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들 봄, 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 같다만 언제 이렇게 더위 가득한 여름이 찾아온 것일까. 하늘은 이미 어둑해진지 한참이었지만 여름 특유의 후덥지근한 공기는 여전히 대기를 맴돌고 있었다. 더워. 이런 날씨에 나 자신도 모르게 손부채질을 퍼덕이며 길을 걷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만히 걸음을 옮기고만 있을 뿐인데도 때때로 숨이 턱턱 막혀오는 듯한 느낌. 집에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 좀 쐬면 나으려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올해 여름 들어 한 번도 작동시켜보지 않았던 집 에어컨에 문제가 있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에어컨에 마지막으로 가스를 충전했던 게 언제였던지. 천천히 곱씹어 생각해봐도 흐릿한 기억만이 존재할 뿐, 도통 또렷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꽤나 오래된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니 작년 여름엔 예상과 달리 그리 덥지 않아 전기세 많이 잡아먹는다고 하는 에어컨은 멀리해서 깊이 쳐박아둔 채 선풍기로만 연명해 살고 그랬으니, 그렇다면 집 에어컨엔 가스가 떨어진 지 오래겠지. 이럴 줄 알으면 미리 좀 넣어두고 그럴 걸.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지. 결국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다시 방향을 돌렸다. 집에 가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게 뻔하였으니 그 말고 다른 대책을 찾아봐야 할 터였다. 어쩌지, 어쩐다. 딱히 갈 곳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색다른 방법을 찾는 게 맞겠지. 무더운 밤공기가 저를 꾹꾹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더 생각이 안 나는 것만 같기도 하고 말이다.
걸음을 옮기며 줄곧 두리번 거리던 시선. 이쪽 길은 처음 와 본 것이었나 싶을 즈음에 고깃집 하나가 들어왔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입구 주변에 개업 축하 메시지가 적힌 온갖 화분들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 때 간단히 챙기고 저녁을 안 먹었었구나. 이미 가게 내부에는 손님들이 적잖이 들어차 있는 듯 열린 출입문 사이로 고소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온다. 그 고기 내음을 맡고 있자니 서서히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급 허기가 지는 느낌에 배를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문질렀다. 고기를 먹고 싶은데, 혼자 먹으러 가긴 좀 그렇고. 누구 같이 갈 사람은 없나. 하는 마음에 고민하던 때였다. 핸드폰에서 메신저 알림음이 들려왔다. 누구지. 이 사람이랑 고기 먹으러 갈까. 뭐, 실상은 아직 누군지도 확인 안해봤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메세지를 확인하였는데.
[너 그새 죽은 거 아니지?]
타이밍도 기가 막히시지. 얼마간 또 연락이 끊겨있었던 A다. 저번에 벚꽃 구경 가자고 한 약속이 무산된 이후로 (중요한 일이 생겼다면서 자기가 먼저 파토내고 갔다. 망할 녀석.) 다시 연락이 두절 되었었는데 어느새 문자가 와 생존 여부를 묻는다. 얘는 매번 하는 말이 그거밖에 없냐. 어째 A와 내 연락은 늘 생존 여부를 묻는 걸로 시작되는 거 같다만. 그 메시지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 같이 고기 먹을 사람은 A 너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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