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해우] 일상 귀퉁이

보고 싶다는 말의 함의란,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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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 해운

사랑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해운은 5년보다도 전에 정의했던 단어를 다시금 끄집어올렸다. 사랑, 사랑이라. 사랑에 대해서는 반지를 주고 받을 적에 모든 정리를 끝냈었다. 자기확신 없이 남의 인생을 제 남은 생에 엮어 매듭 지어버리는 일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 당연했다. 우현이 제게 스며들며 제 삶을 지지하는 많은 가치가 변했다지만 결국 그는 박해운이었기에, 저는 물론이요 우현의 삶까지 뒤흔들어버릴 일 앞에서는 자연스레 옛 방식을 고집했다. 그때의 저는 사랑을 두고 인간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손해볼 것이 자명함에도 손익을 따지지 못하게 하는 것, 그저 만족하게 만들면서도 더 욕심내게 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인간이 사회를 이루게 만드는 감정이었다. 그 모든 절차를 밟고서 해운은 제게 뛰어든 우현의 방식을 모두 받아냈다. 아, 과연 제 정의는 틀리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부정되는데도, '나'의 모든 규칙이 무색해짐에도 그것조차 좋다니. 우스운 일 하나 없음에도 비실비실 무의미한 미소를 띠게 하는 감정이 너무나 기꺼웠다.

해운은 그래서 우현과 결혼했다. 나를 이렇게나 무너뜨리는 너를 외부인으로 두기엔 불안하니까, 또 다른 이유로는 내가 너에게 이렇게나 흔들리는 만큼 너 역시 나에게 흔들렸으면 하니까. 그 내심의 결과로 프로포즈는 우현이 하게 되었으니―정확히는 해운이 그렇게 유도했다― 해운의 어처구니 없고 생산성 없는 사랑 프로젝트는 깔끔한 대성공이었다.

그땐 그랬지. 해운은 답지 않게 말랑하니 풀어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지 않았다. 퇴근이 2시간 남은 까닭이기도 했고, 어제 늦게까지 마감을 하느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베개에 머리를 붙인 배우자의 이마에 아침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까닭도 있었다. 다른 때라면 마감하다 그리 곯아떨어져도 꼭 이마에 가벼운 접촉을 하고서 출근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얼굴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어져 탱탱 붓기 시작한 볼이나 한 번 쓸어보고 말았다. 발로 차느라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한번 덮으며 답답해 하는 발만 이불 밖으로 쏙 빼주기도 했던가. 하여간 오늘은 이상하게 한없이 물러지는 기분이었다. 결혼기념일도 아닌데 왜 이러지, 하는 의문은 없었다. 해운은 오래 전 우현으로 인해 재정립되는 제 규칙을 몸소 체험했다. 끝내 우현을 제 방식대로 정의하지 못했으니 우현과 관련된 저의 이상반응은 인과관계를 따져야 할 문제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한참 근무 중인 사람이 고요한 틈을 타 문자를 보내는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도 그리 중한 것은 아니었다. 해운은 진한 화면 위에 톡 떠오른 하얀 말풍선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을 흠뻑 머금은 물감이 보풀 인 도화지에 번지듯 불시에 표정의 온도가 변했다. 이 시간쯤이라면 깨어있을 텐데, 티브이를 보느라 확인을 늦게 하려나 따위의, 상대의 일상을 온전히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까지 여유롭게 즐겼다. 속절없이 상승기류를 타는 사랑을 언어화하여 전달했다는 충족감과 상대방의 답장에 대한 기대감이 기분 좋게 뒤섞였다. 해운은 손을 까딱거리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해, 같은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정형화 되어 있어 외려 사랑하고 있다는 현재진행형의 감정을 담아내기에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한참 연애에 불타오를 때나 오직 '사랑'말고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벅찰 때나 그것을 입에 올렸지, 보통 때의 해운은 우현을 향한 애정에 녹아내릴 때 다른 표현을 가져다 붙였다. 예컨대,

'보고 싶어.'

―와 같이. 고작 네 음절의 말이지만 이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직접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너와 떨어진 나의 일상에조차 너의 온기를 그리워한다는 말이라니, 네가 나의 일상을 점령했다는 다소 유치하고 낯부끄러운 표현이지 않은가. 심지어 해운의 근무지엔 우현을 상기시키는 어떤 직간접적 요소도 없기에 더욱 노골적이었다. 이것이 '내 머릿속엔 너밖에 없어' 하는 삼류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구시대적 대사와 다를 게 무엇인지.

하지만 우현에게 이 말이 어떻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현은 때로 놀랄 정도로 해운에 대해 잘 파악했으며, 때로는 해운의 노력이 무색하게 아주 둔감한 사람처럼 굴었다. 예측되지 않는 사람. 해운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앉아 휴대폰 화면을 흘리듯 쳐다보았다. 1분, 2분……. 화면이 밀려올라갔다. 깜박, 떠오른 답장에 해운이 앓듯 잇새로 나직한 탄식을 흘리며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퇴근까지 2시간이나 남아있는데도 고작 답장 하나에 완전히 무장해제 상태가 되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해운은 어찌되었건 간에 우현에게 저항하는 법을 몰랐다. 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를 정도로 우현이 떨어뜨리는 조약돌에도 풍덩풍덩 파도를 일으켰다.

'그럼 야근하지 말고 튀어오든가.'

아, 그 나이 먹고도 그렇게 귀여우면 어떡하자는거지. 해운은 바람결에도 끙끙 앓는 헤로인 중독자마냥 인내했다. 맙소사, 아직도 2시간이 남았다니. 말도 안된다고 읊조린 해운이 다시금 핸드폰을 들었다. 매끄러운 화면 위를 빠르게 두드린 손끝이 순식간에 문장 하나를 완성했다. 충동적인 답장의 답장 끝에 다른 답장이 오지 않아도 좋았다. 퇴근까지 2시간 남은 시점, 해운의 노동 의욕은 끌어올려질대로 올라왔다. 절대 야근은 없다. 야근따위 하지 않아야지. 부러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해운이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덮었다. 문자 하나에 휘청이던 애처가는 어디가고, 유능하고 능률 좋은 전문의로 돌아왔다.

*

"다녀왔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집 안의 훈기가 훅 밀려들었다. 해운은 추위로 차가워진 뺨이 온기에 녹아가는 걸 느끼며 척척 걸음을 옮겼다. 늘 두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두고 코트를 젖히는 손길이 분주했다. 마음이 급하니 벗은 코트는 옷걸이에 걸기보단 팔뚝에 걸쳤다. 긴 다리를 십분 활용해 순식간에 거실에 당도한 해운이 연갈색 머리꼭지를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티브이로 드라마를 즐기면서 과자를 부스럭거리고 있던 머리꼭지가 해운을 힐끔 돌아봤다. 평소라면 은근슬쩍 눈치보듯 과자 봉지를 내려두는데, 오늘은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이유가 훤히 보여 해운이 또 깊게 미소지었다. 오늘따라 이상하더니 그냥 사소한 부분마저 그저 귀여워보였다.

들뜬 만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굳이 가동시키지 않으며 해운이 소파에 앉은 우현을 끌어안았다. 바깥의 추위가 닿으면 몸서리 칠까 싶어 굳이 코트를 벗어두길 잘한 것 같다. 우현이 별다른 거부없이 가만히 안겨주는 걸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충족감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잠 안 자도 내일 움직일 수 있겠는데. 남아도는 에너지를 계산하며 우현의 이마에 쪽 입 맞춘 해운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평소보다 늦은 주제에? 마치자마자 온다더니."

툴툴 불만을 늘어놓는 우현의 눈썹이 평소보다 찌그러졌다. 해운은 아직 열기가 돌지 않은 찬 손을 우현이 놀라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 그의 찌그러진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도 손을 뿌리치지 않은 걸 보니 아주 화가 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해운이 바깥의 추위로 발개진 얼굴로 비실비실 웃었다. 우현이 얼굴을 더 찌그러뜨리며 뭐가 웃기냐고 쏘아붙이려 했지만 해운이 먼저였다.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할 줄 아는 해운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오는 길에 벌써 문을 여는 곳이 있어서 말이야, 갓 구운 걸 받아왔더니 시간이 좀 걸렸어."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붕어빵 사왔어."

해운이 까딱 눈짓했다. 과연, 하얀 봉투 끝이 삐죽 튀어 나와있는 게 보였다. 그런 거라면 일찍 말하든가. 우현은 해운을 힐끔 확인하고는 슬쩍 과자봉지를 치우고 붕어빵을 꺼내려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갑작스레 날이 추워져 슬슬 생각나던 시점이었는데 타이밍 한번 끝내줬다. 해운은 붕어빵 봉지를 들고 희희낙락 즐거워하는 우현을 바라보고 웃었다. 첫입은 제가 덥썩 물더니, 하나 더 꺼내 해운의 입에 물려주었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 따위, 제대로 된 성분도 알 수 없고 위생상태조차 불확실하며 영양의 균형 같은 것도 찾을 수 없는데 우현이 주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거부감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을 수 있었다.

바삭, 갓 구워 유독 바삭거리는 붕어빵의 꼬리가 입 안에서 부스러졌다. 혀를 아릿하게 자극하는 단맛에 괜히 혀로 입술을 적셨다. 단 것을 즐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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