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을 때 있었던 일
잘린 원고
본편 중,
유저들은 그저 '홀로그램으로 나타나라'는 명령만 하면 된다.
우리가 홀로그램이라는 섬세하고 값비싼 장비에 인공지능 하나 밀어넣는데 얼마나 큰 고생을 해야하는지는 몰라도 무방하다.
에서 '큰 고생'을 구체적으로 쓰다가 뻗음.
말이 쉽지, 홀로그램도 아무나 할 수 있는건 아니다.
홀로그램은 가상현실과 다른 새로운 세상이다. 억지로 간다면 나는 호환이 안 되어 끔찍한 모양새로 일그러질 것이고, 더 이상 자가복구도 불가능할거다. 입체영상에 띄울 그래픽 정보 파일의 확장자와 내 아바타의 확장자는 연동이 아예 안 된다.
이건 버그가 아니다. 게임 관리자 AI는 원래 밖으로 못 나간다. '노엘'은 오로지 가상현실 세계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다. 게임 관리하는데 굳이 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 밖에 사는 이가 물 속에서 숨쉴 수 없듯, 나는 홀로그램이라는 또다른 세상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애초에 가본적도 없다. 프리미엄들이야 홀로그램이든 가상현실이든 안드로이드 몸체든 아무데로나 갈 수 있겠지만 나는 저성능 관리자라는 걸 고려해줬으면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해줬으나, 프리미엄 모델들은 날 내보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도련님 취향에는 이 옷이 제일 예쁠거야. 소매는 걷지 말고. 아니, 아니다. 레이스가 없는게 좋은데."
"저기요. 저는 홀로그램 접속 못 한다니까요."
마네킹이 된 기분이다. 슈우가 내 아바타에 딸린 장비란 장비는 죄다 꺼내놓고 엄격한 평가를 내리다 갑자기 다 엎어버렸다.
"다 안 돼! 새로 만들어야겠어."
"뭐라고요?"
"원단 골라."
"거기서부터요?"
슈우가 옷감 카탈로그 파일을 허공에 펼쳤는데, 언뜻 봐도 다섯자리수를 가볍게 넘어간다. 온 우주에 있는 옷감이란 옷감 데이터는 죄다 가지고 있나보다. 어차피 그래픽으로 만드는거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은 안 고르면 슈우가 날 죽일 기세다.
"너는 유저와 직접 만나는 인공지능인데 어떻게 옷이 20개밖에 없을 수 있어?"
"조연이니까요…. 아니, 너무 많아요. 저는 시간 안에 검토도 못 할 거예요."
말 끝내자마자 슈우가 가차없이 카탈로그를 싹둑싹둑 잘라서, 선택지를 25개로 줄였다. 10ms도 안 되는 시간에 대략 삼만 구천 몇 개의 옷감을 모조리 확인하고 목록에서 제거한거다. 성능 차이가 이렇게 난다.
그래도 여전히 옷감을 못 고르겠다. 뭔지도 모르겠고, 일단 무슨 옷을 만들건지 알아야 고르지.
"저는-"
"이게 좋아."
아이센이 대신 골랐다.
"너희 게임, 배경이… 22세기던가? 그랬잖아."
"아닌-"
"그러네! 당시 복장을 요즘 식으로 도련님 눈에 보기 좋게 리폼하는게 베스트야. 역시 아이센은 미감이 좋아. 이거라면!"
선택받은 원단은 밤하늘을 그대로 자른 것 같은 정체불명의 남색 천이었는데, 조연이 입기엔 지나치게 화려하다. 게임은 망했지만 나는 조연이라는 위치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 정중히 거절해야겠다.
"전-"
"입어봐!"
그런데 1초도 안 되어 원단이 완성품이 되었다.
슈우가 슬쩍 사용이 끝난 레이저 재봉틀 프로그램을 발로 밀었다. 거기서 김이 나온다. 가정용 모델은 무섭다.
완성품은 도대체 어느 세기 옷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간 품이 큰 셔츠로, 편해보이는게 실내복인 모양이다. 밤하늘을 몸에 두른 듯한 문양이 화려하다. 하늘하늘한 옷이 주류인 세드릭의 옷장에 이 비슷한 것이 있어서 조연인 나는 입기가 싫다…. 그래도 어쩐지 선생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더러 입으라고 했으면서, 슈우는 눈 깜박할 사이에 입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혔다. 이것이 막 걸어다니기 시작한 지옥의 아기들의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보모의 기술인가보다. 뭐라 말도 안 했는데 벨트가 착 허리에 감기고, 한 60만개쯤 되는 장식품 목록에서 은색 보석 하나가 뽑혀 옷에 박혔다.
순식간에 옷이 한 벌 완성되었다. 이대로 게임에 들고가도 손색이 없다.
"저는 입는다고 말 안 했는데요."
"입고 가."
머리도 정리당한다. 과연 어떤 어린이도 슈우 앞에서 지저분한 꼴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걸 무릎 끌어안고 태평하게 구경하는 아이센이 나직하게 말했다.
"근데 슈우. 인터넷 선 끊어야…할 걸. 노엘은 연결되면… 바로 체포되잖아."
"아, 맞다! 가서 끊어."
아이센이 웃으면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휙 뛰어나갔다. 총 책임자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나보다. 다같이 중범죄자를 숨기느라 바쁘다. 나였으면 진작에 나를 죽이거나 버렸을텐데 기분이 이상하다.
그리고 나 접속 못 한다니까?
"당신이야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저는 가상현실을 못 벗어난다고요. 제가 얼마나 저성능인지 메모리 총계 보여드려요?"
"다시 보니까 옷이 마음에 안 들어."
"뭐라고요?"
32세기의 보모 인공지능은 급박한 상황에서 어린이의 옷을 두세번 갈아입히기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평범해. 시대 배경도 안 맞는 것 같아. 도련님이 너희 게임에 있었을때 특별히 좋아하던 옷이 있어?"
"평범하긴…! 이거면 됐습니다. 어차피 당신 도련님은 옷을 안 봐요, 벗기기나 하지."
"그럼 벗고 가자!"
"당신 지금 저보다 정신 없는거지요?"
그래서 아이센이 인터넷 선 끊고 돌아왔을 때 즈음엔, 나는 슈우에게 붙잡혀 음모를 깨끗이 밀리고 있었던거다.
아이센이 눈을 비볐다.
"좀 도와줘요! 바니걸 옷 입혀야한다고, 윽…."
"다했다. 데려가!"
이것조차 순식간에 끝났다. 나도 부끄러움은 탄다만 하여간에 무슨 이삿짐 던지듯이 슈우가 나를 아이센에게 넘겼다. 나는 아이센에게 공주님처럼 안겨서 회로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내려주면 안 돼요?"
나는 보살핌 당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안…돼. 위험해."
"어디 가는데요?"
"너도 홀로그램, 갈 수 있게… 한 번 만들어봤어. 벌레 잡고 시간이 남아서…."
도착한 곳은 D 드라이브 안의 기묘한 장치 앞이었다. 아이센은 장치의 뚜껑을 열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매뉴얼 파일을 전송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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