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카페] 비의 소리
비가 오면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언제나 그치지 않는 목소리가 선명한 윤곽을 가지고 뇌를 파고든다.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로 비를 알았다. 몸을 감싸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킨다. 떠도는 흙의 냄새, 피부를 감싸는 습기, 귀를 울리는 노이즈가 좋지 못한 것들을 부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 그것들은 나의 친구였지만, 항상 좋은 존재는 아니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 꼬이는 것들은 특히.
어둑한 방의 불을 켜지 않고 건너편 침대를 내다보면 유키노 씨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약한 한숨을 흘렸다. 이불을 정돈하고 짧은 메모를 남긴다. 상냥한 유키노 씨가 걱정하지 않도록. 메모에 다소 진실은 숨긴다. 불필요한 것을 남길 필요는 없으니까.
검은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방을 나선다. 복도에 나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닥에 끌리는 그림자는 하나, 내딛는 걸음은 여럿. 그것들은 나의 그림자에 숨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힘을 쓴다면 쫓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다소 몸이 무겁다. 그렇게 아우성치는 그림자를 끌고 복도를 걷는다.
기나긴 복도를 걸어서 도착한 교실의 문을 열면, 이름 모를 화학 약품의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구 이과 준비실. 타키온 씨와 같이 쓰는 교실에서 독특한 느낌을 주는 약품의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발을 끌어 움직였다.
“아, 카페! 오늘은 일찍 왔군.”
타키온 씨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거슬리는 노이즈가 된다. 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내가 쓰는 교실의 반쪽 스페이스에 몸을 뉘었다. 깊게 소파에 파고들면 억지로 잊고 있던 피로가 무너져 내렸다. 눈을 지그시 감은 내 곁으로 타박타박 발소리가 다가왔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건가. 그렇다면 무리하지 않고 기숙사 방에서 얌전히 쉬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도 태연한 목소리가 언짢게 느껴졌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아 가라앉은 기분에 불쾌한 감정이 증폭된다. 빗소리에 섞여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뇌를 찌른다. 미간에 깊게 새겨지는 주름을 누르며 대답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내게는 걱정 끼쳐도 된다는 뜻인가. 섭섭한데.”
“당신이 정말 걱정이란 걸 하나요?”
“이런! 자네는 나를 뭐로 보는 건가. 상심이 크군. 벌로 자네를 위한 에너지 드링크라도 만들어 줄까?”
“필요 없어요.”
날카롭게 대답하는 내게 타키온 씨가 유쾌하게 들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약 오르게 만드는 미소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람다웠다.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삼켰다. 몸을 말아 안고, 그저 빨리 그의 흥미가 끊기기를 바란다. 그런 나에게 지치지 않는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진심으로 자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나의 연구에서 우마무스메의 컨디션 난조를 해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자네는 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나?”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에요.”
정확히는 컨디션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 큰 영향을 주는 건 다른 문제였다. 어둑하게 하늘을 가리는 비, 거기에 섞여 넘어오는 목소리들. 나 이외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들이 응달에 힘을 키워 나를 뒤흔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나의 대답에서 흥미를 읽어냈는지 탄성과 같은 콧소리를 내며 타키온 씨가 말했다.
“예의 심령 현상인가! 역시 자네 곁에는 흥미로운 현상이 끊이지 않는군.”
킬킬거리는 목소리는 소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무거운 한숨을 뱉어냈다. 무언가 대꾸를 하려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곁으로 다가온 타키온 씨가 흥미를 잃고 멀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리는 빗소리, 움틀 거리는 목소리 속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다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고 천천히 긴장을 풀어갈 때쯤, 옷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감촉이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살갗을 느끼자마자 눈을 반짝 떴다. 눈앞에는 살며시 내려앉은 갈색 속눈썹이 보이고, 입술에 맞닿은 타키온 씨의 입술이 벌어져 내 입술을 핥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고 타키온 씨는 내게 키스했다.
밭은 숨을 들이켜려 입술을 벌리자, 타키온 씨가 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비가 와서 몽롱했던 정신은 이제 날씨의 탓만은 아니었다. 몸의 온기를 앗아가던 습기는 이제 열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타키온 씨의 백의를 붙잡았다. 구겨지는 옷깃을 떼어낸 타키온 씨의 손이 나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부드럽게 마찰하는 살갗에서 간지러운 열감이 퍼졌다.
하얀 정적.
그리고 키스는 예고 없이 시작했던 것처럼 갑자기 끝이 났다. 떨어져 나간 숨이 얕았다. 마주 보는 타키온 씨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형식적으로 느껴지는 미소였다.
“어때? 좀 나아졌나?”
“이게 무슨….”
“심령 현상이란 건 관측자의 정신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 모양이라서 말이지. 자네의 주의를 분산시켜서 컨디션을 회복시켜보려 한걸세. 효과는 있었나?”
얄미울 정도로 명쾌하게 말하는 타키온 씨를 바라봤다. 감기와 같은 나른함 속에서도 빗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차가운 빗소리가 피부를 뚫고 심장을 두드린다. 시끄럽게 몸속을 울린다. 그렇게 자작자작 타오르는 비의 소리가 멈추지 않아서.
“최악이에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