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청 단문 2
청명이는 삥뜯는데 도사에요
청명생일 기념 QnA 참고
머리끈이라는 건 툭하면 끊어진다.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정리하려다가도 끊어지고. 나뭇가지에 걸려 끊어지기도 하고. 싸우다가 끊어지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데도 끊어지기도 한다.
청명은 끊어진 머리끈을 멀뚱히 쳐다봤다. 아까 싸우다 끊어먹었던 걸 대충 이어 놨더니, 기어코 끊어지고 말았다. 이게 운명인 것처럼.
어쩔 수 없네. 옆에 놈 걸 삥 뜯자.
“내놔.”
“이젠 주어도 없소?”
“내놓으라고.”
“없소. 정 급하시면 제 허리끈이라도 풀어서 드릴까요?”
“저 새끼가...”
청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당보는 언제 성냈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숲도 울창하고 괜찮지 않을까요? 오다가 동굴 하나 봐뒀는데, 거기로 모실까요? 청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까부터 허리를 지분거리는 거 하며,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계속 듣고 있으니. 저게 세가 도련놈인지, 환락가 기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본 사이.
청명은 당보와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 말을 들은 당보는 낭만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모르는, 말코 도사라고 투덜거렸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사람을 마음에 품은 놈이 잘못인 것을. 이제 팔순이 된 노인네가 하는 연애 놀음이 풋풋할 리 있는가. 낭만은 애초에 없을 거라 충고까지 해줬는데 안 들어 먹은 놈의 잘못이지.
-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곁에만 있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이 이상 바라는 건 제 욕심이니까요.
세가 놈 세 치 혀에 놀아나는 게 아닌데.
거칠고 투박한 손. 자상이 그득해 산적 놈 같은 손이 뭐가 예쁘다고. 손끝만 살짝 닿았을 뿐, 새빨개진 얼굴이 퍽 귀엽게 느껴진 탓에 청명은 당보가 하는 연애 놀음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처음 손을 잡고 깍지를 끼자, 놀란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게 한심해서 이 연애 놀음 때려치울까. 고민하던 찰나, 절절한 사랑 고백을 토해냈다. 토해냈다는 무슨. 청명은 어디 폭포수가 쏟아지는 줄 알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청명은 낯선 감성에 휩쓸릴 것 같아 당보의 입을 막았다.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떨어져.”
“싫습니다.”
“저 새끼가 덜 맞......?”
청명이 손을 올리려다 멈췄다. 얼굴을 살짝 찡그렸을 뿐인데, 당보는 기가 막히게 알아봤다. 허리로 가 있던 손에 어깨로 옮겨졌다. 비단처럼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 마.
처음엔 그래, 이왕 하는 거 장단이나 맞춰줄까. 가벼운 마음에 어울려 줬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까만 천을 물들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예상한대로 당보는 청명을 물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당보가 청명에게 물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손을 잡는 게 자연스러워지고, 본의 아니게 치아 개수도 알게될 무렵 청명은 깨닫게 된 것이다.
까만 옷 천을 다른 색으로 물들일 수 없어도. 투명한 물은 어떤 천에도 스며들 수 있다. 하얗든 까맣든, 아무 상관 없이.
처마 아래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옷에 스며든 빗물에 젖은 짜내는 우둔한 자신을 탓해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겨우 탈골 난 걸로 호들갑은...”
“탈골 난 거 우습게 보지 마십쇼. 그러다 어깨 작살납니다.”
“작살은 무슨, 이깟 거 어깨 휘휘 돌려주면 낫는다.”
“아이고, 형님 어깨가 엿가락이라도 됩니까? 휘휘 돌리면 낫게. 저 뒀다가 뭐 하시렵니까. 국이라도 끓여 드실 겁니까?”
“맛없어.”
“잘만 드시더구먼.”
어깨를 맞추면서 할 농담인지. 청명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차자. 당보가 낄낄 소리내며 웃었다. 구김 없이 반듯하게 펴진 얼굴에 안심되면서도, 얄미운 마음도 조금 든다.
어깨에서 손이 떨어지자, 청명은 가볍게 어깨를 돌려봤다. 낡은 문을 여닫는 것처럼 다소 거북함이 느껴졌다. 당보가 치료를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뼈는 제자리에 맞게 들어갔고, 놀란 근육을 풀어주고자 기까지 불어넣어 줬다. 과잉 진료를 받았음에도 거북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전시 중이라 어깨가 탈골된 채 싸운 청명의 잘못이 크다.
“끈 없다며.”
“마침, 못 쓰게 된 비도가 생겨버려서요.”
“더럽게.. 손 때 묻은 걸 하늘같은 형님 머리에 묶으라고 주냐?”
“깨끗하게 관리한 거거든요. 완전 뽀송뽀송.......”
“이 자식 왜 말을 하다 마냐..?”
“이 당보가 머리 얼마나 잘 묶는지, 형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야!”
청명이 발로 까거나 말거나, 당보는 꿋꿋하게 청명의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렸다. 손에 비도를 잘 틀어쥐기 위해 끈으로 단단하게 묶듯. 끈으로 잡고 있던 청명의 머리카락을 동여맨다. 머리카락이 풀어지지 말라고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매듭까지 만들고는.
목 끝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아. 머리카락이 아니라 숨결이었나. 쪽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머리끈값이 과해도 너무 과했다. 당보야. 셈이 지나침을 탓하려 부른 게 아니다. 손님이구나. 당보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른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청명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잘 모셔야지.”
“예. 이 당보. 손님 모심에 있어 소홀함이 없도록, 각별하게 신경 쓰겠습니다.”
나뭇가지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늘은 비구름 하나 없이 맑았음에도 불구하고.
당군악은 앞에 있는 이의 속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때가 많다. 대뜸 손을 내밀다니. 뭘 달라고 저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귀애하는 여식의 말을 떠올렸다.
- 사형은 저만 보면 머리끈을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머리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고 다니던 머리끈을 나눠 드렸더니. 이건 싫다, 하시며 비도 손잡이를 감을 때 쓰는 끈을 달라는 하시는 거예요. 비단 끈도 아닌 그저 그런 무명 끈인데 어떻게 머리 묶는 데 쓰냐고 말씀드려도 고집불통이시고. 어휴 그런데 어쩌겠어요. 사형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드려야지.
그런데 제가 요즘 검을 쓰는 데 익숙해져서 암기는 잘 안 써서 여분의 끈을 안 들고 다녔거든요. 그랬더니 이젠 오라버니와 잔이에게까지 가서.....
당군악이 실소를 터트렸다. 소소와 패, 잔에 이어 자신의 차례까지 왔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고 만 것이다. 녹색 끈이라. 청명이 당가에 뜯어 먹은 것들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물건이다. 그냥 줘도 아깝지 않을 물건이나, 당군악은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이 작자는 이제 매번 나에게 찾아와 끈을 달라고 하겠구나. 어찌 보면 당소소가 당군악에게 끈이 든 꾸러미를 준 것도, 이 일에 대한 선견지명일지도 모르겠다.
당군악이 내어준 녹색 끈을 보던 청명은 끊어질락 말락 한 끈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를 끈으로 묶어 고정하고는 당군악을 향해 씨익 웃었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청명이 매번 당가 사람에게 머리끈을 달라는 이유였다.
중간중간 당보가 하는 말은 섹드립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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