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해준) 오늘은 뭐 먹어요?

(서원해준) 오늘 뭐 먹어요? -단호박 파운드 케이크-

요리하는 박서원x영상 찍는 정해준

*결말 부분 까지의 스포일러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읽으신 후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캐붕,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보다 전체적으로 많이 말랑한 느낌입니다.

***

"나가."

"왜애!!"

아침부터 박서원은 실랑이 중이다. 내가 아니라, 쌍둥이와 실랑이 중이었다. 이유는 타당했다. 주말 아침 댓바람부터 쌍둥이가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박서원은 오늘부터 비활동기에 들어갔다. 그동안 바짝 당겨서 벌기도 했고, 10월부터는 내가 바빠졌기 때문에 그전에 나랑 실컷 놀겠다면서 으름장을 놨다나. 내가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스케줄을 빡빡하게 짠 적이 없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못해도 1년은 놀 거라고 했으니 드디어 박서원이 집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박서원이 고대하던 주말이 되었으니 데이트라도 하자고 나를 꼬시던 와중에 백쌍둥이가 찾아왔다. 박서원이 몇 차례 무시하니 호출 벨과 박서원의 핸드폰을 동시에 울리게 했다. 30분을 그러고 있었으니 주변에 민폐였기 때문에 일단 들여는 줬지만 박서원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야, 해준아. 네가 설득 좀 해봐."

"집주인은 제가 아닌데요."

"그래도 네가 집주인 맘에 드니까 네가 허락하면 들여줄, 악!!"

"헛소리 하지 말고 가."

백주연이 내 쪽을 향해 말을 걸자 박서원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하였다. 여기선 주먹으로 잘 안 때리는데. 어지간히 맘에 안 들었나보다. 백주연은 맞은 부분이 아팠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정수리 상태를 백주하에게 검사 받았다.

"우리가 그냥 왔냐? 간만에 손님 데려왔더니 세워두기만 하고!"

"연락도 없이 온 게 문제라곤 생각 못하냐?"

나는 그런 백주하의 말에 고개를 살짝 내려다 보았다. 새까맣고 단정한 머리에 까만 눈.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눈매였지만 큰 눈동자와 단정한 자세가 얌전하단 느낌을 주었다. 나는 몸을 살짝 낮춘 뒤 말을 걸었다.

"산래도 안녕."

"안녕하세요."

이산래. 저쪽에서의 본명은 이산예. 여기선 이산래가 본명이었다. 이 사람도 캐릭터 쪽이 다른 이름이었지. 본래 백 년은 산 용의 자식이지만 이쪽에서는 얄쨜없이 12살의 어린이였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4년이 지났으니 중학생인가 고등학생 정도일 거다. 속의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렇게 되면 호칭 정리가 애매해져서 이쪽 나이대로 지내기로 했다. 사람들은 좀 의젓한 아이 정도로 보는 거 같았고.

백쌍둥이도 이산래와 마찬가지로 기억이 멀쩡히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중에선 박서원만 기억이 없군.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말이다. 박서원은 이산래의 목소리에 시선을 낮추어 이산래를 쳐다보다 결국 들어오기를 허락해주었다. 쌍둥이는 성공했다면서 철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이산래만 현관에 그대로 서 있었다.

"괜찮아. 들어와."

"연락도 안 하고 와서 죄송해요."

"그건 쟤네가 잘못한 거지. 네 잘못이 아니야."

박서원의 말에 이산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저쪽에선 박서원이 이산래를 싫어했던 터라 서로 사이좋게 대화한 경험은 그다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저쪽에서의 이야기지, 여기선 기억이 없기도 하고 자신보다 10살은 넘게 어린 이산래를 박서원이 싫어할 이유 따윈 없었다. 그래도 박서원이 본인에게 살갑게 대해주면 조금 불편해하는 듯했다. 이것도 박서원의 업보라면 업보겠지. 나도 이산래에게 들어오라고 다시 한번 말하자 그제서야 이산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정해준 살판 났네. 와! 플스!"

"우리 해봐도 되냐??"

"선배들 집에도 있잖아요."

"원래 친구 집에 와서 하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야."

"들여보내 준 거 철회하기 전에 적당히 하지?"

쌍둥이는 거실로 향하자마자 근처에 놓인 게임기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있을 때 온 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늘 저랬다. 옆에 같이 온 이산래가 얌전히 우리 옆에 서있는 거랑 비교하면 비교한 이산래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박서원은 쌍둥이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이산래 때문인지 과일을 깎아오겠다며 나에게 이산래를 맡겨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와 이산래는 티비 앞에서 시끄럽게 구는 쌍둥이를 두고 적당히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우리 집에 다 오고."

"아, 아뇨. 별일 없습니다. 확인차 들려본 거니까요."

"말투 못 고쳤네요."

"아."

"뭐, 버릇일 테니 고치긴 어렵겠네."

"해준...형 앞이라서 더 그런 거 같지만요."

이산래는 볼을 살짝 긁적이며 말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돌아오고 나서 이산래와 자주 대화하진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호칭과 말투가 익숙한 건 아니다. 나야 이산래의 외형이 어리니까 반말 정돈 자연스럽게 나왔지만 이산래는 어른처럼 보이는 말투를 그대로 쓰기엔 아직 어렸다. 게다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까지 해야 하니까. 입에 달라붙지 않았는지 어색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 말투를 고치기 전에 이산래가 성인이 되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일 거 같긴 하다.

"잘 지내시죠?"

"응. 보시다시피."

"다행이네요."

"산래 너는?"

"저도 잘 지내요. 형들도 다 적당히 바쁜 거 같고요."

이산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산래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던 형들과 어머니는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멀쩡한 걸 알았을 땐 엉엉 울었다나. 국장, 그러니까 이산래의 아버지인 이목과는 따로 만난 적이 있었을 때 들었던 이야기다. 그 많던 형들과도 같이 만났었기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 덕인지 이산래에게는 딱히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야, 너넨 무슨 대화가 새해 안부 인사도 아니고 그렇게 딱딱하게 말해?"

"이건 딱딱한 게 아니라 예의가 있다고 하는 거죠."

"그래, 네 똥 굵다."

"더러운 소리 말고요."

"저저...박서원이랑 지내니까 싸가지가 비슷해졌어."

백주연의 말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내가 박서원이랑? 그럴리가 있나. 내가 아무리 박서원을 좋아해도 그의 인성까지 좋아할 순 없었다. 성격이 안 좋은 거야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저쪽에서보다 이쪽이 덜한가 싶기도 했지만 그냥 이쪽이 사회성이 좀 더 좋아서 그래 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둘 다 박서원인데 뭐 다른가. 똑같지. 게다가 지금 누가 더 안 좋게 말하는데? 그사이 백주연이 내 표정을 보고는 백주하를 부르며 내 표정 좀 봐보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백주하가 내 표정을 보고는 박서원과 똑같다며 소름이 돋는다는 몸짓을 했다. 이거 분명 욕이 맞는데, 박서원이 저 뒤에 있어서 기분 나쁘다고 반응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박서원이 잘린 과일이 든 접시를 든 채 포크로 쌍둥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내가 성격이 나쁜 거면 90%가 너네 때문인데. 헛소리 작작 해."

"아오~ 누가 포크로 머리를 때려...구멍 뚫리는 줄 알았네."

"쓰읍...어, 근데 그 포크 누가 써?"

"손잡이로 때렸지만 너네 정수리 때린 거니까 둘 중에 아무나 써."

"손잡이 부분만 닿은 거면 먹는 데엔 문제 없는 거 아냐?"

"그럼 백주하 네가 저거 써. 난 새 포크 써야지~"

"죽을래? 정정당당하게 가위바위보 해."

백주하와 백주연은 그 말에 곧바로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참...한결 같다고 해야 하나. 백쌍둥이도 이곳에선 부모님과 함께였기에 딱히 그늘은 없어 보였다. 하연이도 멀쩡했고. 박서원은 그런 쌍둥이를 내버려 두고 내 옆에 앉고는 이산래에게 말을 붙여왔다. 잘 대해주는 게 어색할 뿐이지 이산래는 박서원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박서원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한 천천히 대답하는 중이었다. 이게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과정이라면 별수 없지. 나는 그들의 가운데에 앉아 박서원이 썰어온 복숭아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박서원이 이산래에게 말을 하며 나를 툭툭 건들길래 나는 새 복숭아를 포크로 찍어 박서원의 입에 물려주었다. 박서원은 자기가 들고 먹을 것은 아니었는지 한 입만 베어 물고 다시 몸을 일으키며 이산래와 대화했기 때문에 박서원이 다시 베어 물 때까지 포크를 들고 기다릴 뿐이었다.

"...두 분 다 잘 지내시는 거 같네요."

이산래가 우리를 보며 말하였다. 아, 너무 자연스럽게 먹여주고 있었다. 집이라서 별 생각 없었네. 내가 박서원에게 받아서 들라고 먹다 만 포크를 건네주자 박서원이 순순히 받아서 들더니 그걸 다시 내 입가로 가져왔다. 방금 이산래 말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꼭 한 번씩 일부러 이런다. 박서원이 끈질기게 내 입으로 들이밀길래 결국 한 입 베어 물었다. 직성이 풀린 건지 박서원은 그제서야 남은 복숭아를 다시 가져가 한입에 넣었다. 방금 그건 쌍둥이도 본 건지 얼굴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진짜 볼 때마다 적응 안 된다..."

"보질 말던가."

"저 싸가지도 늘 적응 안 되고."

"10년 넘게 봤잖아요."

"그래. 그래도 늘 새롭게 싸가지가 없어."

백쌍둥이는 여기서도 박서원과 소꿉친구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끼리는 연결고리가 비슷했다. 한평화와 박서원도 비슷한 때에 알았다지. 여기에서의 나는 저 셋이랑 다른 학교에 원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지. 그게 저쪽에서의 내가 저지른 업보 때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지긴 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안 붙어있는 쪽이 적어도 박서원에겐 좋았겠지. 쌍둥이를 선배라고 부를 이유도 없어졌지만 기억이 버젓이 있으니 그 호칭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도 업보라면 업보였다. 어쨌든 그 기억도 내가 가지고 있으니 내가 선배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치면 나도 박서원과는 몇 년 정도 연이 있는 격인데 아쉽게도 이곳에서의 나와 박서원은 연결고리가 전혀 없었기에 있는 인연으로 취급할 수가 없다.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사귀고 있는 쪽이 더 안 믿기긴 하겠지만. 그 일을 생각하니 어쩐지 할 말이 없어져서 복숭아나 씹어먹었다.

"그래서, 왜 온 건데?"

"우린 그냥 놀러 왔는데."

"그걸 누가 모르겠냐? 얼굴에 생각 없다고 쓰여있는데. 너네 말고, 산래 말이야."

박서원의 말에 쌍둥이가 동시에 이산래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니 잊고 있던 걸 떠올린 것처럼 입을 벌렸다.

"맞아. 쟨 할 말이 있댔거든."

"우린 산래가 물어보길래 대답 해주다가 네가 오늘부터 비활동기인 걸 생각나서 그 김에 온 거고."

"할 말?"

아깐 별일 없다고 하지 않았나? 쌍둥이의 말에 이산래를 쳐다보자 이산래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그 화제를 불쑥 꺼낼 줄은 몰랐나보다. 키도 꽤나 커서 그때랑 좀 비슷해지나 했더니 저런 표정을 보면 아직 애 티가 많이 난다. 이산래는 놀란 표정을 금방 갈무리 하고 차분하게 말하였다.

"제가 예지몽 꾸시는 거 두 분 다 아시죠?"

"응."

이산래는 본디 인간사를 다 볼 수 있던 용이었다. 세계를 합치면서 그의 비늘과 깃털은 모두 떼어내었지만 그 흔적이 아주 조금 정도는 남아있다고 했다. 예지몽은 그중에 하나라고 했다. 이건 그 집안 사람들이면 공통적으로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이산래는 그들 중에 보는 걸 더 잘 본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이제 용도 뭣도 아니니 천기누설 같은 걸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예지몽이래 봤자 그들이 골라서 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돈 천기누설이 되지 않는 듯했다. 당장 저쪽에서 있던 일을 드라마 내용으로 만들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이젠 합쳐졌으니 별세계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런 거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제가 서원...형 관련으로 꾼 게 있어서요."

"나?"

"네. 오늘부터 비활동기라고 하셨죠?"

박서원은 이산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조심 하셔야 될 거 같아서요."

"카메라?"

"어떤 건진 잘 모르겠어요. 카메라도 렌즈가 반사된 빛으로 알아차린 거라서요."

근데 그게, 기운이 좋진 않아요.

박서원은 이산래의 말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박서원의 할머님은 이곳에서도 무당이었다. 이런 말은 나보다도 박서원이 더 친숙한 이야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예지몽을 꾸는 사람들은 꿈에서 겪은 느낌과 꿈에서 일어났을 당시의 기분이 대부분을 좌지우지 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예지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으면 좋은 꿈, 기분이 나쁘면 나쁜 꿈이라는 거다. 기본적으로 감이 좋은 사람들이기에 그 기분 조차도 감에 따라서 느껴지는 듯했다.

"처음엔 네가 비활동기인지 우리한테 물어보더라고. 생각해보니까 오늘부터 들어갔을 거라고 했고."

"아무리 들어도 파파라치 얘기 같지?"

박서원은 쌍둥이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파파라치.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한 것. 사생과는 다르게 집 안까지 들어오진 않지만 오히려 이런 이들은 대놓고 찍지 않기 때문에 경계하기 더 어렵다. 말이 집 안에 안 들어오는 것이지 집 안을 찍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박서원 집에 들어올 때 가장 크게 염두한 것이다.

박서원이 사는 이 집도 그에 맞추어져 있다. 단순히 한강이 잘 보이는 게 아니라 이 정도 높이의 건물이 근처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강을 건너야 이 정도 높이의 건물이 있을까 했다. 요즘은 카메라가 좋아서 그 정돈 확대해서 찍을 수도 있었지만 파파라치들이 박서원 하나 찍겠다고 그 비싼 집에 들어가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강 근처 집은 값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월세도 안 되고 전세부터 가능했기도 하고. 게다가 이 건물의 유리창에는 전부 필름 처리를 해두었다. 안쪽에서 밖은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설사 반대편에 산다고 해도 필름 때문에 안은 보이지도 않는다. 때문에 박서원과 같은 연예인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 종종 들어와 사는 곳이다.

아파트 앞까지야 다들 걸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니 거긴 사람이 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경비가 강하기도 했고 이 아파트 사람 중 경찰과 연이 있는 사람이 있는 건지 금방 경찰이 도착해 해산 시키기도 했다. 사생이나 파파라치 같은 사람이 잘 잡히기도 했고.

박서원 말로는 자신은 걸리는 게 없으니 파파라치가 붙어도 별 상관 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내가 그와 같이 살고, 내가 그의 연인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으니까. 같이 사는 것까지야 친구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 남자가 연인인 건 다른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아직 동성연애를 반기는 분위기는 아닐 뿐더러 상대가 일반인이기까지 했으니까. 이 때문이라도 밖에선 스킨십을 하지 않으려 한다. 파파라치에게 언제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시 공개를 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저건 해준이 말이 맞아. 공개되면 네가 아니라 쟤가 힘들다고."

"당장 회사 가기도 힘들걸."

쌍둥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는지 박서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박서원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거 때문이라도 박서원도 나와 사귀는 걸 알리지 않는데 동의했으니까.

"네가 벌어서 먹여 살리면 모를까."

"그건 이미 지금도 비슷해."

"해준아, 월급 많이 못 받아?"

"제가 여기 셋만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하다. 나는 입사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고, 저 셋은 인기 배우다. 이 중에선 박서원의 몸값이 제일 높았고. 나도 그동안 월급이 오르긴 했지만 그들이 벌어오는 돈에 비하면 턱없었다. 그들은 원래도 잘 벌었지만 빌더쓰 이후 몸값이 더 올라 이제 정말 비교를 못한다.

"뭐, 그게 아니어도 얘처럼 상시 경호가 붙어있진 못할 거 아냐. 본인이 원하지도 않을 거고."

"하하하..."

이산래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산래의 아버지는 유명 3사 중 가장 큰 곳의 국장인 것으로도 모자라 어머니는 남쪽에서 유명한 도지사의 딸이다. 딸인 본인은 천만 영화를 여럿 낸 유명 배우였었고. 이산래의 형들도 어디 가면 이름 한 번 정도는 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 집안의 늦둥이자 막내였으니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말, 다른 게 아니라 이쪽이 훨씬 더 별세계다. 내가 이산래를 더 만나기 어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접점이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자주 만났다간 나만 눈에 띈다. 차라리 아예 용인 게 낫지.

"나만 조심하면 돼?"

"네. 해준 형은 괜찮아요."

박서원의 질문에 이산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은데 박서원만 조심하라고? 이게 무슨 소리지. 박서원은 그 말에서 뭘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이산래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상하다. 얘기에서 소외되는 건 박서원일 줄 알았는데 내가 소외되는 느낌이다...

"난 저 예지몽 얘기가 제일 신기해. 귀신 보이는 것보다도."

"로또 꿈은 안 나와?"

"나오더라도 저한텐 안 나오죠."

제가 용이었는데.

뒷말을 말하지 않아도 이해가 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용이었던 이가 용꿈 꾸는 것도 좀 웃길지도. 옆에 있던 박서원은 어떻게 이해한 건지 몰라도 같이 납득하고 있었다. 박서원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거 보면 또 모르겠단 말이지. 그러다 박서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가 눈꼬리를 내리며 웃어 보였다. 깜빡이도 안 키고 들어오는 거 봐. 그래도 이제 조금 익숙해졌는지 이전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진 않았다.

"해준아, 얼굴 빨갛다."

"너네 뭐하냐..."

젠장. 아니었나. 나는 빨개진 지도 몰랐던 얼굴을 애써 가려보았다.

***

쌍둥이와 이산래는 그 길로 집을 나갔다. 정확히는 볼일이 끝난 이산래가 의젓하게 쌍둥이를 데리고 나갔다. 바보 같긴. 하연이라도 데려왔으면 하루종일 놀다 가게 해줬을 텐데. 이산래는 아직 하루종일 박서원과 한 공간에 있을 정도로 친하지 않다. 예의 있게 볼일만 전하고 나갈 사람이니까. 박서원은 셋을 공동현관까지 배웅 해주었다. 아마 현관 밖으로만 내쫓으면 더 죽치고 있을 거 같아서 배웅 아닌 배웅을 다녀온 것이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난리네요."

"그래도 산래가 개학하기 전에 얼굴 봤네요."

"그쵸. 다들 시간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 더 못 볼 텐데."

나는 박서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때부턴 다들 많이 바빴으니 말이다. 백하연도 지금은 대학생 겸 배우라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그럼에도 걸그룹 멤버인 최나라와는 꼬박꼬박 만나서 우리에게 연락하는 걸 보면 잘 지내는 듯해 별 다른 걱정은 안 하고 있지만 말이다.

박서원은 다시 소파에 앉아 남은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슬쩍 박서원의 얼굴을 쳐다보니 어딘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티 안 내려는 거 같은데 티가 났다. 아님 내가 박서원 표정을 잘 읽게 된 걸 수도 있고. 나는 그런 박서원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고 싶었었는데요?"

"?"

"데이트요."

박서원은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더니 드물게 눈을 크게 떴다. 물어볼 줄 몰랐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곧바로 방긋 웃어 보였다. 웃을 때마다 주변이 반짝이는 건 헛것을 보는 거라는 걸 알아도 여전히 그렇게 보인다.

"그냥 어디 나갔다 올까 했죠. 그런데 산래한테 그런 얘길 들었으니...한동안은 집 데이트 해야겠네요."

"평소랑 같네요."

"그러게요. 그럼 늘 같은 거 할까요?"

"그러죠."

나와 박서원은 서로 말을 끝내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각자 생각하는 대로 물건을 가지고 나왔는데, 나는 카메라를 들고나왔고 박서원은...

"미쳤어요?! 다시 넣어요!!!"

"왜요. 이거 아니었나?"

"장난인 거 모를 거 같아요? 당장 도로 놓고 와요."

박서원은 내 말에 웃으면서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보고 싶지 않은 물건이니 말은 삼갈 거다. 저쪽에서도 입조심 해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박서원은 앞치마를 매며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뭐 먹을까요?"

"음, 영상을 늘 제철 음식으로 해서...왠지 맞춰야 할 거 같아요."

"어렵네요. 나 안 먹는 거 많은데."

박서원은 비린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해산물은 입에도 안 대고, 다른 비린 음식들도 싫어하는 편이다. 오이도 잘 안 먹고 참외도 잘 안 먹는단 소리다. 생각해보면 일전 수박도 참외만큼은 아니어도 잘 안 먹는다고 뒤늦게 이야기 하였다. 아, 그때 생각하니 또 열받네. 아무튼 박서원이 안 먹는 것이 많았기에 선택지의 폭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제철 재료들이 대부분 과일 아니면 해산물이기 때문도 크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박서원은 냉장고를 뒤적이더니 무언가 하나를 꺼내었다.

"...단호박? 언제 샀어요?"

"어제 퇴근하면서요."

"난 왜 못봤...아. 어제 냉장고 안 열어봤네."

"제철 재료가 마땅한 게 없으면 이런 거 먹으면 되죠. 아직 밥 먹을 시간도 아니니까..."

간식이나 만들까요.

박서원은 그러더니 찬장을 찾아보더니 밀가루와 설탕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버터를 꺼냈다. 간만에 베이킹인가? 박서원은 주로 한식을 먹었지만 비린 걸 안 먹는 탓에 요리를 하기 시작했을 땐 배울 수 있는 건 대강 배워뒀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베이킹이었다고. 난 배고프다고 파스타를 해 먹진 않는데. 라면이나 끓여 먹지. 그래도 이 집에 오고 나선 뭐가 많기도 하고 박서원이 라면을 좀 줄이라고 경고하기도 했기에 원 팬 파스타 정도는 해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봤자 박서원이 주는 게 제일 맛있어서 내 요리는 배 채우기용이란 느낌밖에 안 들지만 말이다.

단호박은 그냥 손질하기엔 딱딱해 전자레인지에 3분 정도 돌려준다. 그러면 조금 말랑해진다고. 사실 몰랐는데 전자레인지에 돌린 단호박에 내 손을 가져가 쿡쿡 찔렀기에 알 수 있었다. 입으로 뻥긋대면서 설명하기 번거로웠던 탓에 바로 알기 쉽게 하려고 그런 거 같은데 순간 손 잡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말랑해진 단호박의 윗동을 잘라내 미리 씨를 제거한다. 다시 단호박을 제대로 찐 뒤 껍질을 벗겨내 으깨어준다. 양이 많은 덕에 남은 부분은 한입 크기로 슬라이스 해두었다. 단호박은 잠시 이렇게 두고 버터를 풀어준 뒤 설탕과 섞어준다. 거기에 계란을 섞고 그다음에는 으깬 단호박을, 그리고 박력분과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섞어준다. 이후 우유는 찰기에 맞춰서 넣는다는데, 원래 베이킹을 이렇게 하진 않는 걸로 안다. 박서원 말로는 자기는 그램 수를 맞추는 게 오래 걸려서 눈대중으로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망한 적은 아예 감도 못 잡던 몇 번 정도라고. 감 좋은 게 베이킹에서도 쓰이나? 이쯤 되면 저쪽에서 지낼 때 다른 게 아니라 그걸 달라고 해야 했다. 어디에서나 제일 잘 쓸 거 같다.

반죽에 농도를 맞춘 뒤 잘라두었던 자투리도 넣어준다. 틀을 탁탁 내리쳐 기포를 빼낸다. 이건 박서원이 입으로 뻐끔대며 알려줬다. 이후 틀에 반죽을 붓고 예열을 해둔 미니 오븐에 반죽을 넣는다. 카메라로 이걸 쓰는 건 처음 찍던가. 나는 오븐을 쓰지 않고 박서원도 오븐은 그리 자주 쓰는 게 아니었기에 나름 희귀하다면 희귀한 장면이었다. 오븐에서는 단호박 냄새와 빵 냄새가 섞여 났기에 입맛을 돋구기엔 충분했다.

파운드 케이크는 조금 식힌 뒤 박서원이 칼로 잘라내었다. 단면에 단호박 슬라이스가 보여 조금 더 맛있어 보이게 생겼다. 박서원은 접시에 케이크를 올리고 포크를 꺼내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으려다 박서원이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따라갔다. 소파? 아, 간식이라 위치를 바꿨나. 박서원은 소파 앞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고 내게서 카메라를 가져가 고정시켰다. 나는 그런 박서원을 보다 그의 눈짓에 카메라 앵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에 얼굴 안 나오겠지. 나는 숙이는 것을 조심하며 접시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한입 잘라 먹은 단호박 케이크는 예상이 가던 맛이었어도 충분히 맛있었다. 폭신폭신한 빵의 식감에 부드러운 단호박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반죽에도 단호박을 넣은 터라 다른 걸 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달았다. 내가 맛을 음미하고 있자 카메라에서 삣 하는 소리가 났다.

"맛있나 보네요."

"맛있죠. 아, 카메라 줘봐요. 확인 해봐야 해요."

"뭘? 나 오늘은 잘 찍었어요. 나 못 믿어요?"

"못 믿으니까 줘요."

박서원은 내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나는 카메라의 영상을 조금씩 돌려보면 확인했는데 다행히 얼굴이 나오진 않았다. 다시 안 찍어도 되네. 그렇게 안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뭔가 불쑥 나타났다. 살짝 놀라 그게 뭔지 바라보니 단호박 케이크 조각이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박서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알아서 먹을게요."

"왜 갑자기 내외해요? 그냥 먹죠."

"그러면 박서원 씨야 말로 왜 오늘따라 먹여주는 건데요."

"난 평소랑 다를 거 없어요? 정해준 씨 혼자 낯가리는 거 모를 줄 알고요?"

박서원은 그렇게 말하며 포크를 흔들어 보였다. 아까처럼 안 먹으면 절대 안 물러날 기세다. 하아. 나는 결국 그가 내민 케이크 조각을 먹었다. 그는 그제서야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입에도 케이크 조각을 넣었다. 눈치로 보면 마음에 들게 나온 듯하다. 그러다 박서원과 다시 눈이 마주쳤는데 또 별 말이 없길래 내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아까 같은 실수 할까 봐요. 밖에서도 받아먹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왜요?"

"그야 들키니까요! 당연한 소리 무마시키려는 수작 부리지 마세요."

"수작 부리는 건 시작도 안 했는데."

"예?"

박서원의 말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박서원은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어 보일 뿐이다. 불안하다. 저렇게 웃으면 늘 결과가 안 좋던데. 내가 자리에서 도망가려는 것이 무색하게 박서원이 나를 잡고 단호박 케이크를 먹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계속 먹여줘서 버릇 들이게 하겠단 뜻인가 보다. 어지간히도 들키고 싶은가 보지. 하지만 역시 그때가 지금은 아니다. 나는 박서원이 먹여주는 케이크를 다 먹기 전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쯤 박서원을 이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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