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ㄹㄱㅇ

Estimated Time of Arrival

ㄱㅋ / ㅇㅁㅎ X ㄹㅁㅅ 그리고 약간의 ㄷㅋ / 23월즈 if 주의

Tik Tak Tok by OR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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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민형은 날씨에 걸맞지 않게, 흔히 말하듯 ‘가오 부렸다’ 싶은 착장의 코트와 폴라티…, 세련된 목도리 하며 얼굴에는 안경도 끼지 않은 채 길가에 서 있었다.

‘그래도…, 눈이 오니까 좀 덜 추운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붉어진 손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5시 30분.

약속 시간이 다 됐다. 상대는 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민형과 류민석이 경기장 이외의 곳에서 만나는 건 꽤나 간만이었다. 월즈에서 간발의 차로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JDG에게 골든 로드를 내버렸을 때의 허망함이 그들을 아직 지배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이후 구마유시는 T1에 잔류하였지만, 케리아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KT로 이적하였다.

솔랭이든 뭐든 자주 마주치는 편이기는 했다. 채팅도 심심할 때마다 했다. 그래도 맞은 편 방에서 날카로운 특유의 비명 소리가 날아 오는 일은 더 이상 없었고, 더 이상 함께 ‘생활’ 하는 것은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구마유시는 갑자기, 무언가의 탈력감이 들었다. 그 날 새벽은 유난히 더 잠이 안 왔고, 충동적으로 연락을 했다…. 손이 그냥 움직였다. 새벽 4시 23분. 답이 올 지 안 올지 애매한 시간. 민형은 보내 놓고도 갑자기 긴장하는 몸짓으로 휴대폰을 황급히 끄고는 베개맡에 두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림 소리가 울리자 어쩔 수 없이 폰을 봤지만.

[ㅁㅇ?]

아, 짜증난다….

짜증 날 이유가 없는데. 맨날 이러는 거 아는데. 새벽이라 그런가, 그냥 다 미워보였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민형은 화면을 토독톡 두드렸다. 대충 내일 시간 되냐, 내일이 안되면 모레는 어떠냐. 아니면 다음 주, 그것도 안된다면 그 다음 주….

[더 넘어가면 시즌 중이라]

[나도 ㅁㄹ겠는데]

케리아는 이 바닥에서도 소문난 마당발이었다. 사람 성격이 그리 생겨서인지 사람이 인기가 많은 상인 건지, 한 번 얘기를 나눠봤다던가 합을 한 번이라도 맞춰봤으면 어느샌가 친해져있었다. 그러니까, 류민석과 약속을 잡는다는 일은 거의 팬들이 경기 티켓을 잡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결국 대화는 '나중에 밥이나 한 번 먹자' 하는 극히 진부한 얘기로 끝을 맺었다. 그게 정규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의 일이었으며, 흐지부지 넘어가는 바람에 월즈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약속 하나 잡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고 특별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겨울이 찾아와버렸다. 본가에서 짧지만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던 휴가를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온 날 새벽 민형은 아무 생각 없이 케리아의 방송에 들어갔다. 평소대로의 텐션이었다. 채팅창에는 ‘민석이 피곤한가보네’ 같은 얘기가 올라오곤 했지만….

“저 안 피곤해요. 안 피곤합니다. 왜 다들 그러시는지 모르겠네. 제가 언제까지 얘기해야해요?”

‘그래. 원래 민석이는 이럽니다, 시청자 여러분….’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이민형은 폰을 붙들고 숙소 침대 위에서 계속, 케리아의 방송을 지켜보았다. 거의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맥아리 없이 바라만 보다가, 이따금씩 웃고, 그것만을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방송으로 다른 목소리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게 왠지 누구인지 알 것 같아져서 민형은 허, 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오늘, 오늘 일찍 자야 돼.”

너머로 “왜” 하는 목소리.

“형 송별회 해야죠. 네, 내일 혁규 형 송별회 해요. 어허엉, 안돼애…. 안 가면 안돼요? 네?”

구마유시는 방송을 껐다.

…얕은 잠에서 깬 이민형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3시 31분. 잠든 사이에 케리아는 방송을 종료했다.

‘왜 이렇게 멀지.’

제정신인지 확인도 안 하고 바로 전화기를 집어 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정도의 수신음이 들리다가 뚝 끊기고 여보세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여보세요?”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자세가 뻣뻣하게 굳었다.

“뭐야, 나 잘려고 했는데….”

“민석아. 내일…, 내일이 아니지. 모레 볼 수 있어?”

“아, 왜 하필 이 시기에….”

민형은 그런 영혼 없는 말에 울컥해버렸다. “너 내일 데프트 형이랑 약속 있잖아.”

“그거는~ 팀 약속이지. 그리고, 그거랑 이게 같나?”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밥이나 먹으면 안되냐?”

“아, 뭐 그런 얘기…. 하긴 했었지. 그래, 뭐, 상관 없긴 해. 그 날 프리해서.”

“진짜?” 바보 같을 정도로 솔직한 반응이다. 민석은 시큰둥하게, 빨리 자고 싶다는 듯 단답을 이어나갔다.

그래, 이런 반응…. 민형에게는 익숙했다. 차갑게 식은 말투. 마주치지 않는 눈. 면대면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민형에게는 지금 휴대폰 너머의 민석의 얼굴이 그러졌다. 이 정도로 내가 널 잘 아는데.

“그럼 그런 걸로 안다? 끊어도 되지?”

“민석아.”

“왜애, 또….”

“…다시 티원 올 생각 없어?”

“너는 그 얘기를 지금 해야겠냐?”

“…그냥, 해야할 거 같아서….”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어?”

“그래도 거기 나올 생각 없는 거잖아.”

“모르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왜 희망을 심어주는가?

“됐다….”

“너 자꾸 말 꺼내 놓고 그딴 식으로 굴 거냐 진짜?”

“알겠어. 미안해. 미안하니까…. 내일…, 송별회 잘 하라고. 그 날 보자.”

말은 평온했지만 버튼을 누르는 손은 다급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이민형은 폰을 침대 구석에 처박아두고는 대자로 뻗어서 욕지거리 한마디나 내뱉었다. 새벽이 이래서 위험하다. 그토록 원했던 케리아와의 약속을 잡아낸 건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단추를 어디서부터 잘못 꿴 거지? 이적 얘기를 괜히 꺼냈나? 송별회 얘기는 안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냥 오늘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나? 머릿속이 뒤엉키는 것 같았다.

그 날도 그 다음날도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니까 어쩐지, 이 뒤에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민형은 나서기 전에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는 꽤나 꼴값이라고 생각해버렸다.

“데이트 나가냐?”

아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씁쓸하다. 데이트라고 해도 되지 않나?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마지막으로 들은 민석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가웠어서, 기대를 하면 안되는데도, 민형은 숙소를 나서면서 입가의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어떤 방향으로든 잘 흘러가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민형은 류민석에 대한 건 무엇 하나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류민석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예측이 되어버린다. 그래, 그러한 면에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지….

6시가 되었다.

손가락 끝이 붉어졌다. 입김이 하얗게 일어 허공에 흩어지는 것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미독 상태로 남아있는 메세지, 몇 통의 부재중 전화. 모든 게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도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어느새 쓴 웃음을 짓고 있게만 되었다.

눈이 쌓이고 있을 때, 발자국은 한 사람 몫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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