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순리
12국기 au
마음이 흐르는 것을 막아본 적이 없다. 억지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연왕’의 호를 가진 소년은 턱을 괸 채, 제 앞에서 사랑을 서술하는 자신의 태보를 바라보았다. 그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를 타고 전해오는 이야기는, 태명을 잊고 제 본분마저 잃은 채 사랑에 휩쓸린 사람들을 담고 있었다. 역사에 기록된 한 단의 이야기는 여러 순간과 나날이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엮여있을 것이었으나, 소년은 그 이야기에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는 제 눈 앞의 존재를 응시했다.
상서로운 존재라는 그는 봄빛처럼 다정하다. 여름에 깊게 자라는 녹음마냥 사랑스러웠고, 가을의 청명함만큼 두근거렸다. 여전히 소년은 턱을 괸 채로 제 볼을 손 끝으로 톡, 톡 두드렸다. 지루하십니까? 라고 물어오는 태보의 목소리는 타이르려는 것 보다는 제 상태를 살피는 듯 하여 고개를 저었다. 들어두면 좋은 이야기라며? 라고 말하면서 짓궂게 웃으면 그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다기보다는 단단하다는 인상의 입술이 잠시 다물렸다가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현영궁의 운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묘한 짠 내가 난다. 방파제로 둘러싸인 카나가와의 해변과는 영 다른 느낌이다. 바람의 방향이 다르고, 향이 다르다. 그것을 느낄 때 마다 마음은 서걱이며 묘한 외로움을 불러왔다. 달이 가지는 힘에 파도가 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 세계가 둥글지 않고 평평한 대지 위에 지어진 수평의 세계라면, 이 곳의 파도는 어떤 원리로 몰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에게 이 곳은 그저 알지 못하는 나라였다.
그저, 엔키가 있다. 자신의 태보가 있다. 견우성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다던 기린이 있다. 볕이 들 때마다 가을처럼 반짝이는 갈기가 있고, 눈을 마주칠 때마다 그 눈동자는 맑은 색의 호수처럼 반짝였다. 그가 있기에 저가 이 곳에서 연왕으로 자리할 수 있음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오로지 한 사람의 존재에 빌어 정의되는 삶은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짙은 미궁이었다.
소년은 제 마음이 어디로 흐르는지 막아본 적이 없었다. 봉래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에서의 그는 모두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눈이 흐려지는 것 같이,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다. 수면 위에서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혹은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해 바람 가는데로 흘러가는 부평초처럼 순간의 충동을 밟아 살아갔을 뿐이었다. 인간이 파도를 막지 못하듯, 마음의 풍랑을 막아본 적이 없다.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을 한낱 사람이 바꾸지 못한다는 근본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에게 지금의 순간은 그저 낯설었다. 해변가에 그저 발을 대고 있기만 해도 밀려오는 파도처럼, 연왕이 자신의 태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눈을 깜빡이기만 해도 살풋 미소 짓고 있는 그가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실 것이라 당당히 속삭이는 그가 있었다. 엔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소년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뻗었다. 맞은 편을 향해 손을 내밀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손을 엮어오는 그가 있었다.
“태보.”
라고 부르면 난처하게 웃으면서 하던 말을 멈춘다. 그는 여전히 사랑에 빠져서 나라를 망가뜨리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나쁜 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향하는 마음을 말하지 말라는 명백한 뜻 같으면서도, 그저 이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왕을 위해 이것저것 말해주는 친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소년은 그저 작게, 힘없이 웃었다. 이리 웃으면 그의 태보의 눈썹은 아래로 쳐진다.
그건 꼭, 눈치를 보는 모습 같았다. 자신의 존재가 왕을 힘들게하지 않았을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엔키는 이상하게도, 소년이 땅에 발을 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딘가 훌렁 떠나버릴 것 같다고 믿는 것처럼 한숨 하나에 불안해하곤 했다. 그게 아니야, 라고 정정하듯 말하면 흠칫 어깨를 떨며 눈을 마주쳐왔다. 실수하지 않고 싶어하는 모습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또 다시 파도가 밀려오는 듯 했다.
이것은 분명 연정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이나, 소년은 마음에 그리 이름붙이지 않기로 했다. 달이 파도를 당기지 않는 세상에서 사랑의 이름이야 여러 갈래로 뻗어 명명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엮어 잡았다. 손이 따듯했다. 부드럽게 끌어오자 그는 천천히 끌려왔다. 손가락을 엮은 채로 뺨에 댄 채로 턱을 괴었다. 제대로 앉으셔야 한다는 간언이 들려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렵다. 좋아해, 라고 속삭이지만 그것은 제대로 닿지 않을 것이다. 퍽 눈치가 없는 녀석이었다. 해일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면 분명 제 앞에서 사랑에 실패한 자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을 테다. 호의에 기대면서 굴절된 사랑을 말한다. 그것은 분명 친애처럼 느껴질 것이고 주가 종에게 베푸는 당연한 신뢰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마음 붙일 곳 없는 낯선 나라의 유일한 제 것을 바라보면서 소년은 피식 웃었다.
“이름을 불러줄래?”
그는 난처한 듯 보였다. 이 곳의 이름이 아니라면 불러도 괜찮잖아. 왕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내 이름이니까. 소년은 그것을 애써 구분지어 말했다. 파랑같은 마음은 여전히 역전하며, 다른 이름으로 그에게 밀려갈 뿐이었다. 잡은 손가락이 닻이라도 되는 것 마냥 웃었다. 마나난, 하고 봉래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는 여전히 음역대가 낮고, 다정했다. 그것이면 족하다는 듯 소년은 부드럽게 웃었다. 왕이라기보다는 사랑에 빠진 소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엔키의 태도는 다정하다. 무심코 기대어 욕심부릴 정도로. 마나난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잡은채로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내어준다. 그 위에 앉아 몸을 기대었다. 어깨에 팔을 얹은 채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다정하지 않았어도 분명 좋아하게 됐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속절없이 밀려오는 파도마냥, 이방인의 세계에서 그는 유일하게도 마나난을 연왕으로 정의해주는 증거였다. 나는 네가 엔키가 아니었어도 좋아했을 거야. 농담처럼 속삭이는 말에는 뼈가 있으나, 그것이 그에게 닿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 애는 행간을 읽지 않는다. 그것이 마나난에게 남은 유일한 행운이었다. 현영궁에선 여전히 바람이 불고, 운해의 향은 방파제로 둘러싸여있던 카나가와의 해변과는 다른 냄새를 남겼다. ‘멜랑콜리’하다고 생각했다. ‘노스텔지어’와는 구분되는 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는 그저 제 안에 봉래의 언어를 가두며, 제 기린에게 기대어 네가 좋아, 라고 친애마냥 속삭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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