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해준) 오늘은 뭐 먹어요?

(서원해준) 오늘 뭐 먹어요? -아스파라거스 삼겹살 말이-

요리하는 박서원x영상 찍는 정해준

*결말 부분 까지의 스포일러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을 읽으신 후 열람해주시길 바랍니다.

*캐붕,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보다 전체적으로 많이 말랑한 느낌입니다.


***

"펜션이요?"

해가 하늘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고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이런 날에는 에어컨이나 빵빵하게 틀고 집 안에 있는 게 상책이다. 이러면 지구온난화가 더 빨리 가속된다는 건 알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지. 대충 그런 거다. 그렇게 에어컨을 틀어놓고 소파에 늘어져 있으니 박서원이 대뜸 말한 것이었다.

"에어○엔비예요? 언제?"

"다음 주 주말이요."

"다음 주가 제일 피크 아니에요? 어떻게 구했어요?"

"구민석 씨께서 하나 빌려주던데요? 뭐, 그 분 소유는 아니긴 해요. 아는 분 꺼라던데 그 분은 일이 바빠서 못 쓰신다네요. 그렇다고 놀리면 먼지만 쌓이고, 주변에 빌려줄 사람은 없어서 건너건너 나한테까지 왔다고 하던데. 거짓말이죠?"

"아마도요..."

"짐작은?"

"...형님 분들 중 한 분이시겠죠."

"아하. 그쪽."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혜를 마셨다. 박서원이 듣자마자 납득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말하는 형님들은 이산래의 형들을 얘기하는 거다. 일전에 말했던 대로 그 사람들은 기억이 온전했다. 즉, 내가 뭘 했는지 알고 있단 뜻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게 감사해했다. 내 덕이라나. 아니라고 말해도 듣질 않았다.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아니라 네 명이라─이산래의 형이 넷이나 되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거절해도 끝이 없었다. 내가 직접 주는 걸 받지 않으니 돌려서 내게 도착하게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박서원은 내게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옆에서 직접 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촉이 좋은 박서원이 거짓말이라고 먼저 물어보지 않았나. 말한 적 없었을 때도 그랬다.

"아니, 알았는데 받아왔어요?"

"뭐 어때요. 한 번 정도는 받아줘요. 정해준 씨로는 안 되니까 이제 나한테까지 온 거잖아요."

"그건...그런데..."

"어차피 한동안 바깥에서 뭘 못할테니까...차라리 그런 사람들이 관련된 장소가 더 안전할 거예요. 적어도 카메라는 없겠지."

박서원이 크래커를 먹으며 말하였다. 저 사람 저거 먹어놓고 이따 또 밥 안 먹겠다고 할 텐데. 아무튼 박서원 입장에선 안 들키고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곳이니 오케이라는 것이다. 그치. 여름이라 어디 놀러 가고 싶은데 이산래의 말 때문에 부러 더 집 안에만 있었으니까. 덕분에 박서원은 나보다 더 늘어진 채로 지내고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정해영 말대로 밖에서 일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나는 과자를 먹는 박서원을 보며 말하였다.

"누구랑 가요, 그럼?"

"둘이서만 가죠?"

"...펜션인데요?"

"그러니까 가보는 거죠. 언제 둘이서 조용히 가봐요. 아, 펜션에 수영장 있대요. 굳이 멀리 안 나가고 거기서 놀자고요."

박서원은 손에 들고 있던 크래커를 공중에 빙 돌리며 말하였다. 물 비린내 싫어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지만 박서원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노려봐봤자 안 알려주니 나는 금방 눈을 돌렸다. 박서원과 말하면서 이산래에게 연락을 넣어둔 차였는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용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이 사람도 알고 있었네. 조심하라며? 이건 안 조심해도 돼? 그렇게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박서원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수영복 있어요?"

"아니 뭐...그냥 반팔 반바지 입고 놀아도 되죠."

"그렇게 놀았어요?"

"...그쵸? 보통은? 수영장에서 놀기보단 아예 계곡이나 바다에서 놀았으니까요."

"흐음. 그래요. 나도 그래야겠네."

박서원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다 포기했다. 박서원은 여태 수영복 입고 놀았나. 이상한 건 아니긴 한데. 뭔가...있는데. 아까부터 불안감이 슬금슬금 타고 올라왔지만 알 수가 없었다. 별일 아니라고 애써 넘길 뿐이었다.

***

"...정해준 씨."

"네."

"둘이서만 오자고 했던 거 같은데."

시간이 흘러 지금은 펜션 앞이다. 선글라스로 앞머리를 올린 박서원이 내게 말하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박서원과 얼굴이 닮은 여자가 박서원과 똑같이 선글라스로 앞머리를 올렸다. 그러곤 옆에 같이 서 있는 여자의 팔짱을 끼며 조잘거렸다. 그 옆에 있는 건 오늘이다. 오늘은 자신의 친구에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박서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보았다.

"아깝잖아요."

"쟤네가 나보다 잘 놀러 다닐 텐데 뭐가요."

"그래도 이런 펜션에선 못 놀 거 아녜요."

"그 기회를 꼭 오늘 정해준 씨가 줘야 했어요? 다 큰 어른이면 알아서 할 텐데."

"뭐가 이렇게 말이 많아. 그만 궁시렁거려. 시끄러워."

오늘 옆에 붙어있던 여자는 어느샌가 박서원의 뒤로 와 박서원의 어깨를 때렸다. 박서원은 그런 여자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하려 하더니 작게 폭력 반대. 하고 중얼거렸다. 여자는 그런 박서원을 무시하고 얼굴을 활짝 피며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해준 오빠.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서예 씨."

박서예는 씩 웃어 보였다. 박서원과 닮은 미소다. 박서예가 들으면 짜증 낼 테니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한다.

세계가 합쳐지고 나서, 저쪽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유일하게 내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는 박서예의 얼굴도 잘 몰랐다. 하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저 얼굴은 박서원의 가족이 아닐 수가 없음을 알 수가 있었다. 박서원보다는 조금 더 얇고 유한 느낌이지만 눈꼬리를 접어 웃어 보이면 박서원과 쏙 빼닮아 있었다. 저런 얼굴이 세상에 둘이라니. 애석하게도 박서예는 이런 외모임에도 미디어에 나오는 직종이 아니다. 선생님이라던가. 덕분에 정해영은 박서예의 얼굴을 모른다. 걔만큼 학교와 거리가 먼 놈도 없고. 가볍게 맞잡았던 손을 놓으니 박서예는 말을 이었다.

"편하게 부르세요. 음, 그러니까...새오빠?"

"...그냥 평소답게 부르시죠."

"그래요. 새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박서예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박서원은 운이 좋다. 내가 박서예를 먼저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비슷하면 말이나 하지. 아니, 그래서 말 안 했나? 아니나 다를까 박서원은 박서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끌어가 자신의 옆에 날 끼웠다. 박서예는 그런 박서원을 보고 진절머리를 쳤다. 꼴값이란 뜻이다. 내 생각도 비슷하다.

"해준 씨."

"아, 오늘 씨도 안녕하세요."

뒤늦게 인사를 건네자 오늘이 순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이 박서원에게로 눈을 돌리자 박서원도 조금 더 유해진 표정으로 오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작게 인사하고는 눈짓으로 박서원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 눈짓에 박서원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오늘은 기억이 있는 사람이다. 빌더쓰의 작가이기도 하다. 내가 보조 작가 겸 하면서 들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물론 저쪽에서도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이다. 선물이야 기회가 될 때마다 주고 있지만 오늘이 어떤 사람인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꾸 거절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번 기회는 나도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한동안 아이디어 구상을 위해 대본 쓰는 것을 멈춰둔 상황이라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이다. 나도 오늘도 이런 곳을 올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정도 소수정예이면 그녀도 편하게 쉴 수 있겠지. 박서원이 무어라고 할 수 없는 대상 중 한 명이기도 하고. 박서원은 나를 놓은 대신에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후폭풍이 좀 두렵긴 하지만 어쩌겠어.

"얼른 들어가요. 저도 이렇게 큰 펜션은 처음이에요. 그치, 늘아?"

"응. 난 집도 이렇게 큰 곳은...국장님 댁 뿐이었던 거 같은데."

"국장님? 거기도 엄청 크겠네. 도우미 분들도 계신댔지? 해준 오빠도 가셨다면서요?"

"네. 거기도 주택이고...이것보단 컸을걸요."

"다들 그렇게 큰 집은 어떻게 찾나 몰라. 늘아, 우리도 큰데 사서 같이 지낼까? 큰집은 좋긴 좋은데 치우기는 너무 힘들고. 해준 오빠 말 들어보면 좋은 거 같던데."

"큰집 살 능력이나 되고 말해."

"같이 살게 되면 집들이도 하자. 쟨 빼고."

박서예는 오빠가 긁던지 말든지 웃으면서 오늘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그게 퍽 즐거운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은 마음에 안 드는가 싶었는데 오늘이 웃으니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선 펜션의 문을 열고 차 안에 있던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본적인 도구는 펜션 쪽에서 준비해두었기에 갈아입을 옷이나 먹을 거 정도만 준비했다. 확실히 주변에 사람도 없고 딱히 건물도 없어 보였다. 대신 배달은 못 시켜 먹을 거 같네. 나는 맥주캔을 넣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

"왜요?"

"...자리가 없는데요."

나는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냉장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냉동실도 별반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큰데 이걸 다 채워놨네. 1박 2일이라고 말해뒀던 거 같은데. 다행히 옆에 있던 다른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어서 거기에 넣어뒀다.

뒤늦게 개인 짐부터 방으로 옮겨둔 두 사람이 냉장고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박서원은 이 사태를 물어본 것인지 이산래에게서 온 답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산래의 형이 보낸 답장을 그대로 보여준 사진이었다. 사진 속 그 사람은 아낌없이 먹으라며 내게 또다시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사는 이제 그만 해도 될 거 같은데 말이지. 오늘은 내 눈치를 보고 입모양만 뻐끔거렸다. 그 분이요? 네. 내 대답에 오늘 또한 멋쩍게 웃어 보였다. 오늘도 나와 비슷하게 그들에게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감도 여전히 좋았으니 내가 오늘이 간다고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알았겠지. 그래서 이렇게 되어있는 걸 테고. 박서예가 의아해하는 사이 오늘이 몇 마디 하자 곧바로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저쪽도 저쪽 나름이군. 오늘은 박서예에게 뭐라고 설명해뒀을까.

펜션이 워낙 큰 덕에 한 명이 방 하나씩 가지게 되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사실 그렇게 해도 방이 남았기에 남은 방에는 냉장고에 넣어도 되지 않아도 될 물건들을 모아두었다. 나와 박서원도 대강 정리를 끝내고 다시 거실로 모였다.

바베큐는 저녁에 하려고 하였기에 점심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였다. 내가 수영장에서 적당히 놀고 컵라면으로 때우면 안 되냐고 하니 박서원에게 기각 당했다. 왜. 수영장에서 놀고 컵라면 먹으면 맛있는데. 그러자 박서예가 나와 박서원, 오늘을 밀며 말하였다. 점심 정도는 자신이 간단하게 준비할 테니 우선 가서 놀고 있으라고. 박서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박서예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했지만 저녁에 할 바베큐는 박서원 담당이니 특별히 점심에는 쉬게 해준다고 하였다. 오늘이랑 나는 쉬어야 하니 손 까딱 하지 말라고. 박서예는 자신도 휴가를 낸지라 박서원과 다를 바가 없다고. 교사도 방학이 있던가. 동기 중에서 선생님이 된 애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던 거 같은데. 역시 사람 바이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나와 오늘, 박서원은 적당히 옷을 갈아입고 풀장에 도착했다. 야외에 있는 건 아니고, 한 쪽이 통창으로 크게 나 있는 실내 수영장이었다. 천장 일부분까지 창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오늘도 나와 비슷하게 적당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채였다.

"수영 잘해요?"

"그럼요. 저 수영 좋아해요."

그렇게 말한 오늘은 방긋 웃어 보였다. 정말 제대로 수영할 것인지 오늘은 평소 쓰고 있던 안경도 벗은 채였다. 렌즈 낀 거겠지? 맨얼굴은 잘 볼일이 없어서 조금 새로웠다. 머리도 틀어 올린 채라 분위기가 조금 달라 보였다. 오늘은 내게 웃어 보이다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작게 말하였다. 그리고 물에서 좀 놀아야 이따 서예한테 간다고 해도 괜찮아 할 거예요. 서원 오빠도 그래야 좋아할 걸요. 그러곤 작게 웃어 보였다. 자길 위해서 노는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수영을 좋아하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오늘에게 말하였다.

"서예 씨가 놀고 싶어질 만큼 즐겁게 놀죠."

"서원 오빠도요?"

"저 사람이 물에 들어올까요?"

"그럼 그것도 목표로 삼아요."

우리끼리 재밌게 놀면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이 스스로 물에 들어와서 놀면 그거대로 재밌겠다 싶다. 애초에 근처로 올지부터 궁금한데. 우선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나와 오늘은 스트레칭을 마치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차가운 온도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다. 고개를 빼 들고 물이 흘러 내리는 앞머리를 넘겼다. 물이 생각보다 깊네. 내가 제자리에 서 있어도 어깨와 머리가 겨우 나올 정도였다. 오늘도 고개를 내밀었는데, 제자리에 잘 떠 있었다.

나는 오늘과 함께 수영하며 누가 더 먼저 도착하나 내기를 걸었다. 솔직히 수영에 그렇게 자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늘이 정말 빠르기도 해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져버렸다. 기분이 좋은지 오늘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니 둘 다 금세 지쳐버렸다. 직장인의 체력이란. 우리는 풀장 근처에 놓여있던 튜브를 끌고 와 각자 적당히 물 위를 떠 있었다. 아마 이것도 준비해준 거겠지. 감사히 잘 쓰겠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수영 안 하네요."

"아까 했어요."

"그 사이에 지쳤어요? 운동 해야겠네. 체력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헬스장이나 갈 수 있게 해주던가요."

"음? 아~...노력 해보죠."

박서원이 그렇게 말하더니 입꼬리를 한 쪽만 올리며 이죽였다. 짜증나게. 다행히 옆에 있던 오늘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말조심 해야지. 나는 발을 조금 움직여 오늘에게 다가가 작게 말하였다. 자기가 못 나간다고 저도 못 나가게 잡아서 그래요. 오늘은 그 말을 듣고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박서원에게로 헤엄쳐 가 나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말이 이야기 하는 거지 조곤조곤 혼을 내고 있는 거였지만. 박서원은 오늘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다가 내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나는 모르쇠 했다. 그러니까 진작 잘하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물 위를 둥둥 떠 있었다.

"해준 씨."

"네."

"서원 오빠는, 아직도 기억 못하는 건가요?"

이야기가 끝난 건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온 오늘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며 생각하는 척을 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은 워낙 눈치가 좋아서 일부러 다른 행동을 섞어야지 알아차리기 어려워진다. 그만큼 조심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늘도 이곳에서 합쳐졌을 땐,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 사람분의 기억이 모조리 들어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가까웠던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걸 겪었지만 그는 달랐다. 청룡이 말했었다. 혹시라도 기억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은 없으니, 그런 건 기대도 하지 말라고.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가? 그래도 감상은 비슷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합쳐진 후 내가 그동안 보아온 그는 그이면서 '그'가 아니다. 이것만큼은 내가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에게서 아직도 라는 말을 듣다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나요?"

"아뇨, 확인차 여쭤본 거예요."

그러더니 오늘은 한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더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걸 더 듣기 위해 오늘에게 다가갔다.

'저는 오빠가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오빠는 싫어하겠지만요.'

오늘은 그렇게 말하곤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덜 괴로울 수도 있겠지. 특히 박서원이라면. 하지만 오히려 박서원이기에 그것까지 자기의 것이라며 놓지 않으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박서원 씨."

"왜요."

"조금은 어른이 되어 보는 게 어떨까요."

"난 이미 충분히 어른이에요."

"얼굴에 준 힘이나 풀고 말씀하시죠."

박서원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그의 곁에서 꽤 지내니 무슨 감정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자길 두고 노는 내가 싫기도 했고, 오늘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다. 참고로 후자는 내가 아니더라도 오늘과 가까우면 싫어한다. 웃긴 사람 같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도 될 텐데. 내가 봤을 땐 오늘과 가까운 사람이 적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박서원 때문일 거다. 나는 팔을 저으며 박서원에게 다가갔다.

"물에는 안 들어오게요?"

"...안 들어가요."

"시원한데."

"오빠도 들어와."

"늘아, 너까지 왜 그래."

"내가 뭘...해준 씨 말대로 자꾸 노려보니까 그렇지. 그럴 거면 그냥 들어와서 당당하게 같이 놀아."

오늘은 입을 삐죽이며 말하였다. 하고 싶은 말 다 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좋다. 나와 오늘이 나란히 물에 뜬 채로 박서원을 바라보고 있자 박서원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반팔티를 대강 벗어던지고 물 안으로 들어왔다. 물에 떠 있을 줄 알면서 귀찮은 건지 놀래키려고 한 건지 내가 쓰고 있는 튜브에 팔을 걸쳤다. 덕분에 튜브가 기울었다. 머리는 물에 적시기 싫어하겠지. 나는 박서원에게 물을 튀겼다. 물을 맞은 박서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곧바로 오늘 쪽에서도 박서원에게 물을 튀겼다. 그러자 박서원이 튜브에 걸치던 팔을 빼내어 슬금슬금 멀어지길래 오늘과 합심하여 박서원의 머리 끝까지 물에 적시는 걸 성공했다.

나와 오늘이 하이파이브를 하자 박서원은 머리카락을 털고는 내 쪽으로 헤엄쳐오더니 내 튜브를 엎어버렸다. 물에 빠진 내가 젖은 머리를 다시 올리니 이미 오늘은 박서원에게 쫓기고 있었다. 박서예가 그만 놀고 나오라고 소리치고 나서야 우리는 그 대치를 끝낼 수 있었다.

***

박서예가 준비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조금 쉰 뒤 오늘은 박서예와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까 같이 못 놀았던 거 때문에 같이 가는 거 같지만 친구랑 노니 그거면 됐지 않나 싶다. 나는 그런 둘을 두고 소파에 앉아있다가 오늘과 박서예에게 잡혀 수영장으로 끌려갔다. 평소엔 둘이서 잘만 놀았는데 날 왜 끌고 가나 했더니, 내가 다시 수영장에 들어가자 박서원이 근처까지 다가와 눈살을 찌푸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박서원을 보며 박서예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박서원을 비웃었다. 오빠 골탕 먹히기였나. 중간중간 갑자기 귓속말도 했는데 박서원은 내게서 독립할 필요가 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전에 박서예 앞에서 박서원이 헛소리 해서 그런가. 하긴 그때도 박서예가 박서원의 뒤통수를 때렸다. 동생 기준에서도 별로란 소릴 테니까.

그나저나 이 사람들 너무 스스럼없이 귓속말 하는 거 아닌가? 하다못해 오늘은 그렇다 치겠는데 박서예는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내가 놔줘도 박서원이 안 놔줄 거라서 상대적으로 안심된다고 했다. 그럼 나는? 되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대화가 모두 귓속말로 했던 거라서 결국 박서원이 수영장으로 뛰어들었기에 대화는 중지 되었다. 박서원에게 물세례를 맞지 않도록 피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말 했냐고요."

"별 말 안 했다니까요."

"근데 왜 말 못해요?"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니까요."

저녁 준비를 위해 박서원과 함께 수영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박서원은 여전히 표정이 팍 상해있었다. 연애 초기 때나 이러더니 갑자기 왜 또 이러는지. 나는 걸어가던 걸음을 돌려 박서원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오늘 씨랑 박서예 씨께 얘기 해봤자 뭘 하겠어요. 박서원 씨 뒷담이나 하고 말겠죠."

"그런 거 아니잖아요."

"박서예 씨랑 오늘 씨께 물어보시던가요. 뒷담 했다고 하실 텐데."

"......"

"그럼, 박서원 씨는 뭐가 그렇게 불안합니까?"

박서원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박서원도 오랜만이다. 그때도 이렇게 물어봤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온건하다. 그땐 박서원이 막 밀어붙이고 그랬을 때라 솔직히 왜 그러는지 다 아는 내가 아니었으면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뭐, 박서원이 눈치가 빨라서 내가 이런 말투로 말해도 딱히 상처 받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박서원은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 채였다. 그 사이로 익숙한 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박서예요."

"예?"

"걔, 여태껏 다른 사람 봤을 때 그렇게 친근하게 군 적 없어요."

설마 동생을 경계한다거나 하는 막장은 아니겠지.

"정해준 씨는 촬영 때도 그랬었으니까..."

아. 이쪽 경계?

"거기까진 이해했어요. 정해준 씨 말대로 내 뒷담이나 깠겠죠. 그랬던 사람은 생각보다 없었으니까 박서예 입장에선 신나겠죠."

이 성격에 용케 여태 그런 사람이 없었구나 싶다.

"근데, 그럼 난 왜 피했었어요?"

박서원의 말에 반대로 입이 다물리는 건 나였다. 별수 없다. 정말 말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저쪽에서 본 당신과 여기에서 본 당신의 미묘한 괴리감 때문에 쳐다보기 어려웠다고. 박서예는 박서원과 비슷하게 생겼더라도 박서예는 박서예다. 어차피 저쪽에선 만나지도 못한 이다. 그리고 사실상 저 문제는 이미 해결된 거라 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박서원은 납득이 되지 않는지 말을 이었다.

"난 내 외모나 성격 때문에 그런 줄 알았어요. 나랑 닮은 사람이랑 뭐가 있었나 해서."

"......"

"근데 박서예한테 구는 거 보면 그건 아닌 거 같고."

결국 그 생각이 박서원의 불안감을 다시 일으켜 그렇게 다가온 것이었다. 인정한다. 여과 없이 내 잘못이다. 박서예는 이 사실을 알 리가 없고, 오늘도 이 정도까지는 모를 터다. 나와 박서원의 관계에서 있는 일이니까. 이 부분은 내가 알아서 신경 써야 했는데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박서원에게 다가갔다.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를 넘겨주었다. 눈살을 찌푸리긴 하지만 나를 피하지는 않는다. 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미안해요."

"......"

"박서원 씨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제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이유는, 여전히 못 말해?"

나는 박서원의 말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늘상 하는 대답을 했다. 미안해요. 이런 부분에서 박서원은 늘 내게 져주고 있었다. 나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에 평소에 박서원이 좀 제멋대로 굴더라도 넘어갔다. 그래봤자 그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거다. 나는 입을 달싹이기만 하는 박서원에게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못 말하지만,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는 이미 사라졌어요. 그렇게 된 지 오래예요."

"......"

"그러니 이제 제가 박서원 씨를 마주 보지 못 할 일은 절대로 없어요."

"절대로?"

"네."

대답이 끝나자마자 박서원이 내게 입을 부딪혀왔다. 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박서원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숨이 넘어갈 듯 내 숨을 집어삼켰지만 딱히 밀어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작은 숨 하나를 겨우 토해낼 정도가 되어야 박서원은 내게서 입을 뗐다.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 있는 박서원을 바라보았다.

"약속 지켜요."

그렇게 말하는 박서원은 나를 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였다.

***

재료는 간단하다. 아스파라거스, 대패 삼겹살, 소금, 후추. 우선 아스파라거스는 밑동을 잘라낸 뒤 감자하러 껍질을 벗겨낸다. 꼬치용으로 만들 예정이라 이때 미리 4등분을 내준다. 삼겹살은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해둔다. 본래 아스파라거스는 데치는 것이 좋은데 이번엔 센 불에서 구울 거기 때문에 넘기기로 한다. 자른 아스파라거스에 밑간을 해둔 삼겹살을 돌돌 감아준다. 그리고 준비된 꼬치에 하나둘 끼워놓는다.

"다 했어요."

"이쪽에 놓고 가요."

밖으로 나가자 박서원은 익숙하게 집게로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바베큐를 하는 건 처음 본 거 같은데, 어차피 집에서도 고깃집에서도 잘했던 그였기에 역시나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본가에서 지낼 땐 나도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굽긴 했지만 박서원이 훨씬 잘 구워냈기에 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오빠, 언제 돼~"

"기다려. 옆에 늘이도 잘 기다리잖아."

"나도 배고파."

"조금만 있어 봐."

"저도요."

"이리 와요."

"뭐야, 박서원? 나랑 늘이는?"

"너네도 집게로 먹여줘?"

"으, 됐네요."

박서예는 박서원의 말에 진절머리를 냈다. 정해영은 집게로라도 내놓으라고 하는데. 걔가 돼지인 게 맞군. 나는 박서원의 손짓을 따라 그의 옆에서 잘라낸 고기를 받아먹었다. 좀 뜨겁긴 해도 역시 맛있다. 나는 박서원이 준 고기를 먹으며 꼬치를 반대로 뒤집었다. 꼬치는 내가 만든 것 말고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쪽도 맛있겠다. 그 사이 박서원은 잘라낸 고기를 내게 건네었다. 나는 그걸 받아서 들고 테이블로 가져다 놓았다. 오늘과 박서예는 곧바로 고기를 입에 넣어 먹기 시작했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둘 다 웃어 보였다. 나는 그 사이 쌈 채소에 고기와 밥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예요?"

"쌈이죠."

"먼저 먹어요. 난 이따 먹으면 되니까."

"그래 놓고 얼마 안 먹을 거잖아요. 일단 하나 먹어요."

박서원은 나와 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벌려 쌈을 받아먹었다. 할 일을 마친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오니 박서예에게도 오늘에게 쌈을 먹여주고 있었다. 내가 오자 오늘이 조금 당황한 거 같았지만 결국 그도 받아먹었다. 그러곤 원래도 한 번씩 받아먹는다며 내게 해명하였다. 부끄럽나? 나도 박서원 입에 넣어주고 온 길이라서 딱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오늘과 박서예도 그러고 있어서 내가 한 행동도 별일 아닌 게 되어서 좋은 쪽이었다. 오늘도 간식 아니면 많이 먹질 않으니 박서예가 먹이고 있는 거겠지. 오늘은 더 먹어도 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먹기 시작하였다. 물론 아까 가져온 캔맥주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내가 꽂아둔 꼬치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꼬치에 있는 걸 하나씩 빼내 먹었다. 육향을 풍기는 삼겹살과 아삭한 식감이 남아있는 아스파라거스가 잘 어울렸다. 대패라서 그렇게 질긴 것도 아니라 더 먹기 편했고. 나는 하나를 또 빼내어 박서원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서원은 내가 먹여주는 걸로 거의 식사를 하고 있다. 내가 안 주면 몇 점 먹고 그만둘 사람이니까. 앞에 앉은 오늘도 지금은 잘 먹고 있는 듯해 안심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니, 박서원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박서예나 오늘은 이미 거의 다 먹었다고 하였기에 캔을 몇 번 부딪히고는 박서원이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늦게까지 수영장에서 나오지 않고 놀았던 탓에 피곤했는지 그 둘은 큰 반항 없이 들어갔다. 방은 따로 있지만 아마 저쪽도 같이 놀다가 같이 잘 터다. 박서원은 그제서야 힘을 빼며 내 옆에 앉았다.

"고생 많았어요. 이거 먹어요."

"배불러요."

"몇 입 먹었다고 그런 소리를 해요?"

"정해준 씨가 먹여준 걸로 다 먹은 거 같은데."

"그럼 여기 왜 앉아 있어요. 들어가서 쉬어요."

"싫어요. 들어가면 박서예가 나 쥐어 뜯을걸요."

"평소에 동생한테 잘하면 되잖아요."

"난 잘했어요."

박서원과 실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바깥에는 풀이 우거졌고 밤이 되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단 밝고 높은 소리였다. 매미가 우는 소리도 잦아들어 훨씬 고요해졌다. 그 소리를 멍하니 들으니 어깨에 무언가가 툭하고 건드렸다.

"졸려요? 들어갈까요?"

"아뇨. 잠시 이러고 있어요."

그는 눈을 감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찌르르 울리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더운 날씨에 바깥에서 고기를 굽고 먹은 데다 술까지 먹었으니 몸에서는 계속 열이 났다. 박서원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계속 불 앞에 있었던지라 땀을 조금 흘렸는데 그보단 장작의 탄내가 났다. 묘하게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와 나는 팔만 움직여 티슈를 가져왔다. 그걸로 박서원의 이마를 닦아냈다. 적당히 닦아내고 티슈를 치우자 박서원과 눈이 마주쳤다.

"정해준 씨."

"네."

"술 냄새 나요."

"마셨으니까요."

"열도 나고요."

"...더워요?"

"덥죠. 그렇다고 일어날 생각은 마시고."

박서원이 내 손목을 잡았다. 딱히 일어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날 잡은 이 손을 치울 생각도 없었다. 그가 잡은 부분에서 더 열이 났다. 박서원도 더웠던지라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으니까. 나처럼 얼굴까지 열이 나진 않겠지만 말이다. 나 지금 얼마나 빨갛지? 한 손을 올려 한 쪽 볼에 가져다 대어 보았지만 손 역시 똑같이 뜨거웠기 때문에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 모습을 박서원이 본 것인지 다른 손으로 내가 만졌던 볼 위로 손을 올렸다. 이쪽도 만만치 않게 뜨거웠다.

"얼굴도 다 익었네."

"...박서원 씨도 뜨거워요."

"말 오해하게 하지 말죠."

"제가 뭘요."

"쯧, 역시 둘이서만 왔어야 했다니까..."

박서원이 작게 혀를 차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있던 물이 맺힌 페트병을 들고 물을 몇모금 마시더니 나를 보고는 또다시 물을 마셨다. 작은 페트병 하나를 다 비워낸 박서원은 소리 나게 테이블 위로 병을 올려놓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불공평해서 안 되겠어요."

"뭐가요?"

"나 피해 다녔던 거. 나중에 말해요."

"......"

"당장 말하라고 안 한 걸 다행으로 여겨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또 도망갈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안 도망간다니까요..."

"그래도. 터무니 없어도 상관 없어요. 그 말이 진실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밝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때와 같은 더운 날씨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기 해가 져있고, 몸에서 열이 오르지만. 당신은 여기서도 기다리는구나. 내가 말할 때까지. 나는 그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네."

그러니 나는 그런 당신에게 말해야만 했다. 이제는 그 순간이 기다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서원은 내 대답을 듣고 천천히 입을 붙여왔다. 이번에도 나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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