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행복은 잃어버린 꿈속의 케이크로부터
꿈에서, 눈앞의 커다란 케이크에 포크를 꽂아 한가득 떠서 입안에 넣고 그 달콤함을 맛보기 직전이었는데.
조각이 아니라 온전한 홀 케이크였다.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답고 먹음직스럽고 폭신폭신해 보이는 케이크.
그런 케이크가 통째로 눈앞에 놓이는 광경은 드물다. 카베로서는 그것을 산 기억이 없었지만─애초에 홀 케이크를 살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다─웬일인가 싶어, 마치 써달라는 양 케이크 옆에 가지런히 놓인 포크를 들고서 냅다 케이크의 하얀 생크림 속에 묻었던 것이다.
구름 같은 감촉이었다. 밀도 있는 크림이 갈라지면서 물속의 기포가 연이어 터지는 듯 묵직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금속 포크의 표면에 가득 남았을 크림의 흔적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갔다. 그렇게 크림을 가르고 아래의 시트를 조심스레 헤집어 포크 위에 아슬아슬하게 담긴 달콤한 덩어리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때, 코끝에 닿는 싱싱하고 그윽한 크림의 향기가 케이크를 맛보면 틀림없이 황홀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느껴지던 그때.
번쩍 눈이 떠졌다.
너는 이 케이크를 맛보아서는 안 된다고 거절하는 것처럼.
틀림없이 카베의 손안에 있던 작은 사치는, 그야말로 짧은 순간의 꿈조차 되지 못하고서 덧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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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이렇게 개운할 리가 없다는 위화감이야말로 단번에 잠을 쫓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특효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법 휴식을 잘 취한 듯 가뿐한 몸 상태에 의문을 느끼며 일어나, 시트를 더듬어가며 손에 쥔 휴대전화 화면에 찍힌 시간을 목격한 카베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전 10시를 넘겨버린 화면 속의 시계를 들여다본 예상외의 상황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버린 것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한 손에 든 휴대전화를 옆으로 누워 들여다보는, 단순히 풍경만 따지자면 여유로워 보이는 그림이다. 이럴 때는 보통 ‘알람이 안 울렸나?’ 하고 얼토당토않은 착각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며 카베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알람을 못 들었다’가 아니라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라는 카베의 의심은 타당했다. 카베가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깨는 일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알람을 설정해두긴 했지만, 오랜 습관으로 소리가 울리기 전에 보통은 저절로 눈이 떠진다. 그 알람도 한 침대를 쓰는 동거인이 일어나야 할 시간보다 살짝 이후로 맞추었는데, 괜히 카베가 일어나는 이른 시간에 맞추었다가 알하이탐까지 깨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일찍 맞춰진 알람에 깬 그가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카베가 아침을 준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시간으로 설정했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뜨거나, 아니면 뒤늦게 울리는 소리라도 듣고 아침에 깼어야 했는데. 그 소리조차 못 듣고 잤다는 건, 정말로 알람이 울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혹시나 하며 앱을 켜 보니 알람 설정이 해제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소리가 나기 전에 알하이탐이 카베의 휴대전화를 조작하여 끈 것 같았다.
평소 이 동거인보다 살짝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카베가 제때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확하게 눈을 뜨는 알하이탐의 기척을 느끼게 되므로 카베가 늦잠을 자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매일 그가 아직 잠들어 있을 때 깨어나, 바로 옆에서 잠든 얼굴을 한 번 보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팔을 위로 쭉 뻗었다가 내릴 때, 잠든 몸 위에 살포시 손을 대고서 호흡과 함께 오르내리는 가슴이나 어깨의 느릿한 움직임과 체온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카베 나름대로의 ‘로맨틱한 아침’인 셈인데, 오늘은 이 비밀스러운 낭만을 즐길 틈조차 없었다. 고요하고 낭만적이었어야 할 아침은 정신없이 자는 사이에 전부 흘러가버렸다. 옆자리는 비어 있고 시트에 남은 체온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자신의 체온만이 남은 시트의, 여느 때보다 낮은 온도를 느끼고 나서야 카베는 겨우 현실을 받아들이듯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할 일은 할 생각이었다. 집안일을 맡기로 한 이상, 일이 바빠서 안 된다느니 어젯밤 늦게까지 도면 수정을 했다느니 그래서 피곤하다느니 하는 핑계는 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일상을 공유하는 알하이탐으로서는 카베의 사정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니 별말 하지 않을 테지만, 카베로서 이것은 책임감과 배려의 문제였다. 아침 식사를 못 챙겨주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카베가 챙기지 않아도 그는 혼자 알아서 잘 먹겠지만──그렇다, 이 부분이 진짜 문제다.
사실은,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었다.
한집에서 지내는 사이 두 사람 몫을 요리하는 것이 습관처럼 익숙해지고, 자연스레 커피도 항상 두 잔씩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 먹고 마실 식사와 커피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더 누워 있을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후까지 자버릴까 했으나 시계를 보고 이미 한 번 놀란 탓에 완전히 잠이 깨버렸다. 하릴없이 옆으로 누운 채 휴대전화 시계의 숫자만을 들여다보고 있다. 끝자리가 언제 바뀔까, 60초가 이렇게 길었던가.
새 메시지 수신 창이 화면에 올라온 것은, 속으로 숫자를 하나둘 세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그때였다.
「일어났어?」
“어…….”
짧은 메시지 한 줄인데도, 혼자라는 사실에 사로잡혀 가라앉기 시작한 몸을 다시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옆으로 누워 있던 카베는 튀어 오르듯 몸을 돌려 엎드린 자세로 바꾸었고,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양손으로 쥐고서 메시지 앱을 열어 답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일단 처량하게 줄줄 울고 있는 동물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낸 다음에.
「아침 어떻게 했어?」
「제대로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
「좀 깨우지……. 너 나가는 거 몰랐잖아.」
‘미안’이라고 썼다가 지웠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항상 카베가 해오던 일을 오늘은 자느라 하지 못했으니 습관적으로 사과하려다가도, 어차피 ‘이 녀석도 편할 대로 날 부려먹고 있는데 굳이 사과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울컥했기 때문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전부 이 동거인 때문이다. 차라리 밥하라고 두들겨 깨웠으면 ‘이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느니 ‘피곤해 죽겠는데 네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성격’이라느니 비난하며, 결국은 일어나 평소처럼 둘이서 아침 식사를 하고 배웅까지 해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미안’이라는 말을 보낼지 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식탁 봐봐. 난 다시 일할 거니까.」
카베의 푸념인지 질문인지 모를 메시지에는 답하지 않고, 알하이탐은 이렇게 한 줄을 남기고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것 같았다.
“식탁…….”
카베는 멍하니 중얼거리고서 느릿느릿 일어나보기로 했다. 알하이탐의 메시지로 대화를 끝내기는 왠지 내키지 않아서,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동물 이모티콘을 다시 보내놓고 화면을 끈다. 알하이탐은 ‘다시 일한다’라고 했으니, 어차피 카베의 이 메시지를 보려면 점심시간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알하이탐의 말대로 식탁 위를 확인하러 간 카베는, 그 현장을 남기기 위해 휴대전화의 화면을 켜지 않을 수 없었다.
식탁에 있는 것은 덮개를 씌운 접시 위의 샌드위치와 커피 그라인더, 그리고 커피를 내릴 때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채소를 두껍게 넣어 만든 샌드위치를 들여다보니 제대로 햄과 치즈가 들었고, 그라인더 안에는 한 사람이 내려 마실 만한 양으로 분쇄된 원두가 있었다. 두 잔의 커피를 한 번에 내려서 같이 마실 때 어느 정도로 원두를 가는 게 좋은지, 둘이서 많은 의견을 나눈 끝에 타협했던 그대로였다. 평소에는 카베가 갈고 있으니 알하이탐은 받아 마시기만 한 지 오래되었는데, 어느 정도로 분쇄하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두 약간을 손으로 집어 사르르 떨어뜨리자 벌써 좋은 향기가 났다. 그가 일어날 때 시트 위에서 거두어간 온기가 여기에 남은 것 같았다. 물을 끓여서 천천히 커피를 내리면, 원두 사이사이에 섞여 들어간 따뜻한 조각들이 물에 녹아 향으로 피어오를 것이었다.
커피를 내리기 전에 카베는 알하이탐이 준비하고 간 식탁을 한 장 찍어 그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카메라의 시점을 바꾸고 한쪽 팔을 쭉 뻗었다. 식탁을 배경으로 자신의 얼굴을 찍기 위해서다. 셔터를 누르기 전 잠시 고민하다가, 남은 왼손의 검지와 엄지를 작게 교차해서 작게 하트 모양으로 만들고 들어 올렸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니,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 덕에 제법 잘 찍혔다. 사진을 찍는 일 자체는 기록 외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기 위한 사진은 아무래도 의식하게 된다. 자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얼굴이지만, 어차피 같이 살며 한 침대를 쓰는 사이이므로 자는 얼굴이라면 서로 볼 만큼 봤다. 카베는 다시 메신저 앱을 실행한 뒤, 귀엽게 눈물을 찔끔 흘리는 동물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 「고마워」라는 짧은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리고 방금 찍은 사진을 보냈다. 이런 말을 덧붙여서.
「이것도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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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혼자이기는 했어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느꼈던 상실감을 지워주기에 충분한 아침 식사였다. 주방을 정리하고 나와 집 안을 대강 청소한 뒤, 카베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서재로 들어갔다. 한 건의 일을 마무리지었다 하더라도, 프리랜서로서는 일이 완벽하게 끝나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언제 수정을 요청할지 모르고, 추가 사항에도 응해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의뢰도 진행해야 한다.
간밤에 늦게까지 일했는데도 피로가 무겁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첫째는 케이크를 입에 넣기 직전에 깼거나 어쨌거나 비교적 푹 자고 일어났다는 것, 둘째는 알하이탐이 남기고 간 식탁이고, 셋째로는──그의 점심 식사 이후에 도착할 메시지의 답이다.
순순히 보내줄까. 알하이탐은 스스로 사진 찍는 걸 아주 귀찮아하는 데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서 처음에는 비협조적이었는데, 카베의 끈덕진 설득으로 최근에는 부탁할 때마다 한 장씩 찍어 보내게 되었다. 그 성격에,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 연인에게 보낼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더군다나 출근해서, 점심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업무용 책상에 앉은 그가 휴대전화를 든 한쪽 팔을 쭉 뻗는 모습을 상상하니 더욱 유쾌했다.
──안 되지,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 또다시 풀어지려는 입가를 의식하고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 도착할 얼마 후를 기대하며 일에 열중하다 보면, 반가운 메시지의 알림이 울릴 테니까.
그리고 그로부터 약 두 시간이 지난 후에 보낸 사진 속 알하이탐은, 카베가 시킨 대로 착실히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서 작게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식사 후 이제 막 업무를 다시 시작하려는 참인지 애용하는 서명용 펜의 캡을 아직 빼지 않은 상태다.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 옆에는 방금 사 들고 온 것으로 보이는 커피가 놓여 있다. 메시지 한 줄도 없이 달랑 사진만 보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옆에 있었다면, 찍기 전에 손가락 하트가 나오도록 카메라의 각도를 조절해가며 기다랗게 내쉬는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을 텐데.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괜히 번거로운 일을 시킨다고 불평 한마디쯤은 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진은 옆에서 불평을 들어줄 카베가 없으니 속으로 삼켰겠지만.
사진을 찍을 때, 카베는 알하이탐에게 굳이 웃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게 그답기 때문이다. 일부러 웃는 얼굴을 만들지 않아도, 어울리지 않는 일을 매번 해줄 때의 이 표정이 조금은 귀엽다고 카베는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슬슬 입가가 풀어져 “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였다가, 앞으로 숙이는 김에 책상에 이마를 가만히 대고 있다가 등이 아직도 작게 들썩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웃고 있어서다. 대충 찍은 사진 한 장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을 테니 ‘대충 찍었다’라는 말을 본인 앞에서 하면 미간에 주름을 잡겠지만.
카베는 스윽 고개를 들어서, 손에 쥐고 있는 휴대전화의 카메라 앱을 실행했다. 시점을 바꾸어 자신이 비치도록 설정하고 팔을 앞으로 쭉 뻗는다.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것을 전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분명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 카베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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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양파, 선명한 색의 파프리카, 향을 입히기 위한 갖가지 향신료와 허브. 올리브유와 버터도 빼놓을 수 없다. 고기는 굽기 전에 소금과 후추, 올리브유, 허브로 간과 향을 입혀둔다. 안쪽까지 잘 배어들도록 정성을 들여서. 고기가 특히 중요한데, 알하이탐이 육식을 즐기는 탓에 거의 항상 냉장고에 양질의 고기를 준비해두고 있으므로 이 부분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드레싱조차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전에는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는데, 매번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한 요리에서 다채로운 맛을 즐기기보다는, 잘 손질해서 요리된 재료 본연의 맛과 풍미를 깊게 맛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드레싱은 따로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채소를 굽고, 사이드로 카베가 좋아하는 과일과 치즈를 듬뿍 넣은 샐러드를 준비한다.
술은 항상 마시던 것들 중에서 적당히 고르면 된다. 이건 식사 전에 알하이탐과 상의하자. ‘상의’라고는 해도 술은 거의 카베가 고르는 편이다. ‘오늘은 이거 어때?’라고 물으며 병을 꺼내어 보여주면 알하이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다.
밀려드는 일에 치이던 카베를, 그는 아침부터 배려해 주었으니까.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올 후배를 위해, 저녁 식사는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해주고 싶었다.
이제 알하이탐이 돌아오면 그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고기를 구우면 된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라고 생각하던 그때, 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산 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시간 함께 지냈으니 문소리를 듣고 바쁘게 달려 나갈 정도로 얼굴이 그리운 사이는 아니다. 알아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알하이탐이 주방을 지나치면서 ‘다녀왔어’라거나 ‘나 왔어’라고 한마디씩 던질 때 뒤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느릿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넓은 보폭으로 천천히 걷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소리다. 카베가 움직일 때 식기가 부딪치거나 옷깃이 스치거나 주방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때 나는 소리의 빈틈 사이사이를 채우듯 끼어들다가, 가까이에 다가온 그의 기척이 완벽하게 카베의 소리를 덮을 때쯤 돌아보고 수고했다느니 옷 갈아입고 오라느니 하는 인사를 짧게 건네면 된다. 그러면 시선으로만 카베에게 대답하고 알하이탐은 방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일상의 패턴이다.
그런데 오늘 알하이탐은 곧장 방으로 향하지 않고 발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와 카베의 앞에 서 있다. 카베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려 했지만, 조리대에 막혀 그럴 수 없었다. 평소에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면서 오늘은 무슨 변덕일까.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알하이탐의 얼굴을 보며 이유를 이것저것 떠올려보아도 딱히 짚이는 것이 없다.
“웬일이야? 새삼 더 반갑게 맞아달라고? 안됐지만, 보다시피 지금 너 먹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라서. 오늘 하루 고생했다는 뜻의 키스는 이따가 해줄게. 이제부터 고기 구울 거니까 넌 샤워하고 나와.”
모처럼 귀여운 짓을 하네, 라는 말을 덧붙이는 카베의 바로 앞에서 알하이탐은 짧은 한숨에 목소리를 섞어 흘려내고서 입을 열었다.
“키스해달라는 의미는 아니야.”
“……그럼?”
“하지만 네가 굳이 해주고 싶다는데 사양할 수는 없지. 나는 아침도 내가 알아서 챙겨 먹고 출근한 데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온 상태라 얼른 샤워한 다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거든. 일하는 와중에 틈을 내서 네가 원하는 대로 사진까지 찍어 보냈고 말이야.”
그러더니 살짝 자세를 낮추어 코앞에서 카베를 내려다보았다. 카베는 “그건 점심시간이었……” 하고 작게 항의하다가, 지그시 내려다보는 알하이탐의 진지한 시선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받고 싶으면 받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그래?”
“이보다 더 솔직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다. 평소보다 길게 늘어놓은 말 속에 언뜻 비치던 야유는 사실 가벼운 투정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느라 아침에는 말 한 번 섞지 못했으니, 그에게 미리 작은 상을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카베는 양팔을 뻗어 알하이탐의 얼굴을 감싸려다가 멈칫했다.
“……네가 더 숙여줘. 난 요리하던 중이라 손에 뭐가 묻어서.”
“응.”
얼굴을 감싸려다 갈 곳을 잃은 손을 어중간하게 허공에 멈춘 채 고개를 쭉 올리자, 알하이탐은 그에 맞추어 등을 굽히는 것으로 자세를 더 낮추어주었다. 아주 살짝 입술에 포개었다가 곧바로 떨어지려던 카베는 아쉬움에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힘을 주어 눌렀다. 부드러운 압박감이 재미있었는지 혹은 간지러웠는지 웃는 기척이 전해졌다.
장난치듯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면서 입술을 떼어낸 뒤에도 카베는 여전히 지척에서 내려다보는 알하이탐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무언가 할 말이 더 남았거나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알하이탐은 당장 해야 할 일을 미루면서까지 스킨십을 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아니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왜, 또.”
“케이크.”
“응?”
“자면서 무슨 그렇게 케이크를 찾아?”
“내가 그랬어?”
“응.”
대답하면서 알하이탐은 딱 붙어 있던 카베와의 거리를 조금 벌렸다. 몸에 닿아 있던 체온이 떨어져서인지, 작은 틈으로 스며드는 실내의 공기가 제법 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베는 알하이탐이 눈앞에 들어 올린 커다란 사각형의 무언가를 보고 흠칫 어깨를 들썩여야 했다. 자세히 보니 쇼핑백에 인쇄된 것은 카베가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의 이름이었다.
“이……, 이게 뭐야?”
대답 없이, 받아 들라는 듯 한 번 작게 흔들어 보이는 알하이탐을 응시하던 카베는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 위에 제법 묵직하게 걸리는 무게가 그 안에 든 것의 달콤함을 기대하게 했다. 사각형이고, 꽤 무겁고, 그리고 달콤한 것.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카베가 쇼핑백 안을 살짝 들여다보려 하던 그때였다.
“어른의 사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알하이탐을 응시하는 카베를 보고 다시 한 번 웃더니, 알하이탐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매일처럼 듣는 넓은 보폭의 느릿한 발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유독 크게 울린다.
어른의 사치라.
밀려드는 일에 치이고 클라이언트의 억지는 끝이 없고, 힘들게 의뢰를 완료하고 나서 입금된 잔금도 빚 때문에 스치듯 통장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고된 업무가 이어지는 팍팍한 하루하루를 견디고 그나마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 건, 일상을 함께하는 알하이탐 덕분이었다.
돈이 들어오는 날은 단것을 잔뜩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도, 다달이 빚을 갚고 난 뒤 찍히게 될 통장의 잔액을 생각하면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아쉬울 때, 이따금 카베는 알하이탐과 한잔씩 술을 걸치는 저녁 식탁에서 말하고는 했다.
「홀 케이크를 사서 통째로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야말로 꿈같은 ‘어른의 사치’일 텐데」.
작은 사치마저 누릴 수 없는 형편을 토로하던 카베를 볼 때마다 알하이탐은 별말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다.
케이크는 아직 상자 속에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오늘 아침 카베가 꿈속에서 잃어버린 케이크는 이 상자 속 케이크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폭신한 시트 사이사이 깔린 구름 같은 크림 속에 잔뜩 파묻힌 과일과 케이크 위를 장식하는 초콜릿, 그 새콤하고도 다디단 맛의 황홀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케이크를 독차지할지 알하이탐에게도 한 입 정도는 양보할지 고민하면서, 카베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의식했다.
한 입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 듯한 이 케이크가 얼마나 달콤한지, 그 황홀함을 그에게도 맛보여줘야 하니까.
잃어버렸던 꿈속의 케이크를 손에 들고, 카베는 알하이탐이 들어간 방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최고로 따뜻한, 평소와 똑같은 저녁 식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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