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힐 권리

마탄의 사수 외전 2기 휘태커 피셔 & 아냐 루킨

“먼저 말하자면, 난 당신과의 ‘억지로 친구 노릇’을 그만둘 수 없어요. 당신의 전임자와 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휘태커는 그 밤의 일을 어제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얼어붙은 몸이 쏟아지는 키스 끝에 녹고 두려움과 후회로 점철되었던 의식의 마지막이 이어붙여지던 감각. 아무도 기억 못할 소원으로만 남을 뻔 했던 용서를 구하는 말이 굳은 혀 끝에서 기어코 소리를 입을 때의 감격.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던 아냐는 사과를 거절하고 화내는 대신에 조용히 울었는데, 그건 부활을 선택지 중 하나로 여기고 저울질하던 내내 이제껏 예상해 본 적 없는 반응이었다. 휘태커가 얄팍한 상상력으로 두려워하던 것은 보통 관계의 단절이었다. 어제까지 알던 사람에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인사도 먹히지 않는 벽에 대고 막막한 사죄를 청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랬을지라도 기꺼이 남은 시간을 투신했겠으나, 그렇다고 흔쾌하게 견딜 자신 같은 게 있었을리 없다. 자꾸 얄팍한 부탁을 주워섬기던 것도 거기서 온 것이다. 다녀오게 되더라도 인사해 달라고, 마지막까지 계속 있어달라고.

그러니 전후사정을 모두 기억하는 바, 누구보다 확언할 수 있다. 그때의 나는 40일 이후는 좆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 당신에게 빚처럼 남은 부탁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에게 지워진 모든 의무는 진작에 소멸했다. 당신이 피로한 나를 재워서 전송해 준 이래로 아냐 루킨, 당신은 쭉 자유였다.

이 모든 말을 입 밖에 내기 전부터 깊은 피로를 느낀다.

당신은 결코 내게 ‘전임자’의 이야기를 종결시킬 권한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 당신은 알고 나를 상처입히는 사람이니까. 피셔와 베네를 구분해 부르고, 내 몸과 영을 분리해 받아들이고, 거절해도 꿋꿋하게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서. 애초에 문제는 당신이 아니다. 전부 이해하면서 상처 받는 나지.

아, 나는 진실로 나의 관이 되고 묘비가 되고 싶었다.

이미 온 삶을 후회 없이 불사르고 내던진 다음에 여분처럼 주어진 시간이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 내내 이룬 것도 남긴 것도 없음을 두려워 했던 나를 기꺼이 달래고 위로하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잊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면, 언제든 떠올릴 수 있는 증거가 되기를 바랐다. 당신들은 내가 어떻게 웃었는지를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내가 계속 웃을 테니까. 사순이 짧고 부족했던 나를 대신해 내가 줄곧 당신들의 눈물을 닦아줄 테니까.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누구에게 지키는 신의인지 알 길도 없을 만큼 엄격한 당신의 추모가 나를 상처 입히는 건지. 어째서 앞으로도 마땅히 당신의 슬픔을 받아 마시라는 요구를 선선하게 승낙할 수 없는지. 대답할 수 없는 모든 질문 앞에서 대신에 휘태커는 명확한 명제 하나를 먼저 긍정하기로 했다.

당신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건 강간이었다. 내가 분명히 보복할 마음으로 휘둘렀기 때문이다.

“뜻대로 해요. 아냐.”

늘 챙겨다니는 휴대용 재떨이를 연다. 깊이 다 타들어간 제 것 먼저. 다음은 불째로 움켜쥔 미련한 손아귀를 당겨 열고 다 바스라진 걸 뺏어왔다. 담뱃불이 핥고 지나간 작고 둥근 흉 위로 고개 숙여서 입 맞추니 다정한 저주도 맹세처럼 들렸다.

“나도 내 뜻대로 당신을 상처 입힐 테니까.”

이 얼마나 공평한지. 마치 살아남기 위해 죽이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거꾸로 죽임 당할 각오가 필요함과 같다. 휘태커는 비로소 성자의 흉내를 관두고 이 순간 인정한다. 당신에게 있는 힘껏 부딪혀 상처 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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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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