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신록이 눈이 부신 초여름에 현현된 이곳의 야만바기리 쵸우기는 유독 사무 업무가 서투른 혼마루에 현현된 구세주나 다름 없는 칼이었다. 다들 몸이 좋으면 머리를 덜 써도 된다는 주인의 사고방식에 깊게 감화되기라도 한 모양인지 풍류와 우아함을 사랑하는 문과의 칼인 카센 카네사다마저 보통의 개체와는 다르게 손속이 매웠으며 근육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이곳의 대부분의 칼들은 책상에 앉아서 책과 모니터의 활자를 들여다보기보다는 밖에 나가서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그렇기에 필수적인 사무 업무는 그나마 주인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강하게 갖고 있는 하세베와 금전이 얽힌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구는 하카타에 두 사람에 의해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쵸우기의 합류였다. 정부에서 일한 덕분에 서류 작업은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한 전 감사관 야만바기리 쵸우기다. 쵸우기는 현현 첫날, 현 혼마루의 실태를 제대로 눈으로 확인한 후 바로 이마를 짚으며 업무에 자진 참가했다. 이제부터 자신의 거처가 될 곳이었다. 본인도 더 이상의 엉성한 관리를 참을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시간은 쏜 화살처럼 금방 흘러갔다. 쵸우기도 어느새 이 혼마루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든 존재가 되었다. 혼마루의 칼들은 대체로 혈기왕성했지만 예의는 지켰으며, 이곳은 전체적으로 시끌벅적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즐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낮에는 단도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업무실까지 닿았으며 밤에는 연회방 근처로 술꾼들이 왁자지껄 술주정을 부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단련에 힘을 쓰는 칼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쵸우기는 오늘도 서류 업무를 위해 주인의 거처와 가까운 행정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몇 주 전까지만해도 아침에 일어나면 살갗 위로 쌀쌀한 공기가 반겨주었는데 이제는 약간의 서늘함만 느껴질 뿐 한낮일 땐 완연한 봄 날씨가 되었다. 새로이 피어난 꽃들로 정원도 생기를 되찾았다. 적당히 따스한 햇살을 피부로 느끼며 쵸우기는 계속해서 걸었다. 조금 떨어진 곳의 안뜰에서 작은 호랑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단도들이 보였다. 참으로 평화롭고도 흐뭇한 일상 속의 풍경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쵸우기는 자신을 반기는 동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느긋하게 업무를 시작했다. 다들 봄이 가져온 분위기에 물들은 것일까. 여느 때보다도 여유롭고 나른한 시간이었다. 아마 급한 안건을 어제 전부 처리한 것이 이 나태함의 원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 점심 이후. 다음 출정지에 대한 조사와 인원 편성, 보급품 지급 등에 관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쵸우기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응? 불렀을까나?”
“아니, 집중하고 있었을텐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그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자신을 부른 이인 하세베의 말에 쵸우기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말이 부족했다. 하세베는 다시 입을 열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돌려줬다.
“먼저 말하자면 주인님과 하카타와의 상의한 끝에 결정된 일이다. 너, 최근 들어서 밤낮을 안 가리고 몇 날 며칠을 일만 했잖아. 주인님도 자신이 한 실수 때문에 너에게 많은 고생을 시킨 것 같다며 사과와 감사의 의미로 3일간 휴가를 주시기로 했어. 물론 우리도 동의했다. 네가 그만큼 우리 중에서 가장 고생했다는 걸 다 알고 있기 때문이야. 미리 말하자면 여기서 거절하는 건 주인님의 숭고한 명을 거절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셈이니 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응…?”
“그러니까 하세베도 걱정했다는 뜻이구마! 알겠으면 퍼뜩 나가서 휴가 잘 즐기다 오시랑께~”
“뭐?! 그런 말은 안 했어…!”
하세베의 말 대로 일단 거절하려던 쵸우기는 작게 입씨름을 하는 둘을 지켜보더니 이윽고 어깨에 들어가있던 힘을 탁 풀었다. 확실히 지난 번에 주인의 기입 실수로 인해 한바탕 얽혀져 있는 서류들의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으로 큰 소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필이면 정부에 보내야 할 서류의 마감일이 바로 며칠 전이었던 탓에 시간도 촉박했고, 때문에 사건이 터졌을 때의 대처법도 여기서 가장 익숙한 쵸우기가 주로 과중한 업무를 맡은 것도 맞았다. 사실 아직도 그때의 피곤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탓에 더 몸이 무거웠던 것이었을까? 어차피 이제 급한 안건도 없었으니 모처럼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한 쵸우기는 남은 서류를 마저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섰다.
햇빛은 따사로우며 두둥실 포근한 공기가 만연한 나른한 한낮의 오후였다. 얼추 한 시 반 정도는되었으려나? 평소대로라면 지금 이 시각, 방금처럼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동료들과 함께 서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을 터이다. 막상 휴가가 주어지자 쵸우기는 달리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점심을 먹고 난 후 배가 부른 묘살 군이 햇빛이 잘 드는 툇마루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낮잠을 자고 있다고 종종 들었는데. 자신은 그처럼 고양이가 아니니 그런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신나게 뛰어 노는 단도들의 웃음 소리를 기분 좋게 들으면서 쵸우기는 정처없이 걸었다. 어떤 곳에서는 근력 운동에 힘쓰는 칼들이 보였고, 또 어떤 곳에서는 목검을 맞대고 대련하는 칼들이 보였다. 작은 방에 모여 앉아서 게임을 하는 듯한 칼들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 시간에 보이는 건 드물지 않냐며 말을 걸어오는 자들을 적당히 응수하던 쵸우기는 중간에 같이 차를 마시자며 권하는 오래된 칼들의 모임에 붙잡혀 잠시 다과 시간을 갖기도 했다.
쵸우기는 태평하게 주변을 산책하며 오래간만의 여유를 즐겼다. 정부에 있었을 때 워커홀릭이라고 불렸던 만큼 실제로 지금까지도 일을 찾아서 하는,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라는 것을 쵸우기 본인도 얼핏 느끼고 있긴 했다. 그렇기에 이 붕뜬 시간이 난처했다. 나름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해는 위에서부터 찬란히 빛을 뿌리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머리 위에 올려진 화관 잎이 살랑거렸다. 오다가 마주친 단도들이 수줍게 건넨 것이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꽃내음을 맡으며 쵸우기는 계속해서 거닐었다. 기분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샌가 가보지 않았던 길로 접어 들었다. 혼마루와 꽤 떨어지게 된 쵸우기는 자연이 드넓게 펼쳐진 청량한 숲길의 도입부에 다다랐다. 이곳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으나 아마 지리상으로 이곳은 뒷산의 입구일 터였다.
그때 쵸우기는 떠올렸다. 이 혼마루의 뒷산에는 멋진 꽃놀이 명소가 있다며, 봄이 되면 다 같이 또 놀러 가고 싶다고 현현 초기에 들은 단도들의 들뜬 재잘거림이 불현듯 기억 속에서 떠오른 것이다.
그래. 단지 그뿐이었다.
약간의 설렘과 호기심을 안고 쵸우기는 평소라면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을, 처음 가는 길로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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