🦌🐍 Food For Thought

Food For Thought 생각할 거리

19. 증거는 푸딩 속에 있다*

원제: Food For Thought

저자: BlueberryPaincake


알래스터는 그의 애완동물과 끝내주는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운다.


호텔 전체의 전등이 깜빡거리고 건물이 흔들렸다. 배기는 TV 화면이 번쩍거리고 노이즈로 지직거리는 것을 보며 소파에 앉아 신음했다.

“으! 젠장(Cabrón)!”

그녀의 옆에 있던 찰리는 성인용 컬러링북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비록 최선을 다하긴 했으나 제 바람만큼 불안을 줄이지는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표정에 드러났다.

“계속 저러네…… 우리가, 어…… 그를 좀 들여다보는 게 좋을까?”

콧대를 움켜쥐며 배기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도 얘기해줄 것 같지는 않은걸.”

그녀는 표정을 구긴 채 바를 향해 돌아보았다.

“너희 나갔다 온 후부터 계속 저러는데. 뭐 아는 거 있어?”

허스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벽에 진열된 술병을 붙들기 위해 서둘렀다. 다음 흔들림에 대비해야 했다. 사실, 그는 대답을 누락함으로써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둘 사이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던 탓이다.

호텔 어딘가에서 낙담한 오버로드 역시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역겨움이 물결처럼 넘쳐흘렀다. 그는 깍지를 낀 채 안락의자에 턱을 괴고 앉아, 이 상황을 곱씹었다.

접촉은 알래스터가 혐오하는 것이었다. 특히 저보다 하등한 자들에게서는 더더욱.

그러니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의 입꼬리가 거의 내려갔지만, 그는 곧바로 이를 바로잡고는 제 점심식사가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그의 먹잇감은 복부에 말뚝이 박힌 채 테이블에 고정되어 있었다. 홀로 점심을 먹는 것은 완전한 고립을 보장받을 수 있는 드문 순간이었다. 이는 그가 오버로드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거의 잃어버린 안락함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이들을 강제로 물리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허나. 왜 그 맞닿는 손의 감각이 전혀 역겹지 않았던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잘 삭은 분홍 살덩이에 포크를 꽂아 힘으로 한 조각을 뜯어냈다.

한참을 씹고 난 후, 그는 애완동물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만히 생각했다. 분명히 이는 상호 애정에서 비롯된 허용이 아니었다. 그간 무시해 왔지만, 그들 사이에는 명백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아마도 이는 애완동물이기 때문이리라. 평소보다 덜 갖춘 주인의 옷차림에 몇 번이고 시선을 돌리던, 그의 애완동물.

그 생각에 알래스터의 입술에서 부드러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맞아, 제법 말이 되는데! 애완동물은 주인을 상대로 난잡한 욕망을 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불쾌감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입술을 닦으며 남은 것을 근처의 늪지로 던졌다. 거기 사는 악어들이 쉬운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물론, 어떠한 증거 없이 제 이론의 유효성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제 애완동물과 멋진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이미 나들이 계획을 세워둔 참이었다.

“똑똑!”

사슴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며, 자신이 고쳐놓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흘렀다.

“계십니까?”

마이크로 목소리를 키우고, 알래스터는 문고리를 부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 오늘 누군가가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지.

이윽고 문이 빠끔 열리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데요?”

그는 안을 들여다보려다가, 문틈으로 빛나는 작은 체인 걸쇠를 알아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가 또 한 번 재단사를 찾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먼젓번에 당신이 입었던 그 흉물 같은 스웨터를 고려하면, 당신 옷장에 새 단장이 필요하겠다 싶었죠.”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요.”

문이 철컥 닫혔다.

방금 뭐였지?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대답이 즉각적이었다.

“네?”

알래스터는 문틈을 노려보았다. 붉은 눈의 일부만이 얼핏 보였다. 무엇보다도 지쳐 보이는 눈이었다.

“근래에 무척이나 불출하시더군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시는 건가요? 저 같은 이가 주변에 있다면, 그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음, 안 나가고 싶어요.”

문이 다시 닫혔다. 어쩌면 그의 애완동물은 교훈의 절반만을 배운 모양이었다…… 마침내 이토록 잔혹한 영역에서 제 깨질 듯 연약한 위치를 상기하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주인에게 의지하는 법은?

“좋습니다. 이게 오늘의 훈육이 되겠네요.”

그는 코트를 바로 했다. 그의 그림자가 문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는 데에는 눈짓 한 번이면 충분했다.

최근 몇 번 문짝을 뜯어버린 후, 배기는 시설 관리자가 호텔 기물을 고의로 망가뜨리는 것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었다. 그래서 그는 제 그림자가 해내는 작은 장난질을 요긴하게 활용하기로 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비틀렸다.

“아, 얘들아, 깜빡이던 게 멈췄어!”

아이디어 보드에 붙어있던 찰리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배기를 내려다보았다. 보드 위엔 전보다 많은 실이 얽혀있고, 가장자리엔 급히 찢어낸 색칠한 꽃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어쩌면 알래스터가 좀 나아진—?”

귀를 찢는 비명이 복도에 울렸다. TV를 켜려던 배기는 놀라서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알래스터가 펜셔스 경의 꼬리를 붙들고 말 그대로 호텔 대문으로 질질 끌고 나가는 모습을, 모두는 충격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뱀의 손톱이 방을 가로질러 긴 패임을 남겼다.

그가 문틀에 매달렸다.

“나가기 싫어요!”

그를 떼어내려는 노력에 알래스터의 그림자도 합세했다.

“당신은 갈 거고, 즐기게 될 거예요!”

“음, 여러분?”

관객이 있는 것을 깨닫고, 알래스터는 뱀의 꼬리를 놓았다. 대신 그는 뱀이 도망가지 못하게 제 그림자로 그를 고정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뱀은 곧장 도주를 시도했고. 미꾸라지 같은 친구 같으니.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재단사에게 가려던 참이니까요!”

모두가 그와 그의 인질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으……래. 둘 다 참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네.”

배기가 후드 아래 몸을 숨기고 문틀에 매달린 펜셔스를 가리켰다.

알래스터는 그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돼요, 걱정할 것 없어요.”

촉수를 소환해 이윽고 상대의 손을 풀어낸 그는 씩 웃었다. 그는 마침내 상대방을 호텔 앞마당 자갈길로 밀어냈다.

“나중에 봅시다!”

그는 문을 쾅 닫았다.

펜셔스는 도시를 걷는 내내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물론, 라디오 악마를 직접 쳐다볼 정도로 멍청한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사실상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악마라면?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분명 복스가 그를 볼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Vee가 가는 곳이라면 다른 이도 따라오겠지.

솔직히, 만일 벨벳이 어떻게든 그의 사후의 삶을 악화시킬 방법을 찾아낸대도 놀랍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이름 없는 범부 따위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폭력적인 포주와 관음적인 사이비 교주만 신경쓰면 되었다. 그들이 보안카메라가 있을 법한 가게를 지날 때마다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움츠러들게 하기엔 그것도 충분했지만.

지나가던 악마와 눈이 마주치자, 펜셔스는 주춤하며 모자를 얼굴 깊이 잡아당겼다. 그때 깊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앞에서 울렸다.

“좋은 아침일세, 알래스터!”

제스티얼이 비밀스런 미소를 띠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의 오버로드는 그의 우뚝 솟은 모습을 보고 몸을 쫑긋 세웠다. 그가 바라마지않던 오락거리 아니던가!

“어찌 지내는가?”

알래스터는 웃으며 제 지팡이를 조금 과장되게 빙글 돌렸다.

“아주 잘 지내지요. 제 새로운 애완동물을 위해 볼일을 보러 나온 참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며, 그가 제 뱀을 가리켰다. 뱀은 수줍은 듯 모자를 벗어 품에 안은 채였다.

“허면 자네는?”

거대한 오버로드가 가까이 다가오자 펜셔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꺅 비명을 질렀다. 루시퍼여, 마치 알래스터가 그를 당혹스럽게 하려는 듯— 아니, 아니. 알래스터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돋보기로 개미를 태우며 노는 아이처럼.

“어흠, 어찌 지내시는지요?”

그는 제 꼬리 끝을 바닥에 긁으며 약간의 마찰에 쉿쉿거렸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아무래도 제 비늘은 아직 여린 모양이었다……

“아주 좋지. 무척이나 좋아. 자네만 괜찮다면?”

그는 거대한 손으로 뱀을 가리켰다.

물론 라디오 악마는 우호의 제스처를 거부하는 법이 없으리라.

“물론이죠!”

큰 손이 펜셔스의 얼굴을 쥐었고, 그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것이라고는 몇 번 점잖게 볼을 주무르고 머리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뿐이었다.

제 애완동물이 움츠러드는 것을 보며 차올랐던 만족감은,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오르는 모습에 훅 꺼져버렸다.

“참으로 어여쁘구나. 어디서 이토록 어리고 우아한 존재를 얻었지?”

어려? 펜셔스는 이 거미에게 제 나이를 바로잡아줄까 반쯤 고민했다가, 곧 기억해 냈다. 첫째. 이 악마는 자신보다 몇 세기는 더 살았으며, 둘째. 토를 달았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대신, 그는 폭풍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작은 칭찬과 친절한 대우를 즐기기로 했다.

알래스터는 제 손톱을 확인했다. 마치 저들의 대화와, 제 뱀의 꼬리가 바닥을 탁탁 치기 시작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뭐, 저희 호텔을 찾는 손님들은 많고, 그 역시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에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상황을 지켜보며 찡그리고 있던 제 그림자를, 그는 경고하듯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저는 떠돌이 짐승을 거두는 걸 좋아하니까요!”

제스티얼은 흥얼거리며 그 생물의 뺨을 꾹 눌렀다. 갈라진 혀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허면 그대의 이름은 무언가?”

“음, 눈부신 발명가, 펜셔스 경으로 통하죠! 하지만…… 음…… 원하는 대로 부르셔도 돼요.”

뱀의 후드가 흥분으로 확 펼쳐졌다가, 자신이 누구와 대화하는지를 상기하고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무척이나 표현력이 풍부한 이로군.

“아주 매력적이군! 혹시 그대의 애완동물이 지겨워진다면 내게 와 맞바꾸어 가지 않겠나? 분명 모두에게 득이 되는 거래가 될 터이니.”

제 애완동물의 미소가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알래스터의 가슴이 여봐란듯이 충만해졌다. 비록 그가 오버로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물론, 이를 알아차린 제스티얼은 그의 머리를 몇 번 달래듯 다독거렸다.

“그가 기꺼이 응한다면 말일세.”

그 말에, 그의 애완동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마치 선택의 환상이 주어진 것이 기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펜셔스는 놀라우리만치 정중한 대접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게다가 오버로드에게! 이 뱀이 불운하게 얽혀왔던 모든 이들 중에, 이토록 강력하고 고고한 존재가 어쨌든 간에 자신의 의견을 인지해 준다는 것은 굉장히 뿌듯한 일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나눌 얘기는 아니로군요. 부디 양해를. 약속에 늦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스티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녹색 눈이 빛났다.

“마찬가질세. 잘 가게, 알래스터, 더불어 그대의 펜셔스 경.”

그가 다음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시공간의 실타래가 그를 위해 풀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제스티얼에 뒤지지 않게,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알래스터는 저들의 산책을 짧게 끝마치기로 했다.

“그럼, 가볼까요?”

그가 팔을 내밀었다. 그는 제 이론을 시험해 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애완동물은 내민 손을 잡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늘 변덕스러운 존재인, 그의 그림자가 키 큰 사내를 가볍게 밀었다. 어찌나 가볍게 밀었던지 그 악마는 사실상 알래스터에게 안겨들다시피 했다.

펜셔스가 몸을 빼기도 전에, 세상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가 눈 깜짝할 새 다시 펼쳐졌다. 루시퍼여, 공간 이동은 좀체 좋아질 수가 없나이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그는 제 머리를 붙들고 눈을 깜빡여 시야에 둥둥 뜬 점들을 없애려 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도 당혹스러웠다.

알래스터는 제 이론을 시험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공간 이동 후 뱀이 또다시 뇌진탕의 희생자가 되게 두는 대신(이는 제 잘못이 될 테니까), 그는 상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그는 깨달은 것이다. 뱀의 묵직함이 꽤나 위안이 된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팔은 인간의 엉덩이 아래에 감겨있었고, 그는 이를 퍽이나 달가워하고 있었다.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유념하시길.

오히려, 근육질 부속의 탄탄한 감각에서 느껴지는 기꺼운 편안함이 있었다. 어머니의 포옹은 부드럽고 포근했지만, 그와 달리 이것은 단단하고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낯설긴 했으나, 알래스터는 이것이 싫지 않았다.

허나, 그는 뱀이 먼저 접촉을 해오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크흠.”

알래스터는 즉시 펜셔스를 떨어뜨렸다.

“안녕하십니까, 샤르트뢰즈! 오만의 층 최고의 재봉사를 찾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그는 반가운 미소를 머금고 거미를 향해 휙 돌았다. 예의 거미는 제 가게에서 벌어진 광경에 썩 감명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뱀은 후다닥 자세를 바로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악마는 화들짝 놀라서는 모자를 눌러쓰고, 그녀에게 돌아섰다. 알래스터가 저를 안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x, y, z축을 한 번에 뛰어넘은 탓에 감각이 혼란스러웠을 뿐일까?

“아! 기억하시죠? 저희 파충류 친구요.”

그녀가 힐끔 뱀을 쳐다보았다. 뱀은 제 비늘에 손을 문질러 닦고 초조하게 악수를 청했다.

샤르트뢰즈는 내민 손을 흘깃 내려다보고 다시 현재 작업물의 시침핀을 조정했다.

“옷은 잘 맞던가요?”

“에헤……”

펜셔스가 손을 내렸다.

“네, 무척이나요. 감사합니다, 미스 샤르트뢰즈—어, 사르트?* 줄여서 불러도?”

뱀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진심 어린 혼란과 약간의 혐오가 떠올랐다. 이 무례에 대해 뭔가 말하려는 듯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그녀가 입을 대기 전에, 그는 펄쩍 뛰어 아무데로나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기, 저는 그냥 여기 좀 있을게요. 구경 좀 하면서, 음—”

그는 기어이 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옷걸이에서 한 점을 꺼내 그들에게 들어 보였다.

“치마! 넵. 그쵸, 바지는 제게 좀 입음직하지가 않아서, 이게 차선책이니까요! 어쨌든, 좋은 시간 되세요!”

알래스터는 펜셔스가 제 무덤을 파는 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어 꽤나 영광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는 사르트—샤르트뢰즈에게 돌아섰다. 그녀는 충격에서 벗어나 언짢은 표정으로 다시 마네킹을 작업하고 있었다.

“여튼, 요새 어떻습니까?”

“할 수 있는 만큼 바쁘게 지내지요. 뭔가 특별한 일로 들르신 건가요?”

주문은 쳐낼 수 있을 정도로는 꾸준했지만, 알래스터같은 이가 방문하는 때엔 거미의 일정은 훨씬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두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찾아왔을 뿐 아니라, 누군가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로지는 이 상황을 무척이나 흥미로워하겠지.

알래스터는 지루한 듯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항상 전문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에 능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몇 벌 더 사줄까 해서요. 솔직히 그의 옷장은 참담한 수준이거든요. 당신이 보셨다면 분명 그것들 중 하나는 불태워버렸을걸요.”

아, 입질이 왔다!

거미의 한쪽 눈썹이 놀라움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흥미롭지 않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그의 성격을 감안할 때, 그녀는 뱀의 취향이 그가 살았던 시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사슴의 귀를 짜증으로 파닥거리게 했을까?

“그렇군요…… 그럼 편하게 둘러보고 계세요. 곧 합류하겠습니다.”

바닥을 타고 뻗는 제 그림자를 따라, 알래스터는 느긋하게 걸었다. 그는 특별히 뭔가를 눈으로 좇지는 않았다. 그저 실내에 퍼진 코르티솔*의 맛있는 향기를 맡고 따라갔을 뿐이다. 어떤 옷걸이 앞에 멈춰서서, 그는 팔을 옷가지 사이에 쑤셔 넣고 의기양양하게 그것들을 당겨냈다.

“너무 찾기 쉽네요.”

펜셔스는 화들짝 놀라 제 후드를 치올렸다.

“아하! 네, 찾으셨군요, 축하합니다!”

옷들 사이에서 나오려고 우왕좌왕하던 그는, 알래스터가 자신을 받쳐주기 위해 내민 손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냥 좀 뭐가 있나 보고 있었어요, 당신 하듯이.”

솔직히, 그는 새 옷을 사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은 더 그랬다. 무엇을 살지 결정하는 것은 알래스터일 것이고, 또다시 펜셔스는 거기에 따르기만 하면 될 터였다. 여기서 빨리 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옷을 골라주든지.

그들 사이의 두 번째 접촉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알래스터는 혀를 찼다. 그는 돌아서서 근처의 옵션들을 실제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치마부터 볼까요?”

프릴 달린 분홍 후프 스커트를 들어올리며, 그는 가학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거 재밌게 굴러가는데.

샤르트뢰즈는 가게 곳곳에 배치된 수많은 거울들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며 마네킹의 허리를 조였다. 그들의 상호작용은 이전과는…… 다른 것 같았다.

뱀이 알래스터에게서 몇 센티라도 멀어질라치면, 그는 매대에서 갑자기 발견된 매력적인 옷이나, 뭔가 좀 보라고 알래스터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돌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마다, 그녀는 보았다. 손을 보는 곁눈질. 매대를 지날 때, 다른 한 쌍을 향해 주춤주춤 뻗는 손가락. 뱀이 이것을 알아차렸는지 여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방해를 받은 후에 짜증스레 신음하며, 혼자 둘러보게 좀 내버려두라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곧장 통로 반대편으로 씩씩거리며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단념하겠는가.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알래스터는 맹수처럼 매대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짜증스레 찡그린 채 대강대강 선택지를 훑어보고 있는 먹이를 덮칠 기회를 노리면서. 그저 방심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정중하게 권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실력 행사가 가장 좋은 선택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샤르트뢰즈는 작업장에서 일어나,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어 진주 올가미에 걸었다.

“점점 우스워지는데.”

마치 한쪽 당사자는 뭐가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애처로운 구애의 춤 같았다.

펜셔스는 선택지를 거의 보지도 않은 채 주변시를 의심스레 살폈다. 저 사슴이 하려는 게 뭐가 됐든, 분명 짜증나는 일일 터다. 알래스터에 대한 허스크의 뚱한 태도가 점점 더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비록 뱀에게는 불안함에 곤죽이 되는 것이 더 평상적이기는 했지만.

“크흠. 펜셔스, 라고 하셨던가요?”

샤르트뢰즈는 그녀의 신발 주위를 쿡쿡 건드려대는 그림자를 쫓아버렸다. 곧장 펜셔스의 머리카락이 코브라처럼 치올랐다. 여러 쌍의 눈이 불안하게 주변을 휙휙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마주하고도 머리카락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꼬리는 바닥을 긁었다. 아마도 크게 동요한 탓이겠지.

오 이런, 거미가 아직도 저와 대화를 하길 원하는 걸까?

“네에에?”

그녀는 옷걸이를 가리켰다.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나요?”

옷차림에 미루어봤을 때, 그녀는 그의 취향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다소 격식적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알래스터와 유사한 타입이었다. 첫 방문 이후로 줄곧 같은 방식으로 차려입고 온다는 점에서.

엔젤의 코멘트를 떠올리며, 펜셔스는 어깨를 들먹였다. “그게, 음…… 제 옷장에 좀 더 요즘 스타일로 몇 벌 있으면 좋겠다 싶네요. 하지만 제가 그리 대담하지는 못하다 보니, 에헤…….”

샤르트뢰즈는 그를 탈의실로 부르고는, 단상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몇 가지 옵션을 빠르게 시험해 보죠. 그다음 당신이 편하게 느끼는 것과 실제로 어울리는 것을 바탕으로 진행합시다.”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는 손목의 핀 쿠션에서 핀을 하나 뽑아 들었다.

그 즉시, 부푼 소매와 깊은 브이넥의, 러플로 장식된 크림색 셔츠가 나타났다.

“아뇨…….”

검은 터틀넥이 나타났다.

“네.”

그다음, 가슴에 눈알이 새겨진 밤색 브이넥 니트 스웨터.

“아마도요.”

아가일 무늬 밤색 니트 조끼.

“아뇨.”

입어본 옷이 어찌나 많던지, 그들이 마칠 즈음엔 펜셔스는 완전히 어지러웠다. 대부분은 입을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루시퍼여, 그이는 쇼핑에 적합한 인재가 아니옵나이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독특한 옷깃이 특징적인 검은 코듀로이 코트와—그 아래 받쳐입은—가슴에 달걀 무늬가 있는 흰색 버튼 업 셔츠였다. 샤르트뢰즈는 핀 몇 개를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완벽하네요. 자, 알래스터.”

그녀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제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에게 손짓했다.

“마네킹을 준비할 동안, 편히 살펴보세요.”

복슬한 붉은 귀가 미세하게 쫑긋했다. 그녀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둘을 남겨두고 떠났다. 됐다.

펜셔스는 알래스터 단둘이 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면 저는 옷을 갈아입을 테니까, 당신이 이걸 제자리에 걸어주세요.”

상대방은 치직거리는 음조를 어르듯 흥얼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검은 코트 위로 먼지 터는 시늉을 했다.

“그럴 짬 안 내도 돼요. 그녀의 마법으로 한 이면 되니까요.”*

불행하게도 이 말장난은 빅토리아 시대 사내에게서 웃음을 반쯤 이끌어냈다. 스스로를 언어의 귀재쯤으로 여기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이런 형편없는 말장난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알래스터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 마음을 놓을 만큼 즐거운 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언제는 그가 술수를 부리지 않을 때가 있었던가?

그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 알래스터는 사실상 덮쳐들었다. 마침내, 약간의 진전.

“자, 그녀가 제 의견을 들을 거라지요? 그럼 저도 한 손 거들어드리는 수밖에요.”*

아, 선명한 웃음까지 갖춰진 차림새를 보는 것은 더없이 멋질밖에. 이것이 제대로 된 접근법이었다.

“돌아보시겠어요, 응?”

그가 편히 돌 수 있도록, 사슴은 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내밀어진 손에 불안이 엄습했다. 이전과 같았다. 갑작스러운 접촉 시도. 허나 동의를 구하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행동을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설렜을 것이고, 무척 즐거웠으리라. 하지만 알래스터가 저러는 것은 불안했고, 너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저들이 쌓은 호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선물 받은 말의 입을 들여다보는 것은 멍청한 일일 터이다.

제 애완동물의 몸을 돌게 했을 때, 갑작스런 만족감이 알래스터를 물밀듯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차림새 역시도 꽤나 괜찮았다. 캐주얼하면서도, 단정한.

“아마 스웨터도 괜찮았겠네요…….”

그가 옳았다. 제 애완동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기분이 들겠는가?

알래스터는 다시금 응시했다. 벽을 뒤흔드는 소름 끼치는 눈빛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본 적 없을 것 같은, 고요하고 편안한, 충만하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체스를 두듯이, 알래스터는 항상 제 다음 수를 생각하는 것 같은 이였다. 그런 그가 그저 이 순간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의 비현실적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펜셔스가 알래스터와 이런 시간을 좀 더 갖길 바라는 자신을 알아차린 순간.

오래 가지 않은 순간.

톡톡. 그림자가 그의 팔을 당겼다. 약간 불만스레 신음하며, 알래스터가 바닥을 보았다.

“저게 뭐죠?”


* The Proof is in the Pudding :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의미의 관용구.

* 사르트 : 원문은 “Misss Chartreuse– uh Ssshart? For short?” 샤르트뢰즈(프랑스식)가 발음하기 어려워 쉬운 발음으로 줄여불러도 될지를 물은 상황인데, shart는 ‘방귀를 뀌다가 같이 나와선 안 될 게 같이 나와버리는 것’을 뜻함

* 코르티솔 : 스트레스 호르몬

* 원문은 “No need, her magic makes things like that a stitch.”

* 원문은 “Now I heard she asked for my opinion, sew I suppose there is no helping the matter.”

+ 알래스터의 말장난에 대해서는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는 확신이 없어 주석을 다는 대신 원문만 첨부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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