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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by 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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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꽃밭없음시기

*견 인 분량이 견인됐습니다(미안) 근데 날조까지? (진짜 미안)

*견인 화해로그를 찌고싶어서 써야지~하고 시작한거였는데

남씨도 흥.몰라 바카. 하고있고 견인도 와하하하! 알아서 화해하지말입니다!! 해서 그냥 신성식 로그됨.

이게 무슨소리냐면 결과적으로 좀 그먼십이 되었단 소리다………………….

*미친듯이 얼렁뚱땅하네요 하하핫~로그체력 임종. 편하게 읽어주십사…….

cw. 약간의 우울사고

[인씨. 15일에 시간 돼요? 지아 일도 있고, 밥 한번 사주고 싶어서요.]

[저 그날 됩니다!!]

[지아님이랑은 연락 잘하고 계시죠???]

[덕분에요😄]

[맞다. 희문씨도 그날 같이 밥 먹을 것 같은데 괜찮죠?]

[단톡방 파면 또 잔소리나 할 것 같아서 그냥 물어봐요.]

인은 주고받던 대화에 약한 위화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기분은 아주 미약한 것이라서, 인간의 합리화는 그 공백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 넣었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인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아. 지아님이 큰 키에 익숙한 것 같더라니…. 남과장님의 키를 떠올린다. 1cm 차이지만 10의 자리 수가 8인 것과 9인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커서, 제 키를 생각지도 못하고 한국에 이런 큰 키가 있기도 하네…같은 생각이나 했더랬지. 물론 부장님까지 문짝만 한 사람인 걸 봤을 때의 기분은 영업부 대박인데? 정도였지만. 아무튼, 인은 짧은 순간 헤집어졌던 집중력을 모아 카톡방을 봤다. 화면을 켜놓는 바람에 읽음 표시가 떴을 테니 답이 너무 늦어도 곤란하다.

[당연하죠! 위치는 어디가 좋으십니까?]

[ㅁㅁ정육식당 알아요? 여기 △△동에 있는 건데….]

[압니다! 전에 과장님이랑 삼쏘 한번 했지말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그쪽으로. 6시쯤 만나는 거로. 괜찮죠?]

[넵! 15일에 뵙겠습니다!]

그 가게가 남과장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임을 인은 알고 있었다. 회사와 과장님 댁의 중간지점 정도라 회식 때 자주 갔었던 곳인데, 보아하니 신과장님 댁도 그쯤인가? 견 인은 그의 집을 몰랐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고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며칠 후의 자신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안고 홀로 집으로 향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인씨랑 15일에 약속 잡았어요.”

“15일…. 알았어. 딱히 일정도 없고.”

희문이 뒤늦게 날짜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성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 트인 주방 식탁은 거실의 모습이 잘 보였고, 성식은 주로 식탁 의자에 앉아서 소파에 널브러진 희문과 대화를 하곤 했다. 혹은 그 반대거나. 거실에 놓인 소파는 2~3인용이긴 했지만 한국인 평균을 훨씬 웃도는 키의 남자가 다른 사람과 편히 공유할 정도는 아니었다. 간혹 성식이 맨바닥에 앉거나 둘 다 소파에서 내려와 치킨을 뜯는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시간은 이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했다.

“일정이야 당연히 없겠죠. 백수잖아요.”

“말뽄새 진짜. 당신은 뭐 다른 줄 알아?”

“하하하. 아무튼 그럼 15일에 나가는 거예요.”

거실 한켠을 자리 잡은 선인장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성식은 그 위에 은근슬쩍 놓아둔 음식 데코용 모자를 건드리며 희문에게 다가갔다. 희문이 제 시선을 가린 성식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이상하지. 그 많은 사람이 자신을 싫어해 왔는데, 그의 분노는 성식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차이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가 성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김에 오늘 저녁 외식 어때요? 인스타에서 괜찮은 가게를 찾았는데 웬일로 예약이 비어있더라고요.”

“뭐? 귀찮은데….”

“자! 일어나요. 그놈의 티셔츠 좀 벗고. 왜 한겨울에도 가슴팍을 그렇게 까고 사는 건데요.”

“내가 어떻게 입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네네. 그러고 밖에 나갈 거 아니면 빨리 갈아입어요.”

“에이씨….”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몇 주간 살아온 결과, 희문은 의외로 사람이 좋다. 아니. 성질머리에 비해 제 손에 닿은 누군가를 챙기는 것 하나는 빼놓지 못하던 모습은 이미 봤던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보다 사람이 모질지 못했다. 첫날에도 그랬다. 무작정 쳐들어온 건 성식이었지만, 희문의 성격상 설득의 과정에서 한바탕 할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정을 말한 뒤에 돌아온 희문의 반응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뭐였더라. 일단 들어와…같은 거였는데. 나름의 긴장으로 혼잡했던 탓에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그렇게 희문은 별말 없이 옷방으로 쓰던 방 하나를 성식에게 선뜻 내줬다. 사정을 설명하기 전과 후의 반응이 묘하게 달랐던 걸 보면 자신의 사정에서 무언가 그를 바뀌게 할 만한 것이 있었겠지. 뭘까? 그가 이혼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도 평범한 남자니까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은 있겠지. 그래서일지도, 혹은 저도 모르게 뱉어버렸던 넓은 집에 혼자 사는 건 외로워서…. 같은 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농담처럼 건넨 진심이 닿았던 걸까.

타인의 자세한 마음 따위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성식은 그저 다행이라고 여겼다. 여기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혼자가 아니어도 되어서 다행이다. 그가 나를 내보낼 생각이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이 평화가 계속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수많은 다행과 안도 사이에서 큰 비틀림을 인식하지 못한 건 그가 자신의 안정감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동시에 인식의 범위가 한없이 좁은 탓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성식은 스스로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누군가를 화나게 할 거라는 사실을 아직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그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이 다가왔다.


“말 걸지 마.”

“….알았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성식은 길어진 해마저 떨어진 어둠 속에서 그 길을 밝게 비추는 불빛 사이를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처음부터. 자신이 신성식이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운명이라며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크게 내뱉은 숨은 서늘한 공기 안에서 크게 기화된다. 성식은 눈앞의 숨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신성식 씨, 남희문 씨. 사람 진심 가지고 놀면 재미있습니까?’

‘신성식 씨는 진심으로 지아에게 미안하긴 합니까?’

‘그래요. 뭐 신성식 씨는 그렇다 치고…남희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실망이네.’

갈라지는 소주잔과 낮게 가라앉은 견 인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다가온 건, 단순히 그가 마음만 먹으면 눈앞의 두 사람을 때려눕힐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제 앞에서야 걱정어린 화를 내면서 자신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였지만, 남희문의 앞에서는 어땠던가. 제 직속 상사였던 이에게 살가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게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성질머리 이상한 아저씨라면 더더욱. 그런 사람에게 실없이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고 친근하게 대하던 이가 자신에게 분노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일까?

가로등과 아직 문을 연 가게들이 내려주는 빛은 길이 향하는 곳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알 수 있는 건 그 빛이 닿는 곳뿐이라, 성식은 취기로 인해 비틀거리는 발이 얼어붙은 눈을 밟지 않는 데에 집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아서, 결국 미끄러진 발을 마른 바닥에 디뎌 중심을 잡는다. 이대로 넘어지면 제 앞에 걸어가던 남자는 과연 뒤를 돌아볼까. 그럴 정신 따위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제가 먼저 접근을 거부한 주제에 성가시다는 듯 뒤돌아서 신경질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꼴불견이니까. 작은 사고를 예견한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던 것을 진정시키고 문득 앞을 바라본다. 우뚝 솟은 등이, 성식이 홀로 제 자리에 서 있던 시간만큼 멀어져 있다. 성식은 가만히 그 등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넘어진다면. 그 자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다면 분명 영영 멀어지고 말겠지.

잘못의 시작은 자신이라고 치고. 이 모든 문제가 수면위로 오르게 된 것까지 제 실수라는 사실이 성식을 심란하게 했다. 때는 바야흐로 고작 40분 전. 40을 코앞에 둔 남자와 40을 넘긴 아저씨. 그리고 20대 후반의 반열에 오른 젊은 청년이 9살짜리 어린 딸아이에 대한 다양한 칭찬을 술안주로 대화하던 때의 일이었다. 시작하기 전부터 저 잘 먹습니다. 와 나 잘 마신다.의 영업부 둘이 앉아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6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시작된 식사 자리는 30분이 지난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몇시간이 지난 상태에서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식은 그런 술자리에 면역이 있진 않았지만, 제 딸에 대한 칭찬이 계속되니 결론적으로 셋 모두에게 제법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견 인의 날카로운 질문이 무의식적으로 성식을 향하기 전까지는.

‘두 분이 같이 사시는 겁니까?‘

견인으로선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을 뿐이다. 약속을 잡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여가던 의혹이 술자리에서의 대화로 인해 반쯤 확신이 섰으니까. 그냥 그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의 사소한 호기심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성식은 저도 모르게 대답한다. 대충 얼버무렸으면 되는 일인 것을.

‘네에. 제가 캐리어 하나 들고 쳐들어갔어요.‘

하하하. 능청스럽게 웃는 모양새에 희문이 저도 모르게 덧붙인다. 이 양반 진짜 뻔뻔한 인간이야. 몇주일 뿐이지만, 함께한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진다. 사람 왔는데 러닝셔츠 바람인 건 안 뻔뻔하고요? 말도 없이 왔잖아! 그 틈에 견 인도 슬그머니 끼어든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별 내용 없어 보이는 대화가 이어진다. 러닝셔츠요? 춥지도 않으십니까. 그땐 별로 안 춥긴 했어요. ……설마 두 분. 그 전부터 같이 살고 있었던 겁니까? …마지막 말만 안 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

회사와 집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가게는 그래봤자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성식에게 그 시간은 마치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끊임없이 뒤로 움직이는 레일 위를 천천히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추위를 타지 않는 몸이지만 술로 인해 뜨거워진 몸은 찬 공기를 만나 조금씩 식어간다. 아무리 걸어도 희문의 등은 가까워 지지 않고, 집에도 도착하지 않으니 그저 생각만 길어질 뿐이다.

남희문은 직설적인 사람이다. 성식은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10년간의 기억 속에서 그가 헛된 말을 내뱉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허세와 거짓투성이인 성식과 달리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숨기는 것도 없다. 그리고 그걸 깨트린 게 신성식이었다. 남희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사정 하나 때문에 지아에게도, 견인에게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순간을 공범으로 남았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다고. 만날 수도, 대화할 수도 없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고작 그 하나로 누구보다 친근했던 이에게 죄인이 된다.

나 때문에. 그 생각을 하자마자 성식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술기운 탓에 유독 솔직해진 몸이 결국 눈물 두어방울을 내보낸 뒤에야 짧은 일탈을 끝낸다. 꿈과는 사정이 달라서 쉽게 젖어든 뺨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붉어진다. 가볍게 손등으로 문지르며 생각한다. 대체 어떻게 해야 했던 건지. 누군가는 그에게 숨고 도망칠 필요 없이 바로 만났으면 되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의 성식은 마주할 용기도 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역시 누군가의 말이 맞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남희문의 집에 오지 않는 게 나았을 거다. 그랬다면 적어도 그가 근본적으로 제 잘못이 아닌 일로 화를 입진 않았겠지. 평생을 후회하지 않던 남자는 다시 한번 혼란을 눈 밖으로 떨궈낸다.

사실 제 행동이 타인을 분노케 하고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하는 것은 성식에게 익숙했다. 견 인이 들으면 분노가 두배가 될 테지만, 그가 자신을 향해 화를 내던 순간도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역시 그 분노가 자신보다 희문을 향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의 인과관계가 뒤집힌 모습은 성식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동시에 그 분노에 충격을 받은 듯한 희문의 반응까지 성식을 혼란스럽게 했다. 왜 반박하지 않아? 어째서 화를 내지 않지. 억울하다고, 제 탓이 아니라며 화를 내고 성식을 향해 화살을 돌렸다면 이렇게까지 심란하진 않았을 텐데. 희문은 그저 입을 닫고 인의 성난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견인이 떠난 후 몇번이고 걸어본 전화에 응답이 없었을 때에도, 두어번의 전화 이후부터는 끝없이 소리샘으로 넘어가던 순간에도. 그 뒤로 남은 술병을 모두 비우고 계산을 할 때까지도 계속됐다. 성식은 그게 아주 난감했다. 애초에 감정 표현이 그렇게 다양한 인간도 아니었지만, 화를 내는 게 아닌 모습은 그의 생각을 영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끝에 드디어 익숙해져가는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희문이 앞서간 길을 아슬아슬하게 따라가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닫히는 문을 가진 엘리베이터가 그들을 반긴다. 닫히는 속도는 빠른 주제에 움직이는 속도는 다른 건물들보다 느린 오래된 물건인 탓에 8층 즈음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덴 또다시 한참이 걸린다. 둘은 다시 한번 같은 공간 안에 애매하게 걸쳐 있었지만 여전히 대화는 없었다. 숨이 무거웠다. 집에서도 이런 분위기면 끔찍할 텐데. 여기까지 와서 살고 있을 이유가 없을 정도로.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작은 소리와 함께 도착한다. 희문의 뒤를 바짝 쫓아 탄 성식은 키 차이 덕분에 보이지 않을 표정을 갈무리하며 생각한다. 이대로는 안 돼….

“해장할 거예요? 그럴 거면 나 먼저 씻고 나오고.”

“…생각 없어.”

“왜요? 해장 안 한다고 해서 여기 없는 견인씨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그게 말이라고…. 애초에 당신이 입 좀 잘 놀렸으면 이렇게 될 일 없었잖아!!”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밝은 목소리의 말들이 그를 자극한 건지 결국엔 희문이 소리를 친다. 그 한마디에 성식은 지금까지 희문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의 화는 지금껏 자신을 향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향한다고 해도 그 안에 진심 어린 분노 같은 건 흐릿할 뿐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성식이 뱉어내는 것들과 닮아있어서. 애써 꾸며낸 미소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미안해요.”

“….에이 xx.”

짧은 사과마저 희문에게는 의외의 반응이었는지 잔뜩 구긴 얼굴이 방향을 잃은 분노를 삼킨 듯 더 깊게 일그러진다. 크게 심호흡을 한 희문이 거실 초입에 자리한 선반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신발이나 겨우 벗은 꼴로 다시 한번 현관으로 향하는 희문을 성식은 가만히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쾅! 큰 소리를 내며 닫은 문 너머로 옆집 사람의 항의가 두어번 들려온다. 조용히 좀 합시다! 그래서 성식은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평생 기억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남긴다는 사실과도 같다. 그리고 그 기억을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점은 언제나 성식을 괴롭힌다. 텅 빈 집 안에 서 있던 성식은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선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들어오자마자 대충 씻긴 했지만 이대로 누워봤자 잠이 오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잠을 설치면 꿈을 꾼다. 성식은 누구보다 이기적인 인간이라. 외로움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꿈이 된다. 아직까지는 외로움만이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인데, 그렇게 꾼 꿈은 언제나 성식에게 힘겹기만 한 경험이 될 뿐이라 이것은 죽은 이에게도 미안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친구가 멋대로 제 어깨에 지어주고 떠난 짐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방법이 이런 식 이어봤자 결국은 아무도 기꺼워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더욱 성식은 잠들고 싶지 않았다. 죽어 사라진 타인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이 살고 싶어서.

새벽 2시가 되어도 희문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조용히 들어왔나 싶어서 거실로 나가봤지만 성식을 반기는 건 그저 우뚝 선 선인장 화분뿐이다. 어두운 거실에서 마주하고 있자니 왠지 말을 걸 것만 같아서 애써 무시한 채 소파에 잠시 앉아있다가,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거슬려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작은 방 안에 있는데도 또다시 전의 집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은 또다시 성식의 숨을 졸라댄다. 헉. 하고 내뱉은 숨과 함께 성식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함 속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묵직한 무게감이 쿵, 쿵 매트리스 아래에 깔린 바닥을 울리고 성식은 그 모든 일이 현실임을 깨닫는다. 방음이 잘 되는 편은 아닌지라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 찬장에서 작은 컵을 하나 꺼내서 식탁에 신경질적으로 올려놓는 소리 같은 것들이 벽을 타고 흐른다. 붉은 뚜껑이 따지고 액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누군가의 목 너머로 사라지듯 조용했다가, 한숨처럼 터져 나오는 알싸한 알코올의 탄성들이. 가물거리는 인식이 그 모든 것들을 타인의 인기척으로 받아들여 성식은 다시 한번 잠에 빠져들었다.


난방이 세지도 않은 한겨울의 작은 집에서 식은땀과 함께 깨어나는 감각은 성식을 피로하게 했다. 평소의 절반밖에 안 되는 수면시간 탓일 수도,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성식은 온몸에 힘이 모두 빠져나간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깨어난 이후부터는 마치 스치듯 지나가는 기억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꿈을 꾼 날에는 부러 빠르게 움직이곤 했다. 제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기억은 고이기 마련이니까. 그러게 누가 살아생전 하지도 않던 짓을 하라고 했습니까, 동부장님. 습관처럼 책임을 돌리며 입꼬리를 올린 성식은 문을 열고 거실로 향했다. 오후가 다 되어가는 해가 창밖에서 들어오는 거실과 주방엔 달큰한 술 냄새가 가득했다. 안주도 없이 술을 털어 넣은 건지 빈 병만 굴러다니는 식탁 위에 희문이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키도 큰 양반이, 저러다가 일어나면 허리 아프다고 성질이나 낼 텐데. 아니 차라리 그러면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화를 내는 희문은 일상과도 같으니까.

성식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와 찬장을 확인했다. 라면 두 봉이 남아있어 모두 꺼낸다. 냉장고 안에는 조금 말라가는 청양고추와 파, 달걀을 골라 한 손에 들고는 문을 닫았다.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해 둔 덕분에 작은 냄비 하나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리는 데 까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마와 칼을 찾아 잠시 뒤적이다가 쿵, 소리를 냈지만 술기운에 곯아떨어진 희문은 미동도 없었다. 잠시 눈치를 살핀 성식은 넘어진 고목 같은 희문의 뒷모습에 뻔뻔함을 되찾고 이내 칼질을 시작했다. 적당히 썰어 넣은 파와 고추가 붉은색 가루와 끓어오르는 물들 사이에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계란을 깨 넣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조금은 호화롭게 인당 하나씩. 두 개의 계란을 끓는 국물 안에 던져넣은 성식은 뒤돌아 희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일어나요. 해장해야지.”

“…뭐야. 몇 시야?”

“점심이 다 되어가는데. 자. 라면 다 끓었으니까 일단 먹어요.”

“아…머리야.”

“술을 그렇게 마시니까 머리가 아프죠.”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됐다…. 당신이 끓인 거야?”

“그럼 방금 일어난 희문씨가 끓였겠어요? 자. 젓가락이랑 앞접시. 빨리 먹어요. 분다.”

잠이 덜 깬 틈을 타 잔뜩 밀어붙여 라면을 먹인다. 구시렁대면서도 얌전히 먹는 모양새에 약간의 안도를 느끼며 성식은 물과 김치까지 대충 가져와서 앞에 앉았다. 일부러 조금 꼬들꼬들하게 끓인 면은 적당히 불어 먹을만했다. 그래도 역시 희문이 끓인 해장라면이 더 시원한 것 같지만.

“어때요?”

“먹을 만해.”

“나름 만들어본다고 만들었는데 희문씨 해장라면은 못 이기겠네요. 다음에 레시피 좀 알려줘 봐요.”

“그냥 끓이면 되는데…콩나물이 있어야 해.”

“아하, 그럼 알았어도 오늘은 어려웠겠네요.”

콩나물을 사둬야 하나…. 그러고 보니 저번에 해장한다며 남아있던 콩나물을 모조리 때려 박았던 것 같기도 하다. 성식은 실없이 생각하며 면을 집어먹는 행위를 반복했다. 저도 모르게 희문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그가 찌푸린 시선을 보낸다. 모른 척 물을 건네자 이내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성식은 생각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나? 어제와 같은 짜증이 흐려진 얼굴을 본다. 단순한 사람인 건지 아니면 너무 어른인 건지. 희문은 식사하는 내내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젓가락을 놓을 때 즈음엔 무언가 달관한 듯한 표정을 했다. 그 모습이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성식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부러 닫아둔 이야기를 헤집어 꺼낸다.

“인씨…많이 화나 보였죠?”

“그랬지…그래 보인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데.”

“한 대 안 맞은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요.”

“차라리 때렸으면 구치소나 한번 들어가고 말았을걸.”

“그런가.”

“추천은 안 해.”

“제가 할 생각은 없네요.”

희문이 내려놓은 젓가락을 앞접시와 함께 집어 들어 싱크대로 향한다. 얼마 남지 않은 국물을 개수대에 버리고 뒤처리를 하는 동안 희문이 앓는 소리를 낸다. 하룻밤을 식탁에 엎드려 누워 보냈으니 찌뿌둥할 만도 하다. 두어번 허리와 등을 펴고 나서 희문이 자리를 뜨려는 찰나, 성식이 다시 한번 입을 연다.

“….연락 해 볼 거예요?”

“뭐 하러 그래? 전화번호 차단까지 했는데.”

“그래도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알아서 화 풀리면 먼저 연락 하겠지.”

“어째 낙관적이네요.”

“낙관적인 게 아니라…”

성식은 희문이 왜 조용한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수도 없이 화를 내는 인간인 주제에,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화를 내다가도, 그만두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혹은 그 이유를 알아야 앞으로의 상황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화내지 않는 이유를.

“희문씨도 저한테 화난 거 아니었나요.”

“뭐?”

“어제 분명 화를 냈잖아요. 근데 왜 이제 와서 아무 말도 안 해요?”

“아니…사람이 가만히 넘어가면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면 되지. 그런 걸 왜 물어봐?”

“제 잘못이잖아요!!”

“….”

“나 때문에 견인씨가 나한테도, 희문씨에게도 화가 난 거잖아요. 근데 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견인 그 자식이야 당신이나 우리 상황을 잘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 화낼 수 있었던 거고!”

“정말 겨우 그거 때문이라고요?”

“그래!!”

희문이 상황을 끝내는 고함을 지르고는 혀를 찬다. 그가 하여간 성격 꼬라지 하고는…. 따위의 말을 구시렁거리며 목덜미를 벅벅 긁더니 씻으러 들어가자 이내 성식은 작은 한숨과 함께 식탁에 몸을 기댔다. 결국 그런 거다. 남희문은 생각보다 정이 많고, 이해해 버린 사람들에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도 겨우 회사 동료였을 뿐인 사람은 그걸 이제야 알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20년가량을 알고 함께 지내던 사람의 마음도 잘 알지 못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주고받던 사람을 잘 알 수 있을 리 없다. 다행인가? 어떤 이유에서든 남희문이라는 사람이 신성식이라는 인간을 내치지 못한다면 그걸로 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응, 지아야. 응. 아빠도 사랑해~~”

전화를 끊은 성식이 작게 숨을 내쉬며 화면을 끈다. 등 뒤에 다리를 접은 채로 소파에 누운 희문이 자신을 뻔히 바라보는 걸 알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지아가 희문씨 잘 지내냐는데요?”

“같이 사는 거 말했어?”

“그럼요. 지아는 누구 씨네 부하직원보다 훨씬 착하거든요.”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이. 그건 그냥 지아가 당신 딸답지 않게 너무 착한 거고.”

“그것도 맞아요.”

실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이내 성식이 등을 돌려 한쪽 팔을 소파에 얹은 채 희문을 본다. 제 다리에 닿는 팔의 감각에 희문이 굽혔던 다리를 펴자 길쭉한 다리가 소파 팔걸이 너머로 빠져나갔다. 결과적으로 제법 우스운 자세가 되었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인씨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지아랑은 저번에 통화했다던데.”

“뭘 그런 걸 애한테 물어보고 그래….”

“연결고리가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희문씨는 아직 차단당했죠? 저도 전화 연결은 안 돼서요.”

“심란하게 그딴소리를 또 왜 해!! 언젠가 연락 하겠지.”

희문이 결국 소리를 버럭 지르고 폈던 다리를 다시 굽히며 무릎으로 성실의 팔을 밀어낸다. 괜스레 거리감을 벌리곤 희문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성식이 제 딸과 전화하던 와중에도 별 의미 없이 틀어뒀던 영상에 이제 와서 집중될 리 없지만. 물론 성식은 희문이 이전보다 더 휴대폰을 보지 않는다거나, 울리는 전화의 번호를 확인하는 모양새를 보아왔으니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정말로 괜찮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 성식은 결국 등을 소파에 기댄 채 조금 미끄러져 내려간다. 소파의 끝부분에 뒷목을 기대 불편한 자세로 앉았다. 허리 망가지기 딱 좋은 자세네. 문득 그런 생각을 하지만 굳이 자세를 바르게 하진 않았다.

언젠가 연락할 거라는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그 정도의 신뢰가 있기 때문에 희문은 가만히 그를 기다릴 수 있는 거겠지. 조바심이 있을지언정 그게 자신을 잠식하지 않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나처럼 얕은 흙 위에 자라난 꽃밭과는 달리 좀 더 견고한 방식을…. 성식은 제 앞의 의미 없는 예능의 한 장면을 시야에 담으며 자신이 기억해야 할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자신과 그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성식은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거리는 과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만, 다행히 이런 날에 닭 한 마리 가게를 오는 젊은 커플은 많지 않았다. 날이 추운 만큼 실내는 후끈했고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캐롤이 이질적인 감성을 더했다. 이런 날에 아저씨 둘이서 뭐 하는 짓이냐. 뭐 어때요. 우리가 언제 남 신경이나 썼다고. 많이 쓰던데. 몇번이나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국물이 모조리 졸아버린 냄비에 죽까지 볶아내고 나니 둘의 옆에 남은 건 빈 소주병들뿐이었다. 그래서 성식은 더 자연스럽게 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아 학교 근처에 인씨네 조카 유치원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생각보다 가깝네.”

“혹시 마주치면 말 좀 해달라고 했는데…. 조만간 한번 가볼까 싶기도 하고.”

“나 참, 할 짓도 없다.”

“일찍 화해하면 좋잖아요.”

“어련히 알아서 할까….”

“정작 연락이 오면 좋아할 거면서.”

“…먹기나 해!”

성식은 괜스레 신경질적으로 수저를 놀리는 희문을 보며 웃었다. 얼마 남지도 않아 바닥에 눌어붙은 죽을 긁어내는 행동을 보며 알딸딸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도 내가 찾아간다고 해서 인씨가 쉽게 기분이 풀릴 거란 생각은 안 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투를 인식하지 못한 채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들어 조금 남은 죽을 긁어먹는다. 잔뜩 졸아 제법 짜진 탓에 얼굴을 찌푸렸다가 그 맛을 안주 삼아 소주를 털어 넣는다. 희문과 그리 오래 지낸 것도 아닌데 술에 익숙해진 꼴이 미래가 걱정되긴 하지만, 이내 무시하기로 한다.

“그 친구가 희문씨가 말한 대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이유는….”

신성식과 남희문은 애초에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에서부터 성향, 사고방식까지. 비슷하기라도 한 걸 골라보라고 해 봤자 손에 꼽을 정도니 의미도 없다. 그런 주제에 서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느 한 부분만큼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들이라. 이 모든 게 시작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니 둘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조차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서. 희문은 성식의 말을 들으며 빈 잔을 채운다.


성식은 지금껏 관계의 많은 부분에서 수동적으로 행동해 왔다. 수많은 외면과 합리화가 그의 인생을 가득 채워왔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평생 경험해 볼 리 없는 사건이 그의 근간을 무너트린 이후로 성식은 조금 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인간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는 법이라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달라질 리는 없다. 하지만 그가 쌓아 올린 새로운 근간이 다른 사람들 시선에서야 같아 보일지라도, 그것은 마치 테세우스의 배와 같이 결국엔 무언가가 달라진 것이라. 성식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야 모든 것을 잃기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인간이라서.

견 인의 입장에서는 성가시기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하는 꼴이라니. 경찰에 신고라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성식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이 또한 인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행동하지 않는 모습에 솔직하게 분노하고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던 모습은 성식 또한 기억하고 있으니까. 희문이 그를 믿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처럼, 성식은 그를 믿어 행동하기를 선택한 셈이다. 그 결과가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기도 했다.

무작정 초등학교 근처를 거니는 성식의 시야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교야 12월 말에 종업식을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라면 내년을 기다리며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다거나, 홀로 집에서 사색을 곱씹을만한 날에 여기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겨울방학이 없으니 만약 견 인이 아직도 조카의 등·하원을 담당한 이상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주일 정도 허탕을 치고 있었다. 역시 월말은 바쁜가. 지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긴 했지만, 그마저도 인의 옆에서 낯을 가리던 어린아이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물론 아무리 호감 상인 얼굴이라고 해도 모르는 남자가 초등학생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성식은 차가워진 공기를 폣속에 머금었다가 내쉰다.

집에 갈까…. 희문이 아무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동거인으로서 새해 바로 전날에 집을 비우기엔 너무 외로울 것 같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알림이 온다.


견 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켰다. 홧김에 둘에게 잔뜩 쏘아붙이고 나서 전화번호를 차단하긴 했지만, 근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분노는 희석된 지 오래였다. 그사이에 가끔 마주친 지아님이 간접적인 안부를 전달해 준 덕에 성식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남과장…남희문 그 사람이야 화를 낼지언정 그렇게까지 애타게 찾아다닐 사람은 아니지만. 생각하니 또다시 좀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환기 겸 화면을 다시 껐다가 켠다. 정신 차려라 견 인! 너 그렇게 속 좁은 인간이 아니다. 비록 두 사람이 먼저 잘못했지만! 지아님이랑 나를 속이고 둘이 하하호호 하고 있었지만! 물론 진짜 당사자인 지아님이 괜찮다고 한 이상 견인이 계속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그가 화를 낸 가장 큰 이유는 상처받았을 작은 아이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지아와 다시 마주친 날, 궁금증과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했다.

‘괜찮으십니까?’

질문의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지아가 이미 성식이 희문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고, 그런데도 제법 후련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저보다 20여년을 더 산 사람보다는 확실히 더 순수하고 솔직해서인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응. 아빠랑은 화해 했으니까요.’

‘섭섭하진 않으신 겁니까….’

‘제가 만나봤는데, 희문 삼촌도 좋은 삼촌이잖아요?’

‘그런 문제인가….’

‘저는 잘 모르지만…. 아빠나 삼촌들이 큰 사고가 있었던 거잖아요?’

‘네, 뭐…. 그렇긴 합니다.’

‘책에서 봤는데. 무서운 게 많은 친구는 항상 숨어요.’

추위로 인해 발개진 얼굴을 가볍게 문지르며 아이가 올려다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빠도 그랬던 것 같아서요. 굴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아기돼지처럼.’

자신이 아는 성식의 얼굴과 똑 닮은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견 인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제 아이도 이렇게 똘똘한데 아빠 된 사람은 과연 언제쯤 철이 들까? 그 옆에 있는 아저씨는 또 어떻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인은 너털스럽게 웃고 만다. 아무리 한심해도 그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데, 이런 걱정이나 하고 있는 게 우습다. 어련히들 알아서 잘하겠지. 그런 기분으로 손가락을 움직인다. 잘 지내십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술 좀 줄이시고…. 저도 모르게 잔소리에 가까운 문장을 적어내다가 조금 지우고 적당히 갈무리한 내용을 보낸다. 어차피 이게 마지막 인사는 아니니까. 적당히 보내도 괜찮겠지. 당신네들도 멋대로 굴었으니 저도 좀 멋대로 굴겠습니다.

견 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 그에게 있어서 오늘은 모든 것을 끝맺으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시작할 전야제의 날이다. 계획과 다짐은 끝났다. 이젠 시작할 때이고, 그 출발선을 새해로 정해두었으니 이제는 노력해서 달려 나갈 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 시작을 다짐하게 만든 건 결국 그 모든 사건이었다. 끔찍하고, 모든 사람에게 지우지 못할 상흔을 만들어낸 일이며, 그 사건으로 잃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동시에 이 길의 시작을 만든 한방의 총알이기도 해서. 견 인은 그것들을 모두 품에 안고 걷기로 다짐했다. 그러니 자신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분명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날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경찰이 됐습니다!!! 그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삑삑삑삑... 삑. 삑삑. 서두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리고 성식이 찬 공기를 몰고 들어온다. 희문이 한겨울에도 티셔츠 바람으로 소파에 앉아있다가 그 모양새에 얼굴을 찌푸린다. 뭐야? 짧은 한마디에 성식이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신발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온다.

“문자 받았어요?”

“문자? 무슨 문자.”

수상할 정도로 전화에만 반응하는 영업부 과장의 대답에 성식이 어이없다는 듯 성큼 다가간다. 테이블 쪽에 던져놓다시피 한 희문의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잠겨있는 화면을 보고선 희문에게 건넨다.

“확인해 봐요. 인씨한테서 문자 왔는지 안 왔는지.”

“걔가 문자를 했어?”

“저한테는요!”

그 말에 희문이 휴대폰을 확인한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인 주제에 제법 급한 터치를 선보이던 그가 움직임을 멈춘다. 오.

“왔네.”

“거봐요!”

“거봐요는 무슨. 거봐! 알아서 연락할 거라고 말 했잖아? 쓸데없이 연말까지 나돌아다니기나 하고.”

“이러네?”

“근처에만 있어도 팔뚝 시려 죽겠어!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저녁 뭐 먹을 거예요? 연말이라 지금 시키면 분명 자정에나 올 텐데.”

“된장찌개 해놨어.”

“뭐예요 그게? 낭만 없어….”

좀스러운 투정에 째려보는 희문을 피해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간다. 기분 좋게 겉옷을 벗어 걸고 옷을 갈아입고선 씻고 나오면 적당히 펼쳐놓은 식탁이 그를 반긴다. 직접 끓인 된장찌개에 성식이 사다 둔 콩을 넣은 밥. 몇 가지 반찬을 주변에 두고선 마주 앉는다. 잘 먹겠습니다. 가볍게 말하고 국물을 떠서 한입.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안타긴 해도 한겨울에 식은 몸이 뜨끈해진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이 맛을 더 좋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실에 틀어둔 티브이에 별 내용 없는 뉴스가 지나간다. 어느새 그 일상적인 소음에 익숙해진 성식이 앵커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말을 꺼낸다.

“희문씨는 타종식 티비로 봐요?”

“할 거 없으면 가끔? 근데 당신은 어차피 12시 전에 자잖아.”

“새해 정도는 늦게 잘 수도 있죠. 요즘은 일도 안 나가고.”

“그럼 보던가. 통닭이나 하나 뜯으면서 보지 뭐.”

“오늘 그 생각 하는 사람만 사천만명 정도 될걸요.”

“괜찮아. 여기 맨날 오는 트럭 오늘 같은 날에 매번 오니까 내려가서 사 오면 돼.”

“아. 그 아저씨 연말에도 오시는구나.”

“응.”

정작 견인이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성식과 희문은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해의 마지막을 보냈다. 카카오톡이 아닌 문자메시지라서 답장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2025년의 자정. 서른세 번의 종소리를 들으며 갓 튀긴 통닭을 뜯어낸다. 제법 평화로운 연말이다.

돌아오지 않는 답장에 위화감을 느낀 건 새해가 지난 후 2025년의 1월 초반. 생일이 다가오는 신성식이 안부겸 건 전화 너머로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을 때였다. 물론 그 뒤에 또다시 희문의 신경 좀 끄고 살어! 라는 일갈에 얌전히 지아와의 약속을 잡은 건 또 다른 이야기.

적당히 쓸만한 살림용품과 함께 꼬불한 글씨로 또박또박 쓰인 손편지, 그리고 꽃이 그려진 앞치마 하나를 등에 한가득 메고 온 지아를 처음으로 희문의 집에 초대한 것도 그 이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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