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용가하] 겨울나기
보다 따뜻한 겨울을 위해
늦가을, 청유관은 이른 겨울나기 준비를 시작한다. 수리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사들여야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있는지, 예산은 어느 정도 되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 되는지. 사실 주술사들로 가득 찬 청유에서 이런 일반적인 겨울나기는 그리 의미 있지 않았다. 주술사들이 누구던가, 메마른 사막에 호수를 만들고 지독한 늪지대에 건조구역을 생성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수리해야 하는 부분? 주술로 고치면 그만이다. 사들여야 하는 것? 주술로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청유에는 무려 하늘의 사랑을 받으시는 대주술사 가하 님이 계시니 겨울나기쯤이야 1분이면 할 수 있었다.
다만 청유 소속의 주술사들은 창립자를 닮은지라, 나랏님도 살피지 않는 민심을 두루 살피기를 원했다. 그러니 가까운 마을을 여럿 거쳐 골고루 물품을 사들이는 것으로 겨울을 앞둔 이 시점에 경제에 기름칠을 하려고 했다. 청유관의 겨울나기 준비란 그런 것이었고 따라서 일찍부터 준비해 마땅했다.
그렇다면 청유의 주술사들이 이리 바쁠 때, 창립자이자 수장인 대주술사 가하 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가하 님, 이번에는 안 됩니다."
"하지만, 홍영."
"안 됩니다."
홍영이 흑색 눈동자를 똑바로 치켜 뜨며 가하를 응시했다. 망설임 없이 담요와 갖은 간식거리, 찻잎을 쥐여준 홍영이 제 붉은 머리를 질끈 묶고는 단호하게 끊어 말했다. 어찌나 살벌하게 끊어뱉는지, 가하의 옆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뱀용이 가하에게 꿈질꿈질 달라붙어 체온으로 위로해주려 할 정도였다. 가하는 홍영의 단호함을 이기지 못해 소리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금년만큼은 제발 쉬세요. 첫눈 내리는 날 날뛰는 하룻강아지도 그리 돌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가하 님께서 일을 죄다 가져가시면 청유의 아이들이 자책을 합니다. 작년에는 마음 여린 아이가 가하 님께 실례를 저질렀다고 기어이 울음까지 터뜨렸는데 잊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이런 때 아니면 내가 언제 나갈 수 있겠어요."
단정한 목소리에 홍영이 잠시 멈칫했다. 그라고 모르는 것은 아닌지라, 그는 잠시 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대주술사 가하, 그리고 제국의 1급 범죄자 가하. 별 실행의지가 없는, 그저 가하에게 약간의 구속력과 불편함을 주기 위한 수배임을 알지만 가하는 혹시나 제 움직임이 청유의 주술사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했다. 그는 자진해서 청유본관에만 머무르고, 외출을 삼가며, 청유의 뿌리처럼 지냈다. 실제로 그가 돌아다니다가 순찰을 도는 나랏돈 먹는 이들에게 발각되어 귀찮아진 일이 몇 번 있기도 하였기에 더더욱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눈치 안 보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세혼제 시기나 마을의 축제 기간 정도, 그리고 온 마을이 다 바쁜 겨울나기 시기뿐이었다.
아무리 의젓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신다 해도 가하는 한참 젊은 사람이었다. 삼십 대인 홍영의 입장에서는 젊다 못해 어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이 좁은 곳에 갇혀 있다시피 한데 어찌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홍영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하를 이 겨울나기에 끼어주기엔 병아리 같은 어린 아이들이 손발을 달달 떠는 모습이 지극히 안타까웠다. 하아, 홍영이 한숨을 토해내며 손가락 하나를 치켜 세웠다. 그 모양새에 가하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딱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건 작년이면 족합니다."
"네, 홍영."
얌전히 앉은 가하를 마주하며 홍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겨울나기를 총지휘하는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내역을 짚었다. 멀리 나갈 수 있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으며 겨울나기에 도움이 되는 것. 금세 일거리를 짚어낸 홍영이 가하를 보았다. 기대감 가득한 눈빛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홍영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조곤조곤 할 일을 넘겨주었다.
"가하 님의 겨울나기 일은, 겨울옷을 지을 옷감을 사오는 것입니다."
*
"두툼한 옷감 팝니다! 다섯 필을 사면 튼튼한 실과 바늘을 추가로 드려요!"
"푹신한 목화 넣어서 더 따뜻한 겨울 보내십시오!"
"짱짱한 모피가 여기 있습니다! 선착순!"
와글와글 쏟아지는 장사꾼들의 목소리가 시장 한복판을 꽉 메웠다. 코 끝이 쎄할 정도로 공기가 차가워졌는데 그들의 큰 목소리는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바쁘게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체온과 그들의 숨으로 시장 공기가 제법 훈훈해졌다. 땔감 하나 때우지 않은 것치고 꽤 나쁘지 않은 공기였다.
그 장거리를 걸으며 가하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홍영이 챙겨준 돈은 도톰한 천주머니에 꽉꽉 들어차 가하의 손에 꼭 쥐여 있었다. 생기를 머금은 황금빛 눈동자가 천이 늘어진 탁상을 빠르게 훑으며 작게 감탄을 흘려보냈다. 와, 하는 소리가 하얀 김이 되어 언 뺨을 녹이고 스쳐갔다. 가하는 색색깔의 천을 보며 뺨을 발갛게 붉힌 뒤 들뜬 기색이 여실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늦가을, 뱀의 본능을 이기지 못한 뱀용이 꾸벅꾸벅 주억이던 머리를 푸르륵 털었다. 청유관, 특히나 뱀용과 가하가 머무는 방은 언제나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추위가 강력한 겨울잠을 몰고온 모양이었다. 자주 볼 수 없는 연인의 모습이 마냥 귀여워 가하가 눈꼬리를 내리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손 뻗은 가하가 뱀용을 끌어당겨 차갑게 언 뺨에 손바닥을 대었다.
"이제 따뜻하죠?"
술진도 필요로 하지 않는 간단한 주술이 뱀용의 몸에 훈기를 둘렀다. 뱀용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응, 하고 대답하더니 그제야 가하의 옆에 바짝 붙었다. 가하가 보던 옷감을 같이 구경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보이는 몸짓인지라, 가하는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의 손등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것으로 애정을 달랬다.
다정한 연인 한 쌍이 옷감을 보러 온 게 분명해 보이는 태도로 가게 앞을 기웃대자 주인이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척척 능숙히 옷감을 들어올리며 소개해주는 억양에 장사꾼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한가득 묻어났다.
"자아, 보이시오? 이만한 두께에 이만한 가격인 곳 또 없소이다. 여기여기, 같은 길이인데도 훨씬 가볍기도 하오. 아가씨, 한 번 들어보시겠소이까?"
"음……. 와아, 정말 가볍군요. 이만하면 겉옷으로 짜도 괜찮겠어요. 다만 아이들이 쓰기엔 다소 무거울 것 같은데, 이보다 가벼운 건 없나요? 두께는 좀 더 얇아도 좋아요."
"아이 나이가 몇 살 정도 됩니까?"
"가장 어린 아이들이 열둘에서 열셋 정도 돼요."
"허어, 그 나잇대라면 이게 제격이지요."
장사꾼이 허리를 숙여 가판대 아래로 쑥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의 손에 들린 두둑한 옷감을 보며 가하가 작은 감탄을 흘렸다. 청유의 겨울나기는 어디까지나 경제에 기름칠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옷감의 가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가하는 익숙하게 길이를 재어보고는 거리낌 하나 없이 가격을 치렀다. 망설임 없이 빠르게 건네지는 돈을 보며 장사꾼이 헤벌쭉 웃음을 그렸다. 아이고, 또 오십시오. 다음엔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척척 옷감을 잘라 자투리 천을 꿰어 만든 가방에 뚝딱 담아준 그가 허리를 넙죽 숙이며 가하에게 물건을 건넸다. 손목을 감는 묵직한 무게감에 경량 주술을 걸며 상투적인 인사를 남긴 가하가 다음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이 옷감은 이렇고, 저 옷감은 저렇고. 홍영이 빵빵히 채워준 돈주머니를 알고 있는 만큼 흥정하지 않고 물건을 사들이는 가하는 꼼꼼하고 야무졌다. 옆에 멀뚱히 서서 가하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뱀용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의문을 잔뜩 띄울 정도였다. 그가 보기엔 이것도 저것도 다 비슷해보이는데 가하는 신중하게 옷감을 골라 사들였다. 같은 옷감이 여럿 있다면 청유의 주술사들이 좋아할 만한 무늬나 색깔인 옷감을 색출했다. 어려워. 그는 가하의 뒤를 쫑쫑 쫓으며 양손 가득 쥔 옷감 가방을 고쳐 들었다. 가하가 주술을 걸어주어 가벼웠지만 부피가 있어 자칫하면 놓칠 것 같았다.
"거기 붉은 치맛단 아가씨, 우리 가게에도 들르겠소?"
곰방대를 사려 문 중년의 여성이 까딱까딱 손짓했다. 이를 보이며 짓궂게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가하가 천을 파는 가게를 빼곡이 들러 우르르 사들이는 것을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호객에 자주 응하는 편이었던 가하가 답장하듯 밝게 웃으며 그럴까요? 하고 걸음을 옮겼다. 중년은 낄낄 웃음소리를 흘리며 기다렸다는 듯 천을 늘어놓았다. 빛깔이 반드르르한 천이 화사한 색을 머금고 펼쳐졌다. 작게 감탄사를 흘린 가하가 들고 있던 가방을 잠시 내려두고는 옷감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고 반질거리는 감촉은 봄이나 가을에 어울릴 법한 가벼움을 담고 있었으나, 두께가 제법 괜찮았다. 중년은 자신의 물건에 자부심이 있다는 듯 어깨를 떡 펴고 미소지었다.
"어때, 괜찮지? 꽤 비싸긴 하지만, 비싼 값은 꼭 하고도 남소. 옆에 선 번지르르한 애인도 같이 보는 게 어떻소. 이 아가씨께 잘 어울리는 색깔 아닌가?"
여성이 까딱 눈짓하자 이전처럼 가하만 보고 있던 뱀용이 두 눈을 끔벅이며 그를 보았다. 아는 이들만 아는, 뱀용의 당황한 얼굴이었다. 가하는 폭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뱀용을 돌아보았다. 평소보다 뻣뻣해 보이는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큰 표정 변화가 없지만 맑은 물처럼 들여다보이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가하가 먼저 움직였다. 깨끗하고 가지런한 손이 만지작거리던 천을 한 움큼 들어올려 제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가하의 상아색 저고리 위로 자청색 천이 겹쳐졌다. 사르르 보드라운 미소를 머금은 가하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뱀용과 시선을 맞추었다.
"뱀용, 잘 어울려요?"
당혹감에 희미하게 떨리던 뱀용의 시선이 우뚝 멎었다. 선명한 노란빛을 띤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고정되었다. 대단히 충격적인 것을 본 듯, 혹은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듯 뱀용은 입을 조그맣게 벌린 채 가하만을 응시했다. 이야, 아가씨가 너무 예쁜가 본데? 도련님이 정신을 못 차리네. 가게 주인의 농담 섞인 낄낄거림이 들려왔지만 뱀용은 넋을 놓은 것처럼 굴었다. 예뻐……, 하는 중얼거림이 조그맣게 들렸다. 그러다 퍼뜩, 꿈에서 깨어나듯 들썩인 어깨가 누구나 볼 수 있을 만큼 격정적이었다. 가게 주인은 아예 쓰러질 것처럼 웃었다. 뱀용은 눈을 몇 차례나 깜박이며 가하를 보고 옷감을 보았다가 다시 가하를 보았다. 그러다 결심을 굳힌 것처럼 제 허리춤을 더듬거려 외출할 때 가하가 달아주었던 주머니를 찾았다.
"얼마, 인지."
"으하하하! 이렇게 바로? 바로 사는 건가, 도련님? 하하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야 한다고 배웠어."
냉큼 돈을 꺼내드는 모양새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구매 의사로 번뜩이는 눈이 너무나 결연해서 가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뱀용이 가진 저를 향한 애정의 크기는 볼 때마다 가슴 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가하는 손을 들어 뱀용의 돈주머니를 물리고 제가 살까 하다가, 뱀용이 사준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그가 은근슬쩍 더 풀어진 얼굴로 찰싹 붙어올까 싶어 그만 두었다. 이러는 편이 그의 만족도도 더 높을 성싶었다. 가하는 뱀용이 서툰 흥정으로 어리바리 가격을 치르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얼렁뚱땅 이루어진 즉흥적 구매였지만 뱀용의 두 눈에는 뿌듯함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그는 돈을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인장에게서 받은 천을 소중히 품에 안더니, 양손으로 나누어 들었던 여태까지의 짐을 한손으로 와르륵 들어버리는 기행을 보였다. 빈손은 오직 가하를 위해 구매한 옷감만을 들 것이라는 게 대놓고 드러나는 모습에 또 웃음이 터졌다. 가하는 추위로 발간 얼굴이 설렘으로 재차 물들 때까지 웃고는 연인과 함께 가벼운 걸음으로 가게를 벗어났다. 가슴 속에 꽃이 활짝 피어난 것처럼 속절없는 설렘이 몽실몽실 터져나와 걸음마다 들뜸이 묻어나왔다.
가하, 이 옷으로 옷을 지으면 나에게도 보여줘. 그럼요, 당신이 선물해준 건데 뱀용이 보지 않으면 누가 보겠어요. 일상적인 애정이 배어나오는 대화가 소란스러운 시장 한켠에서 도란도란 흘러나왔다. 가하는 세 걸음에 한 번 웃음을 흘리고 뱀용 역시 덤덤한 낯에 어렴풋이 서리는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날이 점차 추워지는 늦가을, 그들의 겨울나기는 이제 막 시작된 듯했으나, 언제나 그러했듯 올해도 하염없이 따뜻한 날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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