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메이커/로엔벤]관계의 정의
2019.06_히어로메이커 전력 제 1.5회 주제 : 정의(定義)
-포스타입(2019.06.03) 게시글입니다.
-최종수정(2024.02.19)
대본을 따라 줄줄이 대사를 읊었다. 미리 외운 전개에도 깜짝 놀란 척 연기해내고, 있지도 않은 전설을 풀어내며 그렇게 연극을 이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로엔의 삶은 거짓투성이었고, 연극은 그와 다를 게 없었으므로.
손자를 위해 두 눈을 희생한 할아버지는 머릿속으로밖엔 회상할 수 없었다. 우연히 스승의 눈에 띄어 푸른 탑의 제자로 들어오게 된 어린 아이. 그것이 끝을 모를 두꺼운 대본 속 로엔의 역할이었다. 주위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출처도 불분명한 아이를 제자로 들인 것에 대한 질책을 받는 스승을 위해 밤늦도록 책을 펴고 공부를 했으나 그 역시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주변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적당히, 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당장에야 스승을 학장의 자리에 이끌 정도의 지지를 얻었으나 그조차도 로엔에겐 불행이었다. 이어진 시기와 질투 속에서 로엔을 지켜주기엔 학장은 너무 바빴으니까.
조금이라도 맞서면 실력을 믿고 선배들을 우습게 본다며 흠을 봤고,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면 어린 나이에 띄워주니 나태해진 것 좀 보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대본 속 로엔에게 착하고 얌전한 아이라는 설정이 붙었다. 하하 웃어넘기면 혀는 찰지언정 일이 더 커지지는 않았다. 로엔은 싫은 소리를 하면 안되었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안되었고, 어떤 것도 잘 해내어야하지만 그것을 허락없이 티내면 안되었고, 또. 또…. 그렇게 설정은 계속 추가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설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자신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로엔은 대본의 끝을 몰랐고, 그 끝은 아마도 로엔의 평생동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커다란 실수를 뒤덮기 위해 연극에 참가하면서도 로엔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선 용사 공주님을 돕기 위해 파견된 마법사의 설정이 하나 더 붙는대도 무어 별거라고. 차이라면 하나, 이 대본에는 배우가 자신뿐이 아니라는 것.
로엔은 생각했다. 이 일행의 관계는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공주님이라면 가볍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사와 동료들이라고. 하지만 그 답은 배역은 있으나 배우는 아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각자의 사정을 안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그들의 관계는, 그들은.
답을 내지 못한 채로 상황은 급박하게 변해갔다. 연극이 연극이 아니게 되고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연극의 연장인 기분을 털어낼 수 없었다. 왕실 대서기관이 쓴 대본에서 벗어나더라도 로엔은 여전히 대본 속에 머무르고 있었고, 여전히 진실된 것 하나 없는 껍데기였다.
“주술사가 있는 곳을, 제가 알아요.”
그런데 지금 이게 뭐지?
“제 할아버지가 주술사셨어요.”
지금 목소리를 내고있는게 정말 나인가? 내뱉어낸 사실은 대본 속 설정값이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그렇다고해도. 그러나 혼란한 동시에 납득하고 있는 자신을 로엔은 깨달았다. 동료, 친구, 어쩌면 가족. 로엔은 어느새 그들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내리고 있었다.
대본의 끝이 곧이라고,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로엔도 눈치채지 못한 새에, 누군가 서서히 깎아내고 있던 대본의 종장. 학장 외엔 누구도 나서주지 않던 부학장의 억압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 가볍지 않은 거짓말에도 화내지 않고 이유가 있을 거라 자신을 믿어준 사람, 나이차도 별로 나지 않는 자신을 막둥이라며 언제고 챙겨주던 사람.
로엔은 대본의 밖으로 빠져나와, 본연의 제 모습을 되찾아보고싶어졌다. 그러고나면 제일 먼저 그 사람, 벤에게 거짓없는 웃음을 보여주고싶다고----, 어라?
“막둥아, 열 있냐? 얼굴이 빨간데.”
“네?! 아아아뇨! 아무것도!”
황급히 손을 내저어 부정하며, 빨개진 얼굴을 가리는 로엔은 아직 벤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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