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것이란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는 이따금 이유 모를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익숙한 본인의 방에서 눈을 뜬 쿠니히로는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잠에서 깼구나, 딱 그 정도의 감각이었다. 그러나 방에서 나와 밖을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동료들의 얼굴에서 놀라움과 안도감 등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얼핏 짐작했다. 그리고 그 즉시 주인의 앞에 끌려가 이모저모를 문답하고 몸 구석구석이 만져지면서 진단을 끝마친 쿠니히로는 영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을 주인에게서 전해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주일이나 자고 있었고,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그래. 보아하니 영력의 흐름이나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기억에 이상이 남은 것 같아.”

“이상이라니?”

“아까 확인하던 것들 있잖아. 오늘은 어떤 년도이고 몇 월 며칠인지, 그리고 올해 칠석 행사에서 쓸 조릿대는 누가 구해왔는지. 또 3월에 있었던 노래 자랑 대회의 우승자라든가, 최근에 갔던 출진지는 어디였는지….”

진단받으면서 묻고 답햇던 것들을 다시 이야기하던 주인은 이윽고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조립해본 바. 아마 일주일 전에 있었던 출진처에서 소행군에게 저주를 받고, 반년치의 기억이 사라진 것 같아.”

“반…년?”

“응. 반년.”

주인이 턱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벌써 어슴프레해진 기억을 떠올려보려는 듯이 시선을 먼곳에 둔 채 중얼거렸다.

“반년이라…. 이거 꽤 애매한데. 굵직한 사건들만 떠올려보자면 저번에 별관을 증축했고, 크고 좋은 냉장고를 새로 구입해서 미츠타다가 기뻐했던 것이랑, 다 같이 달맞이하면서 먹은 술맛이 너무 좋은 바람에 곯아떨어져서 카센한테 혼난 거랑….”

“…….”

“부젠이 오자 코테기리 군이 당장 아이돌로 데뷔하겠다며 작은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네. 그 전에는 취락제 보수로 야만바기리 쵸우기가 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던 적도 있었고. 아! 저번에 마당에서 불꽃놀이 했던 것도 좋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엄청 크고 화려한 불꽃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엄청 멋있었어. 만바도 같이 봤는데 기억 안 나려나?”

“자, 잠깐. 주인…. 다시 말해 줄 수 있어?”

“응? 불꽃놀이가 멋있었다?”

“아니, 아니… 그 전에.”

“야만바기리 쵸우기가 왔다?”

“…….”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을 쿠니히로는 이때 처음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쵸우기가 오고 난 후 한동안은 혼마루 분위기가 엄청 살벌했어…. 주로 호의 문제로 너랑 많이 싸웠는데. 쿠니히로는 기억 안 나겠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터치하지 않는 주의라 일단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그래도 너희 둘이 어떻게 합의라도 봤는지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져서 다행이었네.”

“그렇다는 건… 즉 본가가, 이 혼마루에 있다는 소리인가?”

“뭐, 그렇지. 당황스러울 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다시 잘 지내봐.”

“그렇게 말해도….”

당황한 쿠니히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면서 격려한 주인은 이내 쿠니히로를 방에서 내보냈다. 떨떠름하게 밖으로 나온 쿠니히로는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자기 방으로 옮겼다. 긴 툇마루를 걷던 쿠니히로는 잠시 멈춰서서 멍한 얼굴 그대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 아래로 하얀 눈이 송이송이 떨어지고 있었다. 두꺼운 천을 뒤집어 썼으나 겨울인지라 내번복 차림으로만 다니기에는 꽤 서늘한 공기였다. 저 멀리서 제 1 부대가 혼마루로 돌아오기라도 한 모양인지 조금 소란스러웠다.

“…….”

자신과 야만바기리라는 호를 공유하는 사이인 본가 야만바기리 쵸우기. 언젠가는 만나리라 생각했으나 그날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을 줄이야. 그가 정확히 언제 이 혼마루에 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일단 자신이 기억을 잃은 이 반년 안에 왔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자신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본가는 과연 어떤 칼일까? 현현하고 한동안 자신과 크게 싸웠다는 말로 보아 애석하게도 자신과 본가는 그리 온화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먼 옛날, 어렴풋이 기억하는 과거의 그는 아직 부상신로서의 자아가 뚜렷하지 않은 자신을 상냥하게 돌봐주던 아름답고도 의지가 되는 강한 칼이었다. 본가의 뒤를 급히 따르다 넘어졌을 때, 그는 손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한 손길로 옷을 털어주며 가뿐히 자신을 안아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희미해진 기억 너머로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쿠니히로라고, 제 이름을 불러주며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던 본가를 떠올린 쿠니히로는 추운 공기도 잊은 채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얼굴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때였다.

“쿠니히로.”

분명 낯설지만 익숙한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그와 같은 목소리였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상대방을 향한 애정을 결코 숨기지 않는 사랑스러운 음색이었다. 심장이 덜커덩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쿠니히로는 목소리의 근원지로 느리게 몸을 돌렸다. 제복 위에 스톨을 걸친, 서양식 복장을 한 은발의 도검남사가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며 제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때? 이제 몸은 괜찮은 걸까나?”

“아, 앗… 그, 저기….”

“안색이 이상하네.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건가? 겉보기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이는데. 너무 오래 자서 둔해진 거 아니야?”

성큼성큼 금방 다가온 그는 쿠니히로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면서 몸에 이상이 없는 지 유심히 살폈다. 이윽고 장갑을 낀 양손으로 쿠니히로의 볼을 감싼 그가 쿠니히로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얼굴을 확인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머리카락은 비단실 같이 가늘고 은빛으로 밝게 빛났으며 얼굴 조형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비슷했다. 쿠니히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가 바로 자신의 본가. ‘야만바기리 쵸우기’라는 사실을.

“왜 그래? 평소보다도 말이 없는데. 내가 돌아오자마자 널 만나러 온 게 기쁘지 않아?”

“으….”

“늘 해주던 수고했다라는 말도 안 해주는 걸까나. 건방진 사본이네.”

“저, 저기. 보… 본가.”

“응? 무슨 일이려나?”

머리가 핑핑 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안색이 하얘졌다 붉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쿠니히로는 간신히 할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나, 본가에 관한 것을 잊어버렸다.”

“…응?"

“정확히 말하자면 반년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그 안에 본가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 다고 생각해.”

“…….”

“그러니까, 음…. 본가에 대한 것을 잊어버려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

얼토당토 않은 소리에 잠시 굳어져있던 쵸우기의 얼굴이 서서히 싸늘해져간다.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를 살피듯이 쿠니히로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쵸우기는 이내 뒤로 물러서서는 쿠니히로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언제 걱정하기라도 했냐는 듯이 순식간에 서늘한 가면을 얼굴 위로 덧씌운 쵸우기는 표표한 설녀 같은 얼굴로 턱을 살짝 올리고선 오만한 음색으로 쏘아붙였다.

“헤에…. 둔한 네가 거짓말 같은 걸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려나. 그래? 그럼 다시 한번 잘 부탁해. 가짜 군.”

“어…? 잠, 사본은 가짜와는 달…!”

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쵸우기는 쿠니히로를 지나쳐 갔다. 점점 멀어지는 쵸우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쿠니히로는 저도 모르게 손을 가슴 위로 가져다 댔다. 손 아래로 심장소리가 크게 쿵쿵거리면서 기분나쁘게 울렸다. 다정했던 그의 태도가 손바다 뒤집듯이 삽시간에 흉흉해졌다. 기억 속의 본가와는 다른 그 모습에 가슴이 아릿해지고 애달픈 마음마저 들었다. 본가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적개심을 드러내는 상대가 된 것이 슬프기 그지 없었다. 쓸쓸하고 화도 났다. 하지만 그보다도…….

마치 정인을 앞에 둔 것처럼 사랑스럽다는 듯이 ‘쿠니히로’라고 부르던 그의 얼굴이 몹시도 살갑고 다정다감했던 것이 못내 슬프고 부러웠다. 자신의 본가에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한 존재가 아마도 과거의 자기 자신이었을 거라는 사실에, 쿠니히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을 시샘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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