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인격] 일라X거트
마지막 담배향
*독행자
*일라거트, 선지약혼
*독행자 모티브 영화인 '한밤의 암살자' 참고
*사망소재 주의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을 걸어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가랑비에 젖는 코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채, 그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놓으며 가로등 밑을 지나고 있었다. 고장난 가로등은 깜빡거리며 빛에 몰려 들은 벌레의 그림자를 비췄다.
그가 멈춰선 곳은 이 거리에서 고급스럽고, 가장 깨끗한 건물의 뒷문이었다.
남자는 계단 입구에 바짝 붙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형광등만큼 밝은 라이터 불빛이 잠시 붕대로 눈을 가린 사내의 얼굴을 불현듯 비추다 사라졌다.
그의 입에서 허옇고 불투명한 연기가 뿜어져 나갔다. 연기는 비가 내리는 하늘로 올라가다 이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담배 연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뒷문이 조심히 열렸다. 단정한 구두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고, 물결치는 갈색 머리를 가진 여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올려 여인을 바라보곤 아주 옅은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여인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안심이 가득한 웃음을 내보였다.
"이제야 오셨네요."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여인은 남자의 옆에 서서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락이 없었던 몇주 동안 그는 조금 수척해진듯도 했다. 어깨가 푹 젖은 그의 코트를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 창밖에 올라오는 담배 연기를 보고 당신이 맞나 했네요."
그녀의 다정한 말투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돌렸다. 정면의 돌담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러곤 손을 내려 손가락으로 두 번 툭툭 담배를 쳐 재를 떨궜다. 그녀는 답해주지 않은 그의 모습이 야속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얼 했는지 말 안 해줄 건가요? 일라이씨."
워낙 말이 없는 남자였지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걱정했던 자신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 걸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일라이는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를 잠시 동안 응시하다가 아주 느릿하게 답을 했다.
"... 조금 바빴습니다."
"그 이유를 묻고 있어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명확하지 않은 답에 그녀가 화를 내려던 참에 남자는 화제를 돌렸다.
"... 그 남자는 어떻게 됐나요?"
"그 남자요?"
그녀는 그의 싸늘한 말투를 듣고 곧 그가 지칭하는 자가 누군지 깨달았다.
"아... 죽었어요."
"...... 그렇군요,"
"네, 얼마 전에 장례식도 했고요. 괴한한테 총에 맞았대요."
그는 말 대신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드렸다. 그가 만약에 잘됐다고 말했어도 그녀는 책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 그 남자의 장례식은 한 달 동안 자신을 스토킹, 협박, 강제로 취하려 한 악마가 드디어 지옥에 떨어졌구나, 하며 속으로 기뻐한 날이었다.
그 악마가 자신에게 낸 상처를 보고 일라이가 얼마나 분노했던가. 아직도 그날 화를 내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빗소리만이 두 사람을 애워쌌다. 습기에 찬 공기가 차갑게 주변을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다 그녀의 약지에서 멈췄다.
"이건 약혼반지겠군요."
그의 말에 그녀는 몸을 흠칫 떨며 급히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췄다.
"아, 맞아요... 미안해요. 빼고 나온다는 걸 까먹어서..."
"결혼식은 언제인가요?"
"....... 내년 봄이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을 전혀..."
전혀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이건 부모님이 강제로 정한 결혼이란 걸.
수많은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미안해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을 슬픔이 드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겨우 진심을 꺼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리 사랑해도,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이것이... 얼마나...
그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어졌다. 몇주만에 만난 연인에게 약혼소식을 말해주고 있는 자신이라니...
하지만 일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붕대 너머의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터 코, 입 하나하나 관찰하며 눈에 담았다. 마치 그녀의 얼굴 전부를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하려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입술에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곧 담배 연기를 머금은 입이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닿았다. 비는 계속해서 낡은 길바닥을 때렸고, 가로등의 불빛은 더욱 희미해져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고, 입에 흘러들어오는 담배 연기를 취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담배가 점점 타들어갔다.
그의 담배가 검지에 닿으려고 할 때쯤 그는 다정하고 애틋한 입맞춤을 그만두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그는 다시금 그 예전에 한 맹세를 떠올렸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당신을 잃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부엉이가, 어두운 비의 밤을 뚫고 정확히 일라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부엉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다.
"... 거트루드."
"네?"
"...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결혼 이후에도. 언제까지나.
그가 뒤돌아서 그녀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거트루드는 어쩐지 그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려지는 거 같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몸을 던지며 외쳤다.
"다음에 언제 오실 거죠?"
하지만 그는 어두운 빗속으로 하염없이 걸어갈 뿐이었다. 그녀는 목청껏 다시 그를 불러보았다.
"일라이씨!"
두 남녀가 잠시 빗속의 세계에 그들만 있는 것처럼 서있었다. 일라이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답했다.
"... 미안합니다. 그게 마지막 담배였어요."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마지막까지 보지 않고, 걸어갔다. 안개가 드리우는 골목 속으로.
거트루드는 한참 뒤에나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가 개기 시작했고, 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다리 위에서 부엉이와 함께 그 달을 바라보다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무리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챘다. 이내 그는 사람이 없는, 컴컴한 다리 밑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긴 코트를 입고, 부엉이를 데리고 다니는 안대 쓴 성인 남성이라니. 찾기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숨어다닐 생각은 있었던 건가?"
그의 이마에 총구가 들이웠다. 살 떨리게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일라이는 답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두려워하지도 않고, 거구의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떨지 않는 그의 모습이 괘씸해진 남자는 총알을 장전했다.
"우리 조직의 도련님을 죽인 값이다."
”비열한 악마를 죽인 값인가?”
총소리가 울렸고, 이내 모두가 사라졌다.
그 뒤 긴 코트를 입고 안대를 쓴 남자를 본 사람은 없었다.
가끔씩 폭우가 오는 날 다리 위에서 한쪽 눈을 다친 부엉이가 슬피 울 뿐이었다.
오늘의 작업 브금: https://youtu.be/ra0eTcqv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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