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5人格 - 단편

[캠베라] 소나기

20200323 백업 | 고딩 AU

LADY by 스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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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튼 캠벨에게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어두운 곳과 꽉 닫힌 장소를 싫어했다. 폐소공포증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본인의 말로는 아니란다.

  그 여파인지 비 오는 날의 캠벨은 유독 위축되어 있었다. 위축이라고 해도, 온갖 아르바이트로 다져진 제법 단단한 실루엣이나, 입술에 머금은 여유로운 기색은 그대로라서, 기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베라 나이르는 그런 캠벨의 특징을 알아차리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베라 나이르는 '특별했다'. 정신을 놓아 버린 쌍둥이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타고난 건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크리처에 의해 노튼과 베라의 관계가 까발려졌을 때 다들 놀라지 않았던 이유겠지.

  일기예보는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하늘을 예상했건만 방학식이 끝난 후에 보인 건 진흙탕이 되어 버린 운동장이었다. 소나기처럼 보이긴 해도 빗줄기가 너무 굵었다.

  캠벨은 한숨을 쉬었다. 그에겐 우산도 뭣도 없었다. 그에게 남은 건 오후의 알바 계획뿐이었다. 현관에서 그러고 5분쯤 서 있었을 때 문득 이질적인 향기가 끼어들었다.

  ─우산 있니?

  ─있는 것 같아?

  ─하긴.

  같이 돌아가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는 음절에서 캠벨은 눈치챘다. 베라가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었는지.

  동시에 그는 베라의 집이 저의 집보다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베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굵고 얇은 손가락이 얽혔다. 빗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피어났다.

  손을 맞잡은 둘은 있는 힘껏 뛰었다. 젖지 않은 것이 없었다. 캠벨의 진한 흑발도, 붉게 상기된 베라의 양 뺨도, 삐뚜름하게 메고 있던 가방도.

  축축해진 흰 셔츠 너머로 살결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고, 물을 먹어 무거워진 교복 바짓자락이 종아리에 달라붙었다. 집에 다다르자마자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욕실로 뛰어들었다.


  베라가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캠벨은 가방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욕실에서 바디워시와 비누 냄새가 반씩 섞인 채 희미하게 떠돌고 있었다. 물이 대충 찬 것을 본 베라는 작은 배스 밤을 던져 넣더니 욕조를 가리켰다. 들어가.

  ─너는?

  ─욕실 하나 더 있어. 거기서 씻으면 돼.

  ─굳이?

  같이 씻자. 속마음이 너무 적나라하게 들려와서 베라는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낯을 한 캠벨이 그래서? 라며 재촉하자 베라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증기가 가득 찬 욕실에 삼삼한 대화가 맴돌았다. 우리 고등학생이야. 이상한 짓 하면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

  확답을 받고서도 베라가 어정쩡한 자세로 쭈뼛거리자 캠벨이 먼저 넥타이를 풀었다. 베라가 따라했다.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를 벗고, 치마와 그 아래에 입고 있던 체육복 바지를 내렸다. 목욕에 어울리지 않게 전부 탈의하지 않았으나 하여튼 베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베라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탈의하자 드러난, 수박을 연상시키는 색 조합의 촌스러운 브리프 때문이었다.

  ─수박 무늬 팬티라니. 수박 무늬 팬티 입은 애랑 사귀고 있었던 거야?

  캠벨은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배스 밤이 들어간 목욕물은 보라색이었다. 둘은 조심스럽게 몸을 담갔다. 

  ─또 보라색이야. 질리지도 않아?

  캠벨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자, 수박 무늬 팬티가 어쨌다고?

  ─아무 생각 없었거든.

  심술궂은 대꾸. 속없게 들리는, 즐거운 듯한 웃음. 베라는 이마를 짚었다. 수박  무늬 팬티랑 포도주스 색 팬티. 뭐가 더 촌스러운지는 굳이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캠벨이 입을 열었다.

  ─요즘 자꾸 꿈을 꿔.

  ─무슨 꿈인데.

  ─꿈속에서 나는 광부야.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지. 근데 폭발 사고가 나서, 다 죽어. 나만 빼고. 알고 보니 그 사고를 일으킨 게 나였다. 거울을 보면, 흉터가 나 있어. 지금 내 몸에 있는 흉터랑 아주 똑같아.

  ─전생 아니야?

  ─그런 거 안 믿어.

  잠시 침묵.

  이번엔 베라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에도 비가 오면 좋겠다.

  ─왜?

  ─너한테서 진지한 얘기가 흘러나오는 건 드문 일이니까.

  ─섭섭하게.

  물이 식기 직전 둘은 욕조에서 몸을 빼냈다. 조금 아쉬운 얼굴의 캠벨이었다.

  ─나 그냥 오늘 알바 가지 말까?

  ─넌 무조건 가게 돼 있어.

  ─그건 또 왜 그렇게 생각해?

  ─노튼 캠벨에서 성실근면함을 빼면 시체나 다름없으니까.

  ─잘 아네.

  베라는 제 아빠의 것이라며 셔츠와 바지를 새로 내어 주었다.

  ─네 교복은 개학식 날에 돌려줄게.

  ─너 그거.

  ─개학할 때까지 안 만나겠단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하늘은 맑음. 욕실에서 캠벨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꿈속에서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베라였다.

  귀부인 같은 옷을 입고 (맘에 안 드는 보라색 사랑은 마찬가지였다)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꿈속의 베라는 캠벨을 말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베일 너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캠벨은 항상 묻곤 했다. 그것은 꿈의 각본대로 흘러가는 대사가 아닌, 캠벨의 자의였다. 당신은 누구야? 내가 아는 베라 나이르야? 베라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냥 나이르야. 나는.

  평범하고 건전한 사상을 지닌 남고생, 노튼 캠벨은 전생 따위를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그런 게 진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싶어졌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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