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랑의 열량

2023.12.04.

성사 후 첫 로그가 이래도 되는가? 고백은 패전 이후 좀 된...시점이라고 생각해서 (리얼타임 적용하면 사흘정도 되나?) 바로 다음날 약간 짝사랑하는 척 구질구질한걸 보고싶었다네요.... 마침 1차시점 마지막 부분도 조율해서 짝사랑이 생각보다 오래됐단 공설도 생겼구우...... 그래서........ 둘이 서로가 맞짝사랑인거 모르고 외사랑인척 삽질하는거 좋아.......서 보고싶엇달까?.... 그리고 이 며칠 후에는 아르 무릎베개 하고 있다가 고백? 받겠지? 싶네요..... 너의 담담한 사랑고백을 좋아해.....제가 아르를 많이많이 사랑함................................................

 

햇볕에서는 다정한 향이 난다.

하얀 린넨을 끊어 직접 만든 커튼과 커튼 사이의 틈으로 투명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엷게 부유하는 먼지들이 빛을 받아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집 안을 흐르는 소리는 그저 적었다. 마나난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기지개를 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파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점령전이 끝났다. 패배의 시작이었다. 서둘러 무리아스로 돌아온 것 치고는 분위기만은 느긋했다. 어제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치던 결계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테이블 위에는 술병 여러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어젯밤의 흔적이었다. 둘이 마신 것 치곤 양이 소박했지만, 잠을 불러오는 데는 그리 나쁘지 않은 양이었다. 마나난 에스파너는 언제나 잘 자는 편이었음으로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패배의 댓가로 내어놓은 기억의 공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창문을 투과한 빛이 커튼 틈새로 길게 뻗어왔기에, 옆으로 내려 묶은 그의 물색 머리카락에도 빛이 들었다. 또다시, 새로운 하루였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한숨은 권태처럼 자리했다. 

 

밤을 건너 아침이 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으나, 각별하기는 했다. 집 안에서 눈을 감으면 파도 소리가 났다. 표류. 그는 오로지 두 글자를 떠올렸다. 친애하던 이들은 별세계를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망자의 배에 남는 공간은 없다. 노 저을 사람도 돛 내릴 이도 없이 바람부는 대로 밀려가는 항해다. 한 사람을 오롯이 담기도 그저 빠듯하다. 그러니 그 모험에 저가 낄 자리는 없다. 슬픔의 다른 이름은 죄책감이다. 

아침 볕이 깊게 들이차는 방 안에서 그는 감내하듯 숨을 깊게 내쉬었다. 속이 쓰렸다. 울음은 오로지 숨 안쪽으로 고이기 마련이었다. 마치 바다의 기원이 거대한 대지의 껍질에 담긴 울음이라도 된다고 믿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어라도 해야만 한다는 묘한 의무감과 더불어, 방 문 너머에서 자고있는 그 애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에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마나난은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집 안은 조용하고, 간간히 늙은 파랑어치가 우는 소리가 삐로로, 들릴 뿐이었다.

 

잠은 더 이상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그닥 졸리진 않아, 그는 주변을 순환하는 마나를 점검했다. 마나난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의 입구는 어제부터 짙은 해무가 감싸고 있었다. 마나난 에스파너에게는 바다조차 깊은 땅이었음으로, 그 개념을 확장시켜 지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그가 이 대지 안에 자리하는 이상, 땅은 제멋대로 움직여 침입자를 거부할 터였다. 

캐스팅해둔 마나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호흡을 다잡았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마을 안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리란 자신의 규칙을 스스로 어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전란으로 물들디 모르는 세상이 더 큰 걱정이었다. 고요함은 쓸데없는 상념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그는 자리서 일어났다. 가지고 있는 불안감과는 달리,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해가 커튼 너머로 넘실대지만 아직 그이가 깬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또한 명백히 드문 일이었다. 아를은 언제나 아침을 연다. 배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침번을 서는 것처럼 언제나 이르게 일어나, 야채를 썰어내는 소리 따위로 사람을 깨우기 마련이었다. 전쟁은 고되고, 더 이상 마법의 수혜를 입지 못하는 그가 어제 술자리에서 상당히 지쳐보이던 것을 상기하며, 마나난은 그에게 준 방문에 정확히 두 번, 노크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묘한 침묵이었다. 불안감은 밀려오는 밀물보다 빠르게 마음을 채운다. 감히 친애에 기대어 문을 열었다. 반짝이는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옅게 보였다. 그 애는 여즉 눈을 뜨지 않았다. 짙은 여독 탓이었을 것이며, 아를의 곁을 떠난 마나 덕일지도 몰랐다. 문가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바라보던 마나난은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의 소리를 죽이는 건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패배의 끝에서 마나난이 전장에서 건져온 것은 채 몇 되지 않았다. 

잃은 것이 많단 뜻이었다. 특히 기억의 공백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림자 안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시선을 굴리다가 눈을 깜빡였다. 잠귀도 예민한 주제에 쉽게 일어나지 않는 동료를 눈에 담았다. 묵직한 선이 깊게 느껴지는 인상은 잠을 잘 때 묘하게 더 누그러져보였다. 폐허같은 전쟁 뒤에도 여전히 삶은 지속되고, 마음은 연속된다. 마나난은 제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응시했다. 그의 마법은 세계에서 유실되었으나 그를 잃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커튼을 쳤는데도 집안은 충분히 밝았다. 빛이 닿는 자리의 색채는 좀 더 연해보이고, 엷은 먼지는 마치 별길처럼 보였다. 잃지 않았음을 상기하며 마나난은 그를 바라보았다. 아를이 숨을 쉴 때마다 얇은 이불을 덮은 가슴은 오르락내리락하길 반복하며, 그의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잡혀있었다. 청록빛 눈을 가린 눈꺼풀에는 묘한 피로가 느껴졌다. 피차 지친 것이다. 에린에서 무리아스의 작은 마을까지 뻗는 여로를 최속으로 주파하는 일은 인간에게 버티기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물에게 사랑받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마법사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마나난은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지킬 수 없던 손으로 머릴 쓰다듬었다. 여전히 잠들어있는 모습에 지독한 무력감이 번져왔다.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노력했다면 지킬 수 있었을까. 후회는 한숨처럼 쌓였다. 허나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상체를 기대에 침대에 뉘였다. 아를의 팔이 머리에라도 닿았는지, 약간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애매한 거리감에서, 그는 한없는 삶을 느꼈다. 

 

익숙한 공간에, 좋아하는 사람이 누워있다. 유일한 위안이었다. 전쟁이 끝난다면 고백이라도 할성 싶었던 사내였다. 버릇처럼 익숙한 사랑에 매듭을 지어보는 상상을 했다. 거절을 염두에 두고 은애의 언어를 혀 위에 담는다. 승리와 함께라면 들어봄직도 했을 거였다. 허나 이제는 감히 내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와 패배 속에서 내어놓기도 묘한 마음이었다. 

그를 은애했다 말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마법사의 강함은 상상력이 정한다. 하지만 비루먹은듯한 풍경은 그의 입술이 거절의 언어를 담는 장면을 재생하곤 했다. 이 또한 오래 된 공상이었다. 발타네 이후 같이 보낸 그 밤 이후 꾸준히 마나난 에스파너의 상상을 좀먹는 공상이기도 했다.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역시, 사랑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인생에선 어느새, 그를 모르던 시간보다 알던 시간이 더 길어졌다. 패배 이후에 말하기에도 멋쩍은 언어들이었다. 그렇기에 마나난은 어설프게 웃으며 단단한 손끝으로 아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조금은 억세고, 조금은 부드러웠다. 이것만큼은 놓치지 말아야하는데, 자꾸만 마음이 삐죽해졌다. 호흡처럼 남은 권태와, 지루함처럼 자연스레 자리하는 무력감 속에서도 갈길 없는 외사랑이 있다. 그의 담담함을 좋아했다. 이상을 사랑했다. 흔들리더라도 내딛고 마는 모습과, 제게 웃어주는 순간이 좋았다. 비루먹은 것들만 남은 패배 이후 남은, 유일하게 가치 있는 거였다. 말할 길 없어 요원해진 감정을 한숨에 담아 뱉어냈다. 

한동안 토해낼리 없을 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단 후회가 침잠하듯 마음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현실이 변하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계속 상상하게 되는 까닭은, 수년을 지속해온 외사랑의 결착을 맺으리라 생각했던 어설픈 마음 때문이었다. 가족 이상의 것이 되고 싶었다. 마법사의 숲에서 같이 자랐단 것보다 강한 결속으로 맺어지고 싶었다. 이 역시, 패전 바로 다음 날 말할 수 없는 말인지라 마나난은 그저 염치없이 고개만을 숙였다.

실로 그 답지 못한 일이었다. 

 

커튼 사이로 뻗는 볕의 길에는 여전히 먼지들이 우주를 만들며 부유하고 있었다. 마나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잠에 들어 있었다. 깊은 오수였다.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침대에 팔을 짚은 채로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짚이 들어가 있는 침대에서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는 모습을 시선으로 덧그렸다. 고백을 내뱉을 용기는 없으면서, 그의 숨을 탐하고 싶단 욕망은 선명했다. 이 또한 어설프게 적립된 회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득 손을 뻗었다. 길고 가지런히 고운 손가락으로 그의 메마른 입술을 톡, 톡 두드렸다. 군데군데 터서 갈라진 곳은 오돌토돌했다. 그의 입술에 무형의 지문을 남겼다. 투명한 것이 그의 숨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의학도들 중에는 사람마다 지문의 모양이 다르다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풍문을 알고 있었다. 그 풍문에 빌어, 그는 제가 가진 고유한 투명감으로 그의 입술에 낙인을 찍듯 톡톡, 건드려보는 것이었다. 아를의 미간이 더욱 좁혀지고, 잇새로 앓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손등으로 덮어 그의 입을 가렸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섬세한 손가락과 이어진 손등이 그의 입술을 가렸다. 마나난은 몸을 숙였다. 무게감을 가진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리고, 투명에 가까운 햇살이 가득찬 방, 그는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좋아하는 그 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애매한 입맞춤을 연신 남기듯, 제 손등에 보이지 않는 자국을 찍었다. 그가 숨을 내뱉을 때 마다 손바닥에는 간질거리는 잔상이 남았다. 좋아해. 라고 속삭였다.

목소리는 투명한 햇살보다 엷었다. 외사랑의 고백이란 무릇 손 위에서 녹아내리는 눈보다도 더 지리한지라, 그의 목소리는 깊게 닿지 않았다. 좋아해, 라고 다시한 번 속삭였다. 듣는 사람이 잠들어 있으니 그것은 유효한 고백이 아니었다. 패배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데도, 여즉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단 생각만이 있었다. 좋아해, 라고 다시 한번 속삭였다. 여전히 손바닥에는 그의 숨이 닿아있고, 마치 숨을 들이키는 것 같이, 호흡의 질량을 재는 듯. 마나난은 다시 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분명 외사랑의 열량. 한없이 파리하고 흩어질 것 같은 연약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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