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자녹] 감미롭고 아득한

본편 무료 | 후기 유료

2013년 7월 7일 쿠로코의 농구 미도리마 신타로 온리전 <녹색혁명>에서 발매했던

녹우 20인 앤솔로지 <내 연애범위는 이런 코앞이 아니야!>에 참여했던 원고입니다.

문장 수정을 포함해 분량 조절로 인해 잘라냈던 부분을 덧붙여 10년만에(…) 무료 발행해봅니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X 미도리마 신타로

[주의사항]

12금 |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의식하고 있다는 묘사 있음


무라사킷치, 요새 뭔 일 있슴까? 아님 여태 화났어요? 키세가 우는소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무라사키바라는 제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무슨 얘기? 그는 과자를 우물거리느라 뭉그러진 발음으로 되물었다. 정작 되묻는 목소리에는 별 감흥이 없었기에, 키세는 치미는 말을 눌러 참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 진짜! 됐슴다! 이제 몰라요!”

무라사키바라는 골이 나 발을 구르며 부실을 나가는 키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옮겼다. 이 순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화학조미료가 잔뜩 첨가된 군것질거리뿐이었다. 혀끝을 자극하는 맛을 음미하며, 그는 생각했다. 이토록 좋아하는 과자를 먹으면서도 만사가 짜증스럽다니 어이없는 일이라고. 적어도 군것질을 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하지 않았던가. 제 유일한 낙을 퇴색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는 알지 못했다.

의욕이 나지 않아도 주어진 훈련 메뉴는 착실히 따른다. 그것은 무라사키바라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주장인 아카시 세이쥬로는 기품이 있지만 때때로 잔혹할 정도로 극단적인 것을 입에 담곤 했다. 이기는 것이 전부라고. 무라사키바라는 노력이나 우정, 여타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아카시의 노골적인 언사가 퍽 마음에 들었다. 또래 동급생에게 순종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무라사키바라의 눈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옳았기에.

그 아카시 세이쥬로의 훈련 메뉴가 문제였다. 너무도 가혹했다. 다른 선수에 비해 체력에 자신이 있던 무라사키바라와 아오미네조차 강도 높은 훈련을 못 견디고 코트에 드러누울 정도였다. 휴식 시간에 부실에 숨어 과자를 먹지 않았더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이, 아카시.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아오미네는 숨을 몰아쉬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묘한 소리를 들었어.”

아카시는 매니저인 모모이에게서 스포츠 타월을 받아들며 말했다.

“팀 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지?”

그리고, 시선만으로 무라사키바라를 지목했다.

지목받은 이는 침묵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미도리마 신타로는 오랜 시간 고민하는 성정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같은 의문만이 남았다. 그날 있었던 일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 별자리 순위는 3위. 그럭저럭 상위권에 해당했고, 얼굴을 맞댈 제 1군 선수들과의 상성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행운 아이템인 병아리 모양 물건도 착실히 몸에 지닌 채였다. (사실 여동생의 캐릭터 양말을 빌렸다.) 즉, 미도리마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인사를 다한 날’이라 해도 되었을 것이다.

“미도칭 말이야─, 아카칭 좋아해?”

매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미도리마가 무라사키바라와 동행한 것은 순전히 매점 앞 자판기에서만 파는 캔 단팥죽 음료를 사기 위해서였다. 왁자지껄한 주변 소음을 뚫고 귓가로 날아든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무라사키바라가 무엇을 묻는지 정확히 인지했다. 그의 14년을 통틀어 이처럼 제 6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통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입이 대답했다.

“흐응….”

무라사키바라는 그새 다 먹어 텅 빈 과자 봉지를 손아귀로 구겼다. 그리고서는 미도리마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마치 과자 봉지 대신 미도리마를 짓눌러버리고 싶은 걸 참는다는 듯이. 그 노골적인 행태에 미도리마는 다시금 인지했다. 그의 물음은 진정으로 묻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는 이미 과자 봉지의 형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것을 던졌다. 그것은 미도리마의 어깨너머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무라사키바라가 말했다. ...그거 기분 나쁘네. 평이한 어조와는 달리, 시선이며 입가는 명백한 불쾌함을 띠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무심코 단팥죽 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표면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손등이 젖는 그 선연한 감각에 미도리마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왜? 대체 왜?

뒤늦게 머릿속을 잠식한 의문. 미도리마는 혼곤한 얼굴로 무라사키바라가 몸을 돌려 걸어가는 것을 응시했다. 보폭이 넓은 그는 금세 미도리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낯익은 그 음률이, 미도리마에게는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미네칭, 미네칭. 남자 좋아하는 남자도 있나 봐.”

방과 후 라커룸으로 들어서는 미도리마의 귀에 제일 먼저 들린 말이었다. 제1군과 제2군의 합동 연습이 예정되어 있어 코트부터 부실까지 바글바글한 날이었다.

“아, 호모인가 하는 그거?”

“응─ 그런 거.”

“같은 거 달린 놈들끼리 재미 좋은가 몰라. 아무리 봐도 여자애 가슴 쪽이 훨씬 낫지 않냐? 특히 마이쨩 정도면 최상이지.”

“헤에, 전 실제로 만난 적 있슴다! 오카마 같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한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구요.”

오가는 대화에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입매를 굳혔다. 언뜻 살피기에 선배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몇몇 부원은 그 조심성 없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듯도 했다.

아오미네는 더위를 참지 못했다. 과자 반입 금지인 부실에서 당당히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는 것이다. 민망할 정도로 다리를 벌리고는 연신 유니폼을 펄럭거리고 있는 모양새가 단정치 못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평소였으면 한소리 했을 미도리마였으나, 아무리 그라 해도 이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어떤 의도인지는 구별할 수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저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의 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닐까. 미도리마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지극히 태평한 어조로 무라사키바라가 말했다.

“키세칭도 호모야? 왜 호모랑 만나? 기분 나빠.”

“너무해! 그런 의미로 만난 게 아니라 촬영 때 인사를 나눈 것 뿐임다! 믿어 주세요~”

미도리마는 일단 평정을 가장하고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사물함을 닫는 소리가 나고서야 기척을 느꼈는지 키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미도리맛치 어디 안 좋아요? 얼굴이 파랗슴다!”

미도리마는 잠시 키세를 바라보다가 대답 없이 부실을 나갔다. 라커룸으로 들어오던 쿠로코와 부딪힐 뻔했지만, 가까스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닫힌 문 너머로 어렴풋이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도리마는 천천히 왼손의 테이핑을 풀었다. 슛을 날리자. 3점 슛을.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인간 자체가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뭐야, 저 자식. 사람이 기껏 걱정해주는데.”

“아오미넷치…. 지금 제 편을 들어준 검까? 감동임다!”

“시끄러, 인마. 사람 무시하는 저 자식이 짜증날 뿐이다.”

아오미네는 어느새 다 먹어치운 아이스크림의 막대기를 짓씹었다. 키세가 무어라 불평을 하면서도 붙임성 좋게 쿠로코에게 인사를 건넨다.

“무슨 일인가요?”

“잘 모르겠슴다. 미도리맛치 얼굴이 새파래서요. 배탈이라도 난 거 아닐까요? 아, 아오미넷치도 배탈 걸릴지도 모름다! 아이스크림 여섯 개나 먹었잖아요.”

“아주 악담을 퍼붓는구나. 키세 이 자식!”

아오미네가 잘 걸렸다는 얼굴로 키세의 머리를 팔로 조이며 쥐어 박았다. 쿠로코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심하게 장난치면 사람이 다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둔탁한 소리가 라커룸을 울렸다. 키세의 팔꿈치 가 무라사키바라를 가격한 것이었다.

“거 봐요! 아오미넷치가 자꾸 미니까…. 무라사킷치 미안함다!”

“내가 뭐, 인마!”

“…이럴 줄 알았습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도 신기한 재주네요.”

“비꼬는 검까? 너무함다! …무라사킷치, 많이 아파요?”

“…….”

무라사키바라는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었다. 막대사탕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키세는 그가 무척 화가 났기 때문이라 짐작하고는 제발 짓누르지 말아 달라며 우는소리를 했다. 보고 있던 아오미네가 덩달아 사과하며 ‘야, 그만 해라. 사과하잖냐.’라고 두둔할 때까지, 무라사키 바라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아오미네와 키세를 번갈아 바라보던 무라사키바라는 손에 쥔 막대 사탕을 그대로 휴지통에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사탕이 휴지통 뚜껑에 부딪혀 사방으로 튀어 깨졌다. 사물함에 기대 소곤소곤 사담을 나누던 이름 모를 부원들이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다. 사탕이 깨진 모양새를 무연히 바라보던 쿠로코가 침착하게 바닥을 비로 쓸기 시작했다. 키세는 사과를 해야 할지, 쿠로코를 도와 청소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대걸레를 집어들었다. 정작 원흉인 무라사키바라는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념이란 개념은 느슨한 일상을 지내온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적어도 모두가 생각하는 무라사키바라는 그러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사람 무시하는 새끼들뿐이야.’

라커룸을 떠나는 무라사키바라의 뒤통수에 대고 아오미네가 으르렁거렸다. 그 말은 의미 없이 공중에 흩어졌다. 그날 합동 연습은 엉망진창이었다. 미도리마의 슛은 빈번히 골대에 닿았고, 무라사키바라는 과잉 방어로 2군 선수 두 명을 보건실로 보냈으며, 아오미네는 갑작스레 복통을 호소해 연습 중 귀가 조처를 받았다.

비슷한 일이 며칠간 이어졌다. 미도리마는 깨끗한 슛을 넣지 못한 것이 충격이었던 듯 과한 연습으로 지쳐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괜한 선수에게 화풀이하기 일쑤였다. 대부분 심약하고 작은 제3군 선수들이었으나, 미도리마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심했다. 미도리마가 바쁜 아카시를 대신해 타교와의 친선 경기 일정표를 나누어 줄 때였다. 미도리마는 사무적으로 무라사키바라에 게 깔끔하게 코팅된 표를 내밀었다.

“아─, 미도리마 군. 나한테 손 안 댔으면 좋겠는데─.”

같은 부실에 있던 아오미네는 그 호칭의 변화와 노골적인 거절에 진절머리를 내더니 도저히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며 주먹다짐을 했다. 그 다툼을 말리다가 엉겁결에 볼을 얻어맞은 쿠로코는 진심 어린 한 마디를 했다.

‘봐 주기 힘듭니다, 무라사키바라군.’

웬만해서는 부원들 일에 간섭하지 않는 감독에게조차 이야기가 전해져, 수차례 전체 집합 명령을 받기까지 했다. 주장인 아카시는 면목이없었다. 난장판인 코트 위에서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들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알아야 했지만,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무척 까다로웠다. 아카시는 확신히 필요했다. 그는 감독과, 의지가 되는 선배 한 명에게 따로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5일간, 모두가 지독히도 허덕인 예의 지옥 훈련이 펼쳐졌다.

“왔네.”

결국, 무라사키바라는 개인 호출을 받았다. 아침 연습 후 아카시와 독대한다는 껄끄러운 형태였다. 무라사키바라는 사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최근 울컥울컥 치솟는 짜증을 해결할 길이 없어 어린아이 처럼 떼를 쓰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채지 못한 척 그저 감정을 발산하고 있을 뿐인 제 모습을 아카시가 모를 리 없다. 복도를 걷는 동안은 무어라 변명을 해 볼까 궁리를 했으나 아카시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금세 그만두었다.

“이유는 알 테지?”

이유라니. 무라사키바라는 되려 묻고 싶었다. 아카시 너는 이 짜증의 원인을 아는 거냐고. 그러면서도 내게 이유를 아느냐 묻는 것이냐고. 그저 답답한 심경에 멋대로 입을 놀렸다.

“아카칭-. 그거 알아? 미도치… 아니, 미도리마군이 아카칭을 무지 좋아하는가 본데. 아카칭 상대로 무슨 더러운…”

사실은 호되게 부정당하길 바랐을지도 모르는 내용이었으나 무라사키바라는 그 뒤를 미처 이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둔통이 허리를 울렸다. 무라사키바라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카시의 손이 어깨에 닿는 잔상조차 사라지지 않았건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아카시를 그저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가 하는 짓은 저열하기 그지없어.”

무척이나 싸늘한 그 시선이 내리꽂혔을 때, 무라사키바라는 그제야 물리적 충격으로 멈췄던 감정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코끝이 찡했다. 어쩌면 조금 울고 싶었다. 억울했다. 나는 나쁘지 않은데. 그저 조금 섭섭할 뿐인데….

한순간 스치고 지나간 ‘섭섭하다’는 감정에 무라사키바라는 흠칫했다. 입을 벌리고 뻐끔거렸으나 나오는 말은 없었다.

“…….”

신중하게 제 표정을 살피는 아카시를 신경쓸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실낱 같은 감정을 되새겼다. 미도리마가 아카시를 좋아하는 것이 섭섭하다니. 새삼스레 곱씹고 나서야 비로소 할 말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지 뒤죽박죽인 데다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하고 싶은 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무라사키바라는 머리가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채 벌떡 일어섰다. 오로지 미도리마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또렷이 남았다.

“아카칭, 미도칭 어딨어?”

“...허튼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이건 무척 중요한 일이야.”

“아─, 빨리─.”

“…….”

“아카칭!”

재촉하다 못해 감히 큰 소리까지 냈지만, 아카시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의 깊게 무라사키바라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짧게 말했다. ‘도서실.’ 무라사키바라는 달렸다.

다시금 미도리마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 며칠 사이 무라사키바라의 적대적인 태도를 참아내는 것은 상당히 고역이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성숙하지 못한 무라사키바라의 태도에 쓴소리를 했을 것이다. 날벼락과도 같던 그날의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응당 그리 했을 것이다. 미도리마는 정확히 그 시점부터 무라사키바라가 돌변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도리마는 애초에 ‘오해’를 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카시를 좋아하느냐는 그 물음의 답을 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오해’가 아니라면? 그렇게 전제를 뒤집으며 미도리마는 치명적인 나락을 느꼈다. 어쩌면 무라사키바라가 생각하는 대로, 제가 아카시를 연모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다면. 총명한 두뇌는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망설였다. 나아가 무라사키바라의 적대감을 쉽사리 연결짓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둘의 상관관계는 무척이나 뜬금없고 낯선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그것조차 아니라면, 해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가능성이 남는다. 아득한 감정을 유발하는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겁낸다는 건 결국…. 미도리마는 생각을 멈추었다. 아직은 결론을 내기 일렀다. 아직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미도리마는 오늘의 행운 아이템인 ‘베스트 셀러인 연애소설’을 빌리러 도서실로 향했다. 연애에 별 관심이 없는 그의 책장에 연애소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침부터 얼마나 필사적이었던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점은 학교와 정반대 방향인지라, 임시방편으로 어머니가 즐겨 읽는 사랑 시집을 대신 지참하고 서점을 향했다. 그러나….

‘금일 임시 휴업’

결국 미도리마는 학교에 오기까지 더러운 물웅덩이에 튀긴 물을 맞고, 여벌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자마자 새똥을 맞았다. 침울한 표정의 미도리마에게 아침 연습 후 학교 도서실에서 빌리면 될 것 같다 조언한 것이 아카시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심결에 아카시에게 의지해버리는 습관이 들어버린 것 같다. 이런 모습 때문에 무라사키바라가 그런 말을 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말에 따라 아침 연습 후 도서실로 향했다. 등교 시간대라 도서부 당번을 제외하면 도서실은 텅 비어있었다. 미도리마는 미리 검색해 둔 책을 집어들었다. 하얀 표지에 정갈한 글씨로 ‘감미롭고 아득한’이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다. 필시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지. 미도리마는 손목시계를 살펴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는 연애소설을 몇 권 더 빌리기로 했다. 별자리 순위와 상관없이 꺼림칙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못내 불쾌했기 때문이다. 같은 섹션을 둘러보려던 그는 곧 계획을 철회했다.

“미도칭!”

도서실 문을 부술 듯 열어재낀 무라사키바라가 제법 오랜만에 낯부끄러운 호칭으로 저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미도리마는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도서실에서는 조용히 하라는 것이다, 무라사키바라. 할 말이 있 다면 복도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야.”

미도리마는 언젠가의 무라사키바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단정한 필체로 도서 대여 카드를 또박또박 작성했다. 도서부원이 무라사키바라와 미도리마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카드를 받아들었다. 대여가 끝날 때까지도 무라사키바라는 미도리마의 뒤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충동적으로 미도리마를 찾아오긴 했지만 무라사키바라는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미도리마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 한층 서늘한 시선을 하 고 있었다. 아카시와도 닮은 침착함. 그것을 마주할 때마다 무라사키바라는 숨이 막혔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짓눌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말았다. 정돈된 것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파괴본능, 잔잔한 호수에 뛰어들어 기어코 물을 흐려놓고 싶은 강한 욕구…. 그런 것이 미도리마를 마주함으로써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또 멋대로 입이 움직일 것 같아 무라사키바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미도리마는 속으로 셈을 하고 있었다. 멈추었던 가정을 되새겼다. 결론짓기를 회피하기 전에 조금만 더 힌트가 있다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무라사키바라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미도리마가 눈을 내리까는 것이 슬로우모션으로 느껴졌다. 햇빛을 등진 무라사키바라의 시선 끝에 미도리마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 깜빡. 그건 햇빛을 받아 마치 민들레 솜털 같았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것을 눈으로 쫓자 곧 파아란 시선과 마주쳤다.

“아하하.”

그 다음 순간, 무라사키바라는 분노에 시야가 새까맣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미도리마가 제 얼빠진 반응을 살피고는 소리 내어 웃은 것이었다.

“수작 부리지 마. 짓눌러 버리기 전에.”

목소리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억눌려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미도리마의 멱살을 잡고 단숨에 벽에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신음을 눌러 삼킨 미도리마가 굴욕적인 자세를 깨닫고는 시선을 피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의 귀와 뺨이 뒤늦게 붉어졌다. 무슨 의미일까. 무라사키바라의 눈은 본능적으로 미도리마의 붉어진 부위를 샅샅이 훑었다. 그 와중에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그래, 이런 짓을 하니까 그렇지. 미도칭 호모야? 기분 나쁘다고. 게다가 매일 보는 친구를 상대로 뭐 하는 건데? 설마 반찬 삼는다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믿기 힘들게도, 무라사키바라는 말함과 동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저가 뱉은 말에서 모든 것을 깨달은 탓이다. 폭언은 사실 자신을 향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며칠 전 새벽에 미도리마를 상상하며 토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직후 이게 다 미도리마 때문이라고 이를 갈았던 것도.

‘낯설다는 혐오감’.

그것은 사실 혐오감이 아니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아오미네와 키세가 뒤채며 노는 것에는 무심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미도리마여서 그랬던 것이다. 미도리마를 쫓게 되던 시선의 의미. 같은 시선을 돌려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존재.

미도리마는 무라사키바라의 복부를 무릎으로 강하게 가격했다. 무라사키바라는 정신적, 신체적 충격으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모멸감으로 떨리는 몸을 꼿꼿이 세운 미도리마는 마치 자세를 바로 함으로써 구겨진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있는 것 같았다. 미도리마의 반격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무라사키바라는 차라리 더한 통증에 몸을 맡기고 싶은 심경이었다.

“너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몸을 말고 있는 무라사키바라에게 그 말을 남기고 복도 바닥에 떨어뜨린 책들을 주워들었다. 조금 전의 몸싸움에서 튕겨 나간 것이었다. …알 수가 없는 건 미도칭 쪽이고. 무라사키바라의 서러운 반박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복도에 홀로 남겨져서야 뒤늦게 허튼짓하지 말라는 아카시의 경고가 생각났다. 어떡하면 좋지, 아카칭. 나 어떡해야 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사흘이 흘렀다. 미도리마는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점 앞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기말고사 일주일 전부터는 부활동을 의무적으로 쉬게 된다. 평소였으면 꿋꿋이 코트에 남아 연습을 했을 그였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좀 쉬고 싶었다. 스스로가 회피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없었다. 확인절차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 미도리마는 무라사키바라의 ‘오해’를 푸는 일에는 관심을 끌 참이었다. 무라사키바라가 그렇게도 진절머리를 내는 잔소리도 그만둬 보자고, 이 이상 어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미도리마가 캔 단팥죽 버튼을 누르려 했을 때, 다른 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와 제가 누르려던 버튼을 힘주어 대신 눌렀다. 반마디는 더 큰 손이 미도리마의 손에 차가운 캔 단팥죽을 쥐여주었다. 손바닥에 와닿는 선뜻하고 차가운 그 감각은 미도리마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었다. 무라사키바라는 입매를 일그러뜨리고 미도리마의 앞에 섰다.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키가 클 터인 그가 무척이나 작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멱살을 쥐었던 손이 머뭇머뭇 조바심을 내며 다가왔다. 미도리마는 그 모양새가 퍽 우습게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무라사키바라는 단순히 신기했었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희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버리는 아카시와 미도리마가 신기했다. 그다음에는 곧잘 아카시의 등을 향하는 미도리마의 시선이 또 신기했다. 저 또한 뛰어난 수재인데 열등감이나 비틀림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더 위를 향하려는 가상한 노력이 신기했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미도리마를 관찰했다. 교실을 지나치면서, 코트에서, 방과 후 귀가하면서. 그날 오후 충동적으로 던졌던 질문에 사실 의미는 없었다. 무라사키바라 아츠시는 다만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쳐보고 싶었을 뿐이다.

미도리마는 무라사키바라의 등 뒤로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 안경을 빼앗긴 탓에 모든 것이 흐릿했다.

입술에 와닿은 것은 사탕이었다. 무라사키바라가 혀로 밀어넣은. 무척이나 그다운 화해 요청이었다. 미도리마의 볼 위로 무라사키바라의 눈물이 떨어졌다. 멀리서 종이 울렸다. 종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미도리마는 그 음률이 여전히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의 행운 아이템이었던 책이 말하길, 첫키스는 감미롭고 아득한 것이라고 했다. 미도리마는 그 저자가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대체 합성착향료의 어디가 감미롭고 아득하단 말인가.

<끝>


아래는 후기와 사적인 근황을 가볍게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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