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에 관하여

마탄의 사수 외전 2기 휘태커 피셔 & 루카 아데랄도

40일의 단 한 톨도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은 적이 있다. 완전한 상실 한 끝 앞에서 애원해서 받아낸 두 번째 기회가 이보다 애틋할 수 없어서. 하루라도, 한 시간이어도, 5분만이라도. 단 한 마디라도 전할 수 있는 찰나라도 기적처럼 주어지기를 갈망한 끝에 얻은 40일이니, 어떤 후회나 미련도 뒤에 남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위로를 온몸으로 전하는 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도리라고 확신한 적이 있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여생의 절반도 다 지나기 전에 나는 내 결심이 얼마나 알량했는지를 겪어 알고 만다.

알렉스는 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가게를 다시 열 생각이라고 했다. 빠르면 석달, 길면 다섯달이라나. 그때 처음으로 40일이 얼마나 짧은가 생각했던 것 같다. 쟝은 좀 늦어도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샌드위치를 나눠 먹는 것도 결국 다음 사람의 숙제가 됐다. 아냐는 루카가 주문했던 생일선물을 위해 발 치수를 재게 종이 위에 올라보라고 했다. 내 생일은 1월이고 지난지 오래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루카는 고작 며칠의 말미 뒤에 다시 영영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나더러 기뻐하라는 거라면서 화를 냈다. 뒤늦게 그제야, 어쩌면 이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두 번 보내게 만드는 선택이었나 찔리듯 깨닫는다. 어쩌면 내가 요한의 제안을 한 번 거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던 켈리의 말은 이런 의미까지 포함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베론에게 이미 대답한 것과 같이 후회는 할 수 없다. 다시 돌아가도 단번에 모든 걸 잃기보다 구질구질하게 천천히 흩어지기를 고를 자신을 안다. 왜냐하면 로미오에게도 고백한 것처럼 죽음은 원래 무서운 거니까.

그래도 하나는 인정하겠다.

존재가 지워진다는 게 뭔지 난 전혀 몰랐나 봐.

나는 많은 것을 미리 두려워했지만, 어떤 게 정말로 두려운 일인지는 잘 몰랐다. 나는 타라와 젠, 마일즈 부부가 나를 잊어버릴 것은 알았다. 그래서 방도 빼고 사업도 미리 물려준 거 아닌가.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쪽은 나도 그들을 잊게 될 거라는 쪽이었다. 두 번은 우릴 위해 희생할 필요 없다고 전화 너머로 타라가 남겼던 말은 어설프게 기억나는데, 그 첫 번째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내가 어째서 그 말에 울림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게 되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여전히 보스턴에 멀쩡히 살아있는 가족들이 그들이 사랑하던 막내를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은 끔찍하게 고통스럽지만 감수하면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고작 보름 전 제임스와 찾아갔을 때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던 출장 간 첫째 누나의 이름을 영영 떠올리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실수로 단축키를 잘못 눌러 전화를 걸어놓고 어머니하고 불렀다가 나한텐 아들이 없으니 좀 더 나은 핑계를 가져오라는 웃음기 섞인 놀림이 돌아오는 것은 어쩌면 각오한 영역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을 가슴 저릿한 슬픔과 서운함 한 톨 없이 들어넘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눈물이 도무지 나오지 않는 장례식의 불청객이라도 된 것처럼 잘못 걸었다고 담담히 사과하고 끊는 스스로의 모든 동작이 참을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봐, 이것보다는 속상해야 하는 거 아냐?

의심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휘티.”

있잖아요. 루카. 사실 저를 괴롭게 만드는 사람 중엔 당신도 있어요. 잠과 무의식으로 도망치는 걸 허락하지 않고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깨우는 손길 앞에서 그런 말을 겨우 삼킨다. 걱정과 근심만 가득 찬 다감한 녹갈색 두 눈 앞에서 어떻게 털어놓겠나. 당신이 나를 위해 기꺼이 수고를 들여 꾸민 방에 머물면서 당신다운 상냥한 배려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매순간 의심하고 만다고. 제게 퍼부어지는 애정은 틀림 없이 우리 사이에 쌓인 긴 시간이 맺은 열매일 텐데. 정작 뿌리를 잊어버리고 나니 당신에게 마땅한 마음을 돌려주기는 커녕, 받는 것조차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그러니 꺼낼 수 없는 말 대신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만 마른 입술을 축이며 꺼낸다. 두서 없이 느릿느릿, 또 띄엄띄엄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당신은 기꺼이 귀 기울인다. 내가 얼마나 막막할지 안다는 듯이 손을 감싸고 덮는다. 더운 손 밑에서 한참을 생각한다. 아, ‘전에는’ 어땠었지. 이보다 더, 기뻐야 할 것 같은데. 이보다 더, 고마워야 할 것 같은데. 이보다 더,

“그래, 그리고?”

“더 이야기 해주렴.”

안심되어야 할 것 같ㅡ, 아.

쫓는 사람도 없는데 홀로 쫓기는 생각을 문득 자르며 어깨를 안아 당기는 힘에 그대로 이끌린다. 손등을 덥히던 온기가 이제는 온몸을 끌어안고 번졌다. 마치 내가 말한 적도 없는 불안까지 모두 짐작한다는 것처럼. 당신은,

“난 지금 그저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단다.”

오래된 것부터 바스라지기 시작한 기억은 이제 한뼘 남았다지만, 닫힌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 나눴던 시간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빈정거리고 화내고 숨막혀 하다가 원망 끝에 꼭 이렇게 마주 끌어안았던. 근거 삼을 시간은 사라지고 거기에 뿌리 내린 마음도 전같지 못해서, 그때 던졌던 여러 질문들을 지금 당신이 다시 한다면 나는 도무지 같은 대답을 돌려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목소리라면.

“…… 남은 시간이, 이젠 벅차요. 루카.”

그래서 겨우 쥐어짜 속삭인다.

가난한 나에게도 여전히 당신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이런 모습까지 당신에게 새기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좋은 모습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기를, 이제는 무색해진 소원을 까마득하게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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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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