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5人格 - 단편

[나입베라/스핸시모] 첫사랑

20200403 백업 | 스프링핸드 나이브 → 시간의 모래 베라 첫만남 날조

LADY by 스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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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벨벳 소파에 호화로운 테이블을 거쳐 은빛 접시까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제 주위의 물건들을 확인한 소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소년은 스프링 형태의 장비를 더듬어 전원을 껐다. 자칫하여 값비싼 물건을 부숴 먹으면 큰일이었다.

  유리문 너머로는 아직도 두 남녀가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소년은 그 둘을 아주 잘 알았다. 증기 도시의 주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최첨단 전자 장비로 온몸을 감싼 발명가. 그리고 도도한 언행이 돋보이는 시간의 모래. 증기 도시의 유명 인사─ 모험단의 주축이자 간부.

  그런데 그들이, 이까짓 하찮은 소년 한 명을 두고 몇십 분간이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이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일단은 그들의 공방전을 귀 기울여 들어보기로 했다.

  “좀 생각해 보세요, 시간의 모래. 저 녀석, 진짜 유용할 겁니다.”

  “길에서 굴러다니는 애 주워와서 어디다 쓰게. 우린 아동 착취 같은 거 안 해.”

  “아니라니까요. 정 걸리면 월급이라도 주면서 일 시키세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저런 비루먹은 애한테 우리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 이유는 없어. 안 그래도 깡통모자 그 자식들 때문에 신경 줄이 닳아 있다구.”

  “강철모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필요하단 거예요. 그렇게 못 미더우시다면 음파에게 물어보시든가요. 정말 굉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장비 다 부숴 먹으면서 구해 올 만큼의 가치가 있었어?”

  “물론입니다. 직접 이야기라도?”

  ‘비루먹은 애’ 따위의 말이 아픈 곳을 쿡쿡 찔러 왔지만, 소년은 마구 뛰어대는 심장을 어쩐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한숨, 소곤거림,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 유리문이 매끄럽게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시간의 모래가 소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소년의 얼굴에 열이 쏠렸다.

  증기도시의 신문은 그녀의 모습을 자주 노출하지 못했다. 시간의 모래 자체가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썩 반기지 않을뿐더러, 증기도시의 매스컴은 그다지 성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모래, 그녀의 외양은 그 모든 요인을 전부 원망하고 싶어질 만큼 매혹적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얘. 너. 따라와.”


  양털 깎기 기계를 앞에 둔 양의 심정이 이럴까. 소년은 제 옆의 여인을 힐긋거렸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잔뜩 일그러져 있던 표정은 무얼 뜻하는 걸까. 고깝게 여기는 건가? 아닐지도 몰라. 실제로 그녀는 소년에게 드문드문 말을 걸어왔는데, 그 때문인지 소년은 내심 안심하고야 말았다.

  “이름.”

  “뭐?”

  “네 이름. 말하라구, 꼬마야.”

  “스프링핸드. 나이브 수베다르.”

  “말이 짧다.”

  “......입, 니다.”

  “시간의 모래. 베라 나이르.”

  돌아온 대답을 소년은 재빨리 받아 삼켰다. 베라 나이르, 베라 나이르. 그녀에게 주어진 이름이 그것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서둘러 익혀 입속에 담아야지. 고상한 음절이 뱃속을 간지럽히고 마음을 덥혔다.

  도착한 방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방이었다. 금색과 갈색. 언행을 조심하게 만드는, 가볍지 않은 색채의 조합. 모든 것이 깔끔했고 차분했다.

  “앉아. 뭐라도 가져올게.”

  그렇게 말해놓고선 사라지는 시간의 모래였다. 소년은 방을 한 바퀴 훑어보다가 제 앞에 놓인 테이블에 딱딱한 손바닥을 얹었다. 살풍경한 테이블 위에 향수병이 덩그러니 올라가 있었다. 모래시계 안의 금빛 내용물. 시간의 모래가 지닌, 그 유명한 향수였다.

  소년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손이 절로 올라갔다. 또 하나의 자신이 소곤거렸다. 저걸 분해해서 탐구하는 게 어떨까. 소년은 남의 것을 훔쳐 만족감을 얻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소년은 정의로운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양심보다 탐구욕이 앞서 소년의 행동을 떠밀었다.

  향수병의 측면에 자리한 톱니바퀴를 빼자 뚜껑은 쉽게 분리되었다. 이제 안쪽을 살펴볼 차례. 소년이 고글까지 내려쓰고 향수병을 가까이서 관찰하려던 참에, 익숙한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향수병의 주인. 시간의 모래가 돌아온다.

  어떡해, 어떡하지? 생각보다 빠른 등장에 당황한 소년은 다시 뚜껑을 덮으려 손을 급히 움직였지만, 모래시계는 축축한 손바닥 사이에서 그저 겉돌 뿐이었다.

  “커피는 못 마실 것처럼 보여서. 데운 우유야.”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걸어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들키면 정말 큰일 날지도 몰랐다. 사소한 오해로 죽도록 처맞던, 증기도시 초년생이었을 때의 불쾌한 추억이 자동으로 생각났다.

  어떤 핑계로라도 모면해야 했다. 마음을 굳힌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판단도 타이밍도 옳았다. 그러나 그가 풀린 신발 끈을 밟고 휘청였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몸이 기울어지고 향수병이 떨어졌다. 유리가 바닥과 만나 수천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소년은 이미 균형을 잃은 채였다. 이대로 넘어진다면 뺨에 깊은 자상을 입을 터였다.

  애초에 당신의 것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어요. 이건 어쩌면 내가 받는 벌 아닐까요. 죄송합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소년의 정신은 몽롱해졌다. 어쩌면 깨진 유리 조각이 이미 몸 어느 구석에 박혀서, 아니면 매혹적인 향기가 온몸을 휩쓸어 놓아 그럴지도 몰랐다. 난장판을 묵묵히 바라보던 시간의 모래가 입을 열었다.

  “돌아가.”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과도 같은 엄숙한 음성. 세계가 통째로 복종했다. 시곗소리가 멎었다. 소년은 학교라는 공간에 소속된 적이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어떤 과학적 원리도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고.

  만유인력이라 불리는 그 힘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땅에 붙어사는 한 그것을 거역할 도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녀의 힘이, 이치를 깨부수었다. 필요했던 것은 오직 그녀의 손짓 한 번, 눈빛 한 줌. 힘없이 쏟아져 있던 향수가 공중으로 떠올라 금빛 춤을 추었다. 황홀한 색채의 향기 폭풍이 소년을 감싸 안았다.

  어느덧 시계가 차분히 제 템포를 되찾았다. 소년의 등은 다시 소파에 자리 잡아 기대어진 상태였다. 아까의 상황은 없던 것이 되었다.  

  소년은 자신이 함부로 말을 보탤 상황이 아님을 알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기분이 너무 이상했기에 입을 열기 힘들었다. 방금 근육과 뼈를 통째로 뒤흔들었던 모순. 그녀가 자신에게 행한 것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내가 미친 건가. 소년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눈꺼풀이 힘겹게 감겼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동경 받던 존재였던 그녀는, 세상을 구할 소년의 영원한 첫사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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