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델금랑] 유서 上 (2020.08.12)
결말은 아닌지라 상편으로 포기했으나 드랍. 다음편은 없습니다.
와일드 에리어 구조에서 아주 사소한 사고가 있었다. 조난 당한 요구조자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트레이너 곁에 있던 겁먹은 포켓몬의 공격에 중심을 잃었고, 다행히 큰 사고로 번지기 전에 플라이곤의 현명한 대처로 한쪽 발에 깁스를 감고 목발을 짚는 것으로 이번 일은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다친 건 발이니까 서류작업엔 전혀 지장이 없다고 주장하는 금랑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 너클짐 트레이너들은 재빠르게 금랑을 병가 처리하고 당분간 일 걱정 하지 말고 쉬라며 너클짐에서 내쫓았다.
금랑이라고 쉬지 않고 싶은 건 아니다. 트레이너들에게 일을 맡겨놓고 자기만 쉰다는 게 못내 내키지 않을 뿐이지. 그럼에도 발걸음이 집으로 향하는 건 금랑은 트레이너들에게 언제나 져주는 쪽이었고, 왜 그렇게 걱정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 호의마저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 보다 쉬지 않으면 플라이곤이 정말 화내겠다는 듯이 몬스터볼이 흔들렸다.
포켓몬을 몬스터볼에서 꺼내주자마자 자신에게로 달려들지 못하고 멈칫하는 애들을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미끄래곤은 결국 달려들었다). 같이 식사를 하여 주린 배를 달랜 뒤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로토무를 확인하자 용길이한테 짤막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 위원장님이 찾으셔서 위치 알려드렸어요. 배틀은 안됩니다.
- 절대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메시지를 보낸 저의가 느껴져서 괜히 웃음이 났다. 지금 배틀하는 건 우리 애들도 안 받아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보다 단델이 나님을 왜 찾은 거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 지금 집 앞이야.
단델이다. 금랑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려다 불편한 다리에 주춤했다. 집 안에서까지 목발을 짚을 수 없어서 다리를 질질 끌며 현관까지 도달했지만 막상 문을 열어주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포켓몬들이 다리가 불편한 금랑은 위해서 방 곳곳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갖고나와 한데 모아놓은 터라 남에게 보이기엔 집안 꼴이 엉망이었다. 그렇다고 단델에게 돌아가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문을 열어주었다.
양 손 가득 무언가 사들고 온 단델이 웃으며 인사를 하려다 금랑의 다리가 꽁꽁 싸매진걸 보고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다쳤구나."
금랑이 슬쩍 옆으로 비켜 준 틈을 지나 단델이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할게." 그 뒤를 따라가며 금랑이 변명했다.
"나님이 제대로 안쉴거 같다며 우리 애들이 기브스를 부탁한 거 있지? 이주 뒤엔 풀 거야."
정말 별거 아닌데... 배틀타워에 있어야 할 단델이 식탁 위에 죽이나 과일, 간식을 나열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어색했다.
"나님 당분간 배틀금지야."
"이미 너희 트레이너들에게 주의 들었으니 걱정 마."
"그럼 왜 온 거야?"
"당연히 병문안이지."
"네가 병가라길래 걱정이 돼서." 단델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투로 대답하며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금랑이 직접 꺼내주려다가 단델의 제지에 적당히 냄비나 그릇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직 연미복 그대로인 걸 보면 일하다가 나온 게 분명한 모습에 금랑의 솔직한 심정은 병문안을 와준 기쁨보단 의문이 더 앞섰다. 고작 그런 이유로 배틀타워의 자리를 비웠다고? 그 단델이? 나님을 위해서?
"점심 전에 오고 싶었는데 길을 잃어서 너클시티를 한 바퀴 돌았어. 죽은 냄비에 넣을게. 나중에라도 데워먹어."
금랑은 단델이 과도를 찾기 전에 과일 바구니에서 적당히 하나 꺼내어 통째로 씹어먹으며 곱씹었다. 여전히 단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단델이 챔피언이던 시절에도 금랑은 무수히 다쳐왔다. 와일드 에리어 뿐만 아니라 너클짐에서 배틀을 하다가도, 간혹 안티팬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지만 단델은 병문안은커녕 안부조차 제대로 묻지 않았다. 반대로 단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이나 로즈타워에 수시로 드나든 건 금랑이었다. 먼저 좋아한 사람이 지는 거라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아플 때마다 눈물을 찔끔 흘리면 포켓몬들의 위로를 받곤 했다.
챔피언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이 나간 건가? 금랑은 과일을 다 먹을 때까지 자기가 무슨 맛을 느끼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단델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고서야 시선을 피했다. 그 시선은 어질러진 거실에 닿았다.
"아, 집이 어수선하지? 포켓몬들이 챙겨준 거야. 귀엽지?"
나님 사랑받고 있다구. 금랑이 미끄메라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단델도 따라 미소지었다.
"확실히 사랑스럽네."
"그치?"
"그렇지만 다리를 다친 네겐 위험할 수 있겠어. 조금 정리를 해둘게."
금랑이 말릴 틈도 없이 단델이 한곳에 모여있는 금랑의 옷가지나 포켓몬들과 놀아주던 장난감, 구급상자나 리모컨, 그 외 다양한 잡동사니들을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미끄메라는 치우지 말라는 듯이 더듬이를 세웠지만 두랄루돈은 조용히 원래 있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걸 다 치우려고? 그냥 두면 나님이 알아서 할게."
"금랑 너는 환자니까 쉬어야지."
"배틀타워는 어쩌고?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반차썼어."
그런 건 네가 아플 때 써야지. 나님 병문안에 왜? 안그래도 바쁜 녀석이. 게다가 네가 상사잖아. 이런 데서 노닥거려? 어쩌지. 금랑은 라이벌의 병문안을 고맙다고 해야 할지, 웃기지 말고 돌아가라고 해야할지 고민했다. 진짜 기특하단 생각이 안 드네.
"모처럼이니까 쉬도록 해."
단델은 소파까지 금랑의 등을 떠밀어 강제로 앉혔다. 그래, 모처럼이니까. 단델이 나님 수발을 들어주는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즐기자. 그냥 지금을 즐기는 거야. 지금까지 홀로 단델을 짝사랑하고, 다치거나 아프면 걱정했던 값을 지금 돌려받는다고 생각하자. 전 챔피언이자 배틀타워 오너님 몸값은 비싸게 쳐줄게!
"그럼 부탁 좀 할게."
어쩌면 그냥 돌려보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후회하게 되는 줄도 모르고.
* * *
금랑은 겨우 눈을 뜨고 더듬거리며 스마트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이다. 금랑은 소파에 누워서 SNS를 체크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더랬다. 단델은 돌아갔나? 주위를 둘러보자 어질러진 곳이 깨끗해진 게 보였다. 생각보다 일은 잘해놓고 갔네.
"잘 잤어?"
아직 있었구나. 방에서 포켓몬들이랑 같이 나오는 단델을 보니 대신 놀아준 모양이었다. 이건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네. 금랑이 일어나려 하자 단델이 금세 달려와 부축해 식탁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렇게까지 안해도 된다고 말려도 고집불통이다.
"고마워."
금랑이 먹을 죽을 데우는 사이 포켓몬의 식사까지 챙겨주는 단델은 그야말로 백 점짜리였다. 뜨거우니 조심하라며 그릇을 내려놓는 단델에게 만약 네가 애인이었다면 결혼하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진심을 농담으로 포장조차 못 하고 삼켜야 했다.
"먹는 중에 미안하지만 물어볼 게 있어."
"응? 뭔데?"
"혹시 요즘 힘든 건 없어? 고민이라던가. 아니면 요즘 너클짐은 어때? 그 사건 이후로 너도 증인으로 출석해서 조사받았지? 내가 여러모로 신경을 못 써줘서..."
"잠깐, 잠깐만."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알겠다. 로즈타워가 배틀타워로 바뀌던 그때, 금랑은 책임자로서 조사를 받았다. 지하 플랜트의 잠겨 있는 포켓몬에 대해, 그리고 로즈 위원장과 한패가 아니었는가에 대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의심들을. 물론 로즈 위원장의 자수와 당시 금랑이 너클시티와 시민들을 위해 했던 행동들이 더 주목받았기 때문에 큰 책임은 묻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정도의 문책만 받았을 뿐.
"벌써 다 끝난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네 탓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게다가 고민이라니? 설령 있다고 해도 너랑은 상관없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금랑은 수저를 거칠게 내려놓고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며 노려보았다. 이제 와서 상사 노릇이라도 하려고? 아니 상사보다는 오히려 보모에 더 가깝지 않나? 오늘따라 참견도 많고 정말 성가시네. 모처럼 쉬고 있는 거잖아? 나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지?
"역시 있구나. 그렇겠지."
딱 봐도 '고민', '있다고 해도' 같은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거겠지. 심각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단델 때문에 금랑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쫓자. 그렇게 다짐한 순간, 단델이 테이블 위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유서라고 적혀있었다.
저걸 어떻게 찾은거람. 봉투 앞에 친절히 유서라고 적어놓은 당사자는 그제야 다 알겠다는 듯이,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좋아, 단델. 네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어. 일단 나님 말을 먼저 들어봐."
오해라고? 단델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까 나왔던 방에서 서랍을 하나 통째로 들고나왔다. 테이블에 내용물을 쏟아내자 얼핏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유서가 가득 찼다.
"오해라고?"
단델이 되물었다. 그래, 오해다! 왜냐면 나님은 장수하고 싶으니까. 죽을 마음이 정말 1그램도 없다. 그러니 해명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어쩐지 단델의 눈빛을 보니 갑자기 입술을 떼기가 힘들어졌다.
유서는 정말 별거 아니다. 순무님도 쓰는걸. 순무님뿐만 아니라 와일드 에리어에서 일하는 관련자들이라면 다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금랑도 위험수당을 받고 와일드 에리어의 순찰을 돌고 있는걸. 그러니 의무적으로 쓴 유서가 하나 정도 있는 건 정말로 별 게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금랑의 유서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금랑도 테이블 위에 쏟아진 유서들을 보면서 내심 놀랐다. 나님이 저렇게 많이 썼다고? 진짜? 저게 다 내 꺼야?
"내용을 읽어보면 알 거야. 왜냐면 그건..."
"내용이라면 읽었어."
"어?"
"직접 읽어봐."
내 유서를 직접 읽으라고? 유서의 내용이라면 알고 있다. 별 게 있을리가. 집이나 개인 물건들의 처분을 부탁하거나 재산의 기부, 자신의 포켓몬들, 너클짐과 보물고 인수인계 및 예비 관장 후보에 관한 이야기가 써진 게 전부다. 유서의 양이 많아진 이유도 이에 한몫한다.
처음엔 내용을 조금 수정하려던 걸 아예 새로 쓰다 보니 어떤 유서에는 동숙에게 예비 관장직을 맡겨놓고, 또 어떤 유서는 레나에게, 또 용길의 이름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잘하는 분야를 나누어 공동 위임을 하는 내용도 있었다.
포켓몬이 늘어날 때에도 유서를 썼다. 그 포켓몬의 특성이나 취미, 좋아하는 열매까지 내용에 더해 포켓몬의 임시 보호 및 입양, 짐에 맡길 수 있는 포켓몬이나 트레이너에게서 벗어나 돌려보내 달라는 부탁을 새로 쓰고, 쓰고, 쓰고.
어느 순간부터는 유서보다는 일기 쓰는 마음으로 가볍게 써버리고 버리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렇지만 대체로 중요한 내용은 거의 똑같을텐데 굳이 이것들만 따로 읽어보라고 골라준 이유가 뭔지 궁금해 금랑도 순순히 단델의 말을 따랐다.
"다쳤다. 아프고 힘들어."
"읽어."
"지겹다. 죽고 싶다."
"다른 것도."
"..."
"금랑."
"단델! 이건 그냥 술김에, 진짜 홧김에 쓴 건데…,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지?"
금랑이 종이를 찢어서 증거인멸을 시도하기도 전에 단델에게 다시 뺏겼다. 단델은 종이를 다시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어 따로 챙겼다. 그걸 왜 네가 챙기는 거야. 나님의 흑역사인데. 금랑은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았다.
안티팬한테 다치고 나서 서러워서 쓴 아주 오래전 내용부터 최근에 술을 마시고 안티실명제를 해야 한다며 다음엔 관장직 내려놓고 물리적으로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는 협박도 있었다. 금랑을 싫어하는 기자 때문에 힘들었을 적에 쓴 글에는 내심 죽으면 너도 좆돼보라는 심정을 담아 구구절절 쓰기도 했다(다음날 트레이너들이 준비해준 달디단 디저트를 먹고 서랍행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홧김에 만년필까지 들고 쓴 글에는 정말 적나라한 욕이 적혀있었다. 쓴 기억이 없는 욕이라 글씨체가 아니었다면 정말 자기가 쓴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을 거다.
"이건 그냥 스트레스 때문에…" 금랑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진짜 별거 아닌데."
위험한 임무 때문에 의무적으로 썼다고 변명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섞여 있다 보니 금랑의 말문이 막혔다. 그 침묵 사이에 단델은 테이블에 어질러진 것들을 한데 모아 정리한 뒤 본인이 챙겼다. 아니 그러니까 나님의 유서를 왜 네가 챙기냐고.
"네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 못 챈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
그거 좀 읽은 거 가지고 유난은. 물론 조금이 아니긴 했는데. 솔직히 진짜로 죽으려고 쓴 것도 아니고. 의무적인 유서 사이에 진심이 끼어있긴 했지만, 일기장에 그날 열받았던 일을 적은 거라고 생각하면 그리 심각한 건 아니잖아? 나님이 진짜로 자살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게 더 충격인데!
"오버 좀 하지 마."
"금랑, 나는 진심이야."
단델이 금랑 옆으로 다가와 손을 맞잡으며 울머기마냥 글썽였다. 망할 그 잘생긴 얼굴 좀 저리 치워. 허나 단델은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러니 내게 만회할 기회를 줄래?"
그러니까 네가 왜? 무슨 잘못을 했다고 죄인처럼 구느냐고. 반박할 말은 분명 있음에도 금랑은 반짝거리는 금안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럼 내 방식대로 할게!"
단델이 원래 에스퍼타입이었나? 내일 보자며 단델이 돌아가고서야 금랑도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눈을 감기 전 천장을 바라볼 때에야 어떤 의문이 들었다. 단델의 방식이란 뭘까. 뭘 만회하고 싶은 걸까. 환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니 심장이 간질거렸다. 단단히 오해한 거 같으니 해명은 다음에 만나면 해야지. 졸음에 감기는 눈꺼풀에 생각하기를 포기하 금랑은 어차피 별일 없을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채 겨우 잠이 들었다.
* * *
"오늘도 위원장님이 데리러 오시죠?"
그날 이후 단델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금랑을 데리러 왔다. 조금 늦을 거 같으면 미리 메시지를 보내는 치밀함까지. 답지 않은 위원장의 행보에 처음엔 금랑도 트레이너들도 당황스러워했지만 인간은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금랑이 그냥 내버려 둔 이유는 어차피 일순 지나갈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며칠 뒤면 바쁘다고 알아서 그만두겠지. 하지만 금랑과 함께 집에 가고 같이 저녁 식사를 만들어 먹고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단델은 여전히 찾아왔다.
내 다리가 다 나으면 그때는 진짜 그만두겠지. 하지만 다리의 깁스를 푼 뒤에는 본격적으로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 배틀하자!'
'다음 주에 시간 비울 수 있다면 같이 캠핑가자.'
'이 영화 재미있다고 추천받았어. 보러 갈 거지? 부담스러우면 집에서 봐도 좋을 거 같아.'
'이 카페 디저트가 유명하다고 소니아가 그러던데 금랑 너도 좋아하지?'
'다음에 같이 휴가 맞춰서 놀러 가자!'
이건 마치 데이트하는 연인 같네. 이미 한참 전에 눈치채긴 했지만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야 그도 그럴 게 상대는 그 단델인걸. 금랑은 단델을 짝사랑하긴 했지만 고백할 마음은 일찌감치 접은 지 오래였다. 아무리 봐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으니. 다만 그 마음까진 접지 못하고 마냥 끌어안고 지낸지만 어언 수 년. 이제와서 새삼 설레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렌다. 솔직히 설렌다. 여전히 좋아하는걸. 그런데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짝사랑 상대가 직진해오니 덥썩 받아먹지도 그렇다고 거절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단델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애초에 단델은 나님을 좋아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그저 유서를 쓴 라이벌을 걱정하는... 아니 보통 걱정해도 이 정도까지 해주나? 그래봤자 어차피 남인데? 원래 다들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가? 나님이 이상한 거야? 아님 단델이 이상한 거야?
- 론도로제 호텔 예약했어. 오늘 저녁에 같이 식사하자.
금랑은 조금 전 온 메시지를 한 참 보다가 거절의 메시지를 작성했다. 그러나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또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끝내 메시지를 지운 뒤 알겠다는 짧은 답변을 보냈다. 거절해야 한다고 머리는 알고 있는데 손가락이 제멋대로였다. '이미 예약도 했다잖아.' 함께 배틀하고, 캠핑하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가고, 금랑의 스케줄표를 따로 보내줬을 때처럼 속으로 변명을 하다가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깊게 눌렀다. 그냥 순순히 기뻐하면 안 되는 걸까.
"아니, 역시 그건 아니지."
금랑은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역시 이런 관계는 불편해. 단델이 챔피언이던 시절 홀로 짝사랑하던 금랑은 그 마음을 고이 접어 서랍 한구석에 넣어두었다. 버리지는 못하지만 다시 꺼내 볼 용기도 없었다. 챔피언의 라이벌. 금랑의 위치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였다. 아, 이제 단델은 챔피언이 아니구나. 그럼 나님은 누구의 라이벌이지? 금랑이 자조 섞인 헛웃음을 내뱉을 때 트레이너들이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금랑님 팬레터 왔어요!"
"오! 그렇게 많아?"
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자에서 편지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하트 스티커가 붙은 색색의 편지들이 가득했다. 금랑은 즐겁게 봉투 한 장을 능숙한 솜씨로 깨끗하게 뜯어냈다. 트레이너들도 근처에 자리 잡아 하나씩 뜯어 같이 읽거나 금랑에게 보여주었다.
"아."
분홍색과 하늘색이 섞인 귀여운 편지에는 제법 귀여운 글씨체로 금랑에 대한 열렬한 사랑 고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옆에서 금랑이 읽던 편지를 슬쩍 훔쳐보던 동숙이 새파랗게 질려선 급하게 손에 쥐어진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죄송합니다! 안티팬이 보낸 건 따로 뺐는데 이쪽은 제대로 확인을 못 했나 봐요!"
동숙이 안절부절하자 용길도 슬쩍 편지 내용을 넘겨받아 읽고는 헉,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금랑에 대한 열렬한 사랑 고백은 거의 협박에 가까웠다. 금랑님이 저를 봐주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건지 상세하게 적혀있었고 거짓말이 아니라며 말미에는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그건 금랑의 탓이고 이는 자신의 유서가 될 거라고 적혀있었다. 우웩. 레나가 토하는 시늉을 하며 더러운 걸 만지듯 집게 손가락으로 종이를 들어 올려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트레이너들끼리 분개해 하며 눈짓으로 이제 팬레터의 내용까지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금랑님에게 보여주자는 신호를 보낼 때 금랑은 단델을 떠올렸다.
불쌍한 단델. 어쩌면 나님도 단델을 속인 게 아니었을까? 그 유서들은 실제로 죽으려고 쓴 거는 아니었지만 급격한 스트레스에 빠졌을 때 썼던 과격한 내용은 방금 본 끔찍한 협박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걸 읽은 단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테지.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제 라이벌. 심지어 챔피언이 아니게 된 자신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단델은 상냥하니까. 그걸 제 탓으로 여기고...
금랑은 지금껏 더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단델은 늘 노심초사하며 제 라이벌의 상태를 살피고 평소답지 않게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그렇게 애쓰는 와중에 자신은 연인과의 데이트 같다며 설레기나 하다니. 우와, 나님 완전 쓰레기잖아.
'오늘 저녁에 제대로 말하자. 이제 이 친구 놀이는 그만하라고. 그냥 예전처럼 배틀만 하는 사이로 지내자고. 그저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유서 때문에 오해하게 만든 걸 사과 하고, 지금껏 보여준 호의엔 감사하며, 자신은 우울증에 빠지지도 않았고 목숨으로 장난칠 생각이 없으니까 이제 무리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금랑님 괜찮으세요?"
트레이너들의 염려에 금랑은 퍼뜩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눈치 빠르고 금랑을 아끼는 그들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
트레이너들의 성화로 금랑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서류에 있는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금랑은 단델에게 배틀타워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아머까오 택시를 탔다. 어차피 론도로제 호텔은 슛시티에 있으니 단델이 너클시티에 오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리라. 멀리서도 곧게 솟아오른 배틀타워를 바라보며 금랑은 아직 남은 미련을 마저 달래주었다.
배틀타워에 도착하자 마침 단델이 배틀타워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이른데. 단델은 기쁜 표정으로 성큼성큼 금랑에게 다가왔다. 저를 기다리게 하기 싫어서 이르게 퇴근했다는 이야길 하며. 금랑은 저 때문에 또 무리하는 단델을 보니 양심이 콕콕 찌르는 걸 애써 티 내지 않고 둘이서 천천히 걸었다.
"다음엔 저걸 같이 타자."
슛시티의 명물 대관람차를 가르키며 웃는 단델에게 어깨만 으쓱여보였다. "저런 건 애인이랑 타는 거야." 사내 둘이 타서 무슨 재미가 있다고. 금랑이 작게 중얼거리며 길쭉한 다리를 쭉쭉 뻗어 좀 더 앞서 걸었다. 단델은 개의치 않고 금방 발걸음을 따라잡으며 손목을 잡아챘다.
"금랑? 오늘은 컨디션이 나쁜가? 혹시 어디 아프다면 지금이라도…"
" 컨디션이라면 좋아. 아픈 데도 없고. 모처럼 오너님이 비싼 식사를 사주신다는데 안 좋을 리가."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금랑이 웃어 보였다. 단델은 그런 그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다 '그렇구나'하고 수긍하며 앞장서 걸었다. 다른 방향으로 가려던걸 금랑이 목덜미를 잡아채 끌고 가다시피 했다.
"확실히 저기는 연인과 가는 게 좋겠어." 단델이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금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
식사는 아주 좋았다. 금랑도 스폰서가 아니면 굳이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지라 아주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단델에게 이 친구 이상 연인 미만같은 짓을 끝내자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만 없다면 말이다. 한 손에는 포크, 다른 손에는 나이프를 쥐고 코스별로 나오는 요리를 먹을수록 금랑은 점점 웃음기를 잃어갔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단델이 잠시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우자마자 곧바로 수저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별을 고하려는 연인도 아닌데 나님 이렇게 떨릴 필요가 있는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며 주먹을 얕게 말아쥐던 금랑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작은 간이 무대 위에서 연주가 들려왔다. 원래 이런 이벤트가 있던가? 금랑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쯤에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자리에 일어나려는 금랑의 어깨를 누군가 지그시 눌렀다.
"단델?"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단델이 서 있었다. 젠장. 아니겠지. 나님이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그러나 단델의 뒤에 숨겨지지 않은 빨간 장미 꽃다발을 보자 금랑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예상대로 커다란 꽃다발은 금랑의 손에 들렸다.
"금랑 너에게 고백하는거야."
단델은 부끄러워하는 모습 없이 필드에 있을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금랑을 응시했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무엇하나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언제나와 똑같이. 마치 혼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거마냥 단델은 어둠 속에서도 혼자 빛나고 있었다. 금랑은 단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던 어릴 적을 떠올렸다. 병실에 누워서 가만히 문을 응시하던 자신을. 저 문을 열고 단델이 걱정스럽게 뛰어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렸던 제 자신이 떠올랐다. 끝끝내 찾아오지 않았고 결국 안부조차 묻지 않았던, 제가 다친 줄도 몰랐을 그 단델에 대한 감정을 내려놓았던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델 너 지금 착각하는 거야. 왜? 이 몸이 쓴 유서라도 보더니 갑자기 내가 불쌍해졌어? 갑자기 없던 사랑이 샘솟아? 걱정되고 챙겨주고 싶어졌어? 그거 사랑 아니고 동정심이야."
"금랑?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단델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느낀 연주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까보다 더 느리고 작게 연주를 조심스레 이어갔다. 아름답던 선율이 삐그덕 거렸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단델. 오늘을 포함해서 전부 없던 일로 하자."
"금랑! 나는 없던 일로 하자는 말에는 납득할 수 없어! 내가 싫다면 제대로 거절해줘!"
싫다니 그런 섭한 말씀을. 아직도 쓰레기통에 단델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거절이란 걸 할 수 있을 리가.
"넌 언제나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꽃다발을 단델의 품에 돌려주며 금랑이 웃었다. 더는 연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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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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