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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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겨울에 가까운 땅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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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북부, 경계 도시 이제리온. 

중심가 성문에 도착해 비코는 말에서 내렸다. 후원자의 문양이 찍힌 패를 내보이니 통과는 쉬웠다. 한 마리의 지친 말과 한 명의 지친 사람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비코는 출발할 때보다도 더 홀쭉해진 가방을 메고, 한 손으로는 말을 잘 달래 끌고 터벅터벅 걸었다. 

따끈한 먹을거리와 포근한 잠자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남의 돈을 쓰는 여행이니 가장 호화로운 숙소에서 묵겠다는 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코는 앞에 보이는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말을 맡기고 방을 잡았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듯 내부는 낡았으며 이부자리도 지푸라기를 채운 것밖에 없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목욕물을 채운 나무통에서는 희미하게 곰팡이 냄새가 났다. 살짝 불쾌할 뻔도 했으나, 물이 충분히 뜨거웠으므로 금방 잊어버렸다.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하고 비코는 조금 웃었다. 비린내나 곰팡내가 나도 그냥 따뜻한 물이면 감사하던 때도 있었는데. 돈 많은 사람하고 붙어 살다 보니 쓸데없는 데에서 까다로워졌다.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는 후원자가 살짝 챙겨 준 목욕 소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비코는 피부가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한참 몸을 담그고서야 겨우 계획을 되새겨 볼 여유를 얻었다.

제국에는 북쪽 황야와 맞닿은 지역이 세 개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제국을 떠나 북부를 여행할 모험가를 위해 세 개의 선택지가 준비되었다는 뜻이었다. 서쪽의 엘 보스타, 얼마 전까지 카미로사라고 불렸던 동쪽의 아메세이즈, 그 사이에 낀 마지막 이제리온. 모험 일정의 초석을 세울 때, 후원자의 집무실에 걸린 커다란 제국 지도 앞에서 비코는 더듬더듬 지명을 읽었다. 후원자를 위해 일했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문맹이 아니었지만, 귀족의 장식 문자는 지나치게 화려했고 언제나 알아보기 까다로웠다.

"출발지는 정했나?"

비코는 반걸음쯤 뒤에 멈춘 후원자의 인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평생 남의 뒤에 자리잡을 일이 몇 없었을 위치의 사람이다. 그녀의 앞에 있다는 것이, 반대로 허구한 날 남의 등만 보며 걸어야 할 신분의 비코는 조금 불편했다.

"앞쪽으로 오세요."

"괜찮아."

두 사람 모두에게 어색할 자세를 후원자는 꿋꿋이 고수했다. 그러고는 추천했다.

"이쪽이 가장 현명해 보이는데."

여자의 매끄러운 손가락이 지도의 북동쪽을 짚었다. 잘 손질된 손톱이 아메세이즈의 큼지막한 A를 반쯤 가렸다. 비코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말았다. 아메세이즈는 물론 객관적인 관점에서 가장 나은 출발지였다. 제국의 황제와 후원자의 남편이 모두 그곳 출신이니, 다크우드가 위치한 것과는 별개로 후원자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거기를 추천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비코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근데 저는 별로에요."

"왜지?"

"카미로사엔 가 봤잖아요."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후원자를 위해 일하던 시절, 아직은 카미로사였던 아메세이즈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언제 또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 그녀는 되도록이면 새로운 지역을 여행하고 싶었다.

후원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승낙의 뜻이었다. 비코는 지도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면 엘 보스타와 이제리온이 남는데, 듣자하니 엘 보스타의 변경백은 성정이 괴팍해서 영지의 출입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한다고 했다. 과거의 죄로 발이 묶였던 카미로사의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이유였다. 얼마 전까지 제국을 뜨겁게 불태웠던 그 싸움에도 엘 보스타의 노백작은 일제 관여하지 않았다.

반면 이제리온은 황실의 사무관이 직접 관리하는 도시다. 중앙과의 교류도 잦은 만큼, 몇 가지 인증 절차만 거친다면 출입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리온으로 갈래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래서 출발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비코는 목욕통에서 나와 눅눅한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았다. 피로가 풀리니 뒤늦게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일단 좀 자고 일어나서 말을 팔고 사람을 구하고, 나머지 필수품을 장만해야겠다는 계획을 잠결에 대충 세웠다.

도중에 문제를 발견하는 데에는 그러고도 며칠이 더 걸렸다.

말은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워낙에 좋은 품종이다 보니 금방 팔렸다. 받은 돈은 가장 훌륭한 방한 용품을 사기에 충분했다. 장거리 여행 경력이 있는지라, 비코는 생필품은 또 뭐가 필요한지 잘 알았다.

말썽은 그다음에 생겼다. 북부 황야라는 존재를, 그 이름이 직접 맞닿은 경계 지역에 끼치는 영향을 잘못 예측한 탓이었다.

대륙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특히 가장자리에 사는 사람일수록 대륙을 벗어나는 것을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물을 건너면 다른 대륙이 여럿 있으니, 상인들을 중심으로 바닷길에 대한 공포는 극복한 모양이나 육로로는 아니었다. 이제리온 사람들은 황야라는 단어만 꺼내도 진저리치며 자리를 피했다. 이민족 출신들은 조금 나았지만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출신지도 마녀와 마법사보다는 제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아래쪽이었기 때문이다. 

열댓 번의 거절을 내리 당하고 비코는 입술만 삐죽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대부분은 일정량의 돈을 보면 기억을 잃는 병을 앓고 있었다. 신분이 낮거나 돈이 궁할수록 더욱 그랬다. 그런 사람 한둘쯤은 북쪽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아니면 돈이 부족하거나- 비코는 오른손에 멍청하게 들린, 후원자가 챙겨 준 두둑한 어음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가진 것은 원하는 액수를 적은 뒤 은행에 가져가면 돈을 받을 수 있는 백지수표였고, 거기에 서명한 이는 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여튼 그런 문제 덕분에 이제리온에서 동행자를 구해 북쪽을 탐험할 생각이었던 비코는 계획을 통째로 수정해야만 했다. 이제 와서 아메세이즈로 출발지를 바꿀 수도 없었다. 한참은 더 길을 돌아가야 할 뿐더러, 그곳이라고 딱히 반응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메세이즈에서 온 사람은 이제리온에도 이미 많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채우고, 여행의 조언을 구하고, 또 여러 방식으로 모험의 마지막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할 지역에서 맞닥뜨린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었다.

"바쟈, 그러면 어떻게 하죠?"

부실한 이부자리에 누워, 천장을 뛰댕기는 쥐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비코가 물었다. 그녀가 만난 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하며 완벽한 존재인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밖에 살아 있지 않았으므로.

"어쩌겠어. 혼자 가야지."

대신 비코가 중얼거렸다. 죽은 여자의 억양과 말투를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하면 늘 최선의 해답만을 내던 그녀처럼, 제 말에도 확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비코는 여전히 누운 채로 어깨만 으쓱였다.

"역시 그렇게 해야겠지요."

.

.

.

제국의 최북단, 동시에 대륙의 북쪽 끝인 경계 도시 이제리온에서 한 여자가 출발했다. 

여행자는 자그마한 나침반 하나에만 의존하여 끊임없이 북쪽을 향해 걸었다.

물론 문명의 봄조차 도래하지 않은 땅이 외부인을 따스하게 품어 줄 리가 없다. 공기는 차가울 뿐만 아니라 날카로웠다. 바람은 칼날을 품고서 여자를 감싸고 돌았다. 두터운 방한복과 방한 용품 속을 파고들어 코와 귀와 손발의 끝을 무자비하게 헤집어 놓았다.

틈만 나면 눈이 내리고 눈 깜짝할 새에 얼어붙는다. 땅이라기보다는 이제 거대한 얼음덩어리인 북부는 행인의 발자국 하나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정확히 열세 번째로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비코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녀는 북쪽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목숨조차 확실히 보장받을 수 없는 장소에서 그 이상의 소망은 전부 욕심이니까.

"바쟈,"

비코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이름을 다시 꺼냈다. 목도리 아래에서 입술마저 굳어 발음하기가 조금 어려웠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바쟈, 바쟈 스노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여자.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비코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목숨은 스러졌지만 그 동경은 여전하므로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오히려 더욱 단단해져 이제는 거의 신앙이라 불러도 무방한 정도였다.

비코는 습기가 얼어붙어 묵직한 속눈썹을 열심히 깜박였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비코가 닮고 싶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그 사람이었다.

"난 집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가고 싶지 않아요."

차가운 혀로 입안을 훑자, 어금니 사이에 걸려 있던 음식물 찌꺼기가 걸렸다. 몇 시간 전에, 직전의 식사로 먹은 질긴 양고기 육포였다. 

몇 시간 전. 비코는 추위에 굳어가는 머리로 열심히 생각했다. 몇 시간 전이 아니라 몇십 분 전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방금 전, 어제 점심일지도….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비코는 코를 크게 훌쩍이고는 자그마한 고기 조각을 열심히 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저 잠깐이라도 노력을 들일 곳이 필요했다.

비코는 더는 물러질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찌꺼기를 마침내 목구멍으로 밀어 삼켰다. 그리고는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대부분의 상황에서, 비코는 바쟈가 했을 법한 말을 완벽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동경하는 그 모습을 가지고파 끊임없이 그녀를 탐구하고 복습했으므로. 

바쟈 스노를 흉내내는 비코는 누구보다 원본과 가까운 쌍둥이 남동생은 물론이요 아직 살아 있을 무렵의 바쟈조차도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차가운 얼음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아래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앉아 있는 지금만큼은 달랐다.

"…바쟈."

어떠한 대답도 보이지 않았다.

비코는 입을 다물었다.

선택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이었다.

"무엇이든 가치 있는 대상을 찾아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돌아가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출발해야 남은 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이제리온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뜻이었다. 목숨이 하나인 인간으로서, 그것은 가장 이성적인 선택지였다.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은 용기가 아닌 오만이며, 그럼에도 도전하겠다는 고집은 끈기가 아닌 어리석음이다.

"난 지금 잘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고,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비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목도리 틈으로 솟아오른 입김이 하얗게 얼었다. 그녀는 도저히 외부인에게 살가워질 줄 모르는 바람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양손은 장갑 안쪽의 가죽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느낄 정도로 꽁꽁 얼었지만, 지지대로 쓰기에는 아직 충분했다.

"아니, 당신이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난 그저…."

비코는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이번에는 답이 있었다.

"정답을 모르겠으면 일단 끝까지 가고 봐야지."

그녀는 뒤늦게 대답을 들었다.

"그래요."

비코가 중얼거렸다.

"끝을 보기 전까지는 뭐가 옳고 그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금을 쫓아 무지개 끝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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