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전오수/아니패치]하얗게 불태운 팻쥐

2020.08_

텐님창고 by tennim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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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타입(2020.08.29) 게시글입니다.

-최종수정(2024.02.19) 내용의 변화는 없습니다.

유해졌다. 최근의 패치에게 내려진 부하직원들의 평은 그랬다. 그들의 상사는 전처럼 결벽같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았다. 한시가 촉박하게 잡던 작업시간도, 1mm라도 오차를 내지않겠다는 듯 하나하나 참견하던 지휘도 이젠 없었다. 윗자리에 앉더니 나태해진 거라 말하기엔 패치는 이제 그럴 의무가 없는 직위임에도 여전히 현장에 직접 나와 실수가 있진 않은지 직접 검사하였고 지각 한번 하지 않았으며 근무시간 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쉬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잔소리와 호통이 줄었을 뿐, 그 부지런함은 그대로였다. 그 증거로 패치가 맡은 부서는 문제 일으키는 일 없이 잘 돌아갔다.

그런 연유로 전과는 현저히 달라진 패치에 대한 총평은 지금이 낫다는 것이었다. 여유가 생긴 건지 사람이 좀 좋아진 것 같다고. 패치를 잘 아는 이들이 들었다면 그게 아니라 손을 저었겠으나 패치는 수호대에 친한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그가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 줄곧 살아온 마을을 뒤로 하고 갈래갈래 찢겨져 나가는 마음도 뒤로 했다. 그렇게 달려나온 그때부터 줄곧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 그것을 이뤄내었다. 얼마 전이 얼마나 전이지? 패치는 요즈음 상실된 날짜감각에 머리를 짚으며 신문을 들었다. 작은 숫자들은 반년의 시간이 흘렀음을 일러주었다. 마치 시간이 접혀버린 기분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하루가 끝나있고는 했다. 전날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게임이 무사히 진행되고있는 것을 보며 어쨌든 일은 잘 처리하고있구나, 그 정도의 감상으로 넘어간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벌써 반년이란다. 목표가 없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패치는 정체되어있었다.

그의 길은 이미 끝나있었다.

모드를, 그리고 치트를 막아내고 기적처럼 그들이 흡수했던 모든 것을 되찾았다. 세계를 집어삼키는 어둠을 물리친 패치는 영웅이 되었다. 검은 금요일은 천문학적인 확률로 자연발생한 정체불명의 어둠에 의한 재해였다. 하지만 이번일에는 뚜렷한 범인이 있었다. 당황스럽게도 그는 게임을 지켜야할 수호대의, 그것도 일반직원도 아닌 이사진 중 한명이었으니 사람들의 분노가 이미 소멸한 치트를 넘어 그 치트에게 이사자리를 내준 수호대의 상부에도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방패로 영웅을 내세웠다. 악당을 물리치고 희생된 사람들은 살려낸 영웅. 온갖 찬사가 붙었고 구구절절한 일화가 과장되어 전설처럼 세상에 퍼졌다. 패치는 허황된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방패로서도 순순히 맡은 바를 다했다. 그리하면 권력을 쥘 수 있을테니.

작은 게임 하나를 재건하는 일 따위는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이루어졌다. 가능하다면 제가 직접 맡고싶었으나 담당직원에게 보고서를 받아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목표에 다다른 순간 길의 끝을, 길 너머의 공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의 그가 십구금부서를 맡아봐야 도움이 될까? 패치가 내린 결론은 물론 부정적인 방향이었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지금의 패치라면 온갖 지원을 해줄 수 있다. 담당으로 보낸 직원도 뒷조사까지 해가며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이 중에서 골랐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않아 때때로 감사를 보냈다. 참고의 차원에서 방송되는 주인공님의 게임진행화면도 틈만 있으면 확인하였다. 강박적이기까지한 행동이었으나 사람은 악의가 없어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악의가 있어도 철저하게 숨길 수 있다는 것을 패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패치의 하루는 기계처럼 일을 하고, 십구금부서의 감시를 하고, 생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사와 수면을 챙기는 것이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어본게 언젠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계속 하다보면 누구라도, 매뉴얼- 그 일벌레 패치라도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실제로 패치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더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있나? 물론 목숨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때때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침범할 만큼 패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계속 반복해온 하루인데도 갈수록 새롭게 버거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목표를 이루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모든 것이 괴롭고 힘든걸까. 속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내보이지 못한 감정이, 눌러삼킨 말들이 패치를 옥죄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 터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러니, 이 결정은 충동적이었다.

패치를 온갖 술과 안주거리를 사들고 용검전설의- 약초마을 촌장의 집 앞에 서있게 만든 이 결정 말이다. 미처 명찰을 준비 못해 홀로 이질적인 모바일부서의 그래픽으로 매끈한 모습인 것이 그 첫번째 증거였고, 집주인에게 거절당할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두번째 증거였다. 패치가 그것을 떠올린 것은 이미 문을 두드린 후였기 때문에,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쓸 수 있을지 계산할 시간은 없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곱슬하게 뻗은 금발, 똑바로 마주치는 차갑게마저 느껴지는 눈빛. 아니카다.

“어머, 무슨 일이래요? 다시 볼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게...”

뭐라고 해야할지 패치는 답을 낼 수 없었다. 아니카의 말대로 그들은 다시 볼 사이가 아니었다. 차라리 상대가 퍼블리라면 함께 고난역경을 뚫고온 동료애라도 핑계를 댈 수 있을테지만, 아니카와 패치는 잠시 스쳐간 연에 불과했다. 술 한잔 하고 싶어서? 신세를 한탄하고 싶어서? 그렇다면 부하직원 아무나 붙잡고 해도 되는 일이다. 술집 바텐더라도 상대는 있었다. 무슨 일로 자신은 이곳에 왔을까. 하필 이곳이어야 했을까. 이전 갑작스레 배우의 결원 소식을 접하고도 즉시 지시를 내리던 신속함과 단호함은 어디로 가고 말을 잇지 못하는 패치를 가만 지켜보던 아니카는 재촉하는 대신 문을 더 열어젖히고 패치가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의 아니카는 분명 제 눈빛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래. 그래서 패치는 이곳에 왔다. 제가 숨긴 감정도 저도 모르게 묻어나온 작은 감정마저도 눈치채어주는 그라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내본 적 없는 그의 모든 면을 아니카라면 당황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어 줄 것이다. 물론 다소의 독설은 따라붙겠으나 과도한 걱정이나 친절보다는 나았다. 패치는 충동적이었던 것 치고는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아니카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문이 닫혔다.

“뭘 그렇게 잔뜩 가져왔어요?”

패치의 손에는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가득찬 커다란 봉투가 들려있었다. 형태나 냄새로 술과 안주거리라는 것은 짐작해도 지나치게 부피가 컸다.

“자네가 어떤 것을 좋아할지 몰라서.”

“무식하게 종류대로 다 쓸어왔단 소리네. 대리님, 당신 전에도 그렇고 생각보다 막나간다?”

“그때는-”

“됐고. 그걸 다 늘어놓을 수 있을만큼 큰 상은 없으니까 바닥에서 먹어요. 신문지는 거기 왼쪽에 있어요.”

거실바닥에 깔려있던 푹신한 카페트를 돌돌 말아 치우고 그 대신으로 신문지를 펼쳐 마련한 자리에는 곧 온갖 술과 안주거리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맥주부터 시작해서 와인이며 양주에, 안주도 각각 어떤 술에도 곁들일 수 있도록 맞추어 준비해온 모양으로 참으로 다양했다. 이리 보니 정말 미련해보여 괜히 헛기침을 하는 패치를 두고 아니카는 먼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뭐해요? 서서 먹을 거라면 말리진 않겠는데.”

그러고는 병을 뒤적여 소주를 찾아내 뚜껑을 땄다. 다리를 굽혀 앉자마자 소주를 병으로 받은 패치가 아니카를 보았다. 아니카는 또 다른 소주를 깐 참이었다. 잔은 없었다.

“설거지 안했어요.”

“지금이라도 내가 컵을 씻어오겠네.”

“눈치 없어요? 병나발 불자고요.”

“음. 그러지. 소주가 취향인가?”

“가리는 건 없는데, 대리님 찌질한 분위기를 보자니 소주가 제격이겠더라고. 참. 이제 대리님이 아니던가?”

“그냥 편한대로 부르게.”

“좋아요, 그럼 패치. 남 부를 때 님자 붙이는 거 안 좋아하거든. 댁도 이름 불러요. 일 안할 때도 촌장님이라고 불리고 싶진 않아서.”

“그렇게 하지. 아니카.”

술자리의 시작을 알리는 청량한 짠소리도 없이, 묵묵한 공기 속에서 각자 조용히 술을 마셨다. 아니카는 튀김이나 과자에 몇번 손을 대었지만 패치는 무언가 말을 꺼낼 둥 말 둥 하다가 다시 술을 한모금 넘기며 쭈뼛대느라 안주에는 신경을 쓸 틈도 없어보였다. 누가보아도 긴장한 태도였다. 보다못한 아니카가 무릎걸음으로 패치의 옆에 다가섰다. 그리고 술병을 들입다 패치의 입에 콸콸 쏟았다. 술이 목구멍은 물론 코에도 들어간 패치가 상체를 숙이고 콜록대며 원망의 눈으로 아니카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어깨나 으쓱였다.

“뭐든간에 털어놓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에요? 맨정신으론 못하겠어서 가져온게 술 아니고?”

새로 병을 따서 패치의 앞에 놓아주며 아니카는 편한 자세로 바꾸어 앉았다.

“그럼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얼른 마시라고요. 답답한사람아.”

그래서 패치는 한병을 더 비웠다.

알코올이 뇌를 적당히 적셨다. 현실감각이 무뎌지고, 괜한 용기가 솟는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여태 누구한테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 패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출신과 그곳에서 있었던 일, 자신이 벌인 잘못, 질타 속에 낯선 곳에 뛰쳐나와 겪은 고생, 차별의 시선, 계속해서 꿈꿔왔던 목표, 수호대에 입사한 후의 노력, 치트의 계략과 방해를 극복하고 얻어낸 영웅의 지위, 드디어 이뤄낸 목표, 그리고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않은 자신에 대한 것까지 전부. 아니카는 패치가 장황하게 말을 꺼내는 동안 어떤 호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의 끝에서야 ‘그래서요?’라고 가볍게 물었을 뿐.

패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래서요’라는 질문이 무엇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패치. 당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말 안했잖아, 그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말 못하죠.”

“내, 감정?”

“그래서? 그런 일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하게 하고 무슨 마음을 느끼게 했는데요?”

그런게 없어봐야 솔직히 힘든 과거를 이겨내고 훌륭하게 성장해서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는 우리동네게임보다 대충 짠 스토리처럼밖에 생각안되거든요. 게다가 뭐?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 재벌2세가 나한텐 돈밖에 없다고 질질 짜다 맞아죽는 소리하고있네.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영웅님? 

줄줄이 이어지는 아니카의 말에 패치는 벙찌고 말았다. 다음 순간엔 웃었고.

“확실히 재수없군.”

“그치?”

“하지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었으니.”

“그럼 그걸 지금 생각해요. 모처럼 들어준 거 끝까지 들어줄 테니까. 이 먼 구석까지 온 것 보면 나말고는 털어놓을 사람도 없잖아? 친구 없죠?”

“없어도 잘 살았어.”

“잘 살지 못했으니 여기서 한탄하고 있는거지 뭐. 그보다 자꾸 말 돌린다?”

“음.”

패치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아니카가 새 병을 준비해 그의 입에 꽂아넣었다. 용기를 충전해줄 요량이었으나 벌써 빈 병이 몇개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패치는 주량이 센 편이 아니며 오늘은 안주도 걸치지 않았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가 얼굴부터 목까지 빨개져 앞으로 엎어졌다.

“어머나. 이렇게 약한 줄은 몰랐네. 저기여~?”

패치의 등을 꾹꾹 찌르는 아니카에게 돌아온 것은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였다. 곧 잠들 듯 껌뻑이는 눈을 보고서도 아니카는 패치의 상체를 잡아당겨 일으켰다.

“잘 땐 자더라도 할말은 다 하고 자요.”

“으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이는 상체를 어깨로 지탱한 아니카가 잠시 침묵하다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들었던 거죠?”

기습적인 질문에 붉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취기에 의한 휘청임인지 대답인지 알 겨를이 없었으나 아니카는 멈추지 않았다.

“외로웠어요?”

“-그랬던 것 같네.”

뚜렷한 발음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또?”

“내가 살아있는 의미를 모르겠어.”

“그건 원래 모르는게 정상이고요. 애초에 그런게 따로 있기나 한가?”

“하지마안,”

꾸벅 눈이 감기는 것을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살아서 따로 하고싶은 것도 없어서.”

 “그래서 취미를 만들라고 하는건데, 당신은 그동안 일이 취미였죠? 진짜 인생 재미없긴 했겠어요.”

“앞으로 무얼 하지?”

“나한테 물어서 어쩌려고?”

“그냥,”

자네가 해주는 말이라면 뭐든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여기에 왔어. 말을 마치고 패치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아니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보다 빠르게-, 알코올을 견디지 못하고 역류한 음식물이 그대로 쏟아져내렸다.

참사의 정리가 끝난 후, 아니카에게 옷까지 빌려 갈아입은 패치는 죄스런 얼굴로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거하게 토해내고 술기운이 가셔 앞전 떠든 것들에 대한 후회며 민망함도 컸다. 아니카가 소파에 앉은 채 패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죄송스러워할 건 없지만, 이 구도 마음에 드네요.”

“정말… 미안하군. 할말이 없네.”

‘하하, 할말은 이미 많이 했으니 됐어요. 것보다는 당신이 마지막에 한 말 말이에요.“

“그냥 흘려버리게.”

“싫은데? 이봐요.”

내 말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니, 비싼 충고 좀 해줄게요. 꼬고있던 다리를 풀고 소파에서 내려선 아니카가 패치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눈이 마주쳤다.

“삶에 의미같은 걸 찾지 말아요. 당신의 쓸모를 찾지 말아요. 그냥 즐기기에도 인생은 짧단 말이야.”

“….”

“너무 부지런한 사람은 이게 문제라니까.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으면 시간낭비라고밖엔 생각을 못하지. 낭비면 또 어때? 지금까지 남들의 배로 고생해왔잖아. 느긋하게 굴어봐요. 자고 일어나서 침대에 조금이라도 더 누워있고싶다 이불을 끌어안고 늦장부리는 5분이 하루를 버티게 하는 날도 있어요. 길 걷다 하늘색깔이며 구름모양도 관찰하고, 꽃 한송이 피어있어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얼마나 고운지 살펴보고. 그런 여유가 사람한텐 필요하다니까? 이만큼 말했는데 못알아들을만큼 멍청하진 않잖아. 패치. 하려던 일을 마쳤다면 좀 쉬면 되는 거에요. 쉬고나서도 해야만하는 일은 없는게 좋죠. 하고싶은 일을 해. 하고싶은 일이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어보는 거야.”

아니카가 허리를 폈다. 창가로 걸음을 옮기는 아니카를 패치는 저도 모르게 좇았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너머에선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아니카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가늘게 흔들리는 금빛이 아침햇살처럼 눈부셔 패치는 눈을 감았다. 길이 끝나 이제 더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텅 빈 허공이라 생각한 길의 바깥에는 패치가 여태 보지 못했을 뿐 하늘도 구름도 꽃도, 태양도 있었다. 길이 끝났다면 다음은 길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노니면 된다. 미련하게 멈춰서서 미아처럼 새 길을 찾을 필요는 없는 거였다.

“그렇게 눈 감고 음미할 정도로 내 말이 감동적이었어요? 아예 울어도 좋은데.”

“그런게 아니야.”

“왜? 그냥 울지. 똥폼잡기엔 어차피 못볼 꼴도 다 보였고.”

“됐어.”

“울으라니까? 참아서 좋을게 하나도 없거든.”

“별로 참고 있진 않네만. 자네, 경험자의 말투로군.”

“하하. 아주 여유롭네? 물리적으로 눈물나게 만들어줄까봐.”

다른 누구도 아닌 패치가 말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처량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아니카라도 무신경할 수는 없었다. 그 패치 아닌가. 지금 그는 숙취로 핼쓱해진 것을 빼면 어제보다 확연히 나아진 얼굴이었고 농담도 하는 것을 보면 썩 괜찮아보였다. 다행이라고 아니카는 몰래 마음을 놓았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월급이 나오면 어디에 쓸지, 퇴근하면 자기 전까지 무얼하며 뒹굴거릴지. 그런 사소한 것부터 생각해봐요. 뜨개질이든 낚시든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것도 괜찮고. 연애를 해도 좋겠네.”

“……그래.”

둘은 잠시 그렇게 서서 새벽공기를 만끽했다. 평화로운 침묵에 잠겨서, 그렇게.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새 우는 소리가 싱그럽게 아침을 알렸다. 둘은 따뜻한 커피로 피곤을 달래어야했다. 밤을 꼬박 새운 것치고는 개운한 얼굴이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 붙잡고있었군. 미안하네.”

“차도 안다니는 새벽에 쫓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역시 다음에 제대로 보상하세요.”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여러모로 정말 고맙- 으왁!?”

패치가 문을 열자 문 밖에서 귀를 대고 엿듣던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그 아래 깔릴 뻔한 패치가 눈에 익은 얼굴을 향해 매서운 얼굴로 설명을 요구했다. 가장 앞에 있던 퍼블리가 당황한 얼굴로 변명하다가 결국 되는대로 털어놨다.

“죄송해요! 그치만 아니카 집에 대리님이 있는걸 누가 창문으로 봤대서…! 게다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같이 있다는 건 저기…… 그!”

손짓발짓 현란하게 해가며 도통 침착하질 못하고 말을 더듬다가 물었다. 둘이 어떤 사이냐고. 흥분해있으면서도 혹시나 오해일까 조심스러움이 담긴 질문이었다.

“어머나, 당연히 볼 꼴 못볼 꼴 다본 사이란다.”

술렁거림이 커졌다. 패치가 아니카의 부적절한 단어선택에 항의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번엔 좀 더 직접적이었다.

'“두 분, 사귀시는 겁니까?!”

“그렇게 됐어요~.”

“아니카!??”

“비밀로 해왔는데, 들켜버렸네?”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니카에게 놀란 얼굴을 돌렸다. 물론 패치도 그 중 하나였다.

“아니카, 대체.”

“있잖아요, 패치. 제가 맘에도 없는 사람 신세한탄을 밤새 들어줄 사람으로 보여요?”

아니카가 속삭였다. 패치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생각보다 차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어제는 문전박대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네.”

“주정뱅이 수발도 다 해주고 말이야.”

“사실, 길바닥에 버려버릴 것 같은 이미지긴 해.”

제 손에 얽혀드는 가는 손가락을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마땅히 그래야하는 일처럼 패치는 손을 맞잡았다.

“잘 아시네. 당신이라도 다음엔 얄짤없어요.”

“애인이라도?”

“애인이라도.”

연애를 하는 것도 좋을 거에요. 분명. 아니카가 웃어 패치도 따라 웃었다. 그 뒤로 속이 빈 봉투가 가볍게 거실바닥을 뒹굴었다.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이 목표를 이루면 결말을 맺어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패치는 이야기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목표를 이루고도 괴로움에 시달려야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옆에 있어주겠다 한 사랑을 찾은 지금에도 그는 이야기 속의 인물은 못되었다. 행복한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는 주인공의 결말과는 달리 곤란에 처했으니.

패치의 사방을 흥미와 호기심을 담은 얼굴이 둘러싸고 있었다.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남들의 관심을 끈다. 

“아니카의 어떤 점에 반한 거에요?”

“고백은 누가했나요?”

“그동안 왜 비밀로 한거에요?”

“첫키스는 언제 했어요?”

온갖 목소리로 비슷한 질문이 겹쳐 패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특히 퍼블리의 반짝반짝 들뜬 목소리는 더 무겁게 패치를 압박했다. 거짓말이 불러오는 결과는 항상 변변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니카의 발언이나 이미 둘이 같은 지붕 아래서 한밤을 지낸 것을 목격한 증인이 있는 탓에 괜히 말을 잘못했다간 인간쓰레기로 취급되어 아니카의 절친에게 뭉개질 것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패치가 아니카를 향해 구조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녀는 어디 잘해보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애초에 아니카는 질문이 터지기 시작하자마자 저는 쑥쓰러워 말 못하겠으니 궁금하면 패치에게 물어보라 그에게 책임을 미룬 터였다. 새벽의 상냥함은 꿈이었나 싶어질 만큼 벌써 남일이라고 즐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패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저질렀다. 패치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창백한 낯으로 소파에 늘어져있었다. 다들 물러가고 이제 다시 패치와 아니카, 둘만 남았다.

“수고했어요.”

다분히 웃음 섞인 목소리다. 패치는 재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여기 있었네.”

“…그만하게.”

끄응, 패치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패치와 그 아니카의 연애소식에 흥분한 모두는 얌전히 물러가줄 생각이 없었다. 알 것 없지 않냐, 남의 연애에 신경 꺼라 하고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단 거다. 그럼에도 이렇게 단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을 만족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뜻인데, 그러니까… 패치가 뛰어난 연기력과 고향에서 쌓은 지식을 총동원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음은 좀 대충 지어낸 거 아니에요? 겨우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보다 좀 더 운명적인 재회가 있잖아요?”

“어쨌든 우리도 재회해서 처음 한 일은 음주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아, 그건 좋던데요. 우리 첫 데이트요. 바다는 꽤 좋아하거든.”

“그건… 참고하겠네.”

아니카가 키득였다.

“맞아. 또.”

‘이제 그만해주면 안되겠나?’

아니카는 가볍게 무시했다.

“당신이 제 그런 점을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네만.”

“그래야지.”

아니카의 미소에 이끌리듯 패치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는 아니카의 시원한 웃음이 좋았다. 가끔씩만 보여주는 따스한 배려도 좋았다. 남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치도, 속을 후벼파는 독설마저도. 어쩌면 처음본 그때에 이미 반해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여간, 패치는 확실하게 아니카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카도 패치를 좋아한다 했다. 그리고 커튼새로 햇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지금은 그런 분위기였다. 입과 입을 맞대는 그런, 연인의 시간. 하지만 아니카는 패치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꾸욱 밀어냈다.

“패치. 아까 한 말에 따르면 우리 첫키스는 달이 높이 뜬 밤에 우산 밑에서 이루어져야하지 않겠어요?”

‘아니카, 제발.’

패치는 제가 사람들 앞에서 늘여놓은 로맨스소설같은 연애담을 떠올리고 쪽팔림에 얼굴을 싸매고 몸을 쭈그렸다. 그러다 퍼뜩 고갤 들었다.

“설마.. 아까 내가 한 이야기에 전부 맞출 생각은 아니겠지?”

“당연히, 당신이 한 말 전부 진짜로 만들어 줄 생각 만만인데요?”

로맨티스트가 될래요, 거짓말쟁이가 될래요? 패치는 어쩔 수 없이 전자를 택했다. 한숨이 새는 것을 이번엔 참지 않았다. 꺄르륵 즐거운 웃음소리는 얄미웠으나,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그걸로 되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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