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델금랑] 완벽한 ○○을 위하여 (2021.05.09)
퇴고X
"나는 결혼 할 거야."
단델은 그 날 세 번의 길을 잃고 겨우 당도한 너클짐에서 금랑이 직접 타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금랑은 맞은편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며 벌써 우리가 그런 나이임을 실감했다. 뭐 제법 이르긴 하지만 법적으로 문제도 없고 10년이나 챔피언을 하고 젊은 나이에 배틀타워 오너가 된 단델이니 경제력도 말 할 필요가 없었다. 뭐 단점이라고 해보아야 포켓몬을 너무 사랑하는 정도. 아니, 이건 장점이잖아. 그래, 길치라는점? 보통 길치가 아니라 좀 심각한 길치이긴 했지만 그 정도 단점은 단델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상쇄할 수 있었다. 금랑은 자신이 단델 앞에서 제법 덤덤하게 결혼 축하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 거 같아 안심했다. 그래서 가방에서 꺼내는 게 청첩장이어도 절대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너랑."
단델이 내민 건 새하얀 청첩장이 아닌 새하얀 종이에 검은 활자로 쓰인 계약서였다. 금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종이를 코에 박듯이 들었다.
"단델(이하 "갑"이라 한다)과 금랑(이하 "을"이라 한다)의 위장결혼 기간은 결혼일로부터 10년을 말한다. 결혼은 계약서 작성 후 1년 이내─아니 단델, 너 미쳤어? 위장 결혼이라니? 너랑? 나님이랑?"
금랑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자신의 집무실에 카메라가 있을거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런 금랑을 신경 쓰지 않고 단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챔피언일 때는 로즈씨 덕분인지 이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위원장이 된 후로는 누굴 만날 때마다 자꾸 지금이 결혼하기 좋은 시기라며 자신의 자녀를 만나보라고 권유해서 너무 피곤해. 한두 명도 아니고 매번 이야기의 끝이 이런 식으로 흐르는 것도 내게 좋지 않고. 배틀타워를 운영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 게다가 딱히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가정에도 신경 써주지 못할 걸 알아. 최근엔 거절하기 조금 어려운 사람들도 만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금랑은 어디 계속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나는 지금 당장 결혼 생각이 없을 뿐이야. 아직 20대 초반이고 일에 더 집중하고 싶으니까. 그러니 10년 후에는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거야. 나는 내가 10년 동안 챔피언을 했던 것처럼 지금은 오로지 배틀타워 업무에만 적어도 10년은 집중하고 싶어. 하지만 그때까지 사람들이 나를 미혼으로 내버려 둘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그러니 차라리 결혼을 해버리면 그 누구도 내게 이런 불편한 권유를 더는 못하겠지. 하지만 아무랑 결혼할 수는 없어. 모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내가 타워에 익숙해지고 시기적절하다고 판단할 때 깔끔하게 이혼할 수 있으며, 서로의 이해관계가 잘 맞는 사람이어야하지. 그리고 그게 바로 너야, 금랑. 라이벌인 너와는 몇 번의 스캔들도 있었고 우리의 스캔들이 사람들에게 제법 호감을 사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게다가 10년을 동거해야한다면 마음이 맞고 편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너와 결혼 할 거야."
금랑은 이야기를 끝까지 차분히 들어주었다. 단델의 말을 들어주는 동안 차가 식어버린 것처럼 금랑도 어느 정도 진정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포켓몬과 배틀밖에 없는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말을 길게 하는거보니 농담이 아니란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거절이다. 단델과 결혼이라니 말도 안 돼. 그건 금랑의 계획에는 없는 일이다.
금랑은 단델을 사랑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리 사랑했다.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열렬한 짝사랑을 하는 동안 금랑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배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보여주었고 내어줄 수 있는 마음도 모두 주어서 겨우 얻어낸 것이 최고의 라이벌이라는 칭호였다. 단델이 챔피언에서 내려온 뒤로는 그 자리마저 흔들거렸다. 그래서 배틀타워 때문에 바쁜 단델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금랑은 처음으로 제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단델에 대한 마음을 버릴 수 없으니 욕심을 버린 거다. 그 녀석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못되더라도 그저 그 주변만이라도 맴돌 수는 있지 않을까? 단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제게 소개해주고, 청첩장을 주면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만약 단델만 괜찮다고 한다면 사회를 보아도 좋을 거 같았다. 단델을 닮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분명 배틀을 좋아할게 틀림없으니 그의 후견인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단델은 우리의 관계를 고작 앞으로 10년으로 끝내자고 말한다. 금랑은 조금 울 거 같은 마음에 괜히 버릇처럼 계약서를 꼼꼼히 읽다가 단델이 제시한 금액에서 눈이 멈추었다.
"단델, 이, 이 금액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아니 이런 돈이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설마 배틀타워의…"
"무슨 소리야, 금랑. 내 개인 자산에서 지급하는 게 당연하잖아. 챔피언을 십 년동안 했으니 연금이 제법 많이 쌓였거든. 챔피언을 하는 동안 주거도 제공되었고 스폰서, 광고 등 수입은 많았으니까 마찬가지로 상금도 건드릴 일이 없더라고. 네 연봉을 기준으로 맞춘 건데 부족한가? 그렇다면 금액은 다시 맞춰보자."
"그러니까 이게 십 년 단위의 이 몸 계약금이라는 거지?"
"아니. 일 년 단위의 금액이다."
단델이 금액에 대해서 얘기하며 숫자가 왔다 갔다 했다. 금랑의 뇌도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단델과의 라이벌로 십 년. 그리고 부부로 십 년. 금랑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은 주변을 다 집어삼켜 더는 삼킬게 없어지자 드디어 조금씩 진화되고 있었다. 앞으로 십 년 정도면 충분하려나. 심드렁해 보이던 금랑이 흥미를 보이자 단델이 신이 나서 여러 가지를 떠들어대는 사이 계약서 하단에 두 개의 싸인이 자리했다. 완벽한 결혼생활, 완벽한 이혼, 그리고 단델을 위한 완벽한 재혼 계획. 금랑의 미래가 다시 그려졌다.
"좋아, 달링. 결혼식은 빠르고 화려하게 하자. 물론 네가 이런데 신경 쓸 시간은 없을 테니 전부 이 몸이 알아서 할게."
이후 일주일만에 공식적으로 결혼 발표를 했다.
금랑은 결혼 발표를 하고 곧바로 단델의 집을 방문했다. 정확히는 펄롱마을에 단델과 함께 방문했다. 금랑이 이것저것 선물들을 가득 안고 찾아왔다. 오늘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심성의껏 준비했다. 물론 최고의 완성은 이 몸의 완벽한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델이 가족들에게 결혼 할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했을 리 없을 테다. 결혼 소식을 듣고 다들 어리둥절할 테지. 가족들에게 먼저 인사도 하지 않고 결혼 발표부터 한 이유는 이 일을 무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사회부나 연예부 기사의 1면도 자신들이오, SNS 트렌드도 결혼 소식 밖에 없었다. 제 아무리 가족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쉽게 무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금랑님!"
호브가 제일 먼저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뒤로 단델의 어머니와 조부모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솔직히 모난 말을 듣는거 정도는 각오했지만 단델의 가족들은 금랑에게 다정하고 좋은 이야기만 해주었다. 많이 부족한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을때는 금랑도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그 사이 단델은 이런 중대사항은 TV가 아닌 미리 알려주어야 하는 거라고 말하는 할머니를 달래느라 바빴다. 2번 조항은 두 사람의 위장결혼 사실에 대한 비밀유지. 이는 이혼 이후에도 유지. 사회적인 지탄도 있겠지만 전부 가족들을 위한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가족을 속이는 건 단델도 많이 불편할 테지. 그래서 금랑은 누구보다 예의 바르고 훌륭한 처세술로 단델을 비호했다. 호브는 뭐가 그리 좋은지 단델의 어린 시절 앨범부터 들고나와 보여주었고 마을 주변을 돌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는 금랑님이 가족이 되어서 기뻐요. 왠지 그렇게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 호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 날은 단델의 집에서 하룻밤 보냈다. 펄롱마을에서 보는 밤하늘은 별이 한가득했다. 중간에 떨어지는 별똥별도 볼 수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서 제대로 소원을 빌지는 못했지만. 설령 우주의 먼지일지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아름다워진다. 끝은 한순간이고 추락은 순식간이겠지만. 아무렴 어때. 누군가는 기억해주겠지.
결혼식은 반년 만에 이루어졌다. 장소, 예복, 커플링까지 어떤 조건이든 최상급으로 맞추었다. 돈이 있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정말 완벽해. 마음에 꼭 들어. 나님 이런 화려한 축복을 받고 싶었거든."
실은 거짓말이다. 화려한 결혼식따위 꿈꾼 적 없었다. 단델이랑 결혼할 거라고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평생 파트너들과 독신인 채 살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다. 그래도 화려한 게 좋은 건 사실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스포트라이트와 축복 속에서 사랑을 맹세하다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금랑에겐 언제나 선택지가 별로 없었고 그 중 가장 눈에 띄고 화려한 삶을 골라왔다.
단델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걸 그다지 이해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저 금랑이 화려하고 눈에 띄는걸 좋아한다고 했기에 납득했을 뿐이다. 단델도 지금껏 스포트라이트만 받아왔기에 딱히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축복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단델의 어머니와 호브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너클짐 트레이너들은 안경을 살짝 들어 올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무도 가짜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웃음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맹세의 키스를 했을 때 금랑은 조금 긴장해서 답지 않게 손에서 땀이 났다.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는데 단델이 손을 마주 잡아 반지를 끼워주었다. 평소 저보다 체온이 높은 단델이 차가운 손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형식상으로라도 허니문은 가야 했지만 쉽게 두 사람의 시간은 맞추기란 어려웠다. 물론 금랑의 일정조율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 지 한 달이 꼬박 지나고서야 일주일 동안 알로라로 떠날 수 있었다. 단델은 피곤에 지쳐 호텔에서 잠만 자고 룸서비스를 시켜 먹는 등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휴가를 보냈다. 금랑은 금랑대로 알로라를 즐겼다. 기념사진도 잔뜩 남겼다. 단델의 카드로 기념품을 잔뜩 사고 마지막 날은 펄롱마을에서 보냈다.
"단델은 제일 큰 방을 쓸 거지? 그럼 나님은 이쪽이랑 여기 사용할게!"
단델은 챔피언 시절동안 론도로제 호텔을 이용했다. 챔피언이 아니게 돼서도 그 생활이 익숙했던지라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그곳에서 지냈다. 호텔의 서비스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당장 집을 찾아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하고도 그런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10년은 같이 살아야하는데. 금랑은 최대한 단델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보고 그의 취향에 맞는 집을 고르기 위해 고생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금랑은 집을 알아보는 데는 도가 텄다. 그리고 금랑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단델의 재력이 좋아서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음, 역시 돈이 최고구나. 다시 한번 세상의 진리에 수긍했다.
너클시티에서 자가집을 가지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웠고 금전적 도움 없이 무일푼으로 트레이너를 시작한 금랑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드래곤 포켓몬들을 데리고 살 수 있을만한 집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도 금랑이 너클짐 관장, 보물고 관리인, 와일드 에리어의 관리로 생명수당을 더 받을 수 있었고, 다행히 스폰서와 광고로 수익을 낼 수 있기에 포켓몬에게 금전적인 여유를 쏟을 수 있는 안정적인 경제력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먹고 자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뿐 돈이 쌓이지는 않았다. 일을 늘릴 만큼 충분히 늘린 금랑은 제 몸을 더 쪼개고 싶었지만 더는 여의치 않았다.
단델의 집은 슛시티에 있었다. 지금까지야 직장과 가까운 너클시티에 사는걸 택했지만 금랑은 기꺼이 슛시티에서 너클시티로 출퇴근하기로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평소 기상시간보다 2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하지만. 앞으로 10년 정도만 참으면 되니까! 단델의 포켓몬과 금랑의 포켓몬이 다 같이 있어도 충분히 넓은 집이기에 만족했다. 이런 집에서 돈 한 푼 안 내고 살 수 있다니! 금랑은 진심으로 기뻤다.
금랑은 평소처럼 제 포켓몬들의 식사를 챙겨주면서 단델의 포켓몬들도 챙겨주었다. 제 아침 식사를 차리면서 단델의 몫도 챙겼다. 단델은 아침형 인간인지 깨우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식탁에 앉아 금랑과 식사를 같이 했다. 단델은 습관처럼 빨리 먹었고 금랑은 출근때문에 평소보다 서둘러 먹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도시락을 싸줄 거야. 가끔 SNS에 사진 찍어서 올려주면 돼. 그리고 어차피 야근할 거지? 나님이 퇴근하면서 배틀타워로 마중 갈게. 아직 집 위치 헷갈리잖아. 뭐 익숙해지더라도 계속 데리러 갈 거지만."
"우리가 결혼했다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 있을까?"
금랑은 본인이 직접 겪어보는 게 좋을 거라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단델은 한 달도 못 지나 '그렇게까지'를 하게 되었다. 결혼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제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잠시 잊어버렸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혹시 금랑과 싸운 건 아닌지 물어오는 사람은 얼마나 많았던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불화설 기사를 내버리는 자들이나 옳다구나 그럴 줄 알았다며 달려드는 사람들이나 질리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호브가 어머니가 걱정한다며 넌지시 전화를 주고야 말았을 땐 백기를 들었다.
결혼을 한다고 전부 해결되는 게 아니구나. 결혼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신경써야하다니 정말 귀찮네. 단델의 감상은 그 정도였다.
"나님 말만 잘 들으면 돼. 나머지는 전부 이 몸이 알아서 할게. 너의 완벽한 결혼을 위해서."
금랑은 자신했고 단델은 결혼생활에 신경 쓰는걸 원치 않았기에 그러겠노라했다.
금랑이 도시락을 챙겨주는 날에는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렸다. 단델이 잊어버릴 땐 대부분 금랑이 자신의 계정에 올렸다(일주일에 두 번은 잊었다). 어째선지 도시락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갑자기 유행처럼 많아졌다고 들었다. 단델은 빨리 식사를 하고 업무를 할 수 있어서 편하다고 느꼈다.
호텔에서 생활할 땐 룸서비스만 부르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만 챙기던 단델은 데리러 와준 금랑과 함께 손을 잡고 밖을 거닐며 여러 식재료를 구매하기 시작했고 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요리에 서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지만 그래도 금랑은 이것 좀 부탁할게, 하고 조금이라도 단델의 손을 빌리려했다. 요리란 드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왔던 적이 없었지만 금랑과 함께이니 괜찮았다. 고작 퇴근길에 같이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이전과 같은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앞으로 스케줄표는 이 몸의 로토무에게 보내줘."
시간이 날 때마다 둘은 와일드 에리어 캠프를 갔다. 자주는 못갔지만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금랑의 제안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금랑이 최대한 단델에게 맞추었으므로 문제 될 게 없었다. 포켓몬들한테도 좋을 테고. 단델은 제 포켓몬들이 카레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고 고백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간혹 너클시티에 업무가 있을 땐 늘 금랑이 마중 나와 주변에 눈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너클시티에서 길을 잃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휴가를 같이 맞추었다. 단델은 휴가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다. 금랑이 단델의 업무를 파악하고 비서에게만 이야기했다. 너덜너덜해진 몸을 안고 갑작스레 펄롱마을에서 며칠 지내며 맑은 공기 속에서 단델은 다시 최상의 컨디션이 되었다. 제 가족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녹아든 금랑을 보며 단델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밤 좁은 침대에 같이 누운 금랑에게 단델이 고맙다고 말했다. 다음 휴가에도 같이 오는 것을 약속하며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을 이불삼아 두 사람이 잠들었다.
"달링. 그런 거까지 이야기하면 나님이 부끄럽잖아."
결혼 이후 두 사람을 같이 인터뷰하거나 TV 프로그램에 같이 초대되곤 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사귄 건 언제인지, 헤어진 적은 있는지, 프러포즈는 누가했는지, 결혼 생활은 어떤지, 싸운 적은 없는지. 남들이 흔히 궁금해 하는 질문은 미리 사람들 반응을 체크해두고 적당한 걸로 말 맞추었다. 두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무례한 질문은 지금처럼 금랑의 달링처세술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다. 대신 위원장님이 드래곤스톰에게 꽉 붙잡혀산다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단델님이 금랑님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사랑을 승부로 나눈다면 나님의 완승이죠."
여기서도 승부냐고, 신혼이라 아주 핑크빛이라며 상대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지만 정말인걸. 단델이 옆에서 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애초에 이 몸의 부전승이라고.
* * *
결혼을 환영해준 사람들이 많았지만 간혹 얼마 못 가 헤어질 거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둘이 1년도 못 가서 금방 이혼할 거라는 댓글은 3년으로 바뀌고 다시 5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반응이 덜한셈이지. 여전히 보여주기식 부부를 하는 것도 단델은 업무마냥 척척 해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금랑의 수제 도시락을 먹으면 직원들이 여전히 정성이 대단하다며 금랑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단델은 괜스레 자신이 뿌듯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퇴근하면서 장을 보고 저녁은 함께 만들고, 주말에는 금랑이나 단델은 서로의 포켓몬을 돌보는데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날씨가 너무 좋으면 같이 근처의 배틀코트에서 비공식 배틀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약속대로 와일드에리어에서 캠프. 금랑은 포켓몬들의 취향과 식성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으므로 달마다 돌아가며 다른 맛의 카레를 해주었다. 단델도 정성은 함께 넣어 리자몽급맛 카레를 완성시키곤 했다. 간혹 SNS에서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 같이 가자고 조르면 단델은 흔쾌히 따라다녔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팬들과 사진을 찍는 일도 허다했다. 휴가는 늘 같이 맞추어서 펄롱마을에서 보냈다. 부담스러운 혼담 자리를 강요받는 일도 없었다. 본인의 입지를 다진 단델은 이제 남들에게 쉽게 휘둘릴 위치의 사람이 아니기도 했지만.
음, 역시 금랑이랑 결혼하기로 한 건 좋은 생각이었어. 그와 결혼하고 단델에겐 온통 좋은 일들만 생겼다. 특히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금랑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달링이라고 불러주면 간질간질하게 기분이 좋아서 그저 웃었을 뿐인데도 다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냐며 놀라기도 했다. 늘 홀로 지내던 일에 익숙해졌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건 많이 불편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편하고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 언제 어디서든 배틀이나 리그에 관해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점도 좋았다. 특히 수석관장인 금랑의 조언은 뼛속깊이 새길만큼 가치가 있었고 덕분에 고민이 있을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고를 수 있었다. 같이 배틀영상을 시청하며 밤새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다니! 매일매일이 즐겁다는건 이런 기분이구나.
이미 먼저 식사를 끝낸 단델은 맞은편에서 썰어둔 스테이크를 입안으로 옮겨 우물거리는 금랑을 보고 있을 때 꽃다발을 든 매니저가 자신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
크고 화려한 꽃다발과 카드를 받은 금랑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깜짝놀라 단델을 보았다.
"단델 네가 준비한 거야?"
팬들뿐만 아니라 가라르 사람들이라면 둘의 기념일도 꾀고 있었다. 뭐 상대가 단델이니까. 그러다 보니 일부러 기념일은 론도로제호텔에서 식사를 했다. 대체로 단델은 기념일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 그냥 금랑의 손에 이끌려 여기 올 때마다 오늘 무슨 날이구나, 하고 기억을 가다듬을 뿐이다. 그런 그가 꽃다발과 카드를 준비했다고? 금랑이 미심쩍어하며 물어보았다. 매니저가 멀어진걸 확인한 단델이 와인을 한모금 마시고 무언가 생각난듯 말했다.
"비서가 준비한 거야. 오늘 스케줄이 빨리 끝나길래 무슨 날이냐고 물었거든."
아. 그럼 그렇지. 몇 번의 기념일이지만 단델은 한 번도 제대로 기억한 적이 없으니까. 기억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안 하는 쪽이지만. 금랑은 고맙다는 말을 하며 씁쓸한 표정을 빠르게 지웠다. 그래도 버킷리스트의 항목 중 하나에 줄을 그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비서가 준비한 거지만 카드의 이름엔 단델의 서명이 있으니까!
금랑은 단델과 이혼하기 전 하고 싶은 목록을 만들어두었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사랑의 도시락을 만들어 SNS에 자랑하기, 부부동반 모임에 가거나 데이트한다던가 뭐 그런 거. 뻔뻔하게 남들 앞에서 달링이라고 자주 부르는 것도 포함. 일단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어떤 잡지에서 읽었던 결혼의 로망 대한 내용을 토대로 단델과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이루고 있었다. 단델은 금랑이랑 함께하는 일은 대부분 보여주기식이라고 생각하는지 흔쾌히 응했다. 덕분에 죽기 전, 아니 이혼하기 전 이루고 싶은 일들을 착실히 수행하는데 나름 재미를 들였다. 미련 안 생기게 반드시 다 채워야지. 집에 돌아와 기념일 선물 받기에 미련없이 줄을 그은 금랑은 빽빽하게 빨간 줄이 그어진 다이어리를 보았다.
* * *
그날도 평소와 다를게 없는 그저 평범하고 나른한 아침이었다.
"시간 날 때 여기에 싸인만 해줘. 나머지 서류는 이 몸이 알아서 준비 할게."
금랑이 단델의 앞에 토스트 접시를 내밀며 종이를 옆에 두었다. 자신의 아침 식사를 한 입 베어 물고서 습관처럼 서류를 확인하던 단델은 상단에 굵은 글씨로 적힌 '이혼'이라는 글자를 보고 저작활동마저 잊은듯 멍하니 금랑을 보았다. 금랑은 방금 막 잠이 깬 드라꼰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어주며 아침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금랑 이건…이혼 서류인가?"
단델은 걸걸하게 잠긴 자신의 목소리가 참 못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이건 꿈인가?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양뺨을 두드렸다. "우와, 깜짝이야! 뭐 하는 거야?" 금랑이 곧 일어날 포켓몬들의 식사를 미리 챙겨준 후 자신도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크게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단델은 심장이 뛸 때마다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이혼해버리면 다들 놀랄 테니까 1년 전부터 슬슬 준비해야지!"
"1년?"
"그래, 우리 결혼하지 벌써 9년이나 지났다고. 세월 참 빠르지 않아? 이제 계약기간 1년 남았어."
"계약?"
"응? 잠이 덜 깬 거야? 뭐 상관없나. 어차피 단델 너는 나님만 믿으면 계약대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혼을 해줄 테니까. 너의 완벽한 재혼을 위해서!"
아. 생각났다. 애초에 우리 둘은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구나. 단델의 머리 위로 거다이만뢰가 내려쳤다. 제 방 금고 안에 잠든 갈색 봉투를 떠올렸다. 거기에 자신과 금랑의 싸인이 든 서류를 떠올리자 식은 땀이 났다.
- 요즘 단델님이랑 금랑님 무슨 일 있어? SNS 갱신이 전혀 안되네ㅠ
- 최근엔 단델님이랑 같이 퇴근도 안 하던데?
- 설마하니 드디어 불화인가ㅋ
- 또 시작이네. 너희들도 초반에 둘이 3년 안에 헤어진다, 5년 안에 헤어진다며 날뛰던 놈들처럼 손모가지 걸고 사라지고 싶냐.
- 안사라졌어 이 자식아 손모가지 멀쩡하다고!
- 그치만 요즘 단델님 승급전에도 제대로 집중 못하시는 거 같고...
- 그들도 사람인데 싸울 수도 있지
- 그래봤자 어차피 금방 사이좋을걸?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잖아.
- 오히려 지금까지 안 싸운 게 더 신기한 거 아니야?
단델은 SNS 반응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서로 SNS를 올리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계획된 일이다. 금랑이 저를 데리러 오지 않는 것도 전부 계획된 일이다. 금랑은 착실하게 10년 째에 이혼하기로 한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단델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제가 먼저 금랑에게 위장결혼을 제안해놓고선?
그날 단델은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은 채 리자몽과 함께 퇴근을 했다. 집 안에서는 여전히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긴 했지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고 나서야 인정했다. 확실히 위장결혼이란걸 잊어버리고 결혼생활을 백퍼센트 즐긴 건 자기 과실이지. 금랑에겐 그런 부담을 지워놓고 말이지.
어린 나이에 챔피언이 되고 단델이 가늠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이 손에 쥐어졌다. 로즈는 단델에게 기본적인 경제관념은 심어주었지만 무패의 챔피언이 되면서 돈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나가며 소홀해졌다. 결국 정기적으로 나가는 지출은 전부 로토무가 단델의 허락하에 전부 도맡았다. 그리고 유능한 로토무는 금랑에 대한 지출마저도 도맡았다. 단델은 씀씀이가 헤프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연연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올리브의 지시로 수입과 지출에 대한 메시지를 로토무가 늘 알려줬지만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잊어버린거다. 처음에는 분명 금랑과의 결혼이 가짜라는 걸 알았는데 어느순간 금랑과 한 지붕 아래에 사는 게 너무 당연하고 편안하게 느껴졌고 어딜가든 늘 함께여야했다. 금랑이 자신을 챙겨주는 손길이 마치 마땅히 그래야하는걸 받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 금랑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게 언제부턴가 즐겁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늘 두 사람에게 보기 좋다고 칭찬했다. 듣기 좋았다. 함께 펄롱마을에서 지낼때도 죄책감이 없었다. 속이고 있다는 생각도 못했다. 정말로 모든 게 자연스러웠으니까.
"깨닫는데 10년이나 걸릴 줄이야."
왜 금랑과 헤어지기 싫고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지 단델은 제 마음을 인정했다. 그때 잃어버린 정신이 지금에서야 돌아오는 거 같았다. 아무리 지금보다 어렸다지만 어떻게 위장결혼따위를 생각했을까. 할 수만 있다면 10년 전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계약서가 아니라 반지를 들고 갔었어야 했는데." 손에 얼굴을 묻으며 자책하는 단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리자몽은 아직도 정신 못차렸냐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왜 자신은 위장결혼을 굳이 금랑과 하겠다고 우겼던건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던가. 그런데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어 그 사이 금랑의 마음 한 톨도 얻어내지 못했다. 미련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듯 이혼서류를 내미는 금랑을 떠올리자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어.'
그리하여 며칠 뒤 단델은 집에 들리기 전 커다란 꽃다발을 샀다. 반지는…치수를 모르니까. 결혼식 때 준비한 반지는 금랑이 준비했었다. 배틀할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안쪽에 서로의 이니셜을 새긴 단조로운 반지였다.
"계약을 연장하자고?"
뜬금없는 꽃다발에 당황하는 금랑은 "너와 계속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싶다"고 고백하는 단델의 말에 '계약'이라는 말을 꺼냈다. 계약이 아니라…, 단델이 변명하기도 전에 금랑이 즉답했다.
"…싫어."
"시, 싫다고? 어째서?"
대충 이유는 짐작갔다. 그야 매년 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금랑이고, 매번 식사나 포켓몬들을 돌봐주는 것도 금랑이 대부분을 할애했고, 자잘한 집안일도 모두 그가 도맡아서 하고 있으니…여기까지 생각한 시점에서 단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단델은 배틀타워의 오너, 금랑은 너클시티의 짐리더로 똑같이 바쁜 몸인데 어째서 지금까지 금랑만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결혼생활을 했던 것인가. 도대체 지금까지 나는 왜 이걸 당연시 여겼지? 그러니 금랑이 싫다고 하는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야 나님 너랑 이혼하고 가라르를 떠날 계획까지 전부 세웠는걸. 이제 와서 계약을 연장하는 건 곤란해. 게다가 지금 이혼하는 게 시기적절하기도하고."
"잠깐, 금랑. 이혼을 하면 가라르를 떠난다고?"
"바로 떠나는 건 아니야. 그럼 남은 네가 너무 피곤할 테고 인수인계도 해야 하니까. 정확한 시기는 단델 네가 재혼할 상대를 찾는 걸 보고 결정할 거야."
"우리가 이혼하는 게 네가 가라르를 떠날 일이야?"
단델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이혼한다고 네가 가라르를 떠난다고? 단델과 금랑이 라이벌이 된 지 10년, 설령 가짜일지라도 부부로 산 시간이 10년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단델은 금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금랑은 정말정말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금랑이 이렇게 화가 난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그럼 너는 나님과 이혼하고 당연히 예전의 라이벌 관계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단거야? 네 영향력을 생각해. 너랑 이혼하고 예전처럼 사는 게 남들 눈에 멀쩡하게 보일 거 같아? 지금도 나님이 무슨 말을 듣고 사는 지는 알고 있어? 나님은 평생 너랑 이혼한걸 꼬리표로 달고 살 텐데?"
"그야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가십도 있을거고. 그래도 너는 너클짐 관장이고 여전히 라이벌로 내 옆에 설 수는 있는 거잖아? 떠나려는 이유에는 납득할 수 없어. 그리고 그런게 신경 쓰인다면 그냥 지금처럼 계속 같이 사는 게 훨씬 더…"
"너 10년 뒤에는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며. 그래서 우리 이혼하는 거잖아. 너는 다른 사람이랑 재혼하기로 처음부터 약속 된 결혼이었고, 이혼하고 나면 나님은 너의 라이벌이 아니라 '전배우자'가 되는 거야. 네가 결혼해서 새 가정이 생겼는데 네 주변을 어떻게 얼쩡거려? 너랑 앞으로 결혼할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런짓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님이 가라르를 떠나는데 너를 납득시킬 문제는 아냐."
금랑의 말대로 단델은 자신이 30대가 되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금랑과 이혼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베스트, 설령 아니더라도 조건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도 좋을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쯤엔 업무에 치이고 살지는 않을 테고 어느 정도 융통성있게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럼 일에도 가정에도 충실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확실히 업무에는 익숙해졌다. 단델이 야근을 하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다. 금랑과 함께 돌아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방에서 잠들다 아침에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주말에는 쉬었고 같이 데이트를 하거나 캠핑을 갔다. 확실히 자신은 업무에 능숙해졌고 여유로워졌다. 휴가는 항상 금랑과 같은 시기에 사용했고 함께 단델의 고향에서 보내는 게 익숙해졌다.
단델은 제가 10년 사이에 많은 것을 배웠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유의미하게 바뀌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단델은 여전히 단델이었다. 10년 전 제 고집으로 금랑을 끌어들여놓고 이번에도 금랑이 떠나는 게 싫다며 고집을 부렸다. 이미 자신이 금랑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갑자기 누군가와 의무감으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10년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금랑과 결혼할 거라는 생각을 잘도 해댔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혼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살면 안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 속을 모르는지 단델을 아이처럼 어르듯 금랑은 다시 상냥하게 계획을 읊었다.
"이 몸은 몰라도 단델 너는 훌륭한 집안의 영애와 결혼을 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이혼에 흠이 없어야해. 필요하다면 이 몸의 과실로 해줄 수도 있어. 어차피 떠날 거니까. 뭐 성격차이나 권태기 같은 이유라면 더 좋겠지만. 이건 차차 여론상황에 맞게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넌 걱정할필요 없어.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너는 그저…"
"네 말만 들으면 된다는거지?"
"응. 잘 알고 있네."
빌고 싶어도 빌 수 없었다. 어차피 거절당할 거야. 처음으로 금랑이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고, 지금도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즐겁게 이혼 이야기를 하는 금랑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단델이 한 풀 꺾인 채로 어디로 떠날 건지 물었을 때 금랑은 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단델이 모르는 다양한 지방의 이름이 말했다.
"나님 알로라말고는 가본 적이 없으니까. 기왕이면 아주 많은 곳을 다녀보고 싶어. 트레이너의 로망이잖아?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서 살거야. 나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어. 우리 애들이랑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너는 나랑 빨리 이혼하고 싶어? 우리의 지난 시간은 네게 책임과 의무감만 주었던 거야? 자신이 없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금랑때문에 속이 뒤틀린 단델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처음엔 같이 살면서 부딪히는 것도 많았다. 단델은 집안일도 요리도 잘 하지 못했다. 먹는 속도도 다르고 입맛도 달랐다. 양말을 뒤집어서 내지 말라는 이야기도 자주 까먹곤 했다. 치약을 중간부터 짠다던가 끝에서부터 짠다던가 하는 사소한 것마저 달랐다. 그래도 10년이나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금랑이 한 번도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랑은 짜증 내는 대신 단델에게 하나하나 보여주고 설명해주었다. 옆에서 요리를 지켜보게 하고 만드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알겠어? 네가 배틀타워 업무로 바쁜 건 알겠지만 진짜로 결혼하고 나선 가정에도 충실해야지. 어느 한쪽도 소홀해선 안 되는 거야. 이 몸이 하나씩 알려줄게.'
그러고 보면 금랑은 왜 자신에게 한번도 화내지 않았을까. 라이벌로 지낼 땐 종종 다투는 일도 많았는데. 함께 살면서 부딪히면 금랑은 언제나 먼저 양보를 했다. 라이벌일 땐 그러지 않았다. 대화로도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배틀로 해결했으니까. 결혼 후 금랑은 언제나 단델의 의견을 제일 우선으로 했다. 이 집도 온통 단델의 취향으로만 꾸며졌다. 식사도 금랑이 만들면서 정작 단델이 좋아하는 메뉴로 나왔다. 그러고보니 금랑은 뭘 좋아하더라? 만약 금랑이랑 이혼하면 이 집에 금랑의 것이 남기는 할까?
- 나는 두 사람의 팬이라서 결혼발표 했을 때 정말 기뻤는데 말이지. 내가 결혼해보고 나니까 쉽지 않더라. 만약 이혼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특히 도시락 만들기. 금랑님 보고 로망이 생겼는데 말이지. 실은 몇 달 만에 때려치웠어.
불화설에 달린 댓글을 읽던 단델은 손에 얼굴을 파묻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잘 할 걸 그랬어. 요리도 적극적으로 배웠으면 금랑이 좋아하는 걸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뭐 어려운 거라고 양말을 매번 뒤집어서 냈을까. 사소한 것 정도는 금랑의 의견에 맞춰줄 걸 그랬어. 금랑은 틀린 적이 없었는데.
자책을 담아 펍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옆자리에 두송이 앉아 자연스레 주문을 했다. 단델이 입을 떼기 전까지 두송은 굳이 캐묻지 않으려는 모양이라 그가 고마웠다.
스파이크 마을의 소식은 전부 두송의 귀로 전해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위원장이 초저녁부터 지금까지 집에 갈 생각을 안한다는 원치 않는 소식을 들은 두송은 끌끌 혀를 찼다. 그야 두송도 가라르에 사는 이상 좋든 싫든 둘의 소식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불화설 기사가 난 게 한 두번도 아니지만 요즘 정기회의 때마다 미묘한 기류가 신경 쓰인다는 마리의 말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둘임에도 마리가 느낄 정도면 정말인가 싶었을 때 단델이 남들 눈에 띄기 싫어서 여기까지 와서 술을 마시는 걸 보니 결국 인정해야 했다. 기사의 내용은 다양했다. 싸웠다느니 바람이라느니 곧 이혼하게 될 거라느니 무수히 많은 추측들이 쏟아져 내렸다.
'솔직히 당신은 덤덤할 거라고 생각했다고요.'
금랑은 잘 숨긴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의 지독한 짝사랑은 단델을 제외한 모두에게 들킨 지 오래다. 딱히 캐물을 것도 없이 그냥 눈에 빤히 보였다. 그러면서 죽어도 고백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듯 제자리만 묵묵하게 지키는걸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러니 두송의 머리에서 두 사람이 헤어지는 원인이 금랑에게서 나오리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 단델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금랑은 화내고 울고 끝끝내 용서해주리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어라? 어쩌다 그녀석 이미지가 그렇게 된거지? 두송은 제가 편견에 잡혀있단걸 깨달았다. 그래, 어쩌면 바람을 피웠단걸 알면 단델을 제일 먼저 죽여버릴지도 모르는 거잖아?
"아니 난 바람따위 피우지 않았어."
"제가 입밖으로 말했나요?"
"했어."
"미안합니다."
"단순히 싸운 거 같지는 않은데 대체 무슨 일입니까?" 두송은 이미 신경 쓴 시점에서 이 일에 휘말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사소한 오해 때문일지도 모르잖아? 안그렇게 생겨서 금랑 그녀석은 삽질하는 경향이 있는 편이고. 두송의 물음에 고개를 들자 흐트러진 머리카락 안에서 엉망진창 삐뚤어진 단델의 얼굴이 나왔다. 우와, 심해. 이거 사진으로 남겨도 됩니까?
"지난 시간동안 내가 너무 금랑을 몰랐던 거 같아. 나 때문이긴 하지만, 설마 나를 떠나서 내가 없는 미래를 꿈꾸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내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았거든. 지금까지 그저 참고 견디면서 살고 있었던 거야."
어라? 그건 마치 금랑이 이 이혼을 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아니 내가 아는 금랑은 그런 녀석이 아닌데? 두송이 작은 잔에 담긴 술을 가볍게 마시며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권태기인가요?"
끄응, 신음을 앓는 단델을 보니 고민하는 거 같았다. 단델은 위장결혼이나 계약에 대해 언급할 수 없으니 말해줄 수 없어 답답해하는 모습이었지만 두송은 이를 긍정의 뜻으로 오해했다. 뭐, 10년 가까이 됐으니 그럴 수도 있지. 서로 정이 떨어질 정도로 싸운 게 아니라면 이야기야 쉽네요. 두송이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말했다.
"자극이 부족한 겁니다."
* * *
금랑은 돈이 쌓여있는 통장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내 생에 돈이 쌓이는 걸 보는 날이 있구나. 월세나 생활비에서 빠지는 돈, 포켓몬들에게 드는 돈, 조금 돈이 생기려하면 예상외의 지출이 생겨 적금을 깬다던가 아무튼 금랑은 돈을 모으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그나마도 패션잡지 모델로 몇 번 서면서 협찬도 받았고 금랑이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아서 이쪽으로 선물도 들어와서 제게 드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점은 다행이었다. 키가 월등히 크다 보니 맞춤 의복을 입어야 하지만 그쪽으로 지출을 늘릴 수 없어서 대충 맞는 옷이라면 다 입었다. 패션의 얼굴은 완성이라고 말하듯 사람들은 금랑이 입은 옷에 어떤 의구점도 가지지 못했다. 나님이 짧은 바지를 입고 싶어서 입는 게 아니고 맞는 게 없어서 그런 줄도 모르고 말이야~ 장난이었겠지만 한때 금랑의 다리가 야하다고 짐으로 민원신고가 들어왔을 때는 정말 억울했다. 그거 유니폼이었으니까! 물론 남들보다 다리가 기니 훨씬 짧아 보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추억이었다.
단델이랑 살면서 생활비는 반씩 나누고 있지만 집세가 들지 않으니 오히려 돈이 남았다. 게다가 원래의 수입에서 단델이 주는 돈까지 더해지니 처음으로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려 9년이나 지났다. 적당히 넓은 집을 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돈이 모였지만 이혼하고 나면 가라르에 살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 계약서를 받았을 땐 서운했지만.'
신챔피언의 존재가 있더라도 금랑은 단델의 라이벌이다. 다만 최고의 라이벌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무엇이라도 좋았다. 단델의 옆에 설 수 있는 칭호만 제게 남는다면. 그때는 가장 친한 동성 친구의 자리라도 갖고 싶었지만...
저랑 결혼하겠다고 단델이 말한 시점부터 어차피 저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 할 수 없었다. 늘 지는쪽은 금랑이었으니까. 결국 결혼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단델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가 사라진다면 다르게 남으면 된다. 물론 약속된 이혼이기에 전배우자로 남겠지만. 아무렴 어때. 금랑은 제가 원해서 고집부린 건 제 포켓몬들과 단델 밖에 없었다. 다른 건 딱히 좋아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서,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기왕하는거 즐겁게 하자는 마음으로 지금껏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정된 결혼생활도 즐기기로 했다. 결혼하는 동안 단델이랑 하고 싶었던 건 전부 다 해보자!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도시락을 싸주고 SNS에 자랑을 하고, 퇴근길에 같이 장을 보고 저녁 식사를 하고 주말에는 데이트를 하고 휴가를 같이 맞추고. 주변 사람들이 제게 단델의 안부를 대신 묻는 건 정말 즐거웠다. 그야 물론 화가 나거나 짜증 나는 순간도 많았지만 금랑은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참았다. 하나는 단델이 고용주라는 점이다. 일단 제게 돈을 주는 사람이니 금랑은 화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짜증 나는 순간에 끝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같이 사는 게 아니잖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떠날 사람이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추억만 가득 남기고 싶었다. 단델이 챔피언이던 시절부터 지냈던 지난 추억으로 저 자신은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때 사소한 거로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싫은걸. 그래도 나중에 결혼할 사람을 생각해서 요리나 간단한 집안일 정도는 익히게 도와주려했다.
"너와 계속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싶어."
꽃다발과 함께 말하는 단델때문에 금랑은 하마터면 프러포즈인가 의심할뻔했지만, 지금껏 단델한테 혼자 설렜다가 혼자 좌절하기를 몇 번. 다행히 계약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잘 넘길 수 있었다. 물론 거절이지만.
아직까지도 미련을 못버린 자신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단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용기가 없는 이유가 한몫했다. 함께 살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아직까지도 단델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걸 보니 금랑은 영원히 단델을 놓는 일이 없을 거 같았다. 그런데 계약연장? 그런짓 했다간 진짜 욕심난다고. 만약 단델이 준비도 되지 않은 제게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이혼하자는 말을 한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러니 더이상 휘둘리는 건 사양이야. 금랑은 단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고 싶었지만 10년 전처럼 축하해줄 자신은 없었다.
단델이랑 무사히 이혼하고 인수인계도 마친다면 제일 먼저 성도로 가야지. 그곳에서 존경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더없이 최고일터. 그리고 순무님의 고향으로 가보자. 나중에 관광지 추천해달라고 해야지. 하나지방의 명물 배틀 서브웨이도 놓치고 싶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송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단델을 데려가라고?"
드물게 야근을 한다고 생각했더니 스파이크 마을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은 금랑은 망설이지 않고 아머까오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뻗어버린 단델을 마주했다.
"우와, 술냄새. 얼마나 마신 거람."
"저는 한 잔만 마셨습니다."
"그럼 이걸 전부 단델이? 이렇게 인사불성인 모습은 처음이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금랑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말하자 두송은 물론이고 펍의 주인도 입이 벌어졌다.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두송이 단델을 향해 혀를 찼다. 아니면 설마, 정말로 이제 단델에게 관심이 없어졌나?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화났어요?"
"응? 나님이 화날게 뭐가 있어? 두송 너 뭐 잘못했어?"
"그게 아니라 단델한테 화났냐고요."
단델한테 화가 났다기보단 조금 부러웠다. 금랑은 술이 약해 단델과 결혼하자 곧바로 술부터 끊었다. 내심 술친구였던 두송과 야청은 아쉬워했지만 유부남을 억지로 끌어다가 술을 먹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치만 나님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실수로 위장결혼이니 계약이니 함부로 떠들어대서 위약금을 물고 싶진 않은걸. 단델 이 자식은 술도 쎄고 위약금 걱정 없이 원 없이 마셨다 이거지. 부러운자식.
"별로?"
"그럼 정말로 사랑이 식었어요?"
읏쌰.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거 같아 금랑은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단델을 몸쪽으로 끌어당겨 힘차게 안아 올렸다. 두송이 옆에서 '그 무거운걸…'하고 중얼거리며 단델을 짐짝취급했다.
"사랑이 식었다라…그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네."
"제 삼자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만, 그 녀석은 너한테 미련이 넘치던데요."
금랑은 두 눈을 깜빡이며 지시를 이해하지 못한 미끄래곤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금랑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오늘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탑승했다. 위원장과 수석관장을 태운 택시가 조용히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두송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금랑이 자신에게 식었다고 착각해 끙끙 앓는 녀석이나 한달음 달려와 여전히 단델을 손상받기 쉬운 예술품마냥 조심스럽게 다루는 녀석이나.
"결국 걱정한 나만 손해네요."
안헤어지기만 해봐라. 두 사람을 가지고 곡을 써줄 테다. 두송은 두 번 다시 두 사람의 일에 휘말리지 않기로 다짐했다.
* * *
사실 단델은 깨어있었다. 그야 펍에서 뻗었던 건 사실이지만 금랑이 저를 데리러 온 시점에서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금랑이 저를 안아 올리는 순간에도, 두송이 질문에 대답했을 때도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의식이 있었다. 금랑이 단델을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을 때쯤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모른 척 두 눈을 감았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니 무슨 말이지? 단델 나름대로 고심하고 있을 때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정말 두송 말대로라면 금랑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들키지 않으려고 침을 삼키는 것마저 참고 있을 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근육덩어리자식, 엄청 무거워." 그냥 욕이었다. 그럼 그렇지.
'자극이 부족한 거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두송은 단델의 아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었다. '그거 아껴서 얻다 쓰게요?'
단델은 한번도 금랑이랑 이렇고 저런걸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성욕이 없었던 건 아닌데 한 번도 금랑을 그쪽으로 생각못했다. 미친놈. 저 얼굴을 바로 옆에 두고 왜 지금까지 몰랐지? 그야 평소에는 배틀이나 운동으로 승화하는 편이었고, 정 안될 땐 혼자 몇 번 빼주기도 했지만 정말로 의식한 적 없었는데. 괜히 의식하기 시작하니 아랫도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입고자면 불편할 텐데…"
금랑이 단델의 귓가 근처에서 속삭이기 시작하자 마음속으로 도감을 세고 있던 단델이 참지 못하고 슬며시 눈을 떴다. 아아아르세우스여. 분명 어두운 방 안인데 그 속에서도 홀로 후광처럼 빛나는 금랑과 눈이 마주쳤다.
"금랑…"
"어때 일어날 수 있겠어? 옷만 갈아입고 다시 자자."
웃옷 단추를 몇 개 풀어주고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단델의 상체를 일으킨 금랑이 재촉했다. 단델의 이성이 싸우기 시작했고, 헤드락을 걸듯 금랑의 목을 감싸고 그대로 침대로 엎어졌다.
금랑, 금랑. 금랑. 달뜨게 숨을 내뱉으며 금랑의 가슴에서 목 위로 올라가며 연신 이름을 불러대며 제 머리를 부볐다. 조금이라도 금랑이 저를 가엽게 여겨줬으면. 조금이라도 저를 의식해줬으면 했다.
"단델! 무거워!"
헉, 이새끼 취했나봐, 미쳤나봐. 금랑이 힘으로 단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랑은 팔로, 허벅지로 단델을 밀어보려고 애썼으나 정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친 근육덩어리자식! 이름을 부르던 입은 어느샌가 금랑의 살갗에 닿아 입술을 부벼댔다. 으악, 미친새끼! 금랑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물론 결혼하고 금랑이 단델을 꼬신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타이트한 옷도 입어보고 배틀영상을 시청할 때 몸도 닿아보고 둘이 와인도 마셔보며 분위기도 타볼려고 했었지만 단델은 금랑이 꼬시는 줄은 조금도 눈치 못 채고, 배틀영상에 빠져 눈 한 번 안돌리고, 술도 강한지라 씨알도 안먹혔다. 물론 아직까지 이혼하기 전 끝낼 버킷리스트에 단델과 섹스하기도 적어놓긴 했지만 이렇게, 이렇게 얼렁뚱땅 하고 싶었던 건 아닌, 아닌데, 아니 괜찮을 거 같긴 한데, 괜찮을 거 같아서 곤란한데!
금랑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성별, 나이, 종족에 상관 없이 누구든 꼬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단델은 예외였다. 이 녀석은 그냥 남자한테 안 서는구나, 애초에 그쪽으론 의식도 못하는구나, 그냥 그렇게 납득하고 포기한 채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요? 지금요? 저기요, 이 몸도 나름대로 준비라는 게 필요하고요?
그래, 지금이 아니면 나님이 언제 단델과 섹스해볼 수 있겠어. 지금처럼 술에 쩔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마시는 일이 드문 녀석인데.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내일 아침에 기억도 못할 거 같고. 진짜 눈 딱감고 한 번만 하자. 마지막 추억으로 좋잖아? 마지막 버킷리스트였으니까! 금랑이 감고 있던 두 눈을 힘차게 떴다.
"좋아! 이 몸은 준비 됐어, 단델! 단델?"
단델? 어쩐지 아까부터 점점 소리가 안 들리더라니 단델이 금랑의 위에 엎어진 채로 그대로 잠들었다. 단델의 긴 머리카락이 금랑의 시야를 전부 가리고 있었다. 머리에 피가 잔뜩 몰려서 달려들땐 언제고 잠들었다고?
"농담이지? 단델? 자는 척이지? 일어나, 개자식아!"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단델은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가 제정신이긴 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횡설수설했다. 금랑은 진짜로 아무 일 없었다고 단델을 달랬다. 진짜로 아무 일 없었으니까. 단델의 가슴에 짓눌린 채 잠들어서 뻐근하고 피로한 거 말고는 정말 아무 문제 없었다. 아니 어쩌면 호흡곤란으로 기절한 걸지도 몰라. 엄청난 대흉근이었지. 안타까운 입맛을 다시며 금랑은 단델과 한 침대에서 끌어안고 잠든 것에 의의를 가지기로 했다.
그날 저녁 단델은 금랑에게 조용히 서류를 내밀었다. 금랑이 부탁했던 이혼서류였다. 나한테 미련이 넘친다던 단델은 보다시피 라이벌로써의 미련도 정리했나보다 싶어 씁쓸한 기분을 감춘 채 서류를 챙기려하자 그 위로 두터운 손이 엎어졌다. 원래 열이 많은 녀석이긴 했는데 땀까지 더해서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했다.
"단델?"
"의식하게 된 이상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만약 내가 또 너를 그 어제처럼…하려고 하면 두말없이 이혼해도 좋아. 대신! 남은 기간 동안 네가 조금이라도 내게 마음이 기운다면 그…이혼을 좀 더 보류해주지 않을래?"
단델이 잘못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눈치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손은 절대로 빼지 않는다.
'너한테 미련이 넘치던데요.' 두송이 그렇게 말했을 땐 단순히 우리 사이를 걱정해서 해주는 말인가 싶었다. 어제의 일도 취기에 이른 단순 사고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어,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단델은 남은 손으로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입술을 삐죽 내밀며 길게 숨을 뱉었다. 살다살다 단델이 긴장하는 모습도 다 보는구나. 블랙나이트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는데.
너만 괜찮으면 결혼식이랑 반지도 새로하고, 집도 새로 꾸미고, 뭔가 중얼거리며 덮쳐진 손을 꾸물거린 채 자신의 손가락을 만져댔지만 금랑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짜 멋없는 프러포즈다. 그치만 왜 귀여운거람. 하, 진짜 귀여우니까 봐준다. 나님이라서 봐줬다, 진짜.
금랑은 남은 손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렸다. 나님의 손이 커서 정말 다행이야. 이대로 순순히 받아들여 주기엔 너무 아쉽잖아.
"어쩌지, 나님 내년에 은퇴할 거라고 우리 애들한테 언질해버렸는데."
단델의 얼굴에 낭패라는 글자가 쓰인 것처럼 표정이 드러났다. 은퇴한다는 소리는 매년 해댔다. 그냥 늘어지게 더울 때도, 추울 때도, 일한다고 점심을 거를 때도 내가 사직서 내고 내가 수리할 거라고 할 때마다 짐 트레이너들은 '어이구, 우리 금랑님 오늘은 또 왜그러실까' 하면서 입에 달달구리 하나씩 넣어주고 갔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아닌셈이지.
"이 몸을 꼬시려면 많이 노력해야겠네!"
단델에게서 손을 빼내고 이혼서류를 챙긴 금랑이 굳어버린 단델에게 수고하라고 어깨를 두드리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 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님 단델한테 프러포즈 받았다!
어딘가 얘기해야 하는데 말도 못한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아쉬웠다. 어딘가에 익명으로라도 좋으니 썰로 풀고 싶었다. 안돼, 분명 주작이라고 까일 거야.
커다랗게 이혼이라고 쓰인 글자를 보며 금랑이 웃었다. 가보로 간직할 거야, 액자에 걸어둘 거라고! 성도지방도, 호연지방도, 하나지방도 전부 단델이랑 갈 거니까.
혹여나 종이가 젖을까 봐 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 * *
1 이름없는 트레이너
단델님, 금랑님 10주년 리마인드 웨딩 라이브 영상 달리고도 뭔가 아쉬워서 스레세움
3 이름없는 트레이너
어째 처음 결혼식보다 더 화려해진 거 같은 건 내 착각이려나?
5 이름없는 트레이너
그거 절대 착각 아니야
10 이름없는 트레이너
두송님 결국 축가 불러주셨어 상냥해
12 이름없는 트레이너
그런데 노래 가사가 왠지 익숙한 느낌
21 이름없는 트레이너
불화설이니 뭐니 나는 이제 절대로 휘둘리지 않을테야!
23 이름없는 트레이너
이번에 리마인드 웨딩 너무 화려해서 불화설 기사 쏙 들어감
24 이름없는 트레이너
뭐만하면 헤어진다고 날뛰던 놈들도 쏙 들어감
29 이름없는 트레이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신혼같아
33 이름없는 트레이너
우째 첫 결혼식 때보다 더 긴장하시냐고ㅋㅋㅋㅋ
35 이름없는 트레이너
특히 단델님 예전에는 눈에서 설탕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꿀 떨어지더라고
36 이름없는 트레이너
딱히 변한 게 없잖아ㅋㅋ
38 이름없는 트레이너
이번 리마인드 웨딩 영상 실은 결혼 ppl아님?
40 이름없는 트레이너
난 별거설 뜬 게 제일 웃겼어ㅓ
42 이름없는 트레이너
금랑님이 너클시티에 집 한 채 더 구하셔서 강제 주말부부 된 거 말하는 거지?
44 이름없는 트레이너
단델님 자신도 따라 너클시티로 가겠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시무룩해한 기사 봤어
46 이름없는 트레이너
정말 별 기사가 다 나오는구나... 가라르는...
48 이름없는 트레이너
평화롭단 뜻이지~
50 이름없는 트레이너
금랑님은 그렇다쳐도 단델님이 너클시티에서 출퇴근은 무리지
53 이름없는 트레이너
난 요즘 금랑님 SNS에 아무말 없이 새까만 석탄 사진 올라오는 거 뭔가 했다니까ㅋ
55 이름없는 트레이너
나도 단델님이 최근 요리교실 다닌다는 이야기 듣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어ㄴㅇㄱ
58 이름없는 트레이너
금랑님 먹고 탈나시지 않으실까 걱정돼ㅠㅠ
60 이름없는 트레이너
너클짐 직원인데 금랑님 우리랑 같이 멀쩡하거 드시니까 걱정ㄴㄴ 단델님 도시락은... 코터스가 처리해줬으니 걱정말라구!
62 이름없는 트레이너
코터스만 좋다면야...
63 이름없는 트레이너
어쩐지 최근 기분이 좋아보이더라니
69 이름없는 트레이너
이번에도 신혼여행 간다고 들었음
70 이름없는 트레이너
이번에도 해외지? 좋겠다~
77 이름없는 트레이너
저번 주말에 둘이 장보면서 이게 좋네, 아니네 싸우는거 봤는데 와중에도 단델님 길 잃어버릴까봐 둘이 손 꼭 잡고 있었다
80 이름없는 트레이너
둘 사이 금랑님 SNS처럼 뜨겁네~
81 이름없는 트레이너
비유가 좀...
82 이름없는 트레이너
아니 뜨겁긴한데 아니 고거시...
87 이름없는 트레이너
배타 직원인데 단델님 아예 금요일 퇴근을 너클시티로 하시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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