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체스터 후의 후계자

사람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라고, 붉은 피를 푸르게 물들여 자신을 망가뜨리며....

대지 by 서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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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르트 에스 셀레스트 윈체스터는 피로했다.
태어나기를 영국의 후작위를 이을 사람으로 태어난 윈체스터는, 자신의 이름보다도 먼저 윈체스터 후의 후계자이자 후트샤 백작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해졌으며, 윈체스터가의 공자로서의 처세를 배워야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보다도 먼저 배운 것은 가문에 대한 소개였으며, 사람간의 인간적인 정보다는 타인과 선을 긋고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하는 것을 먼저 배웠다. 사람으로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람을 부리는 것에 능숙해졌고, 사적인 말을 꺼내는 것보다 정세나 경제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우고 나누는 것이 편해졌다.

“…후트샤 백작님, 우리는 귀족이지만, 동시에 일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에카르트가 7살이 되던 해.
에카르트는 순하고 작은 모습과 상반될 정도로 예의를 차린 어투로 타인을 내려다보는 윈체스터가 되어 있었다.

윈체스터 후와 후작의 부인은 그런 윈체스터의 후계자를 자랑스러워했지만, 에카르트의 가정교사 중 한 명인 허버트 준남작은 에카르트의 그런 모습을 가여이 여겼다. 사람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라나는 사람은 몇 세기 전에는 유용했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윈체스터 가문이 후작 가문 중에 유일하게 현대까지 장원을 가지고 영지를 운영하고 있지만, 지금 시대의 귀족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몇 세기 전만 해도 귀족들이 가진 특권-상원에서 동료 귀족들에 의해 재판받거나, 민사상의 체포를 받지 않는 등의 권리-가 있었으니 사람이 아닌 귀족으로 지내어도 괜찮았다. 그들이 푸른 피를 가진 존재로서 사람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도 큰 문제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적었다.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 참칭하였고, 모두가 그 거짓에 속았던 때였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세습된 무언가로 혜택을 받고 있을 뿐이며, 그 또한 영원치 않음을 곱씹어야 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현대의 귀족이란 그저 세습의 혜택을 받는 사람일 뿐이고, 그들의 특권 역시 많이 쇠했다. 장원을 가진 이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자신의 장원을 담보로 내놓거나 잃었으며, 자신이 가진 군과 함께 몰락하여 장원을 가질 자격조차 잃었다. 이전의 귀족들은 대다수가 그 작위만으로 상원 의원이 되어 정치에 간섭하였으나 현대에는 그들 모두가 의원이 되는 일 또한 없다. 그 중 선택된 몇몇의 사람만이 의원으로 선출될 뿐이다.
귀족의 피는 푸르지 않다.
일반적인 인간과 다른 존재를 참칭한 사실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타국에서는 그로 인한 혁명 또한 일어난다. 귀족은 이전보다 더 조심해야하며, 상도를 지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법정, 혹은 그보다 더한 이제 판결 앞에 서야 할 것이다. 수많은 역사가 알려주었듯이.

“허버트 경, 나는 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허버트 준남작은 제자가 된 그를 바라본다.
에카르트는 태어난 순간부터 귀족으로 자랐다. 자신이 보통의 사람과 같다는 것을 이론과 학문으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허버트는 알고 있다. 이제는 하얀 수염이 나고, 머리가 히끗하게 새어버린 허버트는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아온 허버트가 보기에 에카르트는 작디 작은 아이였다. 생각보다 더 천진하고, 좋아하는 것이 많은 아이였다. 에카르트는 작은 풀꽃을 귀여워했고,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햇볕을 좋아했으며, 작은 동물들을 어여삐여기며, 누군가가 흥얼거리는 작은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타인의 눈에 비친 세상을 경애했고, 더 나아가 사람을 사랑했다. 에카르트는 다니는 사람이 적은 파빌리온에 앉아 숲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에카르트는 정치보다는 예술을 사랑했고, 장원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직접 그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선호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보아야 할 것도 많은 작은 아이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에카르트는 부단히도 숨겼다.

“…언젠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교육받으신 것보다, 활자로 보여진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실 테니까요.”

귀족에게 인간적인 것은 필요치 않다고 교육받았기에.
허버트 준남작은 그가 안타까웠다. 이제 시대는 귀족을 원치 않는다. 사람 위에 서있는 가면 쓴 사람을 원치 않는다. 그것을 잠시 동경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 동경은 오래가지 못한다. 허버트의 생각에 에카르트는 귀족으로서 사는 법보다 먼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그리고 사람들과의 정을 주고받고 악의와 선의를 구별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했다. 사람이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허버트 경은 왜 그것을 알려주지 않으십니까?”

“그건 말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백작에게 알려줄 수 있는 만큼 알려주겠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은 백작의 몫이기 때문이지요.”

에카르트는 허버트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허버트는 항상 그러했다.
다른 가정교사들은 에카르트에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아라 정확히 이야기했고, 그것들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주었으나 허버트 준남작은 그러지 않았다. 무언가 하나를 이야기하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에카르트 스스로 어설프게나마 찾을 때까지 질문을 던졌고, 어떤 것에 ‘절대’라거나 ‘항상’이라거나 하는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 생각을 멈추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어떤 날은 정해진 수업을 하는 대신 정원이나 미술관, 공연장 따위를 데리고 다니며 평소에 먹지 않을 것들을 에카르트에게 내밀었다. 길거리의 아무 곳에서나 파는 음식인 경우가 많았는데, 평소에 먹는 것보다 과하게 짜거나, 과하게 매워 항상 에카르트를 곤혹스럽게 했다.

“하하, 그게 그렇게 맵나요?
제가 백작의 눈물을 보네요, 후작께서 아시면 경을 치시겠습니다.”

허버트 준남작은 그런 것에 기함하는 에카르트를 보며 호쾌하게 웃어보이기도 했다.
에카르트가 저도 모르게 축축한 눈을 흘기면 허버트는 저보다 반절은 작은 에카르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씨익 미소지었다. 분명 스스로가 놀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에카르트는 허버트 준남작과 있는 시간이 편했다. 에카르트보다 두 배는 큰 손은 에카르트의 손을 방자하게도 잡고, 아이를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는 얼굴로 에카르트를 살피었다. 그러면 에카르트는 괜히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고는 했다. 꼭,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정말로 가족같아서,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를 보는 기분이라서, 자신의 무방비한 모습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비죽 흐를 것 같아서….

“앞으로 사회, 경제에 대해 가르쳐드릴 해럴드 커티스입니다.”

비죽 흐를 것 같던 웃음은 결국 사라졌다.
허버트 준남작은 다른 교사에 비해 적은 시간동안 일을 하고 사라졌다. 그의 가정교사를 고용하고 배정하는 것은 모두 윈체스터 후작의 권한이므로, 윈체스터는 스스로 추측했다. 아마도 윈체스터인 자신이 허버트 경 앞에서 격의없이 행동했기 때문이리라. 가끔 수업을 빼고 다른 것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잘 부탁드립니다, 커티스 경.”

윈체스터는 피로했다.
귀족이란 고귀한 존재라고 배웠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푸른 피를 가지며, 타인의 위에 군림해도 된다고 배웠다. 어느 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다고 배웠고, 어느 날은 배움을 게을리하고 일을 등한시하면 어느 역사처럼 나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배웠다. 그 날 윈체스터는 지독한 악몽을 꾸었고, 어떤 날은 숨이 막혀왔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가정 교사 한 명 뿐이건만, 세상은 생각보다 더 버석해졌다.

“후트샤 백작은 아는 것이 많군요. 어찌 벌써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지…”

윈체스터 가문의 미래가 밝습니다, 후작이 부러워지는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윈체스터는 나날이 깔끔하고 단정해졌으며, 지식은 늘어갔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정교사가 바뀐 후로 수업은 변동 없이 이루어졌고, 어떤 학습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교사가 바뀐 것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반항심 같은 것도 들었다. 윈체스터 스스로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 있었던 사람을 돌려달라 시위하며 화를 내볼까도 생각했으며, 어떤 순간에는 새로운 가정교사의 교육을 듣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더랬다. 하지만 윈체스터는 알았다. 스스로가 반항을 한다면 그것은 이전 가정교사, 허버트 준남작의 실수로 남을 것이다. 윈체스터 후작의 자랑스러운 차기 후계자가 자랑스럽지 않게 변하는 순간, 그건 쫓겨난 가정교사의 실책이 되고 가정교사를 내쫓은 것을 최선이라 여기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윈체스터는 그런 가능성을 두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가슴이 공허한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의 성취가 좋음에도, 그리하여 많은 교육을 먼저 받고 어린 나이에도 사업에 손을 얹고, 공식 행사에서 의전 서열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타인이 부러워할만한 많은 것들이 있음에도 가슴이 공허했다. 년도가 하나하나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나아지는 일 없이 동일했다. 신체는 점점 커져가는데, 가슴은 여전히 어린 아이의 것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이 자라지 못한 무언가가 신체 안을 데구르르 굴러다니면서 소리를 내고, 그 울림이 자꾸만 스스로를 흔드는 것 같았다.
이것을 단 한 사람의 공백이라고 봐도 되는가?
그는 스스로 고민하기도 했지만, 정확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혼자서는 찾을 수 없는 답이었고, 윈체스터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대화함에도 항상 혼자였다.

그는 가끔 허버트 경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인가요?
가슴이 텅빈 것 같아요, 이건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요? 병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무엇으로 공허함을 느끼는 걸까요.
나는 누구에게 어디까지 물어도 될까요.
귀족은 사람이라 했는데, 우리는 원래 혼자 사는 존재인가요….

하지만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편지에 글자를 썼다가 그 종이를 불에 태우는 나날이 잦아져도 윈체스터는 그 대답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허버트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그가 아주 어린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윈체스터 본인을 위해 저택에 고용되었다가 윈체스터 본인으로 인해 쫓겨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을 그는, 알고 있으면서도 왜 윈체스터를 대하는 것에 변화를 두지 않았을까….

윈체스터는 알지 못하는 사람을, 자신이 모르는 길을 헤매었다.

“괜찮겠니, 윈체스터?”

“네, 괜찮아요.”

어느 날은 국가에서 화친의 목적으로 몇몇 자제들의 교환방문을 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중에 윈체스터 본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정보도. 짧지 않은 시간동안 타국에 가야 하는데 괜찮으냐는 윈체스터 후작부부의 말은 사실 예의상의 물음이었다. 이것에 윈체스터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적당히 화목해보이는 대화, 그리고 그들의 의젓한 후계자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그들의 작은 연극이었다. 그것이 사용인들로 하여금 퍼져나가고, 이후 그들의 입으로 걱정을 꾸며낸 말과 함께 믿음을 보이면 완성되는 작은 극이다.

그는 그렇게 타국으로 넘어갔다.
언어의 문제는 없었다. 인접한 국가의 언어나 세계 공용어로서 기능하고 있는 나라의 언어는 그에게 기본 소양으로 넘겨진 것이었기에. 다만 그는 자신이 가는 나라의 귀족은 우리와 또 다른 형태일 것이라는 것, 그 와중에도 윈체스터는 그들과 친해져야하며 되도록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뿐이다. 그는 처음으로 아무런 기반도 닦이지 않은 세상에 도착했다.

“윈체스터! 어디 가는 길이야? 내가 도와줄까?”

그들 사이에서 그가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어떤 이들은 갑작스럽게 말을 걸고, 어떤 이들은 격의없이 어깨에 팔을 올리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말을 걸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기도 했고,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말을 착각하여 이상한 소문이 돌 뻔한 적도 있었다. 그는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다. 윈체스터 후작성에서는, 수도의 윈체스터 저택에서는, 그리고 그가 겪은 그 어떤 사교의 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겪어보지 못한 터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국에서 후작으로 귀족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편에 속했고, 장원을 여전히 가진 가문으로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도 편히 대하기 어려운 가문의 사람이었다. 자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그의 앞에서 예의를 지켜 말하려 애썼고, 사교 모임에서 격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삼갔다.

“그러고보니 제시가 어디 놀러가자던데, 갈래? 걔가 요즘 너랑 놀고 싶다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 알아?”

하지만 그가 넘어온 타국은 그보다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윈체스터의 원래 신분을 전시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혹은 그것을 전시하였다 하여도 동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격의 없이 말을 건네고는 했다. 간간히 상류사회에서 쓰는 단어를 쓰는 이들은 있었지만 자국에서처럼 인사를 먼저 하고, 안부를 묻는 등의 일은 자주 생략되었고, 어떤 때에는 꽤나 사적인 말을 묻는 일도 있었다. 가끔은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당혹스러웠지만, 티내는 일 없이 고개를 내젓고는 했다. 그저 웃으면서 고마운 일이라고 이야기하거나, 그 날의 일정이 이미 정해져있으니 다른 날에 다른 곳을 가는 것은 어떠느냐고 제안하고 넘기고는 했다.
그 과정에도 학생회에 속하거나, 도서부 부장의 일을 해나가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고, 어쩌면 불행이었다. 윈체스터는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으나, 자신이 잘해내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해나가는 것이 자신의 불행이 될지라도, 그것이 윈체스터 후계자의 불행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윈체스터, 내 이름 알아?”

그 날은 유독 이상했다.
아이들은 자주 윈체스터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사소하게는 과제의 이야기를, 사적으로는 일정과 연애의 이야기를, 사실을 궁금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별안간 자신의 앞자리를 차지하며 스스로의 이름을 아냐고 물어오는 아이는 보통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생회장으로서 동기의 이름은 모두 알아야한다고 생각했기에-그는 이를 귀족들의 계보를 외우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여겼다.- 모든 이들의 이름을 외웠던 터라 알고 있었다.

“알레이 가르시아, 알고 있어.”

같은 교실을 공유하는 이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국에서 겪던 사교계는 그런 것을 기억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알레이는 반에서 목소리가 적당한 편이었고, 많은 아이들과 교우관계가 평탄했다. 윈체스터는 알레이의 성적은 잘 몰랐지만, 보충 수업을 듣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성적 또한 평균 이상일 것이라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고 눈치를 보며 먼저 해산시키는 것이 알레이였기에 타인을 신경쓰는 편일 것이라고 가늠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추측 중 하나에는, 윈체스터 본인을 꺼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왜 알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는 알레이가 말을 건 것이 신기했다.
윈체스터는 학교의 일이 아니면 다른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 편이고, 가끔 거는 것도 적당한 사교행위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이건 사교행위라기보다는… 조금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했다. 알레이의 성격을 어렴풋이 짐작한 바로는 그런 아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네 이름을 모를까봐 알려주러 온 거야? 친절하구나.”

이곳이 사교의 장이었다면 이건 칭찬이 아닌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사교의 장이 아니었고, 윈체스터 또한 상대의 무례를 지적하려는 생각같은 건 하지 않았다. 이곳은 타국인데 자국의 예의를 찾아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알레이는 조금 더 말을 하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도망갔다. 윈체스터는 그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으나 더 말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학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늘어난 탓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이유였고, 철저히 자신을 피해다니는 듯이 말 한 마디 걸지 않는 알레이의 의사를 존중해서이기도 했다.

윈체스터는 아마도 알레이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리라고 여겼다.
아마도, 그 날의 질문은 자신의 약점이나 실책을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자국의 사교처럼 그런 시비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한 것은 확신이 아니므로.

어느 날은 편지가 왔다.
허버트 준남작의 비보였다. 이전 가정교사에 대한 예우로 장례에 참석하기를 바란다는 편지였다. 윈체스터는 사유를 설명하고 학교를 나섰다. 허버트 준남작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보를 슬퍼하고 있었다. 허버트 준남작은 가족이 누나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보듯 슬퍼했다.

“…허버트 경….”

그리고 윈체스터 또한 동일했다.
이미 그가 허버트 경을 보지 못한 지 10년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8살 무렵이었고, 그 무렵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가문의 간섭으로 인해 편지 하나 마음 편히 주고받아 본 적이 없었다. 혹여 가문의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그 안을 들춰볼까 봐 편지로 무엇을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안부만 조금,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나 조금씩 나누었고, 얼굴을 보는 일도 사교계에서 말고는 없었다. 너무나도 얄팍한 연이었음에도 윈체스터는 눈물이 비죽 나왔다. 사진에 보이는 얼굴은 매운 것을 보며 눈물을 찔끔 흘리던 윈체스터를 보는 그 얼굴과 딱 똑같았다. 호쾌하게 웃는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 주름 하나하나마저 부드럽게 느껴졌다. 편안하고 즐거워보이는 얼굴은 꼭 다 자라지 못한 저를 보며 익살스럽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에, 내가 후트샤 백작의 눈물을 또 보다니. 이걸 후작이 아시면 경을 치실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어린 날의 그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하던 목소리가 에카르트의 귓가에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윈체스터는 분명 허버트 경의 명예를 지키려 애썼더랬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으나, 귓가에 맴도는 환청이 꼭 그에게 다르게 속삭이는 듯 했다.

‘그 때에 바랐던 것이 정말 이런 것인가요?’

그가 하지 못했던 것, 자신의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면서라도 친해지고 자신의 명예를 깎아내려서라도 상대와 이야기하고 타인에게 매달리는 것.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그리고 그 스스로도 걷지 못한 그 길이 자꾸만 그의 뇌리에 어른거렸다. 그 때에 자신이 흠집을 용인했더라면, 그것 또한 감수했더라면 그는 많은 질문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놀리면서도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다정한 손길을 한 번이라도 더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 날 윈체스터는 잠에 들지 못했다. 새까만 밤만이 그를 마주했다.

“윈체스터, 혹시 파트너 있어? 없으면….”

어떠한 후회가 있든, 시간은 나날이 흘렀다.
졸업을 앞두고 윈체스터는 자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교류는 오래 이어졌지만, 이 학교가 윈체스터 후작이 될 후트샤 백작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돌아가서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할 터였다. 다들 졸업 전 파티로 파트너를 구하는 시기에, 윈체스터는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모두가 즐거울 때에 혼자 자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도 울렁거렸지만, 그럼에도 해야하는 것은 해야하는 것이다. 윈체스터는 자신에게 파트너를 권하는 이들에게 모두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중 일부는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슬퍼했고,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나가기를 제안했다. 그것까지 사양하지는 않았다.

“…….”

많은 아이들이 다음날의 파티를 준비하러 갔지만, 윈체스터는 준비할 것이 없었다. 다음날의 파티를 위해 학교를 벗어난 아이들과 달리, 그는 모두가 사라진 학교를 정처없이 배회했다. 윈체스터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하는 일은 전과 동일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적당한 교류를, 집에서는 자국에서 넘어온 서류와 가정교사와의 대화 따위만 있었다. 더불어 이제는 자국으로 돌아가니 학교의 일이 없어져, 절대적인 일의 양은 잠시 줄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윈체스터는 피로했다.

텅빈 자신의 책상, 다른 아이들이 마구잡이로 무언가를 적어두어 언뜻 하얗게까지 보이는 칠판, 어떤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운동장과 학교 뒷편의 정원, 그리고 그 너머에 까만 그늘을 만들어둔 숲…. 정처없이 떠도는 동안에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것이 편하면서도 울렁거림을 지울 수 없었다. 한참을 걷고 걷다가 멈춘 곳은, 그나마 자신이 어릴 때 놀던 파빌리온과 유사하게 생긴 대리석 파빌리온의 앞이었다. 아이들이 굳이 찾지 않는 곳은 곳곳에 먼지가 쌓이고, 바닥에는 근래에 떨어진 나뭇잎이 흩날렸다. 돔형의 천장 아래로 진 그늘은 숲의 것보다는 옅었고, 기둥들 사이로 보는 숲은 꼭 한 점의 그림같았다. 그는 그 광경을 참 좋아했다.

‘백작, 무엇을 보고 계시나요?’

‘헉, 아니, 그. …그냥, 정원사의 노고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날에 허버트 준남작에게 발각되었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는 그저 자연이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꼭 예술작품 같아서, 화지에 옮겨보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에 대한 시나 연극 따위를 만들지 않았을까 궁금하다고 묻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흘깃흘깃 파빌리온의 액자가 만든 정원의 그림을 바라보는 자신을 허버트 준남작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했었다.

‘저 들꽃이 참 예쁘지요.’

그 때에 허버트 경이 물었던 것은 고작 그것이었다.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도, 저것을 보며 느끼는 바가 있느냐는 물음도 아니었다. 타인의 위에 서지 않으면 천한 일을 해야한다는 질책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보고 있던 정원의 한 켠에 핀 들꽃에 대한 물음이었다. 노란색이 어여쁘고, 연한 꽃잎이 바람과 장난을 치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으나, 그는 그 때에 눈을 도륵도륵 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허버트 준남작의 기행이 반복되었더랬다. 아마도, 아마도… 허버트 경은 에카르트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리라. 그 짧은 찰나에 그가 호오를 알아챈 것이리라.

“네, 예쁩니다. …저것 또한 하나의 그림같아요.”

그는 그 때에 답하지 못한 것을 흘려보낸다.
그 때와 동일한 꽃, 그 때와 유사한 파빌리온, 그리고 그 때처럼 다 자라지 못한 윈체스터가 이 곳에 있었으나, 그 곁에서 사람으로서의 온기를 나누어주던 허버트 경만이 남아있지 않았다. 윈체스터는 공연히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고자 제 셔츠의 목을 당겼다. 서있을 힘이 부족했기에 파빌리온에 적당히 기대어 앉은 그는 평소보다 더 피로하고, 지쳐보였다. 비보를 들은 후로 그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당신이 꼭 가족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는 계속해서 미련이 남고 후회가 되었다.
허버트를 가족으로 삼지 못한 것이 후회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를 바꾸는 일은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그저, 그저 여러 문답이 후회되었다. 한 마디를 전하지 못한 게 미련이 남았다. 그리하여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사람에게 사람으로서 말하지 못한 것이 한탄으로 남았다.

윈체스터는 알았다.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자신과 달랐던 허버트 경의 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깨닫지 않는 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바뀌지 않는다면 평생 혼자일 것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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