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진짜 이름을 그대는 모르시는 것 같기에.-上-
정수는 아침상 물리기가 무섭게 저를 찾는 주인마님 부름에 도련님이 먹다 남긴 나물 반찬을 집어먹다 말곤 헐레벌떡 안채로 들었다. 장지문 앞 마루에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 부르셨습니까, 하고 작게 읊조리니. 마님께선 저가 정수를 불렀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자수 삼매경이시다 문득 참. 하고 말문을 띄우셨다.
“그래. 정우 네가 올해 몇 살이었지?”
“예? 소인 올해 스물 둘이옵니다.”
마님께선 꼬박꼬박 정수를 정우라고 부르셨다. 매번 헷갈리시는 것인지 부러 그러시는 것인지는 알 길 없었으나, 정수는 차마 그것을 고쳐줄 주제가 되질 못했으므로 늘 고개를 조아리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양반이라면 이미 서당 갈 자식이 있을 나이구나.”
“... 소인, 호, 혼처를 제 때 찾지 못하여....”
“말은 바로 해야지. 내 제때 네 혼처를 알아봐 준 것 같다만. 가기 싫다 고집 부린 것은 정우 네가 아니더냐?”
“아, 마님 말씀이 맞지요.”
반은 맞았고, 반은 거짓이다. 마님께서 정수 나이 열여섯이 되던 해 혼처를 찾아주신 것을 맞았지만, 상대는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알 수 없는 자객 집안에 양인(=알파)이었다. 아무리 아랫것이라지만 그 누가 종놈 혼처를 자객 집안에 알아봐준단 말인가. 정수를 친아들처럼 키운 용주가 뜯어 말리지 않았다면, 그 해 정수는 정말 이름도 모르는 살수에게 팔려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우 네게는 참으로 고마운 것이 많아. 윤이 서당 갈 적마다 따르는 것도 그러하고. 작년 태풍 왔을 적 떨어진 기와도 정우 네가 고쳤었지? 우물까지 들어가 내 비녀를 찾은 것도 정우 너였던 것 같은데... 또 뒤뜰 꽃밭이 매해 그리 풍성한 것도 네 덕이 커. 아암, 그렇고말고.”
어째 나열되는 것들이 정수에겐 죄다 끔직한 기억들뿐이었다. 마지막 꽃밭 이야기 빼고 말이다. 따라간 서당에선 끝날 때까지 도련님 뒤에 바짝 엎드려 등받이 역할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소피가 마려워 발가락 끝이 다 절단 날 것 같아도 말이다. 실제로 어떤 날은 조금 지렸던 적도 있다. (집에 돌아와 한참 울었다.) 기와를 고칠 땐 또 어떠했는가. 목수를 불러 해야 한다는 것을 부득불 정수를 시켜 올라가게 해놓곤 발을 헛디뎌 떨어진 정수를 혼내기만 했다. 그러나 최악 중에 최악은 옥비녀 하나 찾자고 우물 들어갔을 적이리라.
“그 때 너 정말 죽을 뻔 했는데.”
“용주 아재 말론 잠깐 한 번 죽었었답니다...”
“지금은 이리 살아있으니 된 거 아니니?”
실제로 정수는 그 날 숨이 멎었었다. 찰나였다지만 확실하게 죽은 사람이었다 이 말이다.
깊어봤자 무릎쯤에나 올 줄 알았던 우물은 정수의 코 위를 가벼이 넘실거리는 높이였다. 놀란 마음과 더불어 발까지 허둥대니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군가 그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정말 우물 안에서 죽었을 팔자였을지도 모른다. 그 때 놀러온 영의정댁 막내아들께서 뛰어들어 친히 구하셨다. 정수는 몰랐겠지만 숨을 쉬지 않는 정수의 입안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신 것 또한 그 분이렸다. 마님께선 사색이 되어 어찌 노비놈 얼굴에 입술을 가져가시느냐 소리 쳤을 적에도 정수는 몰랐다. 그저 용주가 제 몸을 하도 흔들어 깨어난 줄이나 알았지.
“큼, 내 정우 네게 시킬 것이 하나 더 생겼는데 말이다.”
“예에.”
“혼인을 좀 해야겠다.”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정우 너지.”
“세상천지 스물둘 먹은 몸종을 데려간다는 댁이 있습니까?”
“없지. 말도 못 꺼내지.”
“허면요?”
“다음 달 치룰 윤이 혼인을 네가 한다는 것이다.”
정수는 하마터면 발딱 일어나 안채 문을 열어 재낄 뻔 했다. 올해 열여섯인 윤이 도련님의 혼인을 나더러 대신 하라고? 애꿎은 마룻바닥이나 박박 긁던 정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은 뭐 하시구...
“그 놈의 새끼 지금은 생각도 하기 싫다.”
“예?”
아무렇게나 뭉쳐진 종이 한 장이 정수 앞으로 날아왔다. 펼쳐 봐도 글자를 모르니 눈만 꿈벅대는 정수를 흘기던 마님께서 그러셨다.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야반도주를 한게야.
“이따위 서신 한 장 남기고 소열이까지 데리고 나갔다. 아니 요즘 같이 노비 생산도 어려운 세상에 하필이면 음인 노비한테 빠진단 말야!”
“야반도주.....”
“왜. 너두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니, 아닙. 아닙니다. 소인 당치도 않습니다.”
양반과 몸종의 야반도주가 그리 귀한 일은 아니었다. 마을에서도 해마다 두어번은 일어났으니. 하지만 정수는 제 주제를 알았다. 두 사람은 금방 잡혀 돌아올 테다. 비록 소열은 주인인 윤과 도망친 것이기에 얻어맞는 것으로 끝이 나겠지만. 저는 잡히자마자 죽을 것이 뻔했다. 다시금 충성을 보여주듯 바짝 엎드려 바닥 위로 이마를 박았다. 긁어대던 마루 위로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손톱 밑이 찢어져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긁어댔구나, 나...
“도, 도련님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시키시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 아마 일 년이면 될 거다.”
“일 년요?”
“그 뒤론 후사 얘길 꺼낼 것이 뻔하니, 그 전에 우리 먼저 발 빼야지. 죽은 척 할 것이야. 일 년 뒤 윤이 탄신일에 윤이는 사고로 죽는 것이다.”
“하고 나면.. 소인은 어찌 됩니까?”
“글쎄. 정수 너 하는 거 봐서. 그 때 가서 결정 하마. 죽일 지 어쩔 지.”
일 년 야무지게 뽑아먹고 죽이겠단 소리를 참으로 태평하게 하시네. 정수는 죽일 지, 어쩔 지. 라는 마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드디어 마님 입에서 정수라는 멀쩡한 부름이 나온 줄도 몰랐다. 하지만 대대로 이 집안 노비문서에 갇혀 살은 몸. 할 수 있는 거라곤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마당으로 나오는 수밖에.
“마님께서 뭐라시냐?”
“죽이신답니다.”
“뭐어?”
“저... 저, 일 년 뒤에 죽는대요. 아저씨.”
정수가 듣기엔 충분히 그럴 만도 했지. 마당 바닥에 철푸덕 앉아 엉엉 울었다. 지나가던 노비들이 그러다 대감마님 보기라고 하시면 경을 치실 거라며 혼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그 때 이름 모를 살수와 혼인 할걸 그랬어. 그 때 죽나 나중에 죽나 매한가지인 것을.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것을. 당장 다음날부터 윤의 도포를 입고 상견례를 나가야 하는 정수였다.
“정우야.”
“예. 마님.”
“잘하면 이 혼인 파투 날 지도 모르겠다.”
“예에?”
“저 댁 아들이 혼인에 영 관심이 없다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정수는 소매 아래 숨긴 두 손을 조물딱 대며 아무도 몰래 기도 했다. 신랑이 싫어서 깨는 혼인에 정수의 잘못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정수는 다시 착하지만 구박 받는 몸종 자리로 돌아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게 될 것이었다. 이리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도 자꾸만 죽상이 됐다. 제발 싫다고 해주십시오, 도련님...!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이 혼인을...”
옳다구나! 마님 말씀이 맞구나. 어쩌면 정수보다도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영혼 빠진 놈처럼 허공에 대고 웅얼대던 도련님과 무심코 눈이 맞는 순간이었다.
“... 이, 혼인을..”
“왜 말을 하다 말아? 이도령. 괜찮으니 어서 말씀 하시게.”
“이 혼인을, 좀 더 성대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지 여쭙기 위하여...”
“뭐?”
“도, 도령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예....?”
내내 똥 씹은 표정이던 이도령 눈으로 순식간에 이채가 돋아났다. 그리곤 별안간 화동을 구해보는 것은 어떨 것 같으냐, 굳이 혼례복을 입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또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초대하는 것은 어떠냐며 두서없는 말솜씨를 뽐내는 것이었다. 어릴 적 외갓집인 수성현에 사셨다더니. 말꼬리가 길어지니 사투리가 군데군데 베인 것이 바로 느껴졌다.
“상견례 내내 저만 말하고 있지 않아요... 허나 혼례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령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새, 생각이라면 어떤..”
“이 아이 의견이라면 걱정 말어. 우린 괜찮으니 이도령 원하는 데로 진행 할,”
“전 도령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단칼에 잘라내는 답변에 마님께서 잠시 어안이 벙벙해선 이도령을 바라봤다. 어찌나 쌀쌀맞은 말투였는지 그의 어머니께서도 얘가 지금 버릇없게..! 놀란 얼굴을 하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장모니임- 하며 애살맞게 구는 이도령의 처사에 마님의 입꼬리가 금세 천장을 향해 실룩대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한 사자대면에서 웃지 못하는 건 오직 정수뿐인 듯 했다.
“알려 주시지요.”
“대체 무얼 아뢰야 할 지...”
“원하시는 것이요. 그것이 무엇이든.”
“어.....”
순간 반짝이는 눈이 관통할 듯 마주했다. 정수는 행여나, 만에 하나, 이도령이 알던 것과 다른 이목구비를 들킬까 싶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머리통을 떨구던 말던 이도령은 입이 찢어져라 웃느라 바빠 보였지만.
“.. 주십시오.”
“너무 작아 못 들었습니다. 한 번만 더,”
“그리..! 빤히 보지 말아주십시오.”
정수는 하마터면 제 출신답게 머리를 조아릴 뻔 했다. 이것도 부탁이랍시고... 뭐든 들어줄 것만 같았던 이도령의 반응이 기묘했다. 순하게 웃던 것을 멈추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한 표정을 했다. 그리곤 답을 고르듯 신중하게 눈동자만 굴리는 것이렸다. 호기심에 못 이긴 정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을 때, 마주 앉아 있던 이도령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 정수의 앞에 다다랐다.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거리는 도포 자락 소리... 이윽고 두개의 갓양태가 부딪힐 만큼 가까이 붙어 앉은 이도령이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어쩌지요. 내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
“도, 도련님.”
“이주연이라 합니다. 앞으론 이름을 불러주시면 참으로 좋을 듯합니다.”
“아이고- 이도령. 내 아들 이래 보여도 올해 겨우 과년(瓜年)이네. 자네와 꼬박 네 살 차이인데 어찌 이름을 불러.”
“아이, 장모님. 그래도 명색이 부부인데. 이름 하나 다정스리 못 부르겠습니까?”
아주 맹랑하게 그렇지요? 하면서도 고개를 비틀어 정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꼭 마당에 뛰어 노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정수 것과 뒤섞인 도포자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정수는 어째선지 제 것 하나 없는 그 비단 조각들을 한참 내려다 봤다.
“불러 주시는 거지요?”
“예에. 도련님.”
“아이, 참.”
“주, 주연.”
주연은 세상 나기도 전에 지어져 수도 없이 불렸을 그 이름을 듣자마자,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었다. 마치, 그러니까 마치.
“참으로 듣기 좋네요.”
기다렸던 정혼자를 바라보는 눈빛으로다 그랬다.
- 조선시대에선 대구를 현으로 나눠서 불렀다고 뭐 그랬다는 서치결과가 있사옵니더..
- 갓양태는 갓 테두리 부분..! 요즘 말로 하면 챙 이라고 해야겠쥬? 그 부분이옵고..
- 원래 과년은 혼기가 찬 여자에게 붙이는 말이었다는데,, 모르셔두 되지만 여기는 알오물 세계관이기에 음인(=오메가)에게도 붙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여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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