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해준) 오늘 뭐 먹어요? -Side menu1-
박서원 시점 외전
*결말 부분 까지의 스포일러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읽으신 후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캐붕,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보다 전체적으로 많이 말랑한 느낌입니다.
***
"정해준 씨 보셨나요?"
"네? 어머, 여기 계셨는데."
정해준.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다. 처음 대기실에서 봤을 땐 새 시즌의 배우인가 싶었는데 오늘과 공동작가라고 소개 받았다.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박서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몰라도 걔는 알아야 하지 않았나. 제일 친한 친구인데. 오늘에게 물어보더라도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는 이야기 밖에 못 들었다. 다른 사람들 말로는 친화력이 좋은 성격이라 다른 배우나 스텝들과도 금방 친해졌다던데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방금도 여기 있는 걸 보고 온 거였는데 그 사이 사라져버렸다. 뭐 하자는 거지? 날 싫어하나? 하지만 난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만 아는 이가 저를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박서원 또 까였어?"
"조용히 해. 정해준 씨는."
"저~기. 근데 안 가는 게 좋다. 국장님이랑 얘기 중이거든."
나는 백주하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정말 정해준이 국장과 대화 중이었다. 국장이랑은 왜 또 아는 사이인가? 그렇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국장의 태도에서 그게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평소 무표정에 큰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 사람이 팔을 휘저으며 이야기 할 일이 뭐가 있느냔 말이다. 저 사람이 저렇게 얘기하는 건 해봤자 아들 얘기 뿐이다. 그럼 아들 얘기를 저 사람한텐 왜 하고 있고? 나한테도 잘 안 하는 얘기인데. 정작 그걸 듣는 정해준은 딱히 부담스러워하는 반응도 아니었다. 내가 말을 걸면 그렇게나 움찔 거리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만 수두룩하다.
"야, 정해준 얼굴 뚫리겠다."
"안 뚫려. 존댓말은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어?"
"반말 텄어. 쟤한테 존댓말 쓰는 거 불편해."
"싸가지는 내가 아니라 네가 없는 거 같은데."
"야,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쟤도 허락 했거든? 나한테는 선배라고 부르고. 너한테선 도망 다니느라 이런 얘기도 못했지?"
"......"
백주하가 옆에서 낄낄거리며 말하였다. 그래. 제아무리 새로운 배역이 들어왔다고 해도 이 드라마는 이름값 날리는 배우가 여럿이었다. 그러니까 보통은 보면 놀랄만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나조차도 이 정도 조합으로 모인 건 이 드라마로 처음 봤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정해준은 그 사이를 유유히 다녔다.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도 친분이 있는 것처럼 금방 친해졌다고 이야기 하였다. 저쪽에 있는 백성찬 배우도 이미 정해준에겐 반말을 하고 있었다. 더 웃긴 건 내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한 백주하다. 쌍둥이들은 사람에게 친근하게 굴지만 정작 친구는 나밖에 없다. 곁을 잘 안 내어주는 놈들이라 반말까지 가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불편하다고 바로 반말을 해? 여태 얘네를 잘못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님 다른 이유가 있는데 나한테 거짓말 하던가. 후자가 더 맞겠다.
웃긴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로 나를 피해 다니면 나도 기분 나빠질 법도 한데 그렇지도 않다. 그냥 왜 피하는지 궁금하고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답답한 마음이야 있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대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인간적인 호감이 생긴 이도 처음이다. 헛웃음이 날 정도다.
"됐어. 정해준 씨 나 왜 피해 다니는 지는 아냐?"
"응? 몰라."
"......"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상처 받는다?"
"받던가. 반말은 텄으면서 그런 건 안 물어봤냐?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물어보는 거 뻔히 알면서."
"아니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평소엔 우리보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며."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재밌지?"
"당연한 거 아냐?"
"쯧, 연을 끊던가 해야지..."
"넌 우리랑 절교하면 친구 둘이나 잃어서 네가 더 손해다?"
"너넬 10년 넘게 안 게 더 손해 같다."
나는 그런 백주하를 두고 국장과 정해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차라리 누가 이렇게 붙잡아 둘 때 가서 말을 거는 게 나을 성 싶다. 안 그러면 계속 도망갈 거 같으니까.
"정해준 씨."
"네...예?"
"박서원 씨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국장님."
"해준 씨껜 무슨 볼일인지?"
봐라. 국장도 이미 성을 떼고 부르고 있다. 저러는데 어떻게 수상하게 보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내가 정해준을 바라보니 정해준은 또 슬쩍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내가 뭐 잡아먹나? 도대체 왜 저러는지. 내가 정해준을 보며 입을 열려고 하자 국장이 팔을 들어 올렸다. 도포 자락이 내 앞을 막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씨가 부르더군. 내가 대본을 보고 몇군데 말한 게 있는데 해준 씨가 있어야 고칠 수 있을 거 같다고 전해달라고 했네."
"예? 아니, 그걸 지금 얘기 해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박서원 씨.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편집실 옆방에 있네."
결국 또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정해준을 보냈다. 나는 국장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날 막았다. 왜? 정해준이 날 불편해하는 걸 알아서? 그렇다 해도 그걸 국장이 막아설 이유는 없지 않나.
"불만이 많겠군."
"...네, 덕분에요."
"박서원 씨도 참 날 편해해."
"정해준 씨만 합니까?"
"하하, 그래. 보이는 걸로 모든 걸 판단하기엔 어렵지 않나."
"......"
국장은 분장으로 붙인 수염을 만지작 거렸다. 평소엔 정장 아니면 입지도 않는 양반이 걸친 도포 자락을 익숙하게 정리했다. 갓까지 알아서 고쳐 쓰는 게 마치 원래 입던 옷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걸로 모든 걸 판단하긴 어렵다고.
할머니께서 종종 이야기 해주던 말이다. 인간은 오감으로 정보를 받아들여 그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그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처럼 그 범위를 넘어서면 그만큼 인간이 짊어지기엔 어려운 책임감이 뒤따르기에 모든 걸 알더라도 모든 걸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랬던 할머니였기에 최대한 말을 아끼고 필요한 것만 이야기 해주셨다. 이마저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아니면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와 박서예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무당이 되진 않았으니 그게 정확하게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흔히 감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물려 받았기에 은연중에 무언가 더 있으리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역시 한계는 있었다. 그렇기에 정해준과 더 대화해보고 싶은 거고.
그렇다면 국장이 저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그래. 그도 나처럼 감이 좋다고 말하는 부류였다. 들리는 바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고 듣지 못하는 것도 듣는다던가. 그게 그가 정보력이 좋아서인지 할머니처럼 무언가를 더 닿을 수 있는 사람인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후자다. 그는 경호 외에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거의 쓰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엔 그는 아는 것이 많았다. 그게 무얼 뜻하는 지는 알았다. 그럼 정해준도? 아니, 그건 아니겠지. 방금처럼 도망치기만 하는 그가 그런 부류라고 하기엔 어리숙한 행동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왜? 어째서? 국장의 말을 들어봤자 머리가 복잡해질 뿐이었다. 점점 더 그와 얘기 해봐야 할 이유만 생겨났다.
"괜찮네. 워낙 얇으니 아무래도 오래 걸리겠지. 시간이 해결해줄 테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만 말아. 그러다 닿지 못하네."
국장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몸을 움직였다.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무슨 뜻으로 이야기 한 건지 잘 모르겠는 말을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
"정해준 씨?"
"네?"
우연히 만난 정해준을 집으로 데려왔다. 촬영이 끝나니 온데간데없어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던 이였다. 이렇게 만날 줄 누가 알았겠나. 술에 잔뜩 취한 채 물건은 죄다 잃어버린 터라 데려올 여지는 충분했다.
나는 손님방에 들어가 있는 정해준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쪽이 손님방이라 가리키면서 주긴 했지만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정해준은 이쪽 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우인가. 나는 문틀에 기대어 서서 비틀거리는 정해준을 보고 있었다. 정해준은 내가 불러놓고 별 대답이 없자 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말하였다.
"뭐 주실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저...옷 좀 갈아입게...나가주실래요."
옷? 정해준은 새빨개진 얼굴로 답하였다. 옷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내 집인데. 자기 집 구조가 내 집이랑 비슷한가? 그럼 나는 왜 있는지부터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대로 정해준에게 답하였다.
"옷이요? 옷이 어딨다고?"
"네? 여기 행거에...어라. 왜...없지."
"우리 집이니까 없죠. 드레스룸은 다른 방인데."
"네...? 그쵸...박서원 씨는...안방 맞은 편에서...갈아입잖습니까."
또 맞았다. 발음은 어눌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으면서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집은 방송에도 나온 적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집 구조를 설명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정해준에게로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그쵸. 거기가 제 드레스룸이죠. 제 침실이 어딘지도 아나 보네요?"
"그야...제일 안쪽 방이잖아요."
"왼쪽? 오른쪽?"
"......"
정해준은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이 내 쪽을 바라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동안 정적이 있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본인 집인데...제가..말해야 합니까..?"
나는 정해준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을 피했다. 술이 조금 깼나? 새빨간 얼굴과 발음이 어눌한 것은 같았다. 초점 없는 눈도 같았다. 연기? 그렇다기 보단 그저 무언가를 숨기는 태도이다. 나는 그대로 정해준의 손을 잡고 내 방으로 향하였다. 정해준은 비틀거리면서 내 발걸음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같이 자죠."
"네......?"
"정해준 씨가 우리 집이랑 본인 집을 착각 하는 거 같아서요. 따로 잤다간 뭐 사고 칠 거 같아요."
"아니...제가 왜..."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갈아입을 옷 금방 꺼내올게요."
나는 정해준을 침대 위에 앉혀두고 드레스룸으로 갔다. 사이즈는 대충 비슷하겠지. 대충 잘 늘어나는 거 같은 반팔과 반바지를 꺼내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정해준은 어디로 움직이지 않고 침대 위에 앉아서 방을 둘러보고 있는 거 같은 행동을 취했다.
"옷 가져왔어요. 이걸로 갈아입고 누워요."
"저...여기서...갈아...입어요......?"
"그럼요. 뭐, 어디 들어가서 갈아입게요?"
그 말을 들은 정해준은 무어라 반박할 말을 못 찾았는지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헛손질을 하긴 했지만 멀쩡히 옷을 벗었다. 내가 앞에서 옷을 건네주자 어정쩡하게 옷을 받아들고 입기 시작했다. 비교적 쉬운 바지는 셔츠보다 빠르게 갈아입었다. 나는 그대로 정해준을 침대에 눕히고 불을 껐다. 나도 곧바로 정해준의 옆자리에 누웠다. 애초에 큰 침대를 샀었던지라 성인 남성 둘이 누워도 별로 문제가 되진 않았다. 정해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가 눕혀준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해준 씨."
"네...?"
정해준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눈이 보인다.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눈동자다. 하지만 여전히 초점은 맞지 않는다. 나를 보려고 애쓰는 눈. 분명 나를 보려는 거 같은데....뭔가 다르다. 나를 보긴 보는데...뭘 보는 거지? 뭘 아는 거지? 솔직히 그냥 태도만 보면 스토커인가 싶어진다. 일반인들 선에선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것만 보면 일단 신고할까 했는데...기시감이 든다.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무언가가...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그가 보고 있는 다른 무언가가......
"...침대, 좋네요..."
"? 네."
"그래요. 잠은...이런 곳에서 자야지...그건...방이 아니라......"
정해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말끝을 계속 흐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저절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곤 정해준이 뒷 말을 잇기를 기다렸는데 정해준은 흔들거리던 눈을 멈추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자요. 오늘은...좋은 꿈 꿔요."
살풋 웃어 보이는 정해준의 얼굴이 피어났다. 그렇게 나를 보며 눈을 천천히 두어번 더 깜빡이다 눈을 뜨지 않았다. 그대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런 정해준을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이다. 다른 무언가를 본 게 아닌, 똑바로 나를 보았다.
그게 내 침대 위에서, 더군다나 내 옷을 입은 채로 나와 둘이 누워 잘 자라는 인사말이라니.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 담긴 건......
"......"
가늠하기 어렵다. 사실 무슨 느낌인진 알겠다. 하지만...그걸 네가, 나에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답은 나와 있었다. 과정을 내가 모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해준을 바라보았다.
만나기 전부터 이상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작가로 유명한 오늘과 갑자기 공동작가라며 등장하였고, 처음 보았을게 다름이 없던 배우와도 심지어 국장까지도 불편해하는 듯하면서도 친근감이 있는 듯했다. 애초에 오늘과 많이 가까운 듯한 태도부터가 수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은 좋은 사람인 것과 별개로 친화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로 친했더라면 그동안 얘기 한 번 정도는 들었을 터인데 모른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심이 가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를 가만히 두고 지켜본 이유는 별거 없다. 그는 촬영장에 자주 나오지 않았고,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대화할 적에는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아 그 점 때문에 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게다가 우리에겐 공동작가라고 했으면서 대본이나 드라마에 정해준의 이름이 들어가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이 점도 이상해 쌍둥이 쪽이나 구민석에게 물어봐도 그럴 수도 있지 않냐는 반응이었다. 그 반응이 더 수상해도 더 이상 물어볼 거리도 없었다.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주연배우 쪽의 과반수가 말이다. 심지어는 국장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국장이 그렇다는데 뭐라고 말하겠어.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결국 나도 크게 알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그와 흐지부지 헤어졌다. 애초에 촬영장과 회식 자리에서만 마주쳤던 사람이라 연락처 교환도 안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시나리오를 적지 않을까 하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었다. 얼굴도 괜찮았으니 어디 배우나 아이돌로는 안 나오나 종종 확인해도 비슷한 얼굴조차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내 앞에서. 그러다 오늘에서야 다시 마주친 거였다.
다시 보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왜 공동작가라는 말장난을 쳤는지, 다른 배우들과는 무슨 연이 있는 건지, 왜 내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지, 왜 그렇게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하지만 얼굴을 보니 막상 그런 걸 물어보지 못했다. 술에 잔뜩 취해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물어봤다가 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그렇게 질문을 아끼니 지금은 고른 숨을 내뱉으며 내 옆에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난 누구 때문에 못 자고 있는데. 잠이 오질 않으니 옆에서 얼굴 구경이나 했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차가운 느낌이 드는 인상이었다. 아까 웃을 땐 이런 인상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괜히 정해준의 앞머리를 건드렸는데도 세상 모르게 얌전히 잠들어 있다. 그 표정이 왜 이리 얄미워 보이는 건지. 그렇게 정해준의 머리카락이나 더 만지고 있자 갑자기 정해준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에서 깬 건가 싶어서 얼굴을 쳐다보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우으응, 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고른 숨만 내뱉고 있었다. 우으응이 뭐야. 자기가 고양이도 아니고.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준 덕분에 나는 옆으로 누운 채로 충분히 얼굴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정해준이 중간중간 내 다리를 건드렸기에 내가 잠들 것 같으면 나를 깨우기도 해서 결국 제대로 자진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 콩나물을 사 온 뒤 콩나물국을 끓여도 정해준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내가 그의 몸을 몇 번 흔들고 나서야 내 침대를 뒹굴며 일어났다. 왜 저러나 했더니 숙취 때문인 듯했다. 기억이 뜨문뜨문 끊기는 듯했으니 술을 궤짝으로 먹긴 한 듯했다. 내가 숙취해소제를 열어 건네주자 양손으로 받아 들고 가만히 있다가 한입에 털어 넣었다. 식탁에도 혼자서 못 앉아서 내가 데려와 앉혀 주었다. 평소에 딱딱하게 굴던 사람이 좀 흐느적 거리니 웃긴 거 같기도 하고. 그거 말고도 카레를 먹자마자 사레가 들려 내가 내민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걸로도 모자라 제집처럼 밥을 다 먹으니 정리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웃겼다. 민폐를 끼칠 건지 안 끼칠 건지 하나만 하지. 내가 차키를 내밀었을 때 눈을 땡그랗게 뜨는 게 제일 인상적이었다. 이런 표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적어도 이땐 내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정해준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연락처를 주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물어볼 건 다 물어봐야 하지 않겠나. 만일 그 대답이 할머니와 같은 이유에서라면 봐줄 의향이 있다. 그리고 간혹 그런 대답 중에선 시간이 지나면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기다릴 수 있다. 그 전에 나를 똑바로 보게 된다면 그렇게 궁금해지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그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니까.
[연락처 저장했어요.]
[집엔 잘 갔어요?]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잡아두던가 해야지. 도망가면 안 되니까.
***
"......"
"...왜요?"
"아뇨, 그냥. 새삼스러워서요."
"? 제가 사과 깎는 게요?"
"그것도 그렇고요."
정해준은 내 앞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 매번 내가 깎으니 자기도 해보겠다며 꽤나 능숙하게 사과를 조각내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잘 깎았나? 요리의 대부분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으니 오히려 이런 걸 그다지 볼 기회가 없었다. 앞으로 한 번씩은 부탁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부러 아무 말 없이 입을 열고 기다리자 정해준은 깎아둔 사과를 내 입에 물려주었다. 이것도 익숙해진 탓에 정해준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제 정해준은 내 눈을 똑바로 본다. 나를 본다고 해서 껄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요? 하고 내게 되물어본다. 거기에 고개까지 살짝 기울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음. 갸웃거리는 거 까진 좀 과하긴 한데. 귀여우니 상관 없지 않나 싶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미소 지어 보이자 정해준은 눈을 가늘게 떠 보였다. 또 내가 무슨 허튼 생각하나 싶겠지. 별 생각 없는데. 나는 내가 먹은 사과 조각을 정해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가늘게 떴던 눈을 다시 풀고 사과를 받아먹었다. 이제 왜 자꾸 먹이냐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착실하게 버릇되어 가는 중인 거 같다. 왜 안 주냐고 할 때까지 할 생각이다. 그 편이 귀엽지 않은가. 정해준이 부끄러워 하는 것도 재밌을테고.
그런 그를 다시 웃으며 바라보자 볼이 살짝 붉어지는 게 보인다. 이 얼굴을 참 좋아한다. 딱히 싫었던 적은 없지만 이런 순간일 때마다 이 얼굴에 고마워 하는 중이다. 그가 외모에 약하다는 점도 좋고. 취향이 뚜렷해서 생각보다 다른 잘생긴 이들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점은 더 좋고. 분명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건 맞는 거 같은데도 그는 여전히 내게 얼굴을 붉혀왔다. 덕분에 매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나도 일부러 이렇게 웃지 않는 이상 그는 얼굴을 잘 붉히지도 않았으니 이럴 때마다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짧게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사과맛이다. 이것도 괜찮네. 내가 입을 떼어 정해준을 바라보자 사과를 깎고 있던 손은 멈춘 상태였고 눈을 나를 보다가 데구륵 굴리고 있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저게 그 나름대로 부끄러움을 참는 중이었다. 안 참아도 되는데. 그냥 귀엽기만 해서 별 생각이 안 든다.
그러자 얼마 안가 정해준이 내게 입을 맞췄다. 이럴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는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연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싫어할 애인은 없었다. 전에 사귀었다던 사람들은 왜 헤어졌지? 이런 사람 놓쳐봤자 뭘 한다고. 나는 그의 허리를 잡으며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원하는 바는 이미 이루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라는 것이 늘어만 났다. 그리고 그는 그런 나를 받아주었다. 그거면 됐다. 내가 당신을 보고, 당신이 나를 보는데. 내가 당신 곁을 떠나봤자 뭘 하겠나. 당신 생각이나 하겠지. 검은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닫힌다. 그걸 보며 나도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정도면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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