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흑]도쿄의 외할머니 댁에 구형군이 살고 있던 건에 대하여

2021년 11월 20일 쿠로코의 농구 배포전 <기적의 RESTART GAME> 발매

주기적 농놀 by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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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0일 쿠로코의 농구 배포전 <기적의 RESTART GAME>에서 발매한 개그지입니다.

CP : 아카시 세이쥬로 X 쿠로코 테츠야

실물 판매가 8,000 / 78p, 포스타입 판매가 4,000원이었습니다.

현판, 통판, 포스타입까지 구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다고 생각하여 무료로 공개합니다.

* 쿠로코와 마유즈미의 특성이 닮은 것, 디자인이 유사한 점을 가지고 둘을 이종사촌이라 날조하였습니다.

* 아카시, 쿠로코, 마유즈미가 주로 나오며 누구 하나 말할 것 없이 망가집니다.

 

1. 서막

교토의 명문 사립 라쿠잔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유즈미 치히로는 고민이 생겼다. 버블 경제 때 도쿄에 집을 살 수 있으면 미국 땅을 다 살 수 있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도쿄 내 국립 대학교에 진학한 마유즈미는 노트북을 닫았다. 적당한 자취방 찾기가 어려웠다.

라쿠잔에 들어간 것도 그냥 집이 가까워서였는데. 자취를 시작하려니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차라리 기숙사에 들어갈까. 마유즈미는 더럽게 귀여웠던 체육 특기생 후배들을 생각했다. 3학년과 1학년이 같이 쓰는 기숙사는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던 증언을 떠올린다. 재능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하물며 나이로만 학년이 정해지지 않는 대학인데. 4인실은 학년이 골고루 들어간다는 안내를 보고 마음을 접는다.

그래, 자취하자.

전국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수재가 모인 라쿠잔에서 집 가까운 평범한 중산층 학생이 도쿄대에 들어간 건 신화였다. 마유즈미 개인으로선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지고 싶지 않아서 버티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프로그래밍도 그럭저럭 할 줄 알아서 공대에 들어갔다. 라는 어이없는 인생사가 그의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전국의 실력자를 모아놓고 끊임없이 경쟁시키는 농구부에서 존재감도 없이 지내다 돌연 벤치에 들기도 했다.

자전적 소설이라도 써서 모○가타리에 투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땀이라도 흘리자 싶어 들어간 농구부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달린 네 명의 인생이 더 화려했다. 마유즈미 치히로의 인생이 두 권 분량을 겨우 뽑을 동안, 팀 메이트의 소개를 완곡하게 해내는 데 다섯 권 정도는 소비할 것이다.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건 오타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는 일이다. 서사가 있어야 관계의 결말도 있는 법이니.

그냥 교토에서 괜찮은 대학을 다녔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굳이, 왜, 도쿄냐 하면 한 번쯤은 변화의 중심지인 수도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이렇게 말해도 그냥 변명이었다. 한정판이 도쿄에서 제일 먼저 풀리는 게 열 받았다. 전통이 어쩌고. 다 필요 없다. 교토가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지방러의 설움은 지방러 밖에 모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인생일대의 이벤트라도 한 번 일어나주지 않으려나. 열아홉에 뜬금없이 농구부 레귤러로 활동한 것도 인생일대의 이벤트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유대감이 없어서 그런가. 게임은 솔플로 즐겨도 충분히 즐겁지만 RPG 인기 게임은 최종 컨텐츠로 파티를 두는 것처럼. 책상에 굴러다니던 샤프 뒤를 볼에 가져다대고 꾹 누른다. 샤프심이 튀어나오는 소리가 경쾌했다.

“치히로, 잠시 나와 볼래?”

흑연이 녹아가는 소리를 끊는 노크 소리였다. 노트에 적어둔 자취방 리스트를 줄 그어 지워내던 마유즈미가 일어났다. 괜히 뒤통수가 가려운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마유즈미는 다행이 180cm가 넘는 건장한 성인으로 자랐다. 방문을 열자 최근 스마트 폰으로 바꾼 어머니가 한 손에 들어오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머리를 올려 묶은 어머니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문 열렴.”

그게 제 마음대로 될 리가요. 마유즈미는 생각을 삼켰다.

“혹시 미츠키 이모 기억하니? 여섯 살 때 만난 게 마지막이라 조금 곤란하려나.”

“외할머니랑 같이 산다고 종종 말씀하셨잖아요. 왜요, 할머니가 어디 편찮으시대요?”

“할머니가 편찮으실 리가. 얼마 전에는 탁구대회에서 상도 타셨다는 걸. 직접 이야기 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전화 받아봐.”

영업직을 맡고 있는 어머니는 마유즈미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었다. ‘언니’라고 선명하게 적힌 번호가 조금 거북했다. 일곱 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의 인사이동으로 교토에 이사를 와, 친척들을 만나지 않은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이모와 통화하라니. 기억 속의 미츠키 이모는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 덕에 책장에 어린 시절 앨범도 제법 된다. 한 번 웃어보라며 간절하게 말하던 이모가 훌쩍 자라고 목소리도 낮아진 자신을 어색해 하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여보세요? 마유즈미 치히로입니다.”

“어머, 치히로. 목소리가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졸업식은 했니?”

“아직이요. 이모는 목소리가 예전 그대로시네요.”

존재감이 옅은 점을 이용해서 사람하고 거리를 두긴 했어도 사회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의 이모는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자매는 닮는 다더니, 바로 앞에서 웃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같았다.

“도쿄대에 합격했다며? 우리 테츠야도 치히로처럼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국어 말고는 그저 그렇네. 부활동 하는 것처럼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테츠야가 지금 몇 살이죠?”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야. 열심히 한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오늘도 친구랑 공부한다면서 나가지 뭐니. 가방만 들고 간 걸 보면 진짜 같기도 하고.”

분명 이모의 아들 이름이 테츠야였지. 이름을 부르자 머릿속에서 아무렇게나 뭉쳐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법 울보에, 짧은 머리를 하고 마유즈미를 제법 따르던 아이였다. 마유즈미의 아버지는 외동에, 어머니는 언니가 있었지만 아이가 생기는 것이 늦었다고 했다. 그 사이에서 외동으로 자란 마유즈미에게 사촌동생 테츠야는 유독 각별한 존재였다.

함께 보낸 시간은 많았지만 같이 찍은 사진은 없었다. 어릴 땐 그 점을 제법 섭섭하게 생각했는데. 테츠야는 또래보다 키도 작고 왜소한 주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이마에 상처 하나씩 달고 다니던 천방지축이었다. 저처럼 존재감도 옅어서, 유원지에 네 시간을 있다가 나오면 한 시간 정도는 동생을 찾는데 온 가족이 혈안이었다. 그러다가 마유즈미도 잃어버려 엉엉 울면서 직원에게 안겨 미아보호센터 안내 방송 마이크를 잡고 엄마와 아빠를 찾았지만. 먼저 이모의 품에 안겨있던 테츠야가 ‘치-쨩’하며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안겨서 저도 겨우 그친 울음을 터트린 기억이 났다.

“아차, 하려던 이야기가 이게 아닌데. 치히로만 괜찮으면 이모랑 할머니 집에서 살래? 2층 테츠야 앞방이 손님방이거든. 치히로가 다니는 대학은 지하철로 30분 정도 걸리지만….”

그리운 이름에 흑역사가 떠올랐지만 대가가 제법 달콤했다. 마유즈미는 공손하게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잡았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저는 좋아요. 마침 방을 구하고 있었거든요.”

“정말? 다행이다. 그럼 언제 도쿄에 올래?”

*

 

요즘 고등학교 2학년은 뭘 좋아할까. 신칸센을 기다리며 마유즈미는 그런 고민을 했다. 주변의 평범한 고등학생이라고 해봤자 입시에 미친 클래스메이트에, 무관의 오장이니 무장의 오관이니 이상한 별칭으로 불리던 후배 셋, 그리고 키도 성인 평균 정도면서 200cm도 넘는 놈을 잘도 다루던 기적의 세대 천재 후배 하나. 생일은 고사하고 기념일 하나 챙긴 적이 없었다.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는 전국 단위의 강호였기 때문에 여자 매니저가 의리초코를 돌리면서 슬쩍 더 좋은 걸 주거나 하는 두근두근한 이벤트도 없었다.

애초에 매니저도 남자였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마유즈미는 편의점에서 산 과자를 뜯었다. 짐은 미리 부쳐둬서 관광객 같은 차림새가 되었다. 도시락을 살 걸 그랬나. 운동부 치고는 적게 먹는 편이었지 나이 또래에 비해선 많이 먹는 편이었던 마유즈미는 손에 묻은 끈적끈적한 가루를 털어냈다.

역에 도착하면 5분 정도 걸어 지하철을 타야했다. 이모부가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지리를 익히고 싶다며 손수 거절했다. 대신 오전에 이미 도착한 짐은 방에 넣어두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봤자 옷이나 이불 같은 기본적인 것 뿐 이었다. 방이 먼지가 많아 테츠야의 친구가 도와준다고 들었다.

얼마나 멀쩡하게 잘 자란거니, 텟쨩! 황금 같은 주말에 친구의 친척이 집에 들어와 산다는 이유 하나로 선뜻 도와주겠다는 친구라니. 제 청춘에 땀 냄새가 배어있긴 했지만 부대껴서 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교토에서만 한정으로 나온다는 과자를 이것저것 샀다. 발밑에서 걸리는 쇼핑백이 존재를 알리며 바스락거렸다. 먹는 걸 싫어하는 고등학생은 없다. 그 미부치도 네부야에게 많이 먹는다며 잔소리가 잦았지만 본인도 평범한 고등학생 이상의 식성을 가지고는 있었다. 고봉밥을 다 비우지 못하는 저를 이해 못한다는 표정을 짓는 게 생생하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아카시는 어땠더라. 입이 짧은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조금만 먹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있었다. 식판에 덜어진 양만 딱 먹고 일어나는 모습이 도리어 경이로웠다. 그래놓고 괴물처럼 연습량은 남들의 배였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 승리하는 것은 좋았지만 팀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현대의 인간은 모두 부품 같은 거라, 사회에 한발 더 딛었다는 느낌으로 일 년을 버텼다. 쓰임이 정해지면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 결국 사회인의 본질 아닌가.

잡념이 길어졌다. 마유즈미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잠을 청했다.

*

도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익숙하게 표를 사고 개찰구를 넘었다. 역에서 십 분 정도 걸어야 하는 외할머니 댁은 생각한 것 보다 번화가의 주택이었다. 근처에 초등학교도 제법 보였고, 고등학교도 있었다. 교토에는 스트릿 농구장보다는 야구장이 많았다. 큰 강을 따라 곳곳에 야구장이 있었고 아직 쓰임이 정해지지 않은 땅에서는 아이들이 그린 다이아몬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미리 저장해 온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평범한 붉은 지붕을 한 2층 집이랬다. 명패에 쿠로코라고 적혀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올려다 본 2층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

…설마. 마유즈미 치히로의 머리를 순간 관통하고 가는 것은 열차에서 잠들기 전 떠올렸던 첫인상이 제법 무례했던 후배였다. 얼음 밑의 잉어마냥 고요한 삶을 살아가던 남자가 유일하게 눈을 번뜩이며 이야기 하던 환상의 식스맨. 분명 이름이….

“치히로 형?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점심은 먹었, 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주실까? 구형 군.”

“여기 저희 집인데요. 그보다 그만 둬 주실래요, 마유즈미 씨. 그 호칭.”

동그란 눈이 저를 빤히 쳐다본다. 방금까지는 치히로 형이었으면서, 정체를 알자마자 ‘마유즈미 씨’로 바뀌는 호칭이 우스웠다.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확실히 존재감이 적은 건 엄마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물론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가족끼리 똘똘 뭉쳐 놀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 저 쿠로코 테츠야의 친구라고 하면, 혹시 세이린의 그 말도 안 되는 두 갈래 눈썹은 아니겠지. 네부야만큼 시끄러운 녀석 같은데. 마유즈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쿠로코 너머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발을 훑었다. 그 정도로 발이 큰 사람은 다행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최근 사이가 좋아져서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도쿄 합숙을 강행해 만날 정도로 기적의 세대가 친해진 모양이지만. 그 녀석들도 하나같이 멀대같이 큰 놈들 뿐이었으니 적어도 세이린 정도라면…, 그닥 껄그럽지 않을 터다. 아마도. 일방적으로.

“테츠야, 형님은 오셨어?”

“잠시만요, 세이쥬로 군. 잠깐 내려오지 말고 부모님이랑 있어 보세요.”

“뭐, 뭔. 무슨 군?”

“조용히 하고 빨리 나가세요! 아카시 군하고 얼굴 맞대고 하하호호 할 셈입니까!”

“너. 도와주겠다고 부른 친구라는 놈이 아카시였냐?”

쿠로코는 현관문을 열고 마유즈미를 밀어냈다. 제법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힘을 주고 있었지만 170cm도 안되고, 근육 하나 붙지 않은 남자애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성인 남성을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윗층에서는 다정한 부부의 목소리와, 인식하고 나니 들리는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섞여 복도를 맴돌고 있었다.

제가 내려가 볼게요. 쿠로코의 속도 모르고 아카시는 계단을 내려왔다. 물론 마유즈미도 아카시와 얼굴 맞대고 앉아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할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젠 쿠로코가 밀어주는 대로 밀려났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카시 세이쥬로가 쿠로코가 현관문을 닫는 것 보다 빠르게 마유즈미를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마유즈미 씨?”

좁은 계단에 멈춰선 아카시의 뒤로 잔주름이 늘어난 쿠로코의 어머니가 내려왔다. 노란색 앞치마가 인상적이었다.

“치히로 왔구나!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이모가 데리러 갔어야 했는데. 테츠야 얘는 왜 형을 밀고 그러니? 예전에는 치-쨩 형이라고 부르면서 죽고 못 살았는데.”

확실히 신이 내린 일생일대의 이벤트였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마유즈미는 도착하자마자 어색하게 웃으며 이모 부부와 인사하고 제 짐 나르는 것을 도왔다. 맞은편에 활짝 열려있는 쿠로코의 방에 창고처럼 사용되던 방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크기와 두께를 보아 예전부터 찍어둔 앨범으로 보였다. 똑같은 크기의 앨범이 교토에도 있었다.

정적이 맴돌았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과 책 몇 권이라 정리가 제법 끝난 상태였다. 이미 놓여있던 책꽃이는 그대로 사용하고, 미리 사 둔 조립식 책상을 조립하면 방 정리는 거의 끝났다. 저녁 준비를 한다며 주방으로 도망친 이모 부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냥 빨리 책상 조립이나 하고 사라졌으면 좋겠다. 마유즈미는 그런 생각을 했다.

책 순서를 정리하는 와중에도 신경이 온통 두 사람에게 가있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 아카시가 도쿄의 쿠로코 집에 있다는 것. 그 다음은 두 사람의 호칭이었다. 윈터컵 결승전 이후에 아카시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턱턱 부르던 것과 달리, 평범하게 성에 존칭까지 붙였다. 처음 그의 입에서 ‘마유즈미 씨’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놀라서 혀를 어디에 둬야할지 잊을 정도였다.

친했던 기적의 세대라고해도 예외는 아니라서 미팅 중에도 ‘신타로’나 ‘료타’, ‘아츠시’라고 불리던 그들이 평범하게 ‘미도리마’, ‘키세’, ‘무라사키바라’라고 불렸을 때는 묘한 기시감도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이 서로를 요비스테 하고 있다. 처음에는 ‘세이쥬로 군’이라고 쿠로코가 칭한 것이 환청인 줄 알았다. 아카시가 ‘테츠야’라고 부르는 것 정도는 이 집에 세 명이나 쿠로코이니 구별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하면 납득이 되긴 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쿠로코가 책상을 벽에 붙이고 있었다.

“마유즈미 씨, 책상 다 됐습니다.”

“어…. 고맙다.”

“별 말씀을요. 세이쥬…, 아카시 군이 도와준 덕에 빨리 끝난 겁니다. 저희 가족은 조립식 가구에는 영 소질이 없거든요.”

“내가 와서 해도 되는 일인데 괜한 오지랖이야. 구형 군.”

“기억 속의 치히로 형은 조금 다정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라쿠잔의 마유즈미 씨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야말로 그 귀여웠던 사촌동생이 구형 군이라는 생각은 안했으니까 말이야? 아카시 녀석은?”

“본가에 돌아간답니다. 기사님이 데리러 오셨다고 하네요.”

아카시는 도내에 위치한 테이코 중을 나왔으니 본가도 도쿄에 있는 게 당연했다. 항상 기숙사에 있었으니 1학년 때는 교토에만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차 하나가 겨우 다닐 골목에 강한 불빛이 늘어난 느낌이었다. 창가에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니 까만 승용차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아카시 군을 배웅해주고 돌아오겠습니다. 적당히 쉬다가 저녁 먹으러 내려오세요.”

쿠로코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방을 벗어났다.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만, 그렇다고 냉랭할 것도 없는 관계였다. 신형이니 구형이니.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게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쿠로코도 아니고 자신이라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현관을 들어오면 바로 계단이 있기 때문에 소음이 전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어떻게 구워 삶은 건지 몰라도 이모 부부가 다음에 또 오라며 아카시를 다정하게 배웅했다.

“치히로, 내려와서 국 간 좀 봐줄래? 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네, 내려갈게요.”

대답은 했지만 마유즈미는 창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뭐가 좋다고 손까지 잡고 배웅하는 거냐. 가로등이 비추는 쿠로코는 확실히 들떠있었다. 싸웠다가 친해지는 친구는 다들 저런 건가. 한결 부드러운 표정의 아카시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잠깐 눈에 담은 것만으로 타인의 모든 것을 읽어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남자의 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쓸데없는 걱정 중 하나가 유명인의 걱정이랬다. 아카시는 지금이야 농구라는 공통점으로 마유즈미와, 쿠로코와 묶여 있었지만 언젠가는 있었다고 자각도 하지 못하는 높은 벽을 넘어설 사람이었다.

그래도 저런 모습을 보면 풋풋한 고등학생임을 실감한다. 졸업식 이후 한 달 사이, 마유즈미는 제가 급격히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멈춰선 두 사람은 한창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변을 살폈다. 그래봤자 현관문을 열고 나가 대문도 못 벗어났는데 저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에 마유즈미 치히로는 제 두 눈을 의심했다. 아카시가 쿠로코의 볼을 살짝 잡더니 살짝 고개를 꺾고 서로 입술을 짧게 부딪쳤다. 잘못 봤다고 믿고 싶었으나 새어나오던 입김이 사라졌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구형 군을 어떻게 벗겨먹은 거냐, 저 녀석. 아카시도 쿠로코도 농구를 할 때 그다지 호감 있던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사고가 멈췄다.

하지만 쿠로코가 제 동생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는 것이다. 아카시는 예상할 수 없는 남자다. 솔직히 연습이나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저 놈을 평생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있어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마유즈미 치히로는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아카시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창가에서 멀어져 교토에서 사온 선물을 들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마침 들어온 쿠로코의 얼굴이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때마침 주방에서 나온 이모는 잔뜩 빨갛게 변한 쿠로코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테츠야, 밖은 추우니까 가벼운 차림으로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아니요, 이모. 아마 추워서 그런 게 아닐 거예요. 마유즈미 치히로는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누른 채 화장실로 향하는 제 사촌동생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저런 놈하고 사귀는 건 이 형이 허락할 수 없다.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와 인정받으려는 자의 유치한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2. 빙탄불용

월공강이나 금공강 시간표를 짜보는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마유즈미는 절망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만 월요일 1교시와 금요일 6교시에 필수이수 과목이 있었다. 둘 다 C언어의 기초를 담고 있어서 내빼지도 못했다. 연고도 없는 도쿄의 밤은 차갑다. 그래도 이모가 해둔 장국은 맛있었다. 엄마가 해준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말하니 할머니가 기쁘게 웃으셨다.

주말에도 부활동을 위해 나간 구형 군이 돌아왔다. 겨우 다섯 시인데 밖이 깜깜했다. 일전의 우승이 요행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니 더 바빠진 모양이다. 겨울은 실내 스포츠의 계절이라 고교농구가 더 주목받은 것도 한 몫 했다. 라쿠잔도 인터하이에서 좋은 결과를 냈으나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이끄는 데다가, 오장 중 셋이 있으니 준우승이 당연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오히려 우승하지 못한 것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 걸려있는 고교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을 슬쩍 봤다가,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신문을 사왔다. 기사는 두려움에 읽지 못했지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 씻을 준비를 할 테고, 그럼 적당히 저녁 준비가 될 것이다. 아무리 가족의 집이라 해도 십 년이 넘도록 보지 않았기에 남 같아서 마유즈미는 간혹 저녁 준비를 도왔다. 답지 않게 경기중에 열을 올린 기억이 있어 쿠로코와 마주하는 일도 피하고 싶었고. 좁은 복도를 두고 산다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기름에 열이 오르는 뜨거운 냄새가 났다. 근처 마트에서 파는 납작한 돈가스를 튀길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채반에 받친 방울토마토에서 천천히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긴 나무젓가락을 들고 요리하려던 할머니를 제지시킨다. 문만한 외손자가 주방에 들어서는 것이 탐탁찮다는 반응을 보이다가도 식탁에 앉으시면 한쪽에 틀어준 라디오에 집중하시곤 했다.

그러고보니 외할머니 댁에는 높은 식탁만 있구나. 마유즈미는 쿄토의 제 집을 생각했다. TV가 놓인 방에서 방석에 앉아 아침과 저녁을 해결하곤 했다. 계절에 맞춰 방석을 사는 것이 어머니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봄과 가을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앞마당에 어울리는 밝은 색감의 얆은 방석을 주로 두었다. 여름에는 대를 엮은 시원한 방석이라 허벅지나 종아리에 자주 자국이 남았다.

이제 방석이 하나 남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튀김옷 입은 것을 끓어오를 듯 기포가 생긴 기름 안에 넣었다. 완전히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다 하나 더 넣는다. 후드에 붙어있는 타이머를 누른다. 3분으로 설정된 것이 정확하게 흐른다.

“치히로는 요리도 능숙하네. 요리부였다던가? 요즘은 가정적인 남자가 인기라잖아.”

“고등학교 때는 농구부였어요. 요리는 잘 하진 않았는데….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다죠.”

마트에서 파는 돈가스 뒤집는 것 정도라면 집에서 여러 번 해봤다. 글로 쌓은 지식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지도 알았다. 고기를 때려 연하게 만들어 우유 등에 재웠다가 소금이나 후추로 밑간을 하고, 계란물과 밀가루, 빵가루를 입혀 찬찬히 튀겨내면 된다. 정도로 극히 이론적인 것들이었다. 빵가루를 조금 넣어보거나 나무 젓가락을 넣으면 기름 온도도 알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넣어봐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으니 온도 맞춰둔 것에 3분씩 뒤집어 튀기기만 했다.

“네 엄마가 은근 그런 거 시키지? 우리 테츠야는 집에 혼자 있거나 도시락 들고 다닐 때마다 제법 잘 해먹는 줄 알았더니, 자신 있게 삶은 계란 몇 개하고 밥솥에 있는 밥만 들고 다녔지 뭐야.”

은근 엉뚱한 구석이 있구나. 마유즈미는 이모에게서 듣는 쿠로코의 이야기가 신선했다. 자식에게 관심이 많다 싶다가도, 농구 경기 이야기 한 번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월요일마다 등교를 걱정하는 엄마와는 다르게 덤덤한 성격인 듯 했다. 코트 밖에선 침착한 그가 그걸 빼닮았다고 하면 칭찬일까.

후끈한 공기를 이끌고 쿠로코가 식탁에 앉았다. 마유즈미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다 튀겨진 것을 꺼내어 튀김망 위에 올렸다. 채 썬 양배추 한 움큼 위에 샐러드 소스를 뿌리고 반 잘린 방울토마토까지 얹어낸다.

“테츠야, 오늘은 시간 맞춰서 들어왔네?”

“카가미 군이 내원하는 날이라서 연습이 일찍 끝났어요. 감독도 따라가셨고.”

“발목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던가? 계속 다칠 텐데 큰일이네. 테츠야도 겨울이니까 조심하렴.”

저녁식사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가족들은 식탁에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밥 먹을 틈도 없이 말을 걸어 괴로워하던 집에서 자란 마유즈미는 이 분위기가 영 불편했다. 옆자리의 외할머니는 제게 손수 자른 돈가스를 얹어주기도 했다. 많이 먹으라거나, 잘 먹으라는 말도 없었다.

매번 점심식사도 그랬다. 아침은 이모부의 일정에 대해 듣는 것만 해도 집안에 소리가 가득했다. 이미 일어나 식사를 마친 할머니가 아침방송을 보는 소리가 섞여 웅웅댔다.

직장이 있는 어머니와 다르게 미츠키 이모는 전업주부였다. 최근 운전면허를 취득해 오전 열 시가 되면 꽤 낡은 승용차로 할머니를 근처 문화시설에 데려다 드리고 점심을 주변의 다른 주부들과 함께 해결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혼자 남을 조카를 위해 간단히 반찬을 해뒀지만.

방학 보충수업에, 여전히 빡빡한 여고생 감독의 훈련메뉴를 소화하느라 쿠로코는 해가 떨어지면 집에 들어오곤 했다. 어릴 때 이미지만 생각한다면 집에 딱 붙어있게 생겼는데. 그러지 않는 점이 쿠로코를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레귤러 자리에 올려놓았겠지만.

“아참, 이모, 저 내일은 점심 저녁 다 먹고 들어올게요. 따로 준비 안하셔도 돼요.”

“내일? 상관은 없는데, 어디 가려고?”

“교내 서점에요. 사야할 책도 있고, 학교 지리도 좀 익히려구요.”

“어머, 그렇네. 아직 학교 앞에 한 번도 안 가봤지? 데리고 가봤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네. 계속 방에만 있었잖니.”

“짐정리가 해도 해도 안 끝나네요. 이제야 대부분 끝났으니까요. 도쿄 지하철은 처음이기도 하고.”

대학가라 번잡한 걸 감안하더라도 근처 민간 서점에서 구매할 책도 있었다. 이 집 근처에도 걸어서 10분 내에 웬만한 시설은 있었으나 제 취향을 완벽히 충족하진 못했다. 주간 만화 잡지나 저명한 신문 몇 개가 꽂혀있는 걸 보면 ‘도쿄가 맞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택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전철이 어지럽게 지나가고 연립주택이나 아파트가 교토보다 배로 많아 시야가 촘촘함에도 그랬다.

얼핏 본 이모의 집에는 순수문학 도서가 가득해서 제 취미는 은밀하게 숨겨두기로 했다. 아카시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링고 땅이 귀엽네요.’라며 감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사촌동생이 건넛방에서 눈뜨고 살아있는데 여동생이 오빠에게 애교 부리는 책을 대놓고 보여줄 순 없는 노릇이다. 혹여 그런 취향을 가졌다고 오해하면 곤란했다. 게다가, 처음 집에 온 날 아카시와 쿠로코의 행적으로 봐서 아마 두 사람은.

“마유… 치히로 형, 번화가의 서점에 가신다구요?”

“……어.”

침묵이 좀 길었나. 저 무표정한 얼굴로 형이라고 부르는 건 통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멱살을 잡았으면 잡았지. 속이 편한 건가. 아님 욕심이 없는 건가. 쿠로코 테츠야는 전자도 후자도 영 어울리진 않는 남자였다. 좋아하는 것은 끝없이 갈구한다고. 마지막 윈터컵의 벤치에서도 확실히 느꼈다. 그 간극이 꽤 되었음에도.

“저도 같이 갈래요.”

진심인가? 마유즈미는 빠지려는 턱을 겨우겨우 집어넣었다. 지금 시시덕대며 같이 쇼핑이나 할 사이란 말인가? 우리가?

“어머. 그래. 테츠야도 책을 좋아하는데, 같이 다녀오렴. 얘 혼자 보내기엔 아무래도 걱정되어서 말이지.”

열여덟 살 건장한 남고생을 걱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반문하려던 마유즈미는 나란히 앉은 할머니와 손자의 팔목 두께가 차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젓가락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마유즈미 치히로는 이모의 제안을 덥썩 받아든 걸 후회했다.

구형군은 혹시 다섯 살입니까? 그런 질문이 단전부터 올라왔지만 다 제쳐주고 열여덟 건장한 사촌동생을 찾는데 집중했다. 정신 없어 수식어로 미아가 되었다는 걸 붙이는 것도 순간 잊었지만.

30분 뒤에 서점 앞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일본문학 서가를 천천히 살피는 것 까지 제대로 확인 했는데. 한눈 판 사이에 어디로 사라진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유즈미 치히로는 인터넷에 돌던, 미아찾기 방송에서 마흔세 살 아저씨의 이름이 나와 빵 터졌다는 경험을 본인이 하게 될 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도쿄로 상경한 이후 인생 일대의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지니 황송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구형 군은 사십삼 세의 반 토막보다 어렸다…. 가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저만 믿으라고 했다가 두 번이나 잘못 환승 했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두 사람은 결국 카나가와로 넘어가 도심의 백화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카나가와 경계에서 세이린을 지나 백화점으로 향했기 때문에, 쿠로코도 자주 타는 노선이랬다.

버스를 기다리며 제가 찾았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짓는 게 어이가 없어 마유즈미는 진지하게 어디 버리고 갈까 생각했다. 그야 마유즈미 치히로는 말만 도쿄대생이지 아직 시간표만 나온 대학생이며, 입학식도 하지 않았고, 이 도시의 철저한 외부인이기 때문에 확 버리고 도망쳐도 질타받을 일이 없었다. 오히려 현지인인 쿠로코가 비난 아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좁은 백화점에서 길을 잃을 수가 있나?

…마유즈미 치히로는 이렇게 생각했다가 발언을 철회했다. 창이 없고 LED 등이 드문드문 박혀있는 백화점은 넓었다. 무지하게. 일본인 평균 키를 훌쩍 넘어, 정수리를 내려다보기 바쁜 남자가 어지럽다고 느낄 정도로.

일생일대의 이벤트 같은 게 일어나길 바란 제 잘못인가. 고등학교 생활은 평탄하게 해달라는 소원은 들어주지 않은 신은 이런 부탁은 왜 잘만 들어주는 거람. 사실 현실의 이세계에 뚝 떨어진 평범한 소년 시나리오를 위한 고도의 빌드업이었던 것인가? 마유즈미 치히로는 제가 인파에 둘러싸여 도무지 제정신 아닌 생각을 했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며 성큼성큼 인파를 헤치던 마유즈미는 슬슬 화가 났다. 전화를 쓸 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안 받는 게 참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설마 제 존재를 잊고 돌아간 건 아니겠지. 나름 동병상련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그래도 설마 제가 이종사촌이었다는 것 까지 잊었을까 싶어, 여섯 번째 발신에는 기어코 성질내며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누군가와 심하게 부딪혔다. 그림자가 옅어 이러고 지나쳐도 문제 생기지 않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상대가 붙잡았다.

“마유즈미 씨?”

“…아카시?”

내가 찾고 싶은 건 구형 군이지 파렴치하게 어른들 눈을 피해서 입 맞추는 애인은 아닌데.

그 ‘파렴치 한’에 쿠로코도 포함이었지만 마유즈미는 내색하지 않았다.

“백화점에는 무슨 일이세요?”

“3층의 서점에. 너야말로 굳이 도쿄에는 무슨 일이야?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아버지께서 부르셔서요.”

거짓말이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정도로 순종적이지 않았다. 말을 안 들으면 안 들었지.

체육 특기생이 많은 라쿠잔은 기숙사가 연중무휴였고, 신년에나 쉬곤 했다. 사감이 무려 넷이나 되었지만 직장인이 한창 때인 고등학생을 통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기숙사 사정은 워낙 유명해서 통학생인 마유즈미도 속속히 알았다.

물론 휴일에 자습실에서 항상 목격되는 아카시의 이야기도. 1학년이면서 학생회장이니, 소문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여러모로 이상한 도련님이다.

“…부자들은 휴일을 백화점에서 보내나?”

다 제치고 마유즈미는 아카시가 그리 달갑진 않았다.

“못 보낼 것도 없죠.”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당돌한 후배인건 알았어도, 단정하게 웃으면서 뻔뻔한 모습이 얄밉기까지 했다. 작년의 건방진 모습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인격이 통합… 어쩌고 했는데, 솔직히 오타쿠인 나도 참지 못할 설정이라 듣고 그냥 잊어버렸다.

아카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련님다운 최신 휴대폰이었다. 살벌하게 기뻐하던 표정을 보다, 손을 탄 길거리의 고양이 마냥 웃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어, 테츠야. 백화점 안이야. 응. 3층.”

마유즈미는 그냥 집에 갈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마유즈미 씨도 찾아 오라고? 어려운 일은 아니지. 이미 옆에 있는걸. …응.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우리만 남겨두고 다 내보낼 수도 있어.”

전화는 안 받으면서 날 찾긴 했군. 마유즈미는 새삼 그가 절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아카시의 표정이 한 줄기 빛 같았다. 왜 사람더러 구원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이 전까지 아카시는 구원자라기 보단 나무구멍 속에서 잘 잠들어있던 다람쥐를 깨워서 불쌍하다며 침대에 눕힌 꼴이었으니.

“하하, 무리하지 말라고? 무슨 소리야. 널 위해 하는 게 어떻게 무리겠어.”

아니, 역시 저 생각은 취소다. 난 역시 이 커플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미치겠다.

 

“어른이면서 미아가 되면 어떡합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누구더러 미아라는 거야?”

지하 푸드코너 마지바에서 바닐라 쉐이크를 마시는 모습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마유즈미는 막상 태평한 사촌동생을 보니 할 말이 없어졌다.

“왜 전화는 안 받아?”

“번호가 저장이 안 되어 있어서요.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메일은?”

“저장 안 된 번호는 알람이 따로 안 떠요.”

그 와중에 책을 읽다 말았는지 테이블에 고이 뒤집혀 있는 모습에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와중에 점심때라, 적당히 음식을 주문했다. 쿠로코는 사양했지만 아카시는 듣지 않고 버거 단품을 주문했다. 그래도 연장자라고, 적당량의 생활비가 들어오는 체크카드로 구매하려 했더니 아카시가 재빠르게 결제를 마쳤다. ‘원래의’ 아카시는 이런 성격인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소년이다.

“아카시에게 전화는 왜 한 거야?”

“마침 연락이 왔어요. 도쿄에 왔다고.”

“그래서?”

“불러냈죠.”

“아카시가 어디 사는 지는 알지?”

“당연히 알죠. K구에 있는 서양식 주택에 살지 않습니까.”

뭘 그런걸 묻냐는 표정에 마유즈미는 이제 질릴 참이었다.

“여기서 K구까지 지하철로 몇 정거장인지 알아?”

“세이…, 아카시 군은 기사님이 계시니까 괜찮습니다.”

“자가용으론 몇 분 걸리는지 알고?”

“40분이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건가? 그냥 사귄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래? 당연히 와줄 거라는 저 뻔뻔함에, 마유즈미는 처음 도쿄에 온 날 쿠로코를 동정하던 생각을 바꾸었다. 이거 아카시가 코 꿰인 거 아냐?

“친구, 를 휴일에 그렇게 막 불러도 되는 거야? 구형 군은 그런 캐릭터인가?”

“어차피 절 보러 도쿄에 오는 사람이니 괜찮습니다.”

그래. 알지. 아주 잘 알고 있지. 내가 뭘 봤다고 생각하는 거야. 일부러 힘주어 친구라고 말했는데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유즈미는 부잣집 도련님인 아카시가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아무튼 도쿄의 부자들은 교토의 평범한 남자인 마유즈미 치히로에게 이세계와 같았다. 어느 이세계물은 대뜸 입을 맞추기도 한다니까….

그래도 사람인 마유즈미는 그런 장르까지 손을 뻗진 않았다.

“그렇지, 테츠야. 어차피 널 보러 오는 거니까 말이야.”

아카시가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햄버거 세 개. 감자튀김이 두 개. 음료는 사이다 하나에 아메리카노 한 잔.

“마유즈미 씨는 커피를 자주 드시나 봐요?”

“탄산을 잘 못 마셔서.”

“테츠야도 그런데. 사촌은 이런 것도 닮는 모양이죠?”

자연스럽게 햄버거 포장을 벗긴 아카시가 쿠로코에게 내밀었다. 내용물이 있는 듯, 없는 듯 얇은 버거였다. 저 정도면 그냥 빵 아닌가? 마유즈미는 다회용기를 덮은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얼음을 깨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매섭게 보지 말아주세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내가? 너랑?”

누가 만나 준다냐? 마유즈미는 마음만 같아선 이 불편한 상황도 밀어두고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어릴 땐 제법 귀여웠던 사촌동생. 그리고 버릇없이 굴다가 말미에 경기에서 졌다고 정신 차린 고등학교 후배. 절대 엿보려던 의도는 아니었지만 둘이 입 맞추는 걸 봐버린 입장에서, 이 교제는 일단 형 된 도리로서 반대하고 싶었고. 그렇다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사이에 껴서 뭘 한다 해도 듣지 않을 벽창호들이고. 그렇다고 연애 사실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대놓고 사귀냐고 물어보기도 그렇다. 그도 그럴게. 동성이잖아? 의도치 않은 커밍아웃이라 사이가 나빠지면 큰 문제지 않은가? 마유즈미는 상도덕 있는 어른이었다.

“굳이? 무슨 명분으로 네가 날 만나?”

“저랑 테츠야가 만나고 있으니까요.”

차라리 아카시 세이쥬로가 개방적인 부잣집 도련님인 편이 낫지 않았을까. 요즘 애들은 다 이러나? 막, 직설적이고? 이런 면은 ‘그 아카시’나 ‘이 아카시’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이렇게 면대면이 아니고 진지한 의미로요.”

“그렇게 됐습니다. 치-쨩 형.”

햄버거를 조약돌만큼 먹은 쿠로코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저렇게 조금 베어 먹었는데 입가에 소스가 묻어있었다.

“테츠야, 소스 묻었어.”

그걸 왜 네 손으로 닦아 주냐고!

마유즈미 치히로는 아득해지는 시야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구형 군과 동병상련은 무슨. 빙탄불용이다. 둘이 될 수 없긴. 천만에. 객체는 객체다.

 

3.가정적인 남자가 인기

부유하게 자란 건 아니지만 가난하게 자란 것도 아니라서. 마유즈미 치히로는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아 한 달을 버텼다. 생활비가 전부는 아니고, 이모 부부와 할머니가 몰래 주는 용돈도 있었으니 실 금액은 더 되었지만.

어쨌거나 마유즈미는 그 생활비와 소소한 용돈 덕에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네가 돈을 써 봤자 얼마나 쓰겠냐는 아버지의 배려 아닌 배려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봄이 한 풀 꺾이고 아침에도 아스팔트가 달궈지기 시작하는 여름이었다. 마유즈미는 이상하게 비는 통장잔고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카드에도 연회비가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학과 생활은 정말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면 나가지 않았고, 기껏해야 점심이나 사먹고 지하철만 타는데도 넉넉하다 생각했던 생활비가 부족했다. 역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 했다가, 아버지가 사실을 알면 지원을 아예 끊어버릴 것도 같아 생각하길 그만 두었다.

먹는 걸 너무 잘 먹었나. 마유즈미는 앞방의 누구누구와는 다르게 평범한 성인처럼 잘 먹었으므로 식비가 좀 더 나와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는 몸을 움직이고 나면 이백엔 하는 샌드위치나 겨우 사먹던 걸, 이젠 늦게까지 불을 켜고 기다리는 라멘집에 과감하게 들어가기도 했으니. 마유즈미는 선홍빛 차유를 국물에 푹 담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스물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 전까지는 추가해 넣어 먹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니.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니 북엔드를 넣어 고정시켜두었던 넉넉한 책장이 꽉 차있음을 깨달았다. 그냥 꽂아두는 걸로도 모자라 균일한 높이의 책 위에 쌓아두기까지 했으니. 개당 사백 엔만 잡아도….

어림잡아 계산해도 제법 아찔한 양이었다. 이렇게 책을 사 모을 거면 이백 엔 샌드위치와 이백오십 엔 도시락 중에 고민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도쿄는 오타쿠에게 너무 환상적인 도시였다. 온갖 초판 한정 굿즈를 전철 몇 분 타면 얻을 수 있으니 조금씩 사 모으던 게, 양이 꽤 되었다.

소비 패턴을 바꿔야 했다. 오타쿠는 원래 잠을 줄이고 간식을 아껴 덕질하는 존재가 아닌가. 고등학생 마유즈미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말이었지만. 오히려 본인을 지독한 오타쿠라며 경멸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등학생 마유즈미는 ‘링고 땅’ 시리즈를 읽기도 바빴다.

일단 저녁을 집에 돌아와서 먹자. 손이 큰 것에 비해 입이 짧은 가족 덕에 저녁상에 올라온 게 아침에 올라오는 것이 일상인 도쿄의 외가댁은 보통으로 밥을 먹는 마유즈미를 아주 좋아했다. 어차피 쿠로코 테츠야는 매번 저녁 연습이 있어 늦은 저녁을 먹거나, 저녁을 해결하고 오곤 했다. 여차하면 그 카가민지 카라멜인지 하는 녀석 집에서 밥을 먹기도 한다니까. 마주칠 일은 적었다. 오히려 아침에 어색하게 마주하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어쩌다 그 귀엽던 아이가 무뚝뚝하고 지기 싫어하는 녀석으로 자란 걸까. 윈터컵에서 우승한 학교의 주전 치곤 꽤 말랐고. 체력은 바닥이고. 아니, 역시 먹는 양이 문제가 아닌가? 네부야는 많이 먹는 만큼 거대했으니.

마유즈미는 백화점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다 힘들다며 주저앉았던 쿠로코를 떠올렸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었다. 그래도 운동을 몇 년 했는데 심각한 거 아닌가?

마유즈미와 쿠로코의 방이 전부인 2층은 조용했다. 주말마다 아카시를 만나러 가는 쿠로코는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하긴 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겐 아카시가 대단했다.

우선 도쿄에서 교토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 만큼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 증거로 본가가 교토인 마유즈미는 종강을 해도 굳이 집에 돌아가지 않을 셈이었다. 짐을 다시 가져오는 것도 꽤 귀찮고. 무엇보다 동네 탁구왕인 외할머니가 하는 일 없는 대학생 외손자와 함께 움직이는 걸 좋아하셨다.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한 번 도쿄에 들린다고 했으니. 집안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외할머니는 얼굴 보기 힘든 둘째 딸의 얼굴을 저에게서 찾았다. 마유즈미는 아빠를 닮았지만.

1층은 온갖 전자기기의 소리에 시끄러웠다. TV에서 아나운서가 일주일 날씨를 전하고 있었다. 아버지들은 왜 하나같이 TV와 신문을 함께 보는지 의문을 품으며 마유즈미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껍질이 그대로 붙어있는 옥수수를 벗겨내던 이모가 반갑게 인사했다. 손질하지 않은 옥수수는 팔십 엔이 쌌다. 이모는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수염을 따로 보관했다. 잘 말려 보리차를 끓일 때 넣으면 더 좋다나 뭐라나.

“치히로, 오늘은 어디 안 나갔네?”

“네, 시험기간도 다가오고 해서요. 쿠…, 테츠야는요?”

이 집에 쿠로코가 셋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빠르게 이름을 바꾼다. 굳이 이 집에 쿠로코가 셋이 아니어도 구형 군이라는 호칭을 이모 앞에서 사용할 순 없으니. 이 집안 사람들의 눈에는 마유즈미가 서른을 먹고 마흔을 먹어도 동생 손을 놓쳤다고 우는 아이 같을 터다.

“세이쥬로 군이랑 공부하러 간다고 나갔어. 아, 둘이 고등학교 선후배라면서?”

“네, 뭐…. 그렇죠.”

“엄청 놀랐어. 일본이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세이쥬로랑은 친했니?”

아카시와 친했냐니. 마유즈미는 생각치도 못한 물음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게 그 주마등인가 뭔가 하는 건가. 이게 죽을 만큼 위급한 상황도 아니고. 뭐라 대답하기 참 난감한 질문이었다. 졸업 전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었는데, 또 사촌동생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면 참 난감해지는 것이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부족한 것이라고 하면…, 가끔 선후배도 모르고 예의 없는 모습만 빼곤 여러모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구마당한 사람 마냥 달라져서는.

일방적으로 마음에 안들어하는 게 무슨. 딸 시집보내는 아버지마냥 불퉁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구형 군의 뭐기에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지도 참 난감했다. 둘이 사귄다고 마유즈미의 신변에 뭔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카시가 워낙 학교의 유명인사였죠. 저도 잘은 몰라요.”

“그래? 세이쥬로는 같은 동아리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던걸.”

미친놈인가. 마유즈미는 눈에 흙이 들어가는 걸로 모자라 다시 태어나도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아는 사이는 무슨. 평생 모르고 살 수 있다면 그러고만 싶은 게 누군데. 이러다 만약 사돈지간까지 되면…. 나란히 수트를 입고 결혼식장에 서면 정말 어떡하지? 마유즈미는 쿠로코 테츠야의 가족 자격으로 가장 앞에 앉았다가 ‘다시 생각해!!’하며 소란을 피우는 상상까지 했다. 여러모로 과한 상상력이었다.

“집에서 공부 하면서 치히로에게 모르는 걸 물어보라니까 선약이 있어서 곤란하다며 아침부터 나가지 뭐야. 저녁 시간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밤엔 테츠야 좀 도와주렴. 열심히하는 것 같은데 도통 성적이 나아지질 않네.”

이모는 모르시는 건가. 동급생이자 선생 노릇을 하는 그 애가 사실은 홀라당 아들을 잡아먹고 있는 데요. 아카시라면 정말 결혼까지 생각할 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알았다며 대충 웃어 넘겼다.

“그런데 주방엔 왜 내려왔니? 점심이 좀 부족했어?”

“아니요. 지금 배불러서 뭐 더 못 먹어요.”

힐끔 화구를 바라본다. 어제 저녁, 오늘 아침, 그리고 점심까지 먹은 카레가 아주 조금 남아있었다. 테츠야가 집에 있었다면 다 먹을 양이었다. 버리긴 애매해서 깊은 솥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배고프다고 하면 저걸 덜어 주시겠지. 살짝 매콤한 맛이 나는 카레는 맛있었지만, 네 끼나 먹기엔 무리가 있었다.

“앞으론 저녁을 항상 돌아와서 먹을까 하는데요.”

“그러면 나야 좋지. 할머니랑 둘이 저녁을 먹을 땐 뭔가 하기 애매하거든.”

“그리고….”

“그리고?”

기뻐하던 이모는 조카의 뒷말을 기다렸다. 가족이 다 같이 먹는 아침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모가 어떤 저녁을 준비할 지 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항상 마유즈미는 불시에 집에 돌아와, 두 사람 몫의 저녁에 밥을 더 얹어 먹곤 했으므로.

“점심 도시락을 싸 볼까 하는데요.”

“도시락을?”

“식비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요. 괜찮으면 이모께 조금 배워볼까, 하고….”

마유즈미는 생활력이 강한 남자였고, 할 줄 아는 요리도 많았지만. 굳이 이렇게 말을 꺼낸 이유는 냉장고 안 재료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재료를 사는 것도 돈이 꽤 들었고. 보관하려면 어차피 허락을 구해야 했으니 은근히 말을 흘리는 게 나았다.

“마침 여름이라 냉장고에 남은 것들 먹으려고 했는데. 들고 다닐 도시락 통은 있니?”

“아마 본가에 있을 거예요. 보내달라고 부탁 드리려구요.”

“교토에서 오려면 오래 걸릴 거야. 집에 안 쓰는 게 있을 텐데, 찾아볼게. 음식 상하면 안 되니까 얼음물도 같이 들고 다니면 되겠다.”

미츠키는 노련하게 어떤 음식이 괜찮을지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냉장고를 열자 한기가 주방에 살짝 돌았다. 냉장고는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채소는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와 바깥을 자주 오가는 바람에 상해 버려지곤 했다.

“샌드위치는 만들 줄 알아?”

“조금은요. 잼 바르고 치즈랑 햄 넣는 정도는….”

“에그마요는 만들어 봤니?”

“아니요. 엄마가 마요네즈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럼 내일 만들어보자. 삶은 계란이랑 마요네즈랑…, 후추만 있어도 맛이 나거든.”

대신 내일 점심 먹고 식빵 좀 사와 줄래? 이모의 부탁에 마유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의 반은 성공이었다. 식비를 줄이면서 굶지 않을 좋은 방법이었다. 애매하게 남은 카레 같은 것도 처리하기 좋았고. 여름이 다가오니 메뉴는 한정적이겠지만. 덕질에 쓸 돈도 차차 줄여 가면 통장에 남은 금액이 이상해지진 않을 것이다. 마유즈미는 그걸 위안삼기로 했다.

 

 *

이모와 약속대로 마유즈미는 점심을 먹은 후 식빵을 사기 위해 주택가에서 살짝 벗어난 빵집으로 향했다. 이모부는 낚시 약속이 있어 새벽부터 나간 차였다. 익숙하게 상 치우는 걸 돕는 쿠로코를 뒤로 한 채 거리를 걷자,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교토는 이상하게 전통적인 색감을 유지하는 집이 많았다. 흰 벽에 고동색 나무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양식은 어딜 가나 흔해서, 어릴 적 마유즈미는 집을 잘못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도쿄 외곽은 연립 주택도 흔하고, 지붕 색도 화려했다. 간판도 큼지막해서, 굳이 도로 끝까지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식빵을 산 후에 집에 돌아오자 못 보던 신발이 있었다. 가격이 꽤 있어 보이는 구두였다. 이모부가 그새 돌아오셨나. 마유즈미의 아버지도 간혹 바다낚시를 떠나곤 했는데, 새벽부터 나가 점심을 다 먹고 정리를 하고 있으면 돌아오곤 했다.

주방과 복도를 분리하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가디건을 벗으며 말하는데, 너무 익숙하고, 있어서는 안 될 뒤통수가 보였다.

제가 아는 빨간 머리는 적어도 일본에서 두 명이었는데. 하나는 키가 크니 구형 군과 키 차이가 저렇게 적지 않을 테고. 아니, 이제 사귄다고 제게 털어 놓았다고 집에 당당히 들이는 건가? 이모도 알고 있는 건가? 단체로 저를 속이는 게 아닌가?

소년이 뒤를 돌아 봤다. 손에 까다가 만 삶은 계란을 들고.

“마유즈미 선배. 오랜만입니다.”

선배애~? 아카시 세이쥬로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인이었나. 입으로 튀어 나올 뻔한 걸 겨우겨우 억누른 마유즈미가 표정을 굳혔다. 누가 보면 긴장했다고 착각할 모양새였다.

“그래.”

“에그마요 샌드위치를 만드신다면서요. 테츠야에게 들었어요.

“그래….”

“테츠야가 계란을 정말 잘 삶거든요.”

“…그래?”

계란 삶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대체로 완숙을 선호하는 마유즈미는 삶는 시간이나, 껍질 잘 벗기는 법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남자였다.

“반숙을 정말 잘 삶아요. 보실래요? 이렇게 꾹 누르면 부피가 거의 반으로 줄어들 정도로 완벽한 반숙이에요.”

진지한 얼굴로 탱글하게 삶아진 계란을 누르는 건 좀 웃기기도 했다. 빨리 칭찬하라는 눈빛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왜 왔냐고 물어보기 전에 쿠로코가 얼마나 계란을 잘 삶았는지 온갖 수식어를 붙여가며 칭찬했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 때, 완숙으로 삶으라며 혼나긴 했지만.

미리 얼음물에 넣어 매운 기를 뺀 다진 양파의 물기를 빼내던 마유즈미는 이 조합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1년 전의 제게 말하면 이 세계에서 날아온 사람 보듯 괴상하게 바라볼 것 같기도 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존재감이 나머지 세 사람의 존재감을 합쳐도 모자랄 정도로 강한 탓이기도 했다. 쿠로코는 제가 삶은 계란을 으깨고 있었다. 아카시는 휴대용 버너를 앞에 두고 식빵을 살짝 굽고 있었는데, 이 모습도 어색하기만 했다.

요리하는 아카시 세이쥬로라니. 라면 한 번 끓여본 적 없을 듯한데. 생각보다 익숙하게 빵을 굽는 모습에 이모가 만족스러워 했다. 테츠야에게 이런 야무진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데 쿠로코의 심기는 조금 불편해 보였고 아카시는 사람 좋게 웃었다.

이미지는 반대인데 말이지. 마유즈미는 사랑이란 이토록 무섭다고 실감했다. 남자주인공 하나 두고 싸우는 하렘물은 양호한 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세이쥬로 군.”

후추와 마요네즈를 넣어 섞던 쿠로코가 작게 한 술 떠 아카시에게 내밀었다. 물기를 짜낸 양파를 들고 있던 마유즈미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보통 재료를 다 넣고 간을 보는 거 아니야? 이게 도쿄와 교토의 차이인가?

아니, 그리고 내 도시락 연습용이라 내가 간을 맞춰야 하는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무표정의 쿠로코 테츠야가 아카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숟가락을 받아 들지도 않고, 떠준 숟가락을 물어 간을 본 아카시가 웃었다. 맛있는 걸. 둘만의 세상에 빠진 연인이 웃는다. 어이가 없어서 마유즈미는 제 손에 들려있던 다진 양파를 쿠로코가 멋대로 간을 맞춘 볼에 넣었다. 섞던 것으로 간을 봤으니 숟가락도 새로 꺼내주었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웠다. 마유즈미는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만들며 생각한 건. 이모는 두 사람이 사귀는 걸 모르는 듯 했다. 자석마냥 딱 붙어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사이좋은 친구가 생겨 다행이라며 넘겼다. 구형 군은 딱히 교우관계에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걱정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테츠야가 친구를 집에 데려온 건 손에 꼽거든. 중학교 졸업식 때도 친구랑 사진 한 장 안 찍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잼을 바르던 아카시의 손이 멈췄다. 뭔가 있나. 쿠로코가 슬쩍 눈치를 봤다. 괜찮아,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것도 같고. 폭 칠십 센티미터가 이렇게 멀었던가. 삼각형으로 잘린 식빵에 맞게 체다 치즈를 자르던 마유즈미는 중학생 쿠로코 테츠야를 그려보았다. 어린 시절처럼 볼 살이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귀여울 것 같은데. 주변에서 가만히 둘 이유도 없을 것 같고.

“세이쥬로는 덩어리 있는 잼도 균일하게 잘 바르네. 빵 옆면에 묻지도 않고. 많이 해봤니?”

뜬금없는 칭찬에 아카시가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처음 해봐요. 요리할 일이 별로 없어서요.”

“정말? 손재주가 좋나보다. 테츠야는 손재주가 그리 좋지 못하거든.”

기적의 세대는 서로 친하다고 하지 않았나? 뭔가 문제라도 있던 걸까. 어른의 사정으로 학교가 갈라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중학교 말미에 안 좋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나잇대 애들은 싸우고 화해하는 것의 반복이니까.

아니라면 그림자가 옅어 눈치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마유즈미는 중‧고등학교 졸업식에 워낙 정신이 없어 친한 사람과 사진을 남길 생각을 못했다. 그 친한 사람도 손에 꼽긴 했지만, 서로가 정신이 없어 잊어버린 탓에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야 문자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부재를 눈치 챘다.

잼을 바르던 소년이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요리 이야기는 도통 할 이야기가 없는 듯 했다. 하긴. 도련님이니. 밥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지 궁금했다. …편견에 심술이겠지만.

“중학교 졸업식 날에는 저도 테츠야와 사진을 너무 찍고 싶었는데. 찾으려고 하니까 보이질 않더라고요.”

“테츠야가 날 닮아서 존재감이 좀 없는 편이지. 나도 학교 다닐 때 자주 그랬거든. 선생님도 존재를 잊곤 하셨어.”

웃으면서 이야기 할 추억은 아니었다. 마유즈미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선생님이 잊어 타지에 버려진 그런 경험은 아니고, 버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대로 종점까지 달리게 된. 여기까지만 들으면 상당히 평범한 경험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는데, 해당 버스 운행을 끝으로 퇴근하는 기사님이 문을 잠그고 가버린 것이었다. 다행이 밝은 낮이었고, 지나가던 동료 기사님 덕에 구해져 집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멀쩡히 자는 사람을 지나치는 건 과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이제야 들곤 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마유즈미는 제 옅은 그림자를 알차게 사용했다. 아무리 졸아도 수업시간에 지목당하는 일이 없었다. 가끔 수업에 빠져도 누구 하나 눈치 채지 못했다. 성적이 발표될 때마다 ‘저런 애가 있었나?’하는 평을 듣는 건 상처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네 엄마도 어릴 적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치히로도 그런 적 있니?”

아무래도 그림자가 옅은 건 유전인 듯하다. 마유즈미는 왜 쿠로코와 제 성질이 닮았는지 도쿄생활 사 개월 차에 깨달았다.

존재감이 적어 일어난 일을 풀어내자면 끝이 없었다. 마유즈미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겪을 법한 일들을 막힘없이 풀어냈다. 으레 주부들이 그렇듯, 제 이야기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면 제가 할 일은 아카시가 잼을 바른 토스트 위에 양껏 만들어 둔 에그마요를 얹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제법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일까지 아카시와 쿠로코 앞에서 털어놓고 나서야, 제법 많은 양의 샌드위치가 완성되었음을 깨달았다.

구형 군의 말에 의하면 점심을 먹지 않고 왔다는 아카시가 만드는 족족 몇 개 집어 먹었는데도 양이 꽤 되었다. 샌드위치는 말할 것도 없고, 식탁에 놓여있던 모닝빵 속을 채우니 두 당 두 개씩 먹어도 남을 양이었다. 우선 내일 아침 마유즈미가 들고 갈 양을 제하고도 그랬다.

결국 비어있는 플라스틱 통에 아카시가 몇 개 담아 가져가기로 하고, 저녁 같은 간식을 먹었다. 가져가라 하니 아카시는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입이 짧은 이 집 사람들은 하나씩 먹고도 배부르다며 저녁을 먹지 않을 게 뻔했다.

깨작깨작 먹던 쿠로코는 마유즈미가 두 개를 먹을 동안 하나를 겨우 먹었다. 그것도 샌드위치도 아니고 모닝빵을. 마요네즈가 잔뜩 들어가 촉촉함에도 연거푸 물을 마셨다. 물 잔이 비기도 전에 아카시는 잔을 채웠다.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마유즈미는 그냥 눈을 찔러버리고 싶었다. 안보면 좀 괜찮을 듯 했다.

“별로야?”

저렇게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확 내려간 눈썹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래서 미인계가 위험하고 미남에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꼬이는구나. 마유즈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른들은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며 내일을 걱정하느라 이 집 아들과, 친구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조금 느끼하네요.”

“하긴, 테츠야는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전처럼 손으로 입에 묻은 걸 닦아줄 까봐 마유즈미는 노심초사 했다. 쿠로코 테츠야는 애가 아니었지만 그 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점이 퍽 거슬렸다. 정황상 어른들은 모르는 눈치니. 애매하게 진실을 아는 입장에선 퍽 신경 쓰였다. 누가 봐도 평범한 친구처럼 안보이잖아! 양심이란 게 없는 건가? 들켜도 상관 없는 걸까? 혹시, 안물어봐서 안알려줬다는 논리를 펼칠 셈인지?

다행히 아카시는 평범하게 휴지를 건넸다. 마유즈미는 절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치히로는 테츠야한테 관심이 많구나?”

“네, 네? 하하….”

이모의 다정한 말투가 퍽 원망스럽다. 신경도 안쓰는 줄 알았더니 다 지켜보고 계셨구나. 어디서나 말 조심해야 한다는 옛말은 왜 틀린 게 하나도 없는지. 마유즈미는 시대가 변했으니 성현의 말은 마음대로 받아들이자는 주의였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결국 사람을 옛것으로 회귀시켜댔다.

인류의 발전이 더딘 것도 다 세상의 잘못이지. 기술혁신최전방에 나서야 할 공대생이 가져선 안될 불순한 생각이었다.

“동생…이잖아요. 오랜만에 보니까 다 새롭기도 하고….”

뭐 틀린말이 없는데 괜히 아카시의 눈치를 보게 된다. 마유즈미는 제가 눈칫밥을 먹으면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이모부에게서 먹을 거라고 생각했지. 주말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사촌동생을 데려가는 저 몹쓸 후배이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동생의 애인에게 먹으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친, 구. 랑 친한 모양이라 보기 좋네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유치해진다더니. 마유즈미는 갓 스물-사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갓’을 붙이기엔 다소 염치없긴 했다- 새내기였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절실하게 느꼈다. 내 귀여운 테츠야는 어디로 가고 고집불통 구형 군이 테츠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남자친구를 데리고. 집안에 자연스럽게 들이기까지 하면서.

“그렇지? 초등학생 때 까지는 시게히로 군하고만 놀아서 내심 걱정했는데, 중학생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면서 년 초에 세이쥬로 군을 소개시켜주지 뭐니.”

“엄마.”

“뭐 어떠니, 얘. 가족인데. 치히로도 학교 후배가 어떻게 테츠야랑 친한 지 궁금할 지도 모르잖아.”

일본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위험하고 매력적인가. 마유즈미는 우유를 마시다 목뼈가 나갈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럼요. 무척 궁금하죠.”

“그러더니 방학에는 테츠야가 공부하는 것도 도와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마유즈미는 그래도 마지막 살 구멍으로 라쿠잔 고등학교의 기숙사 규칙은 꽤나 엄격한 편이라 방학에도 입실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만화 주인공같은 구형 군을 쏠랑 채간 사기꾼인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주말마다 그 먼 거리를 오가고 있는 거겠지만.

쿠로코의 어머니가 아카시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동안, 아카시는 표정 변화도 없이 온화하게 웃으며 마유즈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뭔가 제가 진 기분이라, 아카시 애인의 사촌 형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타입이던데. 부모님께는 숨기는 편이었나? 마유즈미는 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쿠로코가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쑥맥처럼 생겨선 의외로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잘 했고, 솔직한 것 같다가도 숨기는 게 많았다.

그러고 보니 도쿄에서 열린 윈터컵 결승전 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 일본에서 농구는 인기 종목은 아니라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비할 수 있는 온갖 콘텐츠를 다 소비했다. 중학농구, 고교농구, 대학리그, 프로농구와 NBA까지. 결승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준 탓인지 간혹 마유즈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사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대가 발달하니 여기저기 기록이 남아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렇게 되면 구형 군의 위치도 조금 위험할까. 종이 신문에 간혹 나는 것 보다, 인터넷으로 화제가 계속 되면 경계가 올라갈 테니.

마유즈미는 종종 그런 고민을 했다. 그에게 아카시 세이쥬로는 여전히 중학 시절에 머물러있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라쿠잔은 쿠로코 테츠야같은 식스맨이 없어도 윈터컵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학교였다. 물론 그만큼의 열정과 지원이 뒤따르는 곳이었다. 농구부 새 부원이 결정 되고, 제가 여전히 3군에 머물기로 결정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유즈미는 제 세계가 이런 형태가 될 것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결국 농구 이야기를 꺼내 볼 틈도 없이 아카시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여름이라 아직 해가 한창 떠있었다. 지난번에는 까만 승용차가 골목을 틀어막고 있었는데, 오늘은 평범한 주택가에서도 자주 보이는 SUV였다.

마유즈미는 저 도련님의 배려에 감격해야 할 지, 마음대로 상황에 맞춰 차를 골라 탈 수 있는 아카시 가의 재력에 감탄하는 게 좋을 지 결정하기 퍽 난감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모나 이모부는 물론이고, 할머니도 아카시에 대해 잘 모르는 듯 보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재벌의 미성년자 아들의 얼굴을 아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기도 했지만. 아마 ‘그 아카시’가 아니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마유즈미도 전년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로 선서하는 아카시 세이쥬로를 보고 성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지, 그 아카시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아카시가 대문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이 돌아섰다. 테츠야는 골목 앞까지 아카시를 배웅했다. 집에 가자마자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넣으라는 둥. 이왕이면 오늘 학교에 돌아가는 길에 먹으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이 조금 이질적이었다. 명령을 내릴 줄만 아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사람 말을 조용히 들을 줄도 알았구나.

괜히 둘의 시간을 방해하는 눈치 없는 객식구가 되긴 싫어서 마유즈미는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니까, 돌리려 했다. 제가 조금만 둔해 아카시의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평화롭게 방으로 올라가 동기들 사이에서 평이 최악인 교수의 수업 녹음 파일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역시 요리 잘하는 남자를 사위로 좋아하시겠지?”

“뭐라는 겁니까? 헛소리 말고 차에 타세요. 기숙사 통금시간에 늦겠습니다.”

“아까 잼 바르는 걸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셔서. 우리 다음 주부턴 토요일에 요리 학원에 다니는 게 어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말한 게 저번 주 아닌가요?”

평범하다곤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대화였다. 마유즈미는 정말 어쩌다가 제 귀여운 테츠야가 저런 이상한 놈에게 잡히게 된 건지 도통 의문이었다.

“학생으로 살날보다 네 옆에서 살 날이 더 길 것 같은데. 역시 가정적인 남자가 인기겠지?”

저런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 있을 아카시 가의 사용인이 불쌍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봤다 저보다 부자이시겠지만. 천방지축 도련님 때문에 고생하십니다. 그래도 저런 괴상한 고민이 눈을 도려내는 중2병보단 백배 나았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증거였으므로.

“…니까.”

“응? 미안해, 못 들었어.”

“인기 있어서 뭐할 겁니까.”

“어…?”

당황한 표정의 아카시와 눈이 마주쳤다. 마유즈미는 이제 어디 할 때까지 해보라는 표정으로 현관 문 앞에 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식탁에 앉아 음식 먹여주고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대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래도 수치심이라는 걸 알아서 다행이었다.

“전 가정적인 남자 필요 없습니다. 그냥 너면 충분해요.”

와. 대박.

마유즈미는 너무 어이없어서 제 턱이 빠져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 따로 이유가 없는데 만나겠냐. 너희가 비슷하니까 다 버티고 만나는 거지.

마유즈미는 이제 기억 속의 귀여운 사촌동생과 건방진 후배가 연애하는 건 상관없으니 제 눈앞에 보이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아무리 현실도피를 해봤자 둘은…. 조금만 더 유명했으면 세기의 사랑이라고 회자될 수준이었다.

사랑은 미친 짓이라고 했던가. 세계의 연인들이여, 그럼 그걸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도 좀 생각해주길 바란다.

 

4.사랑은 라커룸 앞에서 만나

도쿄 실내 체육관 관객석은 처음인데. 마유즈미는 쿠로코가 준 티켓을 가지고 전광판이 잘 보이는 쪽에 앉으며 생각했다.

고등학생의 여름방학보다 조금 빠른 종강에, 하는 일 없이 누워 라이트 노벨을 읽던 마유즈미에게 쿠로코는 돌연 인터하이 예선전 티켓을 내밀었다. 예선도 아니고 4강전이라, 하루에 경기가 잇달아 두 번이나 있었다. 4강에 이름 올린 학교는 그에게도 제법 익숙한 곳이었다. 기적의 세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결과였으나, 티켓은 두 팀에게만 허락 되었다.

와주실 거죠. 너무 당당하게 말하기에 마유즈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열 시부터 경기라니. 솔직히 윈터컵 결승전 외에 경기 경험이 없다시피 한 마유즈미는 이렇게 아침부터 고생하는 줄 몰랐다. 아침 열시면 고등학생에겐 그리 이른 시간이 아닌가? 하지만 이미 반 년 간 대학에 익숙해진 몸은 고등학교 생활이 온통 거짓 같다고 느꼈다. 그 땐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 것 치고, 마유즈미는 아홉시 삼십분부터 경기장에 앉아있었다. 평일에, 아직 고등학교는 방학 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다. 야구는 응원단도 보내고 하던데. 그에 비하면 농구장은 조용했다. 이따금 무섭게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 뿐이었다. 세이린과 슈토쿠가 몸을 푸는 코트는 분위기가 살벌했다. 세이린은 신입생이 들어와 높이가 보완되고, 슈토쿠는 무게감은 줄어들었지만 미도리마의 존재감이 여전했다.

누가 이기려나.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부활동을 했던 마유즈미는 관객의 입장이 되니 이 경기가 제법 흥미로웠다. 농구를 그만두고 나서야 흥미를 갖게 되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직접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일까. 연습하는 장면부터 차이나는 두 팀의 격돌은 당최 상상할 수 없었다. 도쿄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3점 슛 라인 밖에서 끊임없이 운을 시험하는 에이스와, 골대 밑을 파고들어 찍어 내리는 모습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며 관객석을 압도했다.

“―니까, 이 쪽에 앉는 게 제일 낫다니까! 너무 앞에 앉으면 넓게 안보인, 왁!”

“…괜찮으세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 저야말로 죄송합…. 어?”

인상을 구긴 남자가 절 빤히 바라봤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는데. 노골적인 시선에 마유즈미도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어째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농구부원이나 동창인가?

“마유즈미 치히로?”

“그 쪽은 누구길래 절 아시죠?”

삿대질을 하며 제 이름을 말하니 곱게 말이 나갈 수가 없다. 사복을 입은 걸 보니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사복을 입은 고등학생 일지도. 머리가 짧은 탓인지 어려 보였다. 미간을 좁히는 게 버릇인지 자국이 꽤 오래 남았다.

“한 코트에서 뛴 적이 없어서 기억을 못하는 건가? 키세 녀석처럼 기억력이 안좋아 보이진 않던데.”

“무라사키바라 녀석도 그런 타입이었으니 안 그렇다는 보장도 없을 것 같은데.”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뇌가 빠르게 기억을 훑었다. 라쿠잔 농구부의 레귤러 멤버들은 제멋대로긴 해도 엄격한 규칙에 의해 작전회의에는 꼭 참여해야 했다. 마유즈미는 아카시가 쿠로코와 붙게 되었을 때 사용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던지라, 매번 심드렁하게 회의를 바라보곤 했지만.

짧은 머리에 동안인 얼굴…. 그리고 그 옆에 거대한 갈라진 턱의 남자. 조합이 괴상한데. 그렇게 따지면 아카시랑 테츠야의 조합이 더 이상―, 아니. 이제 그 둘에 대해서는 생각을 멈추기로 마유즈미는 미래의 마유즈미와 약속했다. 헤어지면 놀려줄 생각이나 해야 했다.

“카이조 농구부 출신 카사마츠 유키오입니다. 이쪽은.”

“오카무라 켄이치입니다. 아키타 요센의.”

아. 마유즈미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농구를 계속해 단단한 손을 잡아 악수했다.

 

도쿄 내 모 대학 체육교육과에 추천 입학한 두 사람은 키세를 만나기 위해 경기장에 왔다고 했다. 완전무결 슈퍼모델의 취미가 ‘부활동에 진심인 척 하면서 어떻게든 수업을 듣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도쿄에 오기’라는 걸 들었을 때는 키세 료타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이래서 연예인은 이미지가 중요하구나. 반입 가능한 종이팩 음료수를 얻어먹으며 할 생각은 아닌 듯 했다.

“키세 자식. 건방지게 선배한테 오라 가라….”

얻어먹은 보답으로 더 심한 생각을 했어야 했나. 다 먹은 빈 팩을 구기는 카사마츠의 표정이 살벌했다.

“마유즈미는 여기 어쩐 일이야? 교토에 살지 않나?”

나이가 같고, 일방적이어도 구면이니 세 사람은 편히 말을 놓았다. 스포츠에 큰 욕심이 없었으나, 어쨌거나 몸담았던 입장에선 상당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기적의 세대가 없었다면 당대에 다시없을 천재로서 극찬 받았을 두 사람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학이 도쿄라서.”

“교토에서? 종강했을 텐데, 본가에 안돌아가고? 아, 이 녀석처럼 자취하는 중인건가.”

“자취는 아니고 하숙. 외할머니 댁이 도쿄라.”

“의외네. 도쿄랑 교토는 이미지가 완전 반대라서 그런가.”

“경기는 왜 보러 왔어? 농구는 계속 해?”

생각했던 것보다 대화가 평범했다. 마유즈미는 어쩌다가 제가 저 둘과 나란히 앉아 근황보고를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서 답이 길게 나가질 않았다.

“농구는 이제 안 해. 대학도 관련 없는 과고.”

“그러고 보니 어떤 대학에 다니는 지도 모르네. 우리 세대에 농구 좀 한다는 사람들은 대학 농구대회에서 다시 한 번씩 만났거든. 친선전이었지만.”

“나한테 농구는 그냥 부활동이었으니까.”

준우승이라는 기록이 남는 게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고막을 울리는 소리에 괜히 심장이 떨려왔다.

“오늘은 사촌동생이 경기를 한대서.”

“마유즈미의 사촌 동생? 선수 명단 중에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설마. 그럼 특이해서라도 기억했을 걸.”

“이종사촌이라 성은 달라. 그래도 제법 닮았는데.”

두 사람이 목을 길게 빼고 선수를 훑기 시작했다. 팀의 스타일은 크게 바뀌지 않아서, 마유즈미같은 인상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스포츠 스타가 될 사람은 떡잎부터 남다르다고 하지 않은가. 그건 가장 좁은 농구 코트에서도 어김없었다. 카가미나 미도리마처럼. 누가 봐도 기가 다른 사람이 분명히 존재했다.

어려운데…. 오카무라는 안그래도 작은 눈을 구겨가며 공을 정리하는 후보 선수부터, 벤치까지 훑어냈다. 종내에는 져지를 입고 경기를 지켜보는 단촐한 응원석도 바라봤다.

“사촌이 선수가 아니라 매니저인가? 저기 여자애는 좀 느낌이 닮았는데.”

“…어디?”

카사마츠가 조심스럽게 오카무라의 손끝의 연장선을 바라봤다.

“안 닮은 것 같은데.”

“여자랑 눈도 못 마주치는데 네가 뭘 알겠냐. 맞지? 저기 관중석에서 응원도구 나눠주는 매니저.”

“오히려 그…. 투명소년이 마유즈미를 더 닮지 않았나? 플레이스타일도 그렇고. …이렇게 말하면 실례인가?”

솔직하게 답해도 되나. 마유즈미는 살짝 고민했다. 제가 진실을 안 순간에도 솔직히 경악할 일이었는데 혼란을 가중 시켜서 될 일인가?

“선배!”

만 명이 조금 못 들어오는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활발한 목소리에, 시선이 몰렸다. 푸른 카이조 교복을 입은 키세 료타,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은.

“아카시?”

“아직 시작 안했죠? 지하철을 잘못 타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데, 마침 아카싯치를 역에서 만났지 뭠까!”

저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교토에서 예선전을 치뤄야 할 남자가 왜 도쿄에 있는 건가. 마유즈미는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의료팀이 그 모습을 봤다면 선수들의 부상 여부는 체크하지도 않고 당장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보낼 게 분명했다.

“만난 김에 아카싯치네 차를 타고 왔, 헉! 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당당하게 절 가리키는 검지. 빠르게 굴려대는 눈동자. 마유즈미는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카사마츠의 평가에 백 번 공감했다. 체육계의 군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그래도 사람간의 예의가 있는데.

“쿠로콧치의 사촌 형님이 경기를 보러 온다고 해서 한껏 기대하고 왔는데. 이 넓은 일본에서 하필 당신을 마주칠 건 뭠까?”

그 뒤에서 생글생글 웃는 아카시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참, 머리 쓰는 게 좋은 녀석인데. 야구 같은 국민 스포츠를 했으면 더 인기가 좋았을 것도 같고. 그렇다고 농구를 하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인기 없는 것도 아니니 섣불리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키세.”

무덤을 팠군. 마유즈미는 어쩌다 저런 놈을 후배로 만나 인생이 꼬인 건지 도통 종잡을 수 없었다.

“인사해. 테츠야의 사촌 형님인 마유즈미 씨야.”

“네에?!”

“뭐?”

“마유즈미 씨, 잘 알고 계시죠? 테츠야의 중학교 동창인 키세 료타예요.”

“…어.”

첫인상이 최악인데. 남자가 보이게도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 되는 모습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마유즈미 치히로입니다. 키세 료타 씨.”

“자, 잠시만여. 장난하는 거 아니죠? 아카싯치의 선배니까 날 속이려고 지금…!”

“나도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운명의 장난인 건 확실했다. 차라리 말도 안 통하는 이세계에 떨어지는 게 덜 수치스러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카시는 제가 없다고 라쿠잔이 질 팀이 아니라며 미리 도쿄에 올라왔다고 했다. 이런 녀석이 아직도 주장이라니. 졸업생 마유즈미 치히로는 남겨진 사람들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래서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다 절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던 얼굴이 생각나자 정은 무슨. 제가 삭막한 공대에 다니다보니 감수성을 자극하는 호르몬이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작년의 아카시는 채찍과 당근이 확실한 타입이었다. 지금은 표정부터가 훨씬 유연했다. 그럼 팀원을 다독여서 팀워크를 다질 생각을 해야지. 믿고 있다면서 내팽개치고 나올 일인가. 이걸 수락한 고문과 감독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 결승전에 갑자기 2군도 아니고 3군이었던 절 벤치에 넣었겠지만.

경기가 시작되기 전 키세와 아카시는 삼각대에 캠코더를 얹어두었다. 녹화가 잘 되는지 확인함과 동시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농구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심장이 다 뛰었다. 일부러 의식해서 쿠로코를 보여 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구형 신형을 운운할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화려한 것에 마음을 뺏기기 마련이고, 쿠로코는 항상 그런 사람과 떨어져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역시 센터가 빠졌다는 약점 때문인지, 11점차를 극복하지 못한 세이린이 패배를 안았다. 개개인의 능력치는 확실히 늘어난 게 보였다. 마유즈미가 느낄 정도라면 스포츠인들이 보는 눈에서는 혼란스러울 정도의 수치겠지. 아무리 해가 바뀌어 10cm씩 자라는 게 고등학생이라도 기본 근력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힘들었다.

게다가 끈질기게 붙는 10번 때문에 코트를 끝까지 지키지도 못했다. 성격상 분해할 것 같은데, 의외로 담담하게 악수까지 나누고 장난도 쳤다.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카시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인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사라졌으니 조용한 게 당연하지. 야무지게 캠코더도 챙겨서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역으로 말하면 제가 그만큼 경기에 집중한 걸 인정하는 꼴이라 괜히 부끄러웠다. 티켓을 받을 때만 해도 이런 걸 왜 제게 주냐며 흐린 눈을 했는데.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었다. 연이어 잠시 휴식 후 두 시에 있을 경기를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마유즈미는 입장권을 확인 했다. 두 경기 모두 관람 가능한 것이었다.

“―미, 마유즈미!”

“어,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너무 집중한 거 아니야?”

크로스백을 챙겨 맨 카사마츠가 키세를 통로 쪽으로 밀어냈다. 시간을 보니 열두시였다. 점심을 대충 먹어야겠는데. 테츠야는 어떻게 점심을 먹으려나. 라쿠잔은 하루에 두 번 경기가 있으면 장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한 도시락을 먹곤 했다. 그마저도 과식했다가 교체되는 선수도 있었다. 대체로 1차전과 2차전에 출전한 신입 부원이었다.

세이린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 대충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라도 사다 줄까. 그래도 들리는 소문이 무서워서 마유즈미는 세이린의 감독이자 매니저인 여자의 무서운 요리 솜씨를 알았다. 그걸 먹느니 쿠로코는 안먹는 쪽을 택할 지도 몰랐다. 원체 입이 짧았으니.

“점심은?”

“선약이 있어서.”

방금 멋대로 정한 거지만. 그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뭐가 예쁘다고 다 큰 남고생을 제가 챙기는지 모를 노릇이다.

“그래? 우린 키세가 점심 쏜다고 해서 다녀올게. 오후 경기도 볼 거지? 아카시는?”

“봐야지. 표 값 아까운데. 나도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어. 뭐,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제가 언제 점심 산다고 했슴까!”

“시끄러! 대학생이 너처럼 한가한 줄 알아!”

“한가하다면서요! 언제든 연락하라고 해놓고!”

질질 끌려나가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물론 선배에게 끌려가는 후배보다 후배에게 끌려 다니는 선배가 몇 배는 보기 안좋겠지만. 마유즈미는 도시락을 들고다닌 후로 잘 가지 않던 편의점에, 드레싱이 그나마 적었던 샌드위치가 뭐였는지 고민했다.

찬 기운이 있는 음식을 먹으면 탈나는 사람도 있다던데. 농구선수 쿠로코 테츠야를 잘 모르는 마유즈미는 샌드위치 두 개를 집었다가, 혹시 몰라 인스턴트 죽도 하나 사고, 스물 몇 가지 과채를 넣은 주스도 하나 구매했다. 그래도 겨우 두 살 차이에 제 가슴께도 못 오던 아이가 전국이 주목하는 대회에 나간다고 하니 괜히 걱정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동양고전사 교수가 말한 측은지심인가. 재미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수업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런 갑작스런 생각을 떠올리는 증상을 지칭하는 병명도 존재하겠지.

 

라커룸은 선수의 이름을 대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마유즈미는 세이린의 쿠로코 테츠야의 이름을 대고 선수 대기실에 진입했다. 이렇게 보안이 허술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만약 악독한 마음을 품은 누군가가 사고라도 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앞선다.

세이린이 사용하는 라커룸은 가장 안쪽의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아직도 부원이 스물이 채 안된다고 하던데. 소규모 농구부 치곤 제법 좋은 라커룸을 배정받은 것이다. 마유즈미는 스타팅이 아닌 단순 1군 신분일 때 해당 라커룸을 사용한 적 있었다. 많은 학교가 탈락하고, 겨우 네 팀이 경쟁을 펼치는 복도는 조용했다.

저 멀리 빈 라커룸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덜컹이는 소리에, 빈 라커룸을 청소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사람도 깜짝 놀라 소리 난 쪽을 바라보았다. 졸지에 범인으로 의심받은 마유즈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익숙한 패턴이다. 흐릿한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제발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없길. 옛말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랬다.

까딱하다간 지나칠뻔 한 이를 붙잡았다. 묘하게 얼굴이 익어있었다. 경기가 끝난 건 10분 정도 전이었고, 쿠로코는 마지막 5분을 뛰지 않았으니 이 정도로 열기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마유즈미 씨?”

“………점심은?”

“먹을 겁니다. 라커룸을 착각해서 짐을 잘못 둔 바람에. 사물함이 낡아서 여느라 고생 좀 했어요.”

“그, 그러냐. 이거 가져가서 먹어라.”

괜히 오해한 건가. 쿠로코는 손에 정말 세이린 자수가 박힌 가방을 들고 있었다. 괜히 제가 도쿄에 온 첫 날 일이 떠오른 탓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딱 제 모습이지 않은가. 쿠로코는 편의점 봉투를 벌려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주전 맴버들과 몰래 먹을게요. 안 그래도 감독이 수제 카레를 해 오셔서 곤란했거든요.”

“그래. 그, 지난 경기는 잊고 오후에도 힘내라.”

“네.”

“관중석에서 계속 볼 테니까.”

“…그렇게 안보여선 꽤 정이 많은 편이군요?”

말 한마디를 안지지. 마유즈미는 상대하다간 한 대 쥐어박을 것 같아서 그냥 어서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손짓 한 번에 넘어지려다 겨우 중심을 잡으면서. 겁도 없이 말을 뱉어내는 게 답다고 해야 할 지.

“고맙습니다. 치-쨩 형.”

“…그래.”

쿠로코는 좁게 난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4번 라커룸이 저 쪽이었나. 좁은 복도가 많은 곳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괜히 뒤통수를 긁으며 마유즈미도 왔던 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뭔가 잊지 않았나? 전해야 좋을 소식이 있었는데….

“타카오는 테츠야랑 너무 상극이죠?”

마유즈미는 뒤를 돌아봤다. 방금 쿠로코가 뛰쳐나온 라커룸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고 삐걱였다. 하…. 이 두 녀석들을 어쩌면 좋을까. 묘하게 상기되어 기쁜 표정이 그리 얄미웠다.

“슈토쿠의 10번 말이에요.”

이런 파렴치한, 나는 동생 애인으로 인정 못해!

신임을 얻은 자와 본성을 눈치 챈 두 사람의 유치한 공방전은 진행형이었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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