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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장 by 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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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골도 백주도 둘 다 여행길에 익숙한 편이었다.

여행길에 만나 폭우에 흠뻑 젖어서 산을 내려가지 못하고 찾아낸 동굴에 앉아서 모닥불 피우고 그나마 멀쩡한 수건을 꺼내서 닦는 일 같은 것 쯤은 익숙한 일이었다.

“상태를 보니 비가 한동안 더 내릴 거 같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어야겠구만. 몸이라도 데울 겸 한 잔 해야겠어.”

“모닥불을 피웠는데 굳이 술로 몸을 데우시는 겁니까?”

“몸의 밖과 안을 같이 데우는거지.”

가방에서 술과 안주로 먹을 육포를 꺼내는 백주를 보면서 분골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잔소리를 시작하였다. 아무리 식혼이라고 해도 그렇지, 당신이 취하지 않는 건 알지만 뭐든 너무 남용하는 건 안 좋다, 라고 시작한 잔소리를 백주는 능숙하게 한귀로 흘러 들으면서 잔을 하나 더 꺼내 분골에게 내밀었다.

“자네도 한 잔 하겠나?”

몇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분골은 술을 권유할 때 거절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게로 한 두잔 마시고는 백주에게도 그만 마시라고 하지만 오늘은 비도 오고, 산 속 동굴이니 할 일도 없으니 오늘은 더 마셔도 되겠지. 그리고 할 일이 없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대화를-주로 어디서 뭘 봤는지 같은-주고 받는 사이 빈 병이 하나씩 늘어갔다. 홀짝홀짝 마시던 분골의 손에서 잔이 떨어지는 것을 받아낸 백주가 돌아봤을 때 반쯤 감긴 눈으로 백주를 보는 얼굴이 있었다. 많이 취했군, 그리 말을 걸자 분골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가볍게 웃었다. 취기 탓인지 얼굴이 빨게져 있는 상태로 웃는다.

“백주.”

평소에 부르던 호칭은 어디로 갔는지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백주는 그가 상당히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량은 대충 한 병 반 정도인가? 남은 병들을 치우고, 침낭을 꺼내는 사이 멍하게 앉아 있던 골분이 일어나더니 백주를 끌어안았다.

“백주 형, 오늘은 일찍 주무실건가요?”

세상에 이 나이에 형 소리를 듣게 되더니. 내일 그에게 말하면 그는 이걸 기억하려나? 기억한다면 틀림 없이 부끄러워 할테지. 백주의 몸에 반쯤 기대서 졸기 시작하는 분골을 침낭 안에 꾸겨 넣으며 웃음을 흘렸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동행자가 있으니 나름 즐거웠다. 그리고 다음날 백주의 생각대로 간밤의 일을 이야기하자 취했을 때처럼 붉어졌다. 싫었습니까? 하고 묻는 목소리가 잔뜩 떨리고 있어서 웃기기는 웃겼다. 하지만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하지만 그대가 끌어안은 것은 의외로-.”

으악! 소리를 지르더니 냅다 휘두른 주먹에 동굴 벽에 미세한 금이 가는 것을 보고 더 이야기 했다가는 동굴을 무너트리겠다, 라는 백주의 농담 섞인 말에 분골은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이런 게 취향입니까? 버벅거리는 그 말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자네는 술 많이 마시면 안되겠어.”

“안 취해서 좋으시겠네요.”

“삐졌나?”

“안 삐졌습니다.”

“다음 마을에 가면 자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먼저 먹을까?”

“제가 무슨 애인 줄 아십니까?”

“내 나이의 절반도 안 살았으니 애지.”

“나참.”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묘하게 신경 쓰이는 일이 늘어난 것은. 고개를 돌렸을 때 자주 눈이 마주치게 되는 숫자가 늘어난것도 정말로 사소한 일이 계기였던 것이었다. 적어도 백주는 지금 그렇게 생각했다.

“백주.”

술도 안 마셨는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고는 자신을 붙잡은 손이 떨린다. 무슨 말을 할지 너무 뻔히, 잘 보이는 것에 백주는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떨어지려는 손을 붙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지.”

“그, 그, 오늘은 적당히 마십시요.”

“흐음, 하고 싶은 말은 그거뿐인거냐?”

“그거 말고 무슨 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같을 지도 모르지 않느냐.”

“꽤나 확신하시네요. 그럼, 먼저 말씀해보시던가요.”

“나를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 생각인게냐?”

평소라면 무슨 말을 하냐고 반박할 놈이 아무 말하지 못 하고 자리를 다시 떠나려는 것에 확신이 생겼다. 물론 자신이 까마득한 어른이고, 여러가지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놓으라고 하겠지만 이미 그와 자신은 같은 길 위에 있지 않는가.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의 감촉은 꽤 오랜동안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할 말을 해봐라. 전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마.”

어린이의 말의 기다리는 것도 어른의 미덕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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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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