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맥테이] 그런 사랑 용납할 수 없어
※ 9월 21일 프세터에 올렸던 글 백업입니다.
※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2기 애니 최종화 이후 시점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것은 어느 쉬는 시간에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다이와 스칼렛이 꺼낸 화제에 토카이 테이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테이오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아니면 이상형이라던가.”
“나는 당연히 회장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연애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없냐구. 이런 사람이랑 사귀고 싶다던가.”
“엥,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묘하게 들뜬 기색으로 말을 꺼낸 스칼렛을 테이오가 미적지근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스칼렛은 쓸데없는 일을 신경 쓰네. 연애라니, 그런 게 중요한 걸까. 어릴 적부터 심볼리 루돌프라는 우상을 따라잡기 위해 달리기에만 전념해 온 테이오에게는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화제였다.
조금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테이오를 향해 스칼렛이 쯧쯧 혀를 차며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였다.
“테이오는 아직 애네. 사랑도 못 해보고.”
“애?! 어른이 되려면 꼭 사랑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럼. 사랑을 하면 이 사람과 어떻게 미래를 살아가겠다, 그런 걸 그리게 되잖아?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고.”
“에이, 말도 안 돼.”
“아무튼, 나는 벌써 어떤 사람이 좋을지 생각해 뒀어. 나 같은 우등생에 어울리는 똑똑하고 착실하고 경제력 있는 사람이랑 연애할 거야.”
스칼렛과 테이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드카가 끼어들었다.
“그거 너한테 너무 과분한 거 아니냐? 그리고 결국 너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잖아.”
“뭐야, 말 다 했어?!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났다고!”
“적어도 너보단 낫거든?”
갑자기 시끄럽게 싸우기 시작한 보드카와 스칼렛을 두고 테이오가 맥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맥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셋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투닥거리는 보드카와 스칼렛을 보니까 맥퀸은 참 어른스럽네.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오는 무심코 맥퀸에게 물었다.
“맥퀸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
보드카와 스칼렛의 싸움을 지켜보던 맥퀸이 테이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차분한 미소로 우아하게 행동하는 맥퀸은 왠지, 항상 신경이 쓰였다. 맥퀸의 침착한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테이오가 맥퀸을 바라보았다.
테이오도 별로 맥퀸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테이오는 먼저 물어본 쪽은 자신인데도, 어째선지 긴장하고 맥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맥퀸의 하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질문에 답했다.
“있어요.”
동시에 테이오의 입이 벌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테이오가 새되게 외쳤다.
“있어?!”
“네, 있어요.”
“누, 누군데.”
“글쎄요.”
잔잔한 맥퀸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인 거야?! 이유도 모르고 절규하고 싶은 마음을 삼키며 테이오가 맥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테이오의 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맥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진난만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을 정도로.”
“바보를 좋아하는 거야?! 왜?!”
“그치만 마냥 바보는 아닌걸요. 다정한 사람. 주위를 웃게 만드는 사람. 목표가 있으면 거기에 몰두해서 곧게 나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리고?”
“제게 희망을 준 사람…이에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테이오가 맥퀸을 바라보았다. 맥퀸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오른 것으로 보아 맥퀸도 말을 꺼낸 것이 부끄러운 듯했다.
희망을 준 사람이라니, 벌써 그 정도로 깊은 사이가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맥퀸이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멍한 표정을 지우고 테이오가 애써 정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맥퀸이 좋아하는 사람이 부럽네. 분명 그 사람은 행복할 거야. 맥퀸이 그렇게나 좋아해 주고 있으니까.”
담담한 미소를 짓는 테이오를 보고 맥퀸도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부디 그러길 바라요.”
“뭐가 행복할 거야, 야~!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침대 위에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테이오가 통통 다리를 굴렀다. 시끄럽다는 마야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진정했다. 마야에게는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겠지. 룸메이트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테이오는 얌전히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웠다.
하지만 잠은 조금도 오지 않는다. 사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때 맥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좋아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맥퀸이 지었던 미소와, 부끄러운 듯 지었던 새침한 표정까지, 전부 생생하게 재생되어서 도저히 수업이고 연습이고 하나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떠올리고 나니 다시 발을 구르고 싶은 감정을 꾹 참고 테이오가 눈을 감았다.
사랑을 하면 어른이 된다. 맥퀸은 사랑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어른스러워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억울한 마음이 된다. 왜 그러지. 맥퀸이 먼저 어른이 되어서 질투가 나는 걸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되려나. 자꾸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이 감정은 뭘까? 스스로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기분이 테이오의 잠을 방해했다.
아예 맥퀸한테 연락을 해볼까? 너 때문에 잠이 안 오니까 책임져! 하고. 하지만 이 시간이면 맥퀸은 벌써 잠들었겠지. 곤히 자고 있을 맥퀸을 깨우는 것도 미안하다. 결국 혼자서 뒤척뒤척하던 테이오는 벽에 붙여둔 게시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꿈을 붙여두던 게시판. 처음에는 무패 삼관, 그다음은 무패의 우마무스메,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졌다가 겨우 다시 목표를 찾은 게시판이었다. 그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패배하고, 좌절하고,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라이벌이라는 목표를 찾아서 다시 일어선 꿈이었다. 라이벌인 맥퀸이 있었기에 일어설 수 있었던 꿈이었다.
그런 맥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 사람과 어른이 되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응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같이 터프를 달리는 라이벌로서.
그렇게 마음을 정한 테이오는 애써 잠을 청했다.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깃드는 것 같더라도 꾹 참으며.
학생회실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학생회실에 찾아온 테이오는 조용히 루돌프가 서류 작업을 하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오늘도 회장은 멋있다던가, 나랑 놀아달라던가, 시끄럽게 루돌프를 보챘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일찍부터 찾아오고도 말이 없었다.
루돌프는 그런 테이오를 내버려둔 채 서류 작업을 계속했다. 테이오도 테이오대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락거리며 종이가 넘어가고, 펜이 간간이 사각이고, 다시 종이가 넘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히 있던 테이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회장은―,”
말을 꺼내 놓고도 망설이던 테이오를, 루돌프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차분한 루돌프의 눈은 재촉하지도 등을 밀어주지도 않지만, 언제나 테이오의 안에서 마음이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용히 자신을 봐주는 루돌프의 눈을 마주하던 테이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테이오의 질문을 받은 루돌프가 펜을 내려놓았다. 테이오는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또래의 학생들이 즐겁게 떠들어가며 꺼낼 것 같은 질문의 내용에 비해 테이오는 심각해 보였다. 양손을 깍지 껴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린 루돌프가 대답했다.
“지금은 없다고 해야겠지. 나에게는 아직 꿈이 있으니까.”
“회장도 없구나.”
안심한 듯한 목소리와 다르게 테이오는 아직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이오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루돌프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망설이는 듯했던 테이오가 천천히 루돌프에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스칼렛이 사랑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했던 것, 맥퀸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 것, 계속 그것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이룬 것까지. 말로 하니까 별것도 아닌 걸로 고민한 듯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슴 속의 응어리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끝까지 들은 루돌프가 다정하게 말했다.
“테이오는 지금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루돌프가 그렇게 말해주니 테이오도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생각을 덜 수 있었다.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테이오에게 다가간 루돌프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건 어른이 되는 일이겠지.”
테이오는 루돌프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그런 테이오를 알기에 루돌프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마음을 전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부끄럽고 자신이 나약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전하지 않고 흘려보낸다면, 그 사람과 함께할 미래도 함께 잃어버리는 것과 같아. 그러니, 테이오.”
루돌프가 테이오의 어깨를 감싸고 시선을 맞추었다. 테이오의 푸른 눈에 진지한 루돌프의 얼굴이 비쳤다. 테이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루돌프가 힘주어 말했다.
“모쪼록 용기를 가지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란다.”
푸르게 펼쳐진 터프를 테이오는 바라본다. 초록빛 잔디로 깔린 레인은 군데군데 진흙으로 패인 자국이 있었고, 그 위를 스칼렛과 보드카, 골드쉽이 달리고 있었다. 경쟁하듯 뛰어나가는 셋을 테이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도 테이오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알 수 있는 건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뿐.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이 결국 맥퀸에게로 이어졌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예요?”
운동복에 수건을 목에 걸친 맥퀸이 다가와 테이오 옆에 앉았다. 느닷없이 등장한 고민의 주인공을 보고 테이오가 움찔했다. 그야 있는 건 당연하지만. 같은 팀이니까. 그래도 이번만큼은 나타나지 말았으면 했다. 아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게 더 빨리 수수께끼가 풀리려나. 이도 저도 아닌 감정을 안고 테이오가 맥퀸을 쳐다보았다.
“고민이라도 있어요?”
“응, 아니, 응.”
“뭐예요, 어느 쪽인 거예요?”
“말할 수 없어.”
무언가 고민이 있는지 축 처져있는 테이오를 바라보던 맥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일단 달리죠.”
“응?”
“우리들은 우마무스메잖아요. 달리는 것이 인생인 사람들이니까, 분명 그러면 고민이 날아갈 거예요.”
테이오가 미심쩍은 얼굴로 맥퀸의 손을 보았다. 그러려나. 확실히 달리는 것으로 고민이 완전히 해결되진 않더라도, 적어도 달리는 동안은 고민을 날려버릴 수 있을 터였다. 결국 테이오가 맥퀸이 내민 손을 잡았다. 맥퀸의 손을 잡고 테이오는 터프에 섰다. 맥퀸이 턱을 가볍게 올리고 도도하게 선언했다.
“승부하죠.”
맥퀸을 멍하니 쳐다보던 테이오도 서서히 표정을 바꿨다. 그래, 우리는 라이벌이었지. 라이벌이 승부를 바란다면 거기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호승심을 얼굴에 드러내며 테이오와 맥퀸이 스타트라인에 섰다. 구부린 팔과 다리에서 용수철 같은 탄성이 서렸다.
“자, 준비.”
긴장과 설렘이, 지금은 걱정을 압도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테이오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리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터프에 깔린 잔디가 발을 구를 때마다 움푹 패 떨어져 나간다. 짓이겨지는 풀의 냄새가 바람이 되어 뺨을, 가슴을, 다리를 때린다. 전신을 감싸는 속도감이 더할 나위 없는 쾌감으로 퍼져나간다.
초반 자리싸움에서 맥퀸이 테이오 앞에 섰다. 맥퀸이 가르는 바람이 뒤에 있는 테이오에게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이 자리, 왠지 익숙하다. 보랏빛을 품은 하얀 머리카락이 춤추듯 물결친다. 그것을 테이오는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긴장감이 좋았다. 서로 경쟁하고 같은 잔디 위를 달리는 느낌. 아무리 빨리 달려도 나란히 붙어오는 스피드. 아무리 긴 레인이라도 지치지 않는 스태미나. 아무리 가속해도 똑같은 각력으로 쫓아오는 파워. 진정한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라이벌.
언제까지고 함께 달리고 싶었다. 같은 경기장에 서고 싶었다. 나란히 옆에서 있어 주길 바랐다.
도착 지점을 지나고 맥퀸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테이오도 맥퀸의 뒤를 따라갔다. 흩날린 머리카락을 뺨에 붙이고 맥퀸이 테이오를 돌아보았다.
“어떤가요? 걱정은 좀 날아갔나요?”
흐트러진 숨소리가 차분한 목소리에 섞였다. 맥퀸의 온화한 얼굴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테이오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렇구나.
“맥퀸.”
“네, 테이오.”
“나는 맥퀸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어.”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퀸 앞에 테이오가 당당하게 섰다. 하지만 왠지 두렵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서웠다. 이런 감정을 그대로 전하면 거절당하지는 않을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맥퀸인데.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테이오는 가슴을 펴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나를 좋아해, 맥퀸.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좋아해 줘.”
맥퀸이 테이오를 바라본다. 조용한 시선에 어깨가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테이오는 똑바로 서서 맥퀸의 시선을 받아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맥퀸이 나를 선택해 줬으면 하니까.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멋있는 나를 연기한다. 그런 마음으로 테이오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고 맥퀸의 앞에 섰다.
테이오를 바라보던 맥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거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구요.”
“응? 뭐라고 했어, 맥퀸?”
“아무것도 아니에요. 테이오의 고백은 생각 좀 해볼게요.”
“너, 너무해! 기껏 용기 내서 말한 건데!”
“빨리 저한테 벌꿀 드링크를 사다 주세요. 그럼 테이오를 좋아할 테니까요.”
“이건 횡포야!”
맑은 웃음소리가 하나, 머지않아 둘이 되어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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