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물 공각 드랍..

delicacy by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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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은 660원이다. 주머니엔 500원도 없다. 낭패다. 손 깊숙히 넣어 더듬어봐도 뜯어지기 직전의 실밥이 손가락에 걸린다. 에이 씨발. 잔상처 많은 손으로 짤막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렸다. 말 그대로 먹고 죽을 돈도 없는게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공룡은 딱 4년 전의 절 믿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 천천히 더듬어보니 눈앞에 보이는 슈퍼에서 마지막 한 갑 사서 한 대 급하게 빨고 하수구에다 휙 던졌던 것 같다. 그때는 그게 존나 간지같았다. 바보같은 생각인 걸 분명히 알면서도 굳이 하수구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다. 4년 전에 버렸던 그거 찾는 건 아니고 혹시 나같은 등신새끼가 또 있을까봐. 당연히도 하수구엔 물만 콸콸 흐른다. 어제 비가 왔었나. 고작 10시간쯤 전 일인데 공룡은 완전하게 기억해낼 수 없다. 바닥에 꽁초라도 떨어져 있나 허리 잔뜩 숙여 샅샅이 살핀다. 얼씨구, 정공룡 꼬라지 봐라. 있겠냐? 씨발... 하필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아 공룡이 묵은 한숨 내쉰다. 뒤를 돌아도 역시 아무도 없다. 미래를 여는 선진교정 구현. 두 손 콱 주머니에 쑤셔넣고 모자 푹 눌러썼다. 비가 갠 하늘의 1992년 2월 29일. 정공룡의 출소일이다.

 

1988. 02.25

 

철컥. 익숙하게 비디오 플레이어 전원을 켰다. 영웅본색. 네임펜으로 큼지막하게 쓰인 한글 제목은 뒷골목 비디오팔이 김 상사 손글씨다. 작년 이맘때쯤, 그러니까 상영관에 걸린 지 한 달도 채 안돼서 공룡 주머니에 몰래 꽂아줬던 그 직사각형의 물건은 벌써 서른 번이 넘도록 낡은 텔레비전에서 비춰졌다. 틀었냐? 아직. 각별님 오면 틀거야. 으으음... 한참을 지루한 소리 내던 공룡이 고개 홱 돌렸다. 아니 씨발 뭔 라면을 빚어오냐? 빽 소리지르니까 욕지거리 내뱉으며 위태롭게 양은 냄비 들고온다. 야, 깔 거, 아무거나, 빨리. 두리번거리다 굴러다니는 검은 노트 집었는데 냄비를 들지 않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대가리 내리치며 하는 말이 야 이 등신새끼야 그거 우리 장부잖아. 별 수 없이 어젠가 그젠가 만화방에서 빌려온 무협 만화책 한 권 바닥에 툭 던진다. 아 내가 각별님 한강만들줄 알았다고. 불만이면 니가 만들던가. 별 영양가 없는 대화 나누며 달칵, 버튼 누른다. 

 

신을 믿나?

믿어. 내가 바로 신이니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신이야.

 

와, 씨발, 폭풍간지.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은 양은냄비에 젓가락 집어던지며 탄성 지른다. 너는 이걸 몇 번을 보는데 볼 때마다 이 지랄이냐. 아, 각별님은 낭만이 없어서 그런거고. 어둔 방 공룡 감탄사 뒤로 툭,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비 와? 허겁지겁 달려나가니 작은 원들이 손 쓸 새도 없이 흙바닥으로 스민다. 얼룩 같던 그 물자국은 이내 땅이 내려앉을듯한 물줄기로 변한다. 야, 현관에 양동이! 이 와중에도 영화 멈추는 건 잊지 않는다. 다 찌그러져 물때 그득한 양동이 세 개를 정해진 듯한 자리에 던져 놓는다. 툭, 툭. 점차 작아지는 물소리 너머로 다시금 흘러나오는 텔레비전의 총소리. 굵고 낮고 높낮이가 없다시피한 낯선 억양. 아무 말도 없이 귀 기울이는 두 청춘. 영웅본색은 늦겨울 밤의 소나기와 함께 낭만이 되었다. 옷장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옷고리에 하도 문질러 빨아대서 다 구겨지고 바랜 정장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제 청춘 반사광에서 낭만은 1할조차 차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어린 마음들은 그 밤만은 그렇게 각자의 세상에서 영웅이 된다. 내가 나중에 진짜 돈 많이 벌어서 돈으로 담배불 붙여본다. 얼씨구 지랄, 그럴 돈 있으면 나나 주던가. 아 각별님은 각별님 나름대로 돈 벌어서 살어, 나도 나 나름대로 주윤발처럼 존나 멋있게 살아볼라니까. 어느덧 사라지다시피한 물방울 소리가 웃음소리에 다시 한 번 묻힌다. 

 

1988.02.26

 

동트기 전의 새벽은 성급하게 찾아온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기와는 거리가 먼 나이다. 곧 죽는소리 내며 다리지도 않은 셔츠에 팔 쑤셔넣는다. 양은냄비 밑에서 익어가려던 검은 노트를 탁 집어든다. 오늘 다섯 건이나 있네. 잠 덜깬 얼굴 두 손에 파묻던 각별이 앓는 소리 낸다. 오늘 자정 전에 집 들어갈 수나 있냐. 자정? 뒤지지나 않고 오면 천만다행이다. 허리춤에 노트 껴넣고는 제 옆에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 각별 등을 퍽 친다. 미친놈아 아침부터, 뒤질래? 언제 죽을 듯한 표정이었냐는듯 부릅뜬 노란 눈 보며 공룡이 푸하하 웃음 터뜨린다. 살아 있나 본거야, 살아 있나. 아직 살아 있네. 싱긋 웃으며 걸음 재촉한다. 둘에게 낭만은 그런 것이다. 청춘에 낀 물때는 새로온 빗방울에 닦여내려간다. 그 사실로 하루를 더 살아낸다.

 

아, 이럴 거면 일수를 뛰지 말고 박수무당이나 할 걸, 어쩐지 오늘 곱게는 못 들어가겠더라니. 천천히 손 올려 입술 만지니 기분 나쁜 따끔함과 함께 붉은 것이 묻어 나온다. 다시 한 번 절 향해 날아오는 드센 주먹을 이번엔 각별이 어설프게 막아낸다. 물론 공룡이라고 빡이 돌지 않는 성인(聖人)은 아니지만 지금 제 터진 입술에서 자근자근 새어나오는 피보다는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내야 하는 이십만원이 더 중요하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 겨우 올려 특유의 맑은 미소 짓는다. 사장님,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한데. 좆같은 기분으로 좆같지 않게 말하는 건 처음 회사 들어갔을 때 당시 과장이었던 사장한테 배운 것이다. 눈웃음 살짝 지우고 각별 바라보니 고개 끄덕인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저희도요, 좋게좋게 좀 넘어가고 싶은데. 이거 오늘도 못 받아가면 저희가 진짜 형님한테 뒤지게 처맞거든요, 예? 얼핏 들어보면 설득같지만 안에는 협박이 섞여 있다는 걸 이 동네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짐짓 모르는 척 나 먹고 죽을 돈도 없다 바락바락 악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번엔 왼쪽 얼굴이다. 졸지에 한 공간에서 양쪽 얼굴이 터졌다. 꽉 다문 입으로 새어나오는 건 오직 한숨이다.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도 방법이 없어요, 아시죠? 말과 동시에 공룡이 나무 의자 집어들어 바닥에 내리친다. 주춤하던 사장이 이내 배 째라고 동네 떠나가라 소리지른다. 못박힌 의자 다리로 진열장을 내리친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선반에 올라가있던 물건들과 유리 선반이 바닥에서 나뒹군다. 그것들과 함께 바닥에서 기어다니다시피 하는 사장의 몸을 발로 치우고 계산대를 내리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온 공간으로 튀어다니는 파편들과 함께 계산통이 깨진다. 들고 있던 막대 바닥에 집어던진 다음 망설임 없이 계산통 속 지폐를 집는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나머지는 이자로 가져갑니다, 우리도 요즘 금리가 좀 올라서. 우리마켙. 계산대에 있던 파란 볼펜으로 노트 안 이름 하나를 지운다. 이러한 순간은 청춘도 낭만도 아니다. 산산조각난 유리창과 그 내부와 같은 것이 공룡의 그리고 각별의 청춘이다. 그러한 삶이라도 영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이다. 

 

야, 야, 이 병신새끼들아. 내가 너네한테 사람을 죽이랬냐, 것도 아니면 뭐 밀수를 처 하랬냐. 빌린 돈 받아오라는게 그렇게 좆나게 어렵디? 거친 손이 얼굴 한 번 올려잡더니 이내 주먹이 되어 날아온다. 아까 터진 입술에서 다시금 피가 새어나온다. 죄송합니다 형님. 90도로 고개 숙이니 날아오는 건 복부를 강타하는 구둣발이다. 비리비리한 새끼들 먹고 잘 데 없대서 거뒀더니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한 번만 더 장부에 빵꾸나면 니들 모가지로 때울 줄 알어. 가래침 그러모아 침 뱉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은 영웅의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그래, 이것이 바로 청춘의 한복판이다. 낭만 그 어느 구석에도 놓여 있지 않은, 찌그러진 양동이 틈새 깊숙히 파고들어 씻겨내려가지도 않는 물때. 그것이 공룡에게 또 각별에게는 청춘이다.

 

 낮마저도 어두운 골목에 밤이 찾아오면 그것이 유일한 자유다. 얼마 전에 찬물로 박박 문질러 닦은 셔츠에 또 붉은 원이 쿡쿡 박혔다. 입에서 된소리 발음할 기력조차 없어 한숨만 푹 쉬고 있으니 긴 머리 풀어헤친 인영이 싱긋 웃으며 주먹쥔 손 내민다. 뭐야? 능숙한 손놀림으로 주먹 안에서 꺼내는 건 꼬깃한 지폐 세 장. 미친. 삼만원? 아까 돈통에 삼십 이만원 들어있더만. 장부에는 이십 구만원이라 적어뒀다. 우와아, 소리내며 손 뻗으니 지폐 들고 있던 오른손 확 뒤로 뺀다. 맨입으로? 에이씨 진짜 쪼잔하게. 뒷머리 벅벅 긁다가 마지못해 내뱉었다. 설거지 이번주 내내 내가 한다. 그제서야 푸하하 웃으며 주머니에 손 찔러넣는다. 오랜만에 소주 한잔? 존나 콜이지. 88올림픽의 완벽한 준비. 큼지막한 글씨 박힌 현수막 걷어내며 달빛 받아 빛나는 파편 가득한 길 걸었다. 고작 25도의 알콜이 퉁퉁 부어오른 볼 못에 베인 손바닥 그리고 아린 속까지 씻어내줄 수 없다는 건 공룡이 그리고 각별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웃음이 그리고 찰나의 안도가 둘이 추구할 수 있는 낭만의 최대치다. 

 

1992.02.26

 

3일? 시간 존나 빠르네. 형 뭐 나가서 계획은 있어? 두 살인가 어린 잡범이다. 뭐 딱히 없으면 저랑 사업이나 하자는 거 대가리 한 대 후려친다. 나 계획 존나 많거든 영환아. 너 장단맞춰줄 시간 없다. 헤드락 유지한 채로 약 72시간 후면 작별일 운동장을 목적 없이 회전한다. 

 

그 계획이라는 것은 정확히 약 4년 전 이제는 살던 집보다도 익숙해져버린 공간에 들어온 직후부터 생성되었다. 이따금 공룡은 제 사고능력이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뛰어난 것이 꽤 좆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인생의 기점을 지난 후로부턴 완전히 혼자라는 것이 너무도 명징하게 다가왔으므로. 그렇다면 원인을 찾아야 했다. 불필요한 이 기점을 지나게 만든 원인, 우주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한낱 티끌만도 못할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징그러울 정도로 팽창하는 세계. 그날의 흰 벽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처럼 이곳저곳 뻗쳐나간 생각은 이내 한 사람을 가리켰다. 김각별, 그 빌어먹을 청춘의 한 그림자. 

 

더 쓰긴 할건데 일단 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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