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타키] 최속의 속도 上
봄, 트레센 학원의 입학식, 그날 아그네스 타키온은 맨하탄 카페와 만났다. 기념할 만한 입학식이라고 하나, 타키온에게 그런 겉치레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흩날리는 벚꽃잎,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찬 학생들, 그들을 환영하는 현수막과 간판들. 그런 일련의 행사가 타키온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예식에 불과했다.
어차피 입학은 정해진 사실이고 그에 뒤따르는 절차는 부가적인 것에 불과한데, 굳이 확정된 사실을 전시하려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타키온이 생각하기에 비효율적이었다. 그러니 무의미한 행사를 치르기 위해 강당으로 모이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타키온은 대신 학원 안을 돌아다니며 내부의 시설을 관찰했다.
타키온의 연구 목표는 우마무스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를 관측하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우마무스메들을 실험대에 올려 관찰하는 것이 제일의 과제였지만, 지금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어차피 수 분 만에 잊힐 지루한 연설을 듣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입학식이 한창이라 트레이닝하는 우마무스메도 없을 테고, 이참에 학원의 지리나 설비를 살펴두면 유용할 것 같다는 이유로 타키온은 학원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역시나 레이스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마무스메들이 한자리에 모인 트레센 학원답게 시설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이 장치로 트레이닝하는 우마무스메를 관찰할 수 있다면.... 그런 흡족한 상상을 하며 타키온이 복도를 돌았을 때였다.
타키온의 시야 너머로 트레센 교복을 입은 우마무스메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스쳐 지나간 우마무스메는 순식간에 긴 복도를 뛰어 타키온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스쳐 지나간 머리카락을 멍하니 좇던 타키온은 점점 흥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린 거지? 그 속도는 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이 정도면 랩타임이 얼마나 나올까? 심박수는? 근 활성도는? 기왕이면 뇌파도 찍게 해줬으면 좋겠군.
고양되는 기분을 한껏 발산하며 타키온이 활짝 웃었다. 좋아, 아까 그 우마무스메에게 실험 대상이 되어달라고 하자. 그도 입학식을 빼먹을 만큼 한가하니 거절하지 않겠지. 거절하더라도 잘 회유해서 측정해야겠어. 그만큼의 가치가 그에겐 있어 보였다. 마음을 굳힌 타키온은 눈앞에서 지나간 우마무스메를 따라 달렸다. 힘껏 발을 박차고 모퉁이를 돌면, 이어진 복도 끝에서 아까 보았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거기, 자네! 잠깐만 서보게!"
예열되듯이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타키온이 외쳤다. 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뒷모습은 멈추지 않고, 그림자는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이 이상 속도를 높이는 건 위험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타키온을 스쳤다. 하지만 떨어진 거리를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타키온이 발을 놀리는 움직임은 빨라져만 갔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가까이 간다면...."위험해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타키온은 멈췄다. 누군가 팔을 잡아 타키온을 멈춰 세웠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세워져, 타키온은 뒤를 돌아보았다. 위로 말려든 한 다발의 흰 머리카락, 그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검은 장발, 투명한 피부에 박힌 달빛의 눈동자. 타키온이 자신의 팔을 잡은 우마무스메가 트레센 교복을 입었음을 확인했을 때, 그 우마무스메는 이어서 말했다.
"그 아이를 쫓아가다간 다칠 거예요. 나쁜 아이는 아니지만, 가끔 사람을 꾀어내곤 해서."
차분한 목소리로 묘한 이야기를 하는 우마무스메를 타키온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 붙잡힌 이후로 복도를 달리던 발소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이 소녀를 뿌리치고 쫓아가 본들 이미 멀리 가버렸겠지. 보기 드문 자질의 실험 대상을 놓쳤다는 실감이 들었지만, 이상하게 아쉬움은 덜했다. 천천히 잡았던 타키온의 팔을 놓고, 다소곳이 하얀 교복 치마 위로 손을 모으는 그에게 타키온이 말했다.
"그럼 자네가 대신 실험 대상이 되어주겠나?"
"그건 무슨...."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타키온의 말 한마디에 눈살을 찌푸렸다. 노란 눈동자가 반달을 그렸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계심도 타키온에게는 왠지 유쾌하게 느껴졌다. 아직 의문을 느꼈을 뿐, 온전한 불쾌감을 드러내진 않는 그를 향해 타키온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아까 지나간 우마무스메 대신에 나의 실험 대상이 되어달라는 말일세. 나는 우마무스메의 달리기에 흥미가 많거든. 자네가 지금부터 심박수와 근 활성도 측정 장치를 달고, 경기장에 나가서 전력으로 달려주기만 한다면 내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지."
"어떻게 들어도 수상하게 들리는데요...."
의심쩍은 제의를 그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타키온은 빙글거리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가만히 타키온을 노려보던 그는 저 멀리 복도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 타키온도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는 복도만이 고요히 그 자리에 있었다. 타키온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그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그 아이는 사라진 것 같으니까, 저도 이만 가볼게요."
"잠깐."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서는 뒷모습에 대고 타키온이 물었다. 자신도 의미 없는 궁금증을 의아해하며, 타키온은 그 검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자네의 이름은 뭐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돌아선 뒷모습이 대답했다.
"맨하탄 카페예요."
타키온은 입학 후 수많은 트레이너와 우마무스메의 시선을 끌었다. 정식 출주 이전부터 보여준 훌륭한 기록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기행 때문이었다. 그는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고, 그것을 위한 데이터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많은 시험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고, 학생에게 수상한 약을 먹여 학생회실로 불려 나가는 일도 잦았다는 의미였다.
그런 타키온이 어느 날 자발적으로 학생회실을 찾았다.
"개인 연구실을 달라고?"
타키온이 작성해 온 활동 계획서를 들여다보던 심볼리 루돌프가 서류를 내려놓고 물었다. 심각한 학생회장의 표정에도 타키온은 웃음기를 띠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타키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트레센 학원은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오컬트 동호회도 버젓이 활동하는 와중에 연구 실적이 확실한 나의 활동을 막을 이유는 없어. 게다가 나의 연구가 성공하면 더 많은 우마무스메들을 구원하겠다는 자네의 목적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자신만만하게 손을 흔드는 타키온을 어색한 미소로 바라보던 루돌프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타키온을 째려보던 에어 그루브가 루돌프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속삭였다. 보나 마나 고지식한 반대겠지. 타키온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관망했다. 어차피 빈 교실을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학생회의 허가가 필요했다. 괜히 초조한 태도를 보여 빌미를 잡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여유만만한 태도를 가장한 타키온을 보며, 루돌프가 턱을 매만졌다.
"좋아."
잠깐 틈을 두고 루돌프는 타키온의 요청을 허락했다. 반대에 대한 수많은 반론을 준비하고 있던 타키온은 의외로 쉽게 떨어진 허가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이긴 하지만, 어쨌든 희소식 아닌가. 한발 늦게 환희를 표현하려던 타키온을 향해 루돌프가 선수를 쳤다.
"대신 조건이 있어."
구교사 1층 복도. 오가는 학생이 적은 그곳을 루돌프가 앞서 걸었다. 그 뒤를 타키온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쓰지 않는 교실 하나를 내주겠다, 루돌프는 타키온에게 그렇게 약속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것은 도착하면 말해주겠다. 그것이 학생회장 심볼리 루돌프의 전언이었다.
타키온은 만족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경쾌한 발걸음에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루돌프가 제시하는 조건이 무엇이든 간에 타키온은 가능한 한 지킬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어디까지나 그뿐으로, 만약 그 조건이 자신의 연구에 방해가 된다면 어느 정도 눈속임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교실을 내어주기로 한 것은 회장의 뜻 아닌가. 그에 대한 리스크도 허가해 준 측에서 분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대가 사용하게 될 교실은 여기야."
한 교실 앞에서 멈춰 선 루돌프가 문을 짚으며 말했다. 타키온이 늘어선 복도 창문으로 교실의 크기를 가늠했다. 이 정도 크기면 실험실로 충분하겠군. 계산을 끝마친 타키온이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학생회의 조건은 뭔가?"
쓴웃음을 지은 루돌프가 교실의 문을 열었다. 열린 교실 안으로부터 깊고 진한 커피 향이 넘어왔다. 마음을 끄는 향기에 이끌려 타키온이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금색 천구의, 덩굴무늬 소파, 검은 고양이 장식, 어두운 빛깔의 벽지, 이를테면 메르헨적인 분위기의 방이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방문해서 미안하군, 맨하탄 카페."
"루돌프 씨가 여긴 어쩐 일로...."
그리고 맨하탄 카페가 있었다. 첫만남 때와 다르지 않은, 검은 그림자에 싸인 노란 눈동자를 알아본 타키온이 눈을 빛냈다.
"이거야 원! 맨하탄 카페 군 아닌가!"
"...당신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는 카페를 보고 타키온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폭소하는 타키온과 기분이 저조한 카페를 번갈아 보던 루돌프에게 카페가 말했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요."
"미안하지만 맨하탄 카페, 아그네스 타키온이 연구실을 요구해서 말이야. 그대의 공간을 나누어줘도 되겠나?"
"그런...."
"그대에겐 달갑지 않은 제안이란 건 알지만, 학생 자율 활동에 쓸 수 있는 교실이 남아돌지도 않고, 아그네스 타키온에게 단독으로 교실을 내어주는 것도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야. 부탁할 수 있을까?"
루돌프의 말에 맨하탄 카페가 인상을 쓰고 타키온을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도 타키온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아까의 폭소는 멈췄지만, 어째선지 지금 상황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을 타키온은 한껏 내보이고 있었다. 카페가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성을 쌓듯, 어깨를 둥글게 말고 양손으로 머그잔을 잡았다. 커피 한 모금을 작게 들이켠 카페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할게요."
카페는 마지못한 감정을 드러냈지만, 결국 학생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맨하탄 카페도 개인 수집품을 놓을 공간이 필요해서 이 교실을 받았다. 학생회의 허가가 없으면 카페도 갈 곳이 없었다. 학생 한 명을 위해 교실 하나를 내어준 것만 해도 충분한 자율성 존중이 아닌가. 한 명쯤 공유자가 생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비록 아그네스 타키온이라고 하더라도.
"고맙군. 수속은 학생회에서 마쳐두지. 그럼."
짧은 묵례를 남기고 루돌프는 교실에서 나갔다. 타키온과 단둘이 남겨진 카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커피를 입안에 머금었다.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커피가 수런거리는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혀 주었다. 카페가 곁눈질로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타키온을 살폈다. 타키온은 흥미가 느껴지는 콧소리를 내며 교실 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따라 지그시 타키온을 관찰하던 카페의 눈이 곧 붉은 눈동자와 맞았다. 동시에 타키온의 눈이 방긋 휘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내 이름을 소개하지 못했더군."
"알아요. 아그네스 타키온."
"호오, 이미 알고 있었나. 나한테 그렇게 흥미가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열렬한 고백이라면 차라도 마시면서 하는 게 낫지 않겠나."
"같은 반이잖아요. 게다가 이 학원 안에 당신의 이름을 모를 사람은 없을 거예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페를 타키온이 찬찬히 뜯어봤다. 달갑지 않은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에도, 어쩌면 오히려 그러한 반응에 타키온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 말은 내가 무슨 활동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는 뜻인데, 이렇게 자네의 공간에 들여도 되는 건가?"
위악적으로 말하는 타키온을 바라보는 카페의 눈이 깊게 찡그려졌다. 타키온이 즐거움이 서린 표정으로 카페를 마주했다. 긴 한숨을 내뱉은 카페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회장의 부탁이니 들어줄 수밖에요. 그리고...."
카페가 잠깐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았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타키온에게서 시선을 비낀 채로 카페가 말했다.
"당신이 트레이닝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 말에 타키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 문장을 끝으로 카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커피 향이 감도는 침묵을 카페가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자, 타키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 그런가! 자네는 내 팬이었나!"
"아니에요."
"뭘, 나에게 그렇게까지 흥미를 느끼고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이제 한 공간을 공유하는 동반자가 될 사이이기까지 하니 섭섭하게 굴 필요 없겠군."
"멋대로 친밀감 느끼지 말아 주세요."
차가운 대꾸에도 기세를 탄 타키온은 카페를 향해 악수를 청하듯 자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카페."
가만히 타키온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시선을 미끄러뜨려, 눈앞에 내민 손으로 눈길을 돌린 카페는 마지못한 듯이 손을 내밀어 얕게 타키온의 손가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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