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의 질량

2023.11.09


바람결에 술렁이듯,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안다.

돛을 단 배가 바람을 받아 순항하듯 세계가 앞으로 밀리는 기분. 애매하지만 확실한 고양감과 함께 느끼는 묘한 전율. 순간이 생명력을 가지고 박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강한 확신. 마나난은 눈 앞을 바라보았다. 눈 앞의 그가 가진 노을같은 색채는, 확실한 황혼이나 개벽의 빛이었다. 빛을 받을 때 그는 마치 새벽을 수놓는 계명성처럼 빛난다. 마나난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눈 앞의 그가 이 순간을 어찌 정의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그는 이 순간을 감히 ‘출항’이라 명명한다.

마나난은 자신의 첫 여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은 도주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법사’라고 거짓말을 하고, 저의 십이 년 인생에 가진 모든 것을 긁어모아 육로로 도망쳤다. 그 과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식사를 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남에게 빌어 먹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옷이 깨끗할 즈음에는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상인의 행렬에서 떨어진 하인 아이일 때도 있었고, 절 귀여워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저 다른 마을에 있는 소꿉친구에게로 가출하는 귀한 집 아이였다.

이런식으로 모습과 행색을 바꾸면서 걷고, 떠나고, 걷고, 떠나고를 반복하던 나날은 그에게 방랑을 체화시켰다. 그는 물결 위를 헤매는 배처럼 돌아다녔다. 정박은 늘 길지 않았고, 거짓말은 익숙하게 모습을 바꾸어냈다. 그는 그 스스로가 행운아라 느꼈으나 스스로를 대단하다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고, 저가 스스로 박차고 나온 마을을 그리워했지만 미워하진 못하는 소시민이었다. 마음에 품은 것은 언젠가 뱃사람 사이에서 주워 들었던 ‘낙원’이라는 말 뿐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낙원을 꿈꾸기 마련이었다. 마나난이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낙원이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상인은 내세를 원했고, 마차를 태워주던 맘씨 좋은 노부부는 좋은 사람들이 행복한 곳이라 말했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모두 다른 낙원이 있었으나 소년의 마음에 딱 맞아 떨어진 것은 뱃사람의 낙원이었다. 그들은 폭풍우에 휘말린 사람을 신이 거두어간다고 믿는다. 커다란 고래에도 망설이지 않고 작살을 박을 용기가 있는 사람들을 낙원이 찾아온다 생각한다. 요컨대, 자연재해에 맞선 이들을 데려가는 곳이 뱃사람의 티르 너 노그인 것이다.

고난에도 멈추지 않을 용기. 찾아올 행운을 놓치지 않을 지혜. 육로만을 밟으며 ‘낙원’이 있다는 에린까지 도달한 소년의 혼을 잡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뱃사람의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바닷사람으로 명명했다. 언젠가 배를 타고 흐르다 보면 낙원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낙천적 신앙이 그의 맘 속에 스몄다. ‘도주’였던 것은 어느 순간 ‘여행’이 되었다. 멈추지 않고 걸어간다면 모로가도 낙원으로 가겠지. 그는 제 영혼 속에 미지에 대한 동경을 새겼다. 그 순간, 바람이 멈추지 않고 부는 기분이 들었다.

순풍이다. 그는 돛을 가진 것도, 배를 가진것도 아니면서 흘러오는 바람에 그저 기분 좋아했다.

미지에 대한 동경. 대양에 대한 사랑. 천개의 파도와 천일의 밤을 넘어 도달할지도 모르는 어떤 순간. 자라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뱃일’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 늘어나고, 마법을 배우면서도 그가 품은 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항해를 권하고 제가 품은 비현실과 신비를 말하고 있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배’ 한 척을 얻는 데는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항해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항해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나난의 바다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마법사의 숲은 숲이다.

저가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아 살아가는 땅의 마법사임을 인지해도, 그는 여전히 끝을 모르고 출렁이는 바다와, 저 먼 해안선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날이 좋은 날 괜히 보이지도 않는 섬을 찾겠다고 나무 위에 올라가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기에 자신이 숲을 생각보다 이르게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독립은 아쉽지만 한 곳에 매여있는 것은 달갑지 않다. 거짓말 하나 하지 않고 그저 솔직한 자신만을 내비치면 되는 삶은 너무나도 ‘편한 삶’이지만, 이 곳에 안주하면 낙원으론 가지 못한단 근본적 불안함이 있는 것이다.

마나난은 전설을 채록한다. 신화를 기록한다.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삶에 탐닉한다. 별다를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마법사를 동경하며 만들어낸 여러 신비와, 바다라는 강대한 자연 앞에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어낸 이야기들로 호흡한다. 낙원에 대한 뱃사람의 전설을 들을 때 마다 항해를 꿈꾼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아르타클라는 제 항해에 참가해주겠다고 한 몇 안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마나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품고 있는 품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는 언제가 걸릴지 모르는 ‘미지’다. 그런데 그 꿈에 그는 기꺼이 저를 맡기는 것이다. 아무리 점성술이 있다 하더래도 인간의 일은 쉬이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일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언제 출항을 할지도 어떻게 배를 마련할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따라오겠다 말한다. 그 목소리는 다정했다. 유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겸손했다. 이 모순을 볼 때 마다 마나난은 그의 미래를 취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건 명백한 ‘욕심’이다. 허풍이 될지도 모른다. 마음에 품은 것은 오로지 꿈. 자세히 나누지도 않은 항해 계획. 조타수로는 플레타를 삼고, 요리사로는 아르타클라를 데려가고 싶다는 선명한 욕망. 친구들과 나눈 풋내기같은 꿈. 포기할 생각은 없으나 실현의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마나난은 그의 꿈을 연장시키고 싶었다. 그의 눈은 전설이나, 신비를 목도할 때 반짝인다. 그가 원하는 삶이 고작 시골 집에서 비질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이미 그는 자신의 꿈을 제게 태웠다. 

방랑과 여행의 차이점은 그 목을 옭아맨 밧줄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꿈꾼 이상의 미래로 데려가고 싶다는 선연한 욕망에, 마나난은 또 다시 어떠한 운명을 느꼈다. 그의 꿈을 배에 태운 이상, 그 미래는 반시 이뤄져야할 일이다. 제 미래의 여러 갈래중 ‘선장’만이 남는 순간이다. 하지만 마나난은 이 일이 그저 당연하다 느꼈다. 이는 반드시 이뤄져야만 했다. 강렬한 의무가 영혼을 옭아매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이 운명에서 피하고싶지 않았다.

그의 변화의 순서, 성장의 수순을 제 눈에 담는다. 새 항로의 전설에 태우지 않는다면 죽여버리리라 말하는 상대방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강렬한 욕망이 좋았다. 그것을 제 배에 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운반하고 티르 너 노그로 향한단 말인가. 마나난은 경쾌하게 웃었다. 돛을 단 배가 바람을 받아 순항하듯 세계가 앞으로 밀리는 기분. 애매하지만 확실한 고양감과 함께 느끼는 묘한 전율. 순간이 생명력을 가지고 박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강한 확신. 

마나난은 눈 앞을 바라보았다. 눈 앞의 그가 가진 노을같은 색채는, 확실한 황혼이나 개벽의 빛이었다. 빛을 받을 때 그는 마치 새벽을 수놓는 계명성처럼 빛난다. 마나난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눈 앞의 그가 이 순간을 어찌 정의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그는 이 순간을 감히 ‘출항’이라 명명한다. 바람결에 술렁이듯,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안다.

“이 순간 다른 말 따윈 하지 않아.”

그저 확신을 담아서

“내 항로에 네가 없다면 날 죽여도 좋아.”

제 방랑을 여행으로 바꾸는 말을 얹는다. 이것은 말로 쌓은 약속이다. 그의 손을 가져가 제 목에 얹는다. 얇은 맥이 뛰고 있을 것이다. 이 박동과 약동의 순간, 마나난은 제 시선에 그를 가득 담고 있었다. 죽여도 좋아, 그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미지의 항해에 인생을 걸어, 나를 믿어. 뱃사람의 낙원을 혼에 품은 소년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한 마음을, 눈 앞의 그에게 쏟아 넣었다. 이는 새벽을 여는 열량이었다. 모든 것들이 글러먹어 변변찮은 쪼가리만 손아귀에 가지고 있다 해도, 그가 지금 손에 쥔 목 아래에서 뛰는 맥은 그저 항해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저, 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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