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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 미쳤음. 최대한 널널한 마음으로 봐주시고(뻔뻔함) 그래도 에바인 부분은 꼭 말씀해주세요.
※길다!! 요약: 신성식이 짜증남. 남희문이 착함. 견인이 멋있음. 지아는 천사임
※신성식 꽃밭 없습니다.
CW. 우울사고, 이걸 뭐라고 해야하지 어린이 친화적이지 못한 사회……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오전 7시 32분.
9살 생일을 훌쩍 넘은 어린아이는 보호자가 바쁜 틈을 타서 아주 은밀하고 중요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누군가에게 혼날만한 일이었지만 아이는 행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잔뜩 헤집어진 서랍 한구석에서 발견한 명함 상자. 통성명하며 받아뒀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남겨둔 명함들의 모음. 그 사이에서 아이는 익숙한 이름들을 찾아 헤맸다. 최정수…누구지. 하연지…몰라. 윤성진…아, 이거 엄마 동생. 하지만 필요 없다. 익숙한 이름의 명함을 그러모아 제 방으로 향한다. 은근슬쩍 훔쳐둔 엄마의 휴대폰 화면을 켜선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하나씩 누르기 시작한다. 강태환…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아…끊는다. 김지원…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신지아라고 하는데요. 아빠 아세요? 아~ 성하씨 딸이니?… … 익숙한 이름이라고 해도 이 상황에선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아빠를 모른다거나, 아빠를 알지 못한다거나, 엄마만 아는 사람들. 지아는 배워온 예절을 무시하고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서둘러야 했다. 최성빈…전화를 받지 않아… 동선하…이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번호가 없는 것들은 뭘까? 스쳐 가는 궁금증을 지나치고 마지막 한 장에 적힌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한다. 뚜르르르… 착신 음이 두어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오전 7시 57분.
월요일 아침.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치를 떨고 외면하고 싶은 최악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백수의 몸으로 침대에 늘어진 이 남자에겐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신목이니 뭐니 하는 개 같은 사건 이후로 직장을 때려치운 그는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느지막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때려치운 건지 때려 잡힌 건진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살아있었고, 살아있기 때문에 살고 있었다. 슬슬 선인장 물을 줘야 하던가? 잠결에 이런 고민이나 하던 남자는 동시에 10여년 이상을 영업부에 속한 채 일을 하던 워커홀릭이기도 해서. 벨 소리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은 건 일종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남희문입니다. 잠긴 목을 가다듬고 습관적으로 제 이름을 내뱉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영업부가 아니고, 자신에게 일과 관련된 전화가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는 냅다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신지아예요. 저희 아빠를 아세요?]
듣자마자 어린아이임을 알 수 있는 앳된 목소리는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잡음에도 남희문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신성식의 딸, 신지아다. 돌잔치에서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준 게 벌써 엊그제 같은데… 덜 깬 정신 사이로 스며드는 잡념을 뒤로하고 희문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퇴원한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했던가. 뭔가 만난 사람은 있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된 연락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몇 번 안부를 물었던 것도 같은데, 아니었나? 아무튼 남희문에게도 최근 성식과 연락을 주고받은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제 아빠를 찾는다며 전화를 한 아이에게 모른다고 일갈할 수도 없는 노릇.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는 희문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 어~ 지아야. 희문 삼촌이야. 삼촌이 아빠 어딨는지 알고 있어 걱정마~ 엄마 좀 바꿔줄래?”
회사의 누구든 듣는 순간 귀에 닭살이 돋을 것 같은 말투에도 스피커 너머의 아이는 조용했다. …왜지? 나 뭐 잘못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어… 어? 어~ 그렇... 그렇구나. 그럼 혹시 지아가 삼촌한테 말해줄 수 있을까? 아빠가 왜?”
저도 모르게 마지막에는 조금은 의아한 목소리가 섞였지만 아이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딸이 왜 신성식을 찾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가족들을 그렇게 극진히 아끼더니 뭐 하는 거야 이 인간은. 희문은 성식의 별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 이 의아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이의 입에서 나오고 만다.
[아빠가 안 돌아와요. 엄마가 아빠 입원했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전화도 안 해주고. ]
“뭐?”
[제 생일에도 안 왔어요. 선물도 안 주고. 전화도 안 하고… 원래 안 그랬는데. 바빠도 축하한다고 해줬는데.]
“….”
[희문 삼촌, 아빠 어디 있는지 진짜 알아요?]
“…….지아야. 삼촌이 아빠랑 연락해 보고 꼭! 다시 전화 해줄게. 이 번호로 걸면 될까?”
[제가 될 때 다시 걸게요!!]
“그래 알았다. 지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음에 또 전화하자!”
[네!]
씩씩한 말투에 왠지 모를 기분과 함께 전화를 끊고 나면 남희문에게 다가오는 감정은 분노뿐이었다. [이하 욕설 필터링] … 그렇게 자식 자랑을 하던 양반이. 애를 버리고 튀어??? 명치까지 늘어진 티셔츠 상태로 침대에 앉아 전화를 하던 희문은 벌떡 일어나 침실을 벗어났다.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옷방으로 들어가 움직이기 편한 옷을 찾아 입고 간단한 짐과 지갑. 휴대폰. 혹시 모르니 주민등록증과 이젠 쓰지 않는 명함까지 챙긴 채 집을 나섰다. 영업부 10년 차. 과장직의 가오가 있지. 신성식 이새끼. 발로 뛰는 영업이라는 게 뭔지 보여준다.
……
그 뒤로 희문은 제법 여러 번 지아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 병원에 가서 신성식의 주소지를 물어본다거나,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다는 말에 역정을 내고 쫒겨나길 반복하고. 인사부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보기도 하고, 혹시나 근황이 적혀있을까 하고 인스타를 뒤져본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본 적 있다는 추모 공원이나 납골당을 가보거나, 목격 정보 따위를 괜스레 찾아다니면서 신성식을 표현할 만한 검색어에 대해 고민하다가 머리털이나 더 빠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성식을 향한 분노와 반비례하게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름 마주쳤다는 사람은 많은데 왜 자기 눈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지. 희문이 어린 조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지 몇주가 지났다. 영업부 자존심 다 뒤졌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건 진작에 끝났던가….
그런 희문의 집 문을 누군가가 두드린 건 지아와 첫 연락을 시작한 지 한 달 차의 일이었다.
2024년 11월 21일. 월요일 오후 2시 26분.
초인종 두 번. 노크 소리 세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종교 권유라던가 방문판매라고 생각해 무시하던 희문은 왠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일종의 촉과도 같아서,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흐리게 떠오르는 화면 너머로 누군가가 보였다. 노이즈 낀 목소리가 익숙하다. 렌즈의 영향으로 조금 일그러져 보이지만, 희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빠르게 인터폰을 내팽개치곤 현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문을 연다. 쾅! 무언가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열었지만 문은 다 열리지 않았다. 조금 멀찍이 서 있었던 성식이 얼굴이나 몸을 부여잡고 있지도 않았으니 그가 맞은 것도 아닌데, 의아하게 주변을 흝은 남희문의 시선에 걸린 것은 적당한 사이즈의 캐리어였다. …캐리어? 아니 일단은 그런 데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희문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멈추지 못한 채, 결국 온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치고 말았다.
“내 짐 다 박살 났겠네. 무슨 사람이 이렇게 힘이 좋아요.”
“…신성식!!!!!!!!!!”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 오후 4시 21분.
남희문이 신성식을 찾아 홀로 고군분투 하던 동안, 신지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아니다. 어린아이라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힘냈다. 아쉽게도 연락이 닿은 어른은 희문삼촌이 끝이었지만… 보호자의 휴대폰을 훔치는 데 성공한 어린이는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었다. 지아는 삼촌과 첫 연락을 한 뒤로 곧장 성식의 집으로 갔다. 애초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니 만큼 기억은 확실해서 손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공동현관 따위 없는 작은 아파트인지라 별일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달라진 건 하나 뿐이었다. 띵동- 작은 초인종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띵동- 한 번 더. 그러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를 해도 굳게 닫힌 문 너머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아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뒤늦게 편지라도 써서 우편함에 꽂아놔야 하나 고민했지만, 비상금과 보호자 연락처를 적은 쪽지가 전부인 가방은 제 아빠에게 남길 그 무엇도 없었다. 훌쩍. 왠지 모를 서러움을 삼키다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일어선다. 혹시 모른다는 희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타인으로 인해 무너졌고, 아이는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 엉덩이를 털고 자리를 벗어났다.
‘삼촌. 아빠는 저한테 엄청 잘해주거든요. 만날 때 마다 놀러 가기도 하고.’
2024년 10월 30일. 수요일 오후 3시 48분.
지아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방학 기간도 아니었고,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일 때문이라며 가끔 집을 비우는 날이라던가 수업이 끝나고 친구와 놀러 가는 걸 허락 맡은 날, 지아는 어김없이 일탈을 감행했다. 이제 와선 죄책감이란 것도 없었다. 그저 모험심과 억울함이 가득한 마음으로 지아는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아빠랑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날 들었던 병원 이름. 아빠의 집 근처에 있던 곳이니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버스 두 번과 20분의 걸음. 이번에는 가방 안에 편지와 혹시 모를 메모장, 펜까지 챙겼으니 제 딴에는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그런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지아는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본인만 모를 당연한 이유로, 병원의 모든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며 답을 미룰 뿐이었다. 어린아이가 아빠를 찾는다며 이름이나 외쳐대는 상황에서 바쁜 어른들이 보일 행동은 하나 뿐이기도 했다. 아이는 사람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혼자 있는 기분을 뒤늦게 배운다. 직원 한명이 뒤늦게 아이에게 다가와 자초지종을 물어보며 엄마의 행방을 물어보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서 있다가 이내 꾸벅 인사를 하고 병원 문을 뛰어나왔다.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봤지만 그 뿐이었다.
‘언제나 내 편이에요. 삼촌도 비슷하긴 한데. 아빠가 더 더 그럴걸요?’
2024년 11월 1일. 금요일 오후 3시 22분.
쿡. 떡볶이를 찍어 입에 넣는다. 간간히 만나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삼촌은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언제나 자신을 본다. 전화로 들었을 때에도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확실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자주 봤던 삼촌이다. 그래서인가, 아빠보다 훨씬 키도 크고 무섭게 생겼지만 별로 대하기 어렵진 않았다. 아빠를 찾아 여행을 떠날 때 마다 외면당하던 기억은 어린 지아를 주눅 들게 했는데, 삼촌은 아빠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 기분을 살피며 좋아하는 것들을 사주곤 했다.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이것저것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말해버리긴 했지만, 아빠 친구니까 다 알고 있겠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삼촌이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엄마랑 사이가 나쁜 건 이해할 수 있어요. 모든 엄마아빠가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니까.’
2024년 11월 16일. 토요일 오후 12시 27분.
한 번 정도는 어른의 힘을 빌려도 좋겠다는 생각에 삼촌과 함께 추모 공간으로 향한 적이 있다. 아빠가 갈 만한 곳이 어디에 있을지 함께 고민해달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삼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한마디가 문제였다. 하지만 추모 공간은 병원이나 아빠의 집과는 달리 시내 한복판에 존재했다. 아이가 홀로 여행을 떠나기엔 너무 멀고 위험했다는 소리다. 결국 삼촌은 어설프게 제 손을 잡고 지하철 두 번과 버스 한 번의 먼 길을 떠나주었다. 지아는 이 사람이 제법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곳에도 아빠는 없었다. 옆에서 조용히 읊조리는 험한 소리를 무시한 채 작게 마련된 공간을 기웃거린다.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명의 얼굴이 낯설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도 있었는데, 벽면에 장식된 이름을 보고 깨달았다. 없는 번호의 주인이 그 공간에 있었다. 그저 익숙하기만 하고 기억나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죽음이란 다시 만나지 못하는 거라고 책에 쓰여있었다. 지금 당장 아빠를 한 달이 넘게 못 만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답답한데….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하기 싫었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아빠는 다신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지만, 제 아빠보다 높은 위치에서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근데 왜 나랑 만나주지 않는 걸까요?’
2024년 10월 14일. 화요일 오후 4시 17분.
견 인은 다섯살 난 조카의 손을 잡은 채 엉거주춤 걸었다. 그러면서도 그 걸음은 제법 경쾌하고 익숙한 것이, 하루이틀 잡은 자세는 아닌 듯 보였다. 초등학교 근처에 자리잡은 작은 유치원에서 조카의 하원을 돕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은 상처를 달고 퇴원한 견 인에게는 은근히 고되기도 했으나, 움직이지 않는 건 오히려 몸에 독이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연락두절 뒤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된 삼촌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조카의 마음을 달래기엔 최적의 행위라, 견인에게 있어서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분명히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항상 해왔던 일인데도 이제와선 조금씩 달라진 시선들이 있다. 뉴스에까지 나온 사건이라 그런건지 얼굴과 몸에 빼곡하게 새겨진 흉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카의 손을 잡는 자신을 연민과 어색함, 약간의 긴장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늘었다. 물론 견 인이 그런걸 신경쓰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흉터 지우는 병원을 알아보러 다녔겠지만. 으하하하, 누군가를 안심시키듯 버릇처럼 웃고선 조카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어도 일상은 소중하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즐겨야지. 숨겨둔 도끼는 여전히 집 현관 어딘가에 처박혀 있고, 집 안에 놓인 화분은 모두 베란다에 격리된 지 오래지만 견인은 하루하루를 제법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인의 기분을 매번 롤러코스터마냥 바닥으로 수직낙하 시키곤 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신성식이다. 그렇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확실하지는 않다. 병원에서 바로 옆 자리를 차지한 신성식을 봤을 때 까지는 약간의 반가움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문제였다. 견 인이 신성식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기에 6인실 병실의 바로 옆 자리는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신성식이 제 아내를 향해 무정한 말을 내뱉었을 때도, 딸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도 인은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이 인간은 대체 뭐가 문제인건지, 식물원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생각에도 없는 말들로 상처입히기 일쑤여놓고선 아직도 변한게 없다. 신성식이라는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봤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견인과 신성식은 교집합이라곤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관계를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차이는 확실했다. 신성식은 도망치는 사람이고, 견 인은 따라잡는 사람이라는 점. 그 사실이 인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 모든 상황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신성식은 정확히 견인이 먼저 퇴원한 지 한달이 되기도 전에 연락이 두절됐다. 듣자하니 퇴원은 한 것 같았는데, 그 소식 이후로는 들려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견 인은 다시 한번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이혼을 했으니 신변 정리를 하는 거야 이해한다지만, 견인이 느끼기에 이건 그냥 도피행위였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회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살아야 하는 데 왜 자꾸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지려 하는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인은 자신의 체력과 시간, 그리고 조카의 기분이 허락되는 동안 신성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허락의 제약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체력과 시간은 둘째치고서라도 조카를 혼자 둔 채 다니긴 쉽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신성식을 닮은 뒤통수를 보면 조카를 들쳐업고서라도 그를 따라가곤 했지만, 모르는 사람인 경우도 태반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때면 굳이 추모공간이나 납골당 등을 전전하며 신성식을 찾아보기도 했다. 만나서 할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는 달리 견 인은 신성식을 만나지 못했다. 뒤통수만 닮은 사람은 수십명 정도 마주쳤던 것 같은데, 정작 익숙한 얼굴 한번을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다. 한번은 신성식이 확실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익숙한 얼굴과 실루엣.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 보였지만 그래서 더욱더 신성식이라고 느꼈던 사람. 머리가 조금 자라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그 사람은 견인의 촉을 마구 찔러댔더랬다. 심지어 양손에 조카와 그의 짐도 없는 상황이었던 지라 견 인은 드디어! 라는 생각과 함께 빠르게 달려 나갔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저녁6시 즈음의 시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인이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길가에 장애물처럼 포진해 있는 사람들을 밀쳐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덩치와 흉터를 보고 스스로 피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성식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100m 달리기 속도도 자기보다 두배는 더 걸릴 텐데 왜 항상 이렇게 잘도 빠져나가는 건지. 인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향한 투지를 불태웠다. 신성식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점은, 견 인은 그보다 더 포기하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오후 4시 48분.
이젠 완전히 추워진 어느 날, 견 인은 여느 때처럼 조카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슬슬 눈이 올 법도 한데, 하늘은 답답하게 청명했고 건조한 바람만이 사람들의 옷깃을 여몄다. 해는 짧아진 지 오래라 조카와의 외출도 여의찮았지만 그래도 인은 아이의 양손에 전리품을 들려주고 나서야 문방구를 나섰다. 그에게 벼락같은 기시감이 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문방구 바로 앞, 서너칸 정도의 짧은 계단에 앉아있는 아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조카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큰 키가 쪼그려 앉아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는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로 흘리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걱정인지 그저 확인을 위해서인지는 견 인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시선을 돌려 아이의 얼굴을 본다.
견 인이 신지아를 알아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식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제 딸을 자랑해 대던 사람이었으니 인이 그 얼굴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제법 최근까지. 그는 ND생건의 수많은 직원과 마찬가지로 지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지아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성식과 많이 닮아 있었다. 옅은 갈색의 체모가 그 인상을 조금이나마 흐리게 만들었지만 눈매나 코, 조금 올라간 입꼬리와 특유의 분위기가 차마 그를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식을 닮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 똑같이 생긴 눈에 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 정도? ……눈물? 인은 화들짝 놀라며 조카의 손을 잡은 채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괜찮습니까? 문제라도 있어요?”
“…괜찮아요!”
아이는 경계하듯 아직 흐르지 않은 눈물을 훔친 채 벌떡 일어났다. 자리를 뜨는 아이의 앞을 저도 모르게 가로막는다. 견 인은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깨닫는다. 황급히 조카와 함께 거리를 두고 양손을 보인다. 놀란 듯 토끼 눈을 뜬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혹시 신성식…과장님 따님분 되십니까?”
“…아빠를 알아요?”
“압니다! 같은 회사 과장님이셨습니다. 지금은 아니긴 하지만….”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던 견인은 뒤늦게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딸이 있다면 근처에 신성식이 있을 텐데.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자신 외의 어른은 모두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신성식으로 보이는 남자는 없었다. 의아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뇌를 스친다. 가볍게 이를 악물었다가 한숨을 내뱉고 하늘을 본다. 내 예상이 맞다면 신성식 이 인간 진짜 가만두지 않겠어. 반드시 찾아내고 만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아무리 닮았어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죄가 없다 못해 아마도… 가장 큰 피해자일 아이에게 견인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왜 이런 데서 울고 있습니까. 물어봐도 되는 겁니까?”
인의 질문에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다. 9살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또래에 비하면 조금 작은 키였다. 하지만 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까지 굽어있던 어깨는 어느새 곧게 펴져선 인의 허리께에나 올 법한 키로 그를 올려다본다. 묘하게 큰 키에 익숙한 듯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아이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빠 딸 신지아예요.”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빠 찾는 거 좀 도와주세요.”
바람은 차고, 해는 기울어가는 시간. 영문을 모르는 다섯살 난 어린아이가 아는 것 없이 지겨움에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글동글한 장갑을 낀 조카의 손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힘을 준다. 다른 손으로 제 눈과 얼굴을 쓸어내렸다. 뒷목이 당기다 못해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붉은 기가 남아있는 지아의 시선이 곧게 자신에게 꽂힌다. 인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모든게 사실이었다. 신성식은 딸을 두고 사라졌다.
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오후 1시 03분.
사람들의 휘몰아치는 감정 따윈 전혀 모른 채로 신성식은 잠시나마 평화로웠다. 굳이 따지자면 잃었던 평화를 되찾고 안정적인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3일 전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성식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42년 인생 처음 느껴본 충격의 후폭풍을 견디지 못한 까닭이다. 자신이 끝맺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차라리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그래도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다. 첫날의 난장판 정도는 피곤하긴 해도 그저 웃긴 일화 중 하나니까.
성식은 어느새 익숙해졌다는 듯 작은 주방에 서서 요리를 시작했다. 저녁이야 이것저것 시켜 먹는 것 같지만 점심까지 배달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휑한 주방에서 프라이팬 하나와 계란 네 알, 냉장고 깊숙한 곳에 들어있던 양파까지 찾아 늘어놓는다. 있는 건 없으니 간단한 오므라이스라도 할까 싶어서 계란을 깨트리던 차에 다른 방에서 희문이 나온다.
“뭐해?”
“점심은 먹어야죠. 오므라이스 정도면 괜찮죠?”
“대충 먹으면 되지 뭔 오므라이스를…여기가 브런치 카페도 아니고.”
“싫으면 장 좀 봐놓으시던가.”
에이씨…. 늘어진 티셔츠 너머로 어깨를 긁으며 투덜거리던 희문은 이내 조용히 소파로 향했다. 리모컨 소리와 함께 TV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고 좁은 아파트 안은 금세 인기척으로 가득해졌다. 성식은 그게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른자와 흰자를 포크로 섞고 양파를 잘게 다져 밥과 함께 볶아낸다. 유통기한이 확실치 않은 케첩을 덜어 밥에 간을 하고는 적당히 양을 나눠 그릇에 옮겨 담았다. 남은 건 계란 물을 익혀 밥에 얹으면 끝. 엄청나게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만 딱히 찢어진 곳 없이 얹힌 모습에 만족한다. 계란 위에 케첩으로 엉성한 그림을 그려 넣고 있으면 어느새 희문이 식탁 쪽에 불쑥 다가와 앉는다. 그러면서 입을 연다. 오래 고민하다가 꺼내는 투다.
“…그러고 보니 지아랑 연락은 해?”
“그걸 왜 희문씨가 물어봐요?”
“아니…. 지아가 아빠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고.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당신 찾고 있다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희문의 앞에 오므라이스 그릇이 놓인다. 빨간 케찹으로 구겨진 곰돌이가 그려져 있다. 밥이나 먹어요. 반대편에 앉은 성식의 오므라이스엔 평범하게 지그재그 모양의 케찹이 뿌려져 있는 걸 보고 희문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크게 한숨을 쉰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차에 성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도 말했잖아요? 희문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그걸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애초에 그럼 당신이 제대로 신경을 썼으면 될 일 아냐!”
“제가 왜 신경을 써야 하는데요?”
“뭐?”
화가 난 듯 일그러진 표정이 성식을 향한다. 울컥 솟구친 짜증은 저도 모르게 해선 안 될 말을 했고, 성식은 순간 후회한다.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한다는 감각이 이렇게 숨 막히는 느낌이었던가. 목 안쪽에서부터 막힌 기분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인이 듣기에 용납할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이젠 안다. 하지만, 성식은 이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첫날. 남희문의 집 앞에 서서 그를 마주한 날. 주먹을 쥔 채 자신을 보며 버럭버럭 화를 내던 남희문 앞에서 그저 웃어 보이던 날…. 지아가 날 찾고 있다는 말에 성식은 그에게 모든 걸 말했다. 모두 제 잘못이지만, 있을 곳이 없으니 신세 좀 지고 싶다며 평소처럼 웃어 보였지. 그 내용을 듣고 희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성식은 모른다. 하지만 미간을 잔뜩 찌푸리긴 했어도 선뜻 그러라고 말해준 것에 안도했다. 그가 생각보다 마음이 약해서 다행이라고.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잠긴 목소리가 희문을 향해 새어 나온다. 애써 좋게 봐줄 필요도 없이 평소의 성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희문은 입을 닫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미안해요. 지금 당장은 모르겠어. 만나서 할 말도 없고.”
“할 말이 있어야 만나냐……. 하… 됐다. 밥이나 먹자.”
희문이 말없이 숟가락으로 곰돌이를 으깨곤 퍼먹었다. 성식도 조용히 오므라이스를 먹는다. 둘이 함께 살기로 한 날부터 그 뒤의 모든 날 중에 가장 조용하고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다행인 건 남희문도 그 뒤로 더 이상 성식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게 성식을 배려하고자 한 건지 단순히 글러 먹은 인간을 포기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성식은 그 조용한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식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제외한 다른 모두가 그의 부재에 슬퍼하고 분노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2024년 10월 3일. 일요일 오후 9시 58분.
신성식이 이혼을 결심하고 아내인 윤성하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혼이 인정되는 절차는 복잡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얼마나 많고, 걸리는 시간은 또 얼마나 긴지. 제 입으로 성질을 잔뜩 긁어놓은 성하는 확인 기일 때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죽일 듯이 쳐다보기나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제 잘못이니 불평할 것도 없지만, 피로도는 충분했다. 그나마 그 모든 절차를 피하지 않는 것 자체가 신성식이 내어줄 수 있는 마지막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공동명의인 집은 팔아서 나누기로 했고, 차는 애초에 제 돈으로 사서 관리 중이었으니 신성식의 것이었으며. 신지아의 친권은 윤성하에게 갔다.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질 수 있는 책임은 모두 두고 왔으니 자기가 할 일은 없고, 못미더운 아빠와 엮일 일 없는 딸도 언젠가는 안정을 찾겠지.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성식은 도통 평화롭질 못했다. 긍정적인 게 최고의 장점 중 하나였던 신성식은 식물원 사건 이후로 조금 망가졌기 때문에, 많아진 생각을 다잡는 게 익숙해지질 않았다. 애써 무언가를 보고, 마시고, 먹고…걷고, 씻고 읽어가며 생각을 지워도 무의식 속에 남아있던 생각은 꿈속에서 성식을 뒤흔들었다. 흔들리는 꽃밭, 가라앉는 늪. 달큰한 향과 항상 마시던 음료수. 함께 들르던 음식점과 카페. 제 집보다 익숙해졌던 작은 원룸. 식물원. 피 냄새. 추억과 기억. 외면과 자각을 통해 계속해서 등장하는 죽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성식은 잠을 설쳤다. 평소에 슬픈 영상을 볼 때나 주룩주룩 흐르던 눈물은 대체 무슨 꿈을 꾼 건지 수면안대와 베개를 한가득 적시며 신성식을 깨워댔고. 그가 젖어 들어가는 천 안대를 견디지 못해 휴지통에 내던진 뒤로 수면의 질은 점점 낮아지기만 했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 그저 있을 곳이 아니라며 휑한 기운을 만들어냈던 집은, 이제는 두 개의 방이 양팔이라도 되는 양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눌린 숨을 내뱉으면서 깨면, 두 눈은 언제나처럼 눈물을 머금고 있어서…. 성식은 더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이 집에서 혼자 있을 수 없었다. 꽃밭은 말라 죽어 가고 늪이 땅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고, 정말로 조만간 소주 세 병을 혼자 들이마셔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도, 상대도 원치 않는 일일 게 분명해서…….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오전 3시 46분.
성식은 휴대폰을 켰다. 새로 휴대폰을 바꾼 뒤로 설정을 바꾸지 않아 기본형인 화면에서 연락처 목록을 찾아 뒤진다. 일 때문에 저장된 연락처들 사이에 그나마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있다 보면 다시 떠날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연락을 끊은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말을 건네서 무슨 소용이 있나. 자신이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의미 없이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다가 마지막 즈음에나 보이는 이름을 본다. …….어쩌면, 성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책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행동할 뿐이었다.
집 안에 얼마 남지 않은 제 물건을 캐리어 안에 쑤셔 넣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방을 비우면서 생긴 박스들에 차곡차곡 넣어 트렁크 안에 실었다. 꼭두새벽에 물건을 쏟아내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지만 성식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정신 따위는 없었다. 필수적인 물건들을 여분의 가방에 마저 집어넣고는 SUV 뒷자리에 던져넣었다. 이젠 아무도 타지 않을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울 이유도 없었다. 무거운 짐들을 꾸역꾸역 제힘으로 옮기다 보니 옷과 머리는 흐트러지고 숨은 거칠어졌다. 땀이 잘 나지 않는 편인데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한쪽 등이 꺼진 지하 주차장의 조명 아래에서 신성식은 말없이 서 있었다. 집 문은 잠갔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집 안에 있는 건 쓰레기와 내다 팔 물건들뿐이었다. 모르겠다. 성식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아직 추워질 시기는 아니지만, 지하에 놓여있던 차 안은 유독 서늘했다. 차갑게 식은 가죽시트에 등을 대고 앉아있노라면 올라갔던 체온이 내려가며 노곤한 기분이 든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차 문을 잠근 채 성식은 그곳에 가만히 있었다.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2시 26분.
지아는 견 인과 연락처를 공유한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신성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희문과 달리 좀 더 젊고 활기차 보이는 이 사람은 성식을 찾는 데 더 열정적이기도 했다. 물론 삼촌이 열정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만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 타이밍에 인을 만난 건 지아에게 행운이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 쪼그려 앉은 뒷모습에 지아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어 아는 척을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심까! 오늘은 편한 옷을 입었군요~”
“헤헤. 아빠를 찾으면 달려가야 하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웃으며 몸을 일으킨 견 인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고, 지아 또한 그 손을 꼭 잡았다. 어느 순간부터 지아는 이 시간들이 꽤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비록 아빠는 몇 달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엄마에겐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아이에게 믿음직한 어른과의 탐색은 일종의 모험이기도 했으니까. 모험. 그래, 이건 탐험이다. 비 오는 어린이날, 엉엉 울던 지아의 앞에서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한 아빠가 말해줬던 것처럼. 아빠를 찾아 떠나는 모험. 그 과정에는 험상굳지만 친절한 삼촌도, 상처투성이지만 언제나 웃어주는 사람도 함께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진 알 수 없지만…. 분명 그건 자신의 하루하루에 다양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어디 갈까요?”
“……사실 지금까지 다녀온 곳 말고는 더 생각나는 곳이 없긴 합니다.”
“그럼 어쩌지….”
“……혹시 모르니까 갔던 곳을 한 번 더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급격하게 시무룩해진 지아의 표정에 견 인은 부러 과장하며 말했다. 처음 갔을 땐 타이밍이 안 맞아서 못 만난 걸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에 가면 딱!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신성식 그 인간도 슬슬 나올 때가 되지 않았슴까??? 그 과정에서 반쯤 본심이 나온 것도 모른 채 인은 아이를 달래기 위해 말을 줄줄 꺼낸다. 그래도 그 노력이 빛을 발한 건지 지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갔던 곳 중에 끌리는 곳이 있나요?”
“음…. 왠지 회사 쪽에 다시 가보고 싶어요.”
“좋슴다!!”
시원스럽게 외친 인이 지아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둘의 약속 장소에서 회사까진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으니 그렇게 먼 탐험도 아니었다. 그래도 슬슬 추워지는 날씨 탓에 해가 지기 전엔 돌아와야 했으니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지아는 잰걸음으로 정류장을 향해 걸었고, 견 인은 아이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휴대폰으로 배차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다음 버스는 5분 뒤에 도착 예정이었고, 정류장은 그리 멀지 않았으니 도착하면 바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입김이 흐르는 공기를 빠르게 지나치며 지아는 생각했다. 오늘이야말로 아빠를 찾고 말겠다고. 탐험은 즐거웠지만, 여행엔 끝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지아는 그 끝을 실패로 남길 생각이 없었다.
할 말이 있었다.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타 빈 좌석에 앉는다. 창가 쪽에 엉덩이를 밀어 넣고 빈자리를 툭툭 치자, 인은 머쓱하게 웃고는 그 옆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버스에는 히터가 틀어져 있어서 꽤나 따듯해서 가만히 있다 보면 은근히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아는 슬쩍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즐겼고 인은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 만난 이후로 처음 눈에 띄는 흉터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견 인과 눈이 마주친다. 그제야 자신이 예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지아는 뒷목이 뜨끈해지는 걸 느끼며 작게 사과한다. 물론 견 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특유의 웃음소리를 냈지만. 마주 웃던 지아는 아이 특유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한다.
“어쩌다가 난 상처예요?”
“아…. 이건 신목…아니 식물원 사건에서 입은 상처들임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창밖의 나무들을 흝는 시선이 조금 의아했지만 지아는 그 행동의 문제점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의 사고는 견인보다는 같은 사건을 겪은 걸로 알고 있는 아빠에 대한 걱정으로 흘러갔다.
“아빠도 많이 다쳤어요? 저도 보러 가고 싶었는데…. 아빠도 엄마도 안 된다고 해서 병원에 못 갔어요.”
“아…다치긴 하셨습니다만, 과장님도 다 나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쌩쌩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이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인이 버릇처럼 웃으며 얼버무린다. 영 솔직하지 못한 아빠와 많은 설명이 없는 엄마 사이에서 자란 지아는 그걸 눈치 못 챌 아이는 아니었기에 그저 끄덕이고 만다.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고 싶어 하면서도, 이젠 괜찮을 거라는 말 자체는 거짓말이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자세한 건 아빠를 발견하면 알 수 있겠지. 영 아이답지 않은 생각을 하던 차에 끼익, 신호에 걸려 버스가 잠시 멈춘다. 그 틈을 타 어색해하는 인을 모른척 하기 위해서라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지아는 저도 모르게 반쯤 열린 창문 끝에 이마를 박고 만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세게 박았지만 손은 이마를 짚는 대신 창문을 마저 열기 위해 움직였다. 차가운 바람이 버스 안으로 들어온다. 반대 방향에서 어우씨….하고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오지만 지아는 신경 쓰지 않고 바깥을 본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얼굴이 보인다.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마르고, 편한 옷을 입은 사람이. 묘하게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서 목덜미를 가리고 있었고, 안경을 바꿨는지 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습관적으로 올린 입꼬리라던가, 자신과 똑 닮은 눈매. 그 한쪽에 새겨진 흉터를 보며 순간 바로 전에 들었던 견인의 말이 떠오르고. 지아는 창밖을 향해 외쳤다. 어린아이의 새된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정류장까진 한참 남은 도로 위에 울려 퍼진다.
“아빠!!!!!!!!!!”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2시 53분.
성식은 오랜만에 거리를 나섰다. 희문과의 동거는 성식의 기준으로 나쁘긴커녕 좋은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지아와의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에선 희문쪽이 영 편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야 생긴 것과 성격에 비해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얼굴도 제법 자주 본 조카뻘 아이가 제 아빠를 찾는다는데 그 아빠가 자기 집에 있으면 신경이 쓰여도 단단히 쓰일 것이다. 성식은 이기적이게도 그 때문에라도 슬슬 지아를 만나봐야 하나 고민했다. 그는 웬만하면 짧은 기간 내에 그 집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으니까. 뻔뻔하게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반년 정도 거리를 쏘다니지 않은 것 치고는 성식은 20여분을 걸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이제는 제 자리가 아닌 회사 건물이 보였다. 이참에 카페나 들를까 하는 마음에 건널목 앞에 섰다. 날이 추워지니 음료를 사서 걷는다고 해도 녹을 일이 없다는 건 좋았다. 물론 이건 신성식이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기도 했지만….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멍하니 사람들의 체온이 기화되는 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아빠!!!!!!!!!!”
익숙하면서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주변의 모든 기성세대의 남자들이 반사적으로 소리의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성식도 그 움직임에 동참했다. 그리고 동시에 뒤를 이은 목소리가 벼락처럼 성식의 귀에 꽂힌다.
“신성식!!!!!!!!!!!!!!!!!!”
이건 익숙하고 들어본 적 있는 소리다. 저녁 6시, 사람으로 붐비는 시내가 아니었다면 분명 뒷덜미를 잡히고도 남았을 그날 들었던 목소리다. 견 인. 저 징그러울 정도로 끈질긴 인간.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고, 왜 지아와 함께 있는 거지? 10분 전까지만 해도 지아랑 만나볼 생각을 했던 신성식은 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지아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저 녀석은 안돼. 그런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저 둘이 타고 있는 버스의 정류장은 이 근처가 아니라 딱 회사 앞이니까 지금 당장 내릴 수도 없다. 여기서 건널목을 건너 골목 쪽으로 빠지거나 사람이 더 많은 곳에 들어서면 거리를 벌릴 수 있겠지…. 한동안 걷지 않아 굳어버린 다리를 가볍게 치며 사거리의 신호가 자신의 편이 되어 바뀌길 기다렸다. 깜빡깜빡, 방향을 가리키던 신호등이 꺼지고 완전히 빨간불이 된 순간 보행자 신호가 켜졌다. 몇 번 제 이름을 부른 뒤로 별소리가 안 나는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일단 성식은 안도하며 횡단보도를 걸었다. 4차선 도로의 중간까지 갔을 때였을까, 줄지어 서 있던 버스 중 하나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어떤 식으로 설득했는지 모를 견 인의 발이 버스 문에서 빠져나와 검은색 아스팔트 도로 위에 안착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자주 보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성식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참았던 공기를 내뱉는 순간 앞을 향해 내달렸다.
“기다리십쇼!!!!!!!!”
싫다! 뛰어서 긴 횡단보도를 건넌다. 빠르게 파고든 곳은 가까운 골목.
“과장님!!!!”
이제 과장도 아니다. 네가 사원이 아닌 것처럼. 평소에 저녁을 때우러 자주 들어왔던 곳이라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성식이 여길 돌아다니던 시간은 대부분 저녁 시간이었고,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그의 기억보다 사람이 적었다.
“신성식!!!!!!!!!!!!!”
어쭈? 슬슬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과 뻐근한 허벅지를 무시한다.
“지아 아버지!!!!!!!!!!!!!!”
……이제는 아니야! 바로 뒤에서 마치 바닥을 부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키가 190에 가까운 남자가 뛰면 원래 저런 소리가 나나.
“야!!!!!!!!!!!!!!!!!!!!!!!”
…젠장.
그 생각을 끝으로 견인의 손은 신성식의 겉옷을 잡는 데 성공한다. 끝없이 불러제끼는 다양한 호칭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던 걸 보면, 성식이 견 인에게 잡히리란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심을 잃은 다리가 삐끗하면서 그대로 바닥을 구른다. 그 과정에서 성식의 옷을 놓친 인이 당황한 듯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고, 쓰러진 성식의 몸을 살폈다. 기스야 이미 온몸에 났으니 어딜 다치든 이제 와선 상관이 없지만. 갑작스러운 뜀박질과 낙법이라곤 모르는 허접한 추락에 온몸이 아팠다.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고개를 드니 황당함과 걱정이 가득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뭐예요?”
성식의 말투는 여전했고, 그 힘은 대단해서 견 인은 그가 입을 열자마자 다시 화난 표정이 된다. 정색하듯 굳게 닫힌 입과 노려보는 시선으로 성식을 보다가 입을 연다.
“드디어 잡았지 말입니다, 신성식 씨.”
“네, 잡았네요. 대체 어떻게 지아까지 꼬드겨서 여기까지 왔는진 모르겠지만, 아주 축하해요?”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요.”
“제가 꼬드긴 게 아닙니다. 신성식 씨 따님께서 절 꼬드긴 겁니다.”
“….”
“아빠를 찾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그런 부탁을 했습니다.”
“….”
“생각이 있으면. 따님이랑 만나주십쇼. 네? 제발.”
으득… 화를 참는 듯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견 인은 웃고 있었지만 단단히 화가 난 느낌이었는데, 신성식은 여전히 신성식인지라 그 표정에 묘한 탈력감을 느꼈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나마 앉을만한 자세를 만든다. 그러고는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을 본다. 힘들다.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 이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딸이랑 아빠가 만나는 데 이유가 뭐가 필요해요!”
“애초에 견 인씨도. 쓸데없는 오지랖은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요? 이젠 같은 회사도, 같은 병원 동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찾아다니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니….”
“당신, 딱히 날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신성식씨!!!!”
“아빠!!!”
그런 둘 앞에 지아가 나타난 것은 아슬아슬하게 견 인의 인내심이 끊어진 찰나였다. 이제는 모두에게 익숙한 앳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로막지 않았다면, 인은 분명 딱히 많은 걸 참을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아의 목소리는 견 인의 바로 뒤에서 들려왔으므로. 그는 쥐었던 주먹을 풀고 몸을 돌렸다.
“지아야.”
가쁜 숨을 내쉬는 아이는 몇 분 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흐트러져 있었다. 깔끔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느슨해져 있었고, 겉옷은 흘러내려 어깨를 감싼 맨투맨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견인을 중간에 내보내는 데 성공한 뒤 위험하다는 이유로 착실하게 정류장까지 가서 내린 지아는 눈으로 좇았던 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골목 사이를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아이의 모험은 끝나는 듯 보였으나…….
그러지 않았다.
아이는 아빠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세를 잡더니, 그대로 돌진해서 바닥에 앉아있는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나약한 신성식. 그는 그대로 아이에게 밀려 뒤로 고꾸라졌다.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약하게 박고서야 멈춘 몸은 얼떨떨한 고통과 함께 제 위에 올라탄 딸의 모습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대로 아이는 작은 주먹으로 성식의 가슴팍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작은 손이라곤 하지만 고사리 같은 손은 이미 벗어난 지 오래인 9살의 주먹은 생각보다 매웠고, 그만큼 지아는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성식은 차마 팔을 올려 막지도 못한 채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주먹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 지아를 말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견 인이었다.
“지, 진정하십쇼. 지아님.”
보이십니까? 댁 따님이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이제 알겠어요? 그런 시선으로 성식을 내려다보며 지아의 팔을 잡아 내리는 인을 보며 성식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식은 42년을 살았지만 딸인 지아보다 모르는 게 많은 사람이었으니. 그런 성식에게 또 다른 충격을 준 것은 그 뒤에 나온 지아의 한마디였다.
“아빠가 미워.”
신지아에겐 할 말이 있었다.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3시 10분.
홀로 걷던 골목길 안쪽이 크고 작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정돈되지 않은 바닥 위를 구르고 넘어지고 앉아있자니 온몸이 아팠다. 머리를 생각보다 세게 박은 것 같았지만 성식은 그 통증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제 위에 올라타선 주먹질하는 모습을 보자니 지금까지 보아온 딸에 대한 기억이 꿈이었나 싶었다. 아니, 어쩌면 꿈은 지금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현실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픈 거겠지. 아이의 주먹질은 성식의 상체를 얼얼하게 만들고 나서야 견 인의 제지로 멈췄고,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던 차에 지아는 말했다.
“아빠가 미워.”
아이의 눈은 자신과 똑 닮아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눈빛은 엄마인 윤성하의 것과 같았다. 화와 울분, 지친 마음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있는 그 눈은. 성하와 마찬가지로 신성식을 향해 곧게 쏘아지고 있었다. 성식은 웃었다. 하하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곤 힘없이 팔을 늘어트린다. 언젠가 분명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뻔한 밑바닥을 알고 나면 이 어른스러운 아이가 가질 감정은 딱 하나밖에 없을 거라고….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 오랜 시간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은 건가. 행동력은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지만, 집념만큼은 자신이 아닌 성하를 닮았다. 보통은 그정도로 싫으면 꼴보기도 싫어하던데 굳이 여기까지 온건…. 아니. 그만큼 싫었던 건가.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지? 모르겠다.
“아빠가 지아한테 잘못한 게 많은가 봐…?”
“당연하지!”
버럭 외친 아이가 제 손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말한다.
“갑자기 사라지고. 돌아와도 말도 안 하고. 내 생일에도 안 오고. 아픈 것도 말 안 하고. 전화도 안 해주고.”
많기도 해라….
제 한 몸 건사 하기도 힘들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아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변명할 거리야 많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거나,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거나.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믿었다거나. 그런 의미 없고 설득력도 없는 말들. 성식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춘다. 제 눈앞에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원래도 꽤 잘 우는 아이인데, 반년 사이에 컸는지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지아가 울었다. 커다란 눈에서 맑은 눈물이 고이지도 못하고 뚝뚝 흐른다. 찡그린 얼굴이 우스울 법도 한데 차마 웃지 못하고 제 위에서 엉엉 우는 아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물을 닦아줘도 되나. 이전이라면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문지르고 울지 말라며 토닥여주는 게 자연스러웠을 텐데, 이젠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 신성식은 아직도 그의 딸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3시 27분.
지아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아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 말을 다 하기 전까진 울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가장 중요한 말들을 하지 못하고 발음은 꼬이기 시작한다. 밉다. 아빠가 미워. 아빠는 이 말을 들으면 분명 슬퍼하겠지. 그래서 더욱 제대로 전해주고 싶었는데….
“내 이야기는 하나도 안 들어주고…. 혼자 마음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결정하고.”
걱정하는 것과 달리 훌쩍거리는 소리 사이로 나오는 말들은 곧게 흘러나가 성식에게 닿았다. 떨어지는 눈물이 성식의 옷을 적신다. 이거 봐. 또 내 눈물도 안 닦아주잖아. 원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 뒤에야 성식은 머뭇거리며 아이의 뺨을 문지른다. 그 감각에 아이의 울음은 한바탕 더 쏟아지고 말았지만. 달래주지도 않고. 안아주지도 않고…. 아빠는 내 아빠잖아. 아이는 화가 난 듯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울며 말했다. 성식의 당황한 듯한 표정이 자신을 향한다. 그제야 아이는 제 엄마가 아빠에게 화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만다.
“아빠는 진짜 바보야!!!”
결국 한 번 더 주먹을 내리치려는 걸 성식의 손이 막아낸다.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이 손과 가슴팍에 흔적을 남긴다. 아이는 외치듯이 말했다. 계속하고 싶은 말이. 아빠가 알아줬으면 했던 말을 한다. 바보 같은 어른이 여태 몰랐던 이야기들을, 당연한 것들이라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말들을. 아무것도 모르던 딸이 제 아빠보다 먼저 알게 되었으니 이것만큼은 내가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워한다고 해서 아빠를 싫어하는 게 아니잖아! 화내는 게 전부 아빠를 싫어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
“아빠가 미워. 하지만 미운 이유는 아빠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아빠가 좋아서 미운 거란 말이야…. 아빠가 좋은데 아빠가 자꾸 날 피하고 속상하게 하니까.”
주먹을 막기 위해 잡았던 성식의 손이 이내 손을 놓고 아이의 어깨를 감싼다. 그제서야 아이는 엎드리듯 성식에게 안겼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이제부터는 아이답게 울 수 있는 시간이다. 이 모든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건 남은 어른이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아이는 제 눈물에 젖어 드는 옷을 무시하고 그토록 찾아다녔던 아빠의 품에 안겨 통곡한다. 아이의 모험은 끝났다. 제 등을 토닥이며 연신 사과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키울 뿐이었지만, 성식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3시 46분.
“…이 타이밍에 제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지아 님은 정말 신성식 씨 안 닮았습니다.”
“응…. 그런 것 같네요.”
제 품에 안긴 채 영혼까지 쏟아낼 것처럼 울어대던 아이는 결국 지쳐 잠이 들었다. 하긴, 애초에 여기까지 나온 것도 그렇고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닌 데다가 잔뜩 울기까지 했으니 지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제 할 일을 다 하고 긴장이 풀린 걸 수도 있고 …. 성식도 지친 건 마찬가지라, 엉망이 된 옷가지와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한다. 물론 품에 9살 난 아이를 안고 있느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걸 아는지 견 인이 옆에서 제가 대신 안고 있을까요? 따위의 말을 했지만 거절했다. 괜히 깨우면 곤란하기도 하고…….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혹여 12월의 추위에 몸을 식힐까 가디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문지른 성식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이 상태로 잡아당겨서 일으켜 줄 수 있어요?”
“당연하지 말입니다. 솔직히 신성식 씨는 너무 가볍습니다.”
그 말에 성식은 실없이 웃으며 견 인을 향해 남은 손을 내민다. 커다란 손이 제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힘을 받아 중심을 잡고 다리를 폈다. 반년 사이에 아이는 또 많이도 커서, 그 무게가 제법 버거웠지만… 동시에 차마 놓지 못했던 것이 눈앞에 있음에 성식은 잠시 안도했다. 미워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성식에게 있어서 꽤 신선한 말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흑백으로 나누며 살았으니까.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멀어지는 사람과, 견딜 수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사이에 견딜 수 없지만 멀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단 소리인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든 제 곁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건 분명 성식에게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성장의 방향이 제대로 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성식은 만족스러웠다. 품에 안긴 체온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나, 있을 곳을 허락해 준 사람. 노력을 함께하기로 한 사람과 추억 속에 남은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6시 52분.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 화면 너머의 모습에 남희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혼자 돌아다니다가 퍽치기라도 당한 거야?”
“말하긴 좀 복잡해요.”
“간단하게라도 말하면 되잖아!”
“지아랑 화해하고 왔어요.”
“…레슬링으로?”
그러겠냐고요. 얼빠진 듯한 희문의 표정에 성식은 저도 모르게 하하 웃어버린다. 하긴, 지금 자기 모습은 엉망진창이다. 상의는 온통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하고, 겉옷까지 함께 완전히 구겨진 자국투성이고. 어디서 굴렀는지 잔뜩 묻은 흙먼지를 털어낸 흔적이 가득하다. 흐트러진 머리는 어느 정도 정리했다지만 손과 얼굴에 남은 긁힌 자국은 숨겨지지 않았다. 싸우고 왔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꼴이다.
“지아랑 견인씨한테 사냥당했어요. 어디서 그렇게 합심한 건지, 버스를 도중에 내려서 달려오더라고요. 어찌나 빠르던지…”
농담조로 말하고는, 우선 씻고 나올게요. 이 상태로 거실에 들어가기도 뭐하니까. 같은 말을 덧붙인다. 그 말에 희문은 쉽게 납득하고는 물러난다. 저녁은? 희문씨는 먹었어요? 아니 아직. 그럼 희문씨 먹고 싶은 거로 시켜요. 통닭 시킨다. 빠르기도 해라. 좋아요~ 옷가지를 대충 챙겨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희문은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 마냥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켰다. 저번에 먹었던 통닭이 어디 거였더라…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턱이나 한번 긁적인다.
2024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7시 41분.
“그럼 이제 집에 가나?”
“아뇨?”
“뭐야? 왜.”
“지아랑 화해했다고 해도, 성하랑 저는 이미 이혼한 걸요. 이제 와서 합칠 생각은 없거든요.”
“그러면 언제까지 있을 건데.”
“글쎄요….”
“거기서 얼버무리면 어쩌자는 거야!”
“통닭 닭 다리 줄게요.”
“야.”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성식은 아직 많은 걸 몰랐다. 자기 잘못도, 실수도.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도. 별생각 없이 고마움을 표한다며 희문과 함께 견 인과의 술자리를 계획한 날. 술에 취해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견 인의 분노를 일깨우는 건 그리 멀지 않은 훗날의 이야기. 자신이 차마 놓을 수 없는 것들을 다시 한번 깨닫고 40년 인생을 부정할 일이 생기는 것도. 그 모든 폭풍이 휘몰아친 뒤에야 우연히 마주친 태랑에게 급변한 삶의 이야기를 하는 건 또 조금 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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