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잤어요? 당신이 잠든 사이 간밤에 꽃이 피었어요. 먼 훗날 이 꽃이 질 때 당신과 함께해도 될까요?

보관 창고에 새 인형이 입고되었다는 업무용 단말기의 알림 소리가 흐릿해져 가던 의식을 둔탁하게 두드렸다.

‘새’ 인형이라고 했지만, 새로 제작된 인형이 아니다. 누군가가 소유 중이던, 혹은 소유했던 기계 인형을 말한다. 이곳은 국가가 운영하는 기계 인형 공방이고, 카베는 이틀간의 밤샘 작업을 견디고 나서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보관 창고에 들어오는 기계 인형이라고 하면, 결함이 발견된 상태에서 장기간에 걸쳐 부품을 기다리거나 소유주가 기계 인형을 데리고 지낼 상황이 안 된다거나 하는, 생활에서 비롯된 소소한 사정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급되었다고는 하나 기계 인형은 고가이기에 보관 창고에다 장기간 놔두고 방치하는 일이 적어서, 보통은 일정 기간 보관한 후 곧바로 재출고된다.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함께하던 가족을 잃었을 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몸을 한 번, 두 번 뒤척인다. 점점 깊어지려는 사고로부터 의식을 돌려 조금이라도 쉬려는 의도였으나, 움직일 때마다 끼익 하고 울리는 마찰음이 머릿속에 파고들어 신경을 더 날카롭게 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양팔로 방어하듯 몸을 끌어안은 카베의 굳게 감은 눈이 점차 찌푸려졌다. 극도로 피로할 때는 항상 이렇다. 몸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고 충혈된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도 힘들어서 이 자리에 쓰러져 단 30분만이라도 자고 싶은데, 무시하면 대기에 흩어져 사라질 작은 소리마저 움켜잡은 신경이 그것을 바늘로 만들어 머릿속을 콕콕 찔러 댄다. 보관 창고의 리스트 갱신 같은 건 나중에 확인해도 되는데. 단말기를 무음으로 해둘 걸 그랬다.

짧은 휴식을 방해받은 데 대한 아쉬움이 깊은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오늘은 왜 이렇게, 알림 소리가 유난히 거슬리는 걸까. 보관 창고에 새로 입고된 기계 인형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잡무에 지나지 않는다. 카베는 기계 인형 본체를 제작하는 인형사였으므로 따져 보면 굳이 이런 잡무를 맡을 이유가 없었으나 지금은 견습이니 어쩔 수 없다. 기계 인형은 극도로 섬세한 기술의 집약체라, 관련 지식 외에도 미적인 감각 및 손재주가 필요하여 전공자가 몇 없는 탓에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카베가 보관 창고 관리 같은 잡무를 떠맡은 것이다.

사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리스트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창고로 가서 본체와 서류를 대조하다 보면, 이따금 재미있는 모델을 볼 때도 있었다. 고가인 기계 인형을 창고에 보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일이 적기도 했고, 기계 인형의 이력을 보며 이 인형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하고 상상하는 일이 싫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인형의 인생이라.

아주 모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양산형이라 해도 기억장치에 쌓이고 쌓인 추억은 곧 그 인형의 인생이 된다. 공방에서 개발한 인격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어도 기계 인형을 곁에 두는 사람의 환경과 취향에 맞게 어느 정도는 커스텀되고, 그에 따라 달라진 연산 결과가 개체마다 다른 인격과 행동 패턴을 만들어낸다.

인형일까, 사람일까. 기계 인형 자체만을 따진다면 당연히,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무기체에 불과하다. 복잡한 부품을 수도 없이 끼워 맞추고 그 위에 부드러운 스킨을 덧씌워 포장하고, 코어와 같은 색의 인공 안구를 끼워 넣고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심고, 손톱이나 지문의 모양까지 정교하게 새겨 하나하나가 작품이라고 할 만한 이것들은 일견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여도 결국 인형이다. 이 인형에 이름을 붙여서 친숙하게 매일 불러주고 말을 걸어 목소리를 인식시키고, 기계의 발열을 체온으로 여겨 거기에 기대면서 마음과 시간을 쏟아부어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외로움 속에 빠진 사람이다.

기계 인형이 구동하면 내부의 세밀한 부품들이 발열하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피부가 금속처럼 차갑지 않으니, 평균 체온 정도로 설정된 수치에 맞추어 올라간 기계 부품들의 온도가 체온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기억장치에 쌓인 인형의 기억들은 다양한 상황에 적합한 반응을 한다. 화를 낼 만한 상황, 혹은 비극적인 일을 마주할 때 인형들은 각자의 인격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양하게 대처한다. 감정의 변화와 함께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하는 체온 역시 섬세하게 구현된다.

어차피 사람도 사회 속에서 상황에 맞는 감정 및 대응법을 익히는 기계에 불과하지 않은가, 대중 사이에서 자아를 지키며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면 인형들 역시 그에 한없이 가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형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카베는 보관 창고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생체 인식을 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단말기로 오늘 입고된 인형의 보관 위치를 파악한 뒤, 창고를 한 번 둘러보았다.

몇 번을 와도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느껴졌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단기간이라고는 하나 기동을 멈춘 채 캡슐 속에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노화도 진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인형이라 성장이니 노화니 하는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기억장치에 쌓이는 기억은 단절될 것이다. 기계 인형에 사용되는 인격 프로그램은 아주 복잡하게 짜여 있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학습과 축적된 연산 경험이 기억의 중요도를 선별한다.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고 판단되는 일은 우선순위에 올라가고, 그렇지 못하면──무슨 표현을 써야 옳을지 카베는 잠시 망설였다. 즉, 망각까지 구현했다는 뜻이었다. 인형의 외모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기억만큼은 노화하도록, 정확히 말하자면 노화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야 인간다우니까. 지나치게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으니까. 빈틈이라고 할 만한 기억의 결함에서 기인하는 정해진 행동 패턴이야말로 인간다운 것이니까.

이곳에서 잠든다는 건, 가차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게 버림받아 노화하는 축복조차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창고는 그런 공간이었다. 사람의 욕심에 의해 인간처럼 만들어진 것들이 인간처럼 살아가다가 다시 인형으로 돌아와서 잠드는 곳이었다.

안치실 같다고 생각했다.

관처럼 늘어선 보관 캡슐들 사이를 걸으며 카베는 오늘 새로 들어왔다는 인형을 찾았다.

캡슐의 케이스를 열기 직전에 단말기를 켜서 데이터를 다시 확인한다. 성인 남성형, 성장형. 따라서 성인 체형으로 보디를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보관 개시일은 오늘──약 30분 전. 보관 기한은 무기한, 다른 인수자가 나타날 때까지.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조금 전까지 이 인형은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아니면 잠든 상태인 인형을 사람이 옮겨 왔을까. 데이터를 마저 읽어 내려가며 동의서를 찾는다. 당연하게도 인형을 이 창고에 보관할 때는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인형의 서명도 필요하지만 이 서류에서는 사람이 메인이기에, 보통은 보호자의 서명 다음 장에 인형의 서명이 들어간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이 인형의 보관 동의서는 몇 년 전에 작성된 것이었다. 보호자였을 누군가의 서명과 함께.

이 인형의 보호자는 아마도 자신의 신변에 좋든 안 좋든 변화가 생길 것을 예견하고 미리 서류를 준비했으리라. 그렇다면 보관 사유는 불가피하게 인형을 곁에 둘 수 없는 상황, 혹은 사망이다.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기계 인형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인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정확히는 법이 그렇다. 주인 없는 인형이 사람인 양 혼자 돌아다니는 초현실적인 상황을 염려한 장치이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함께할 누군가가 없으면 결국 이런 식으로 잠들어야 한다. 안타까운 결말이다.

카베는 단말기를 조작하며 보호자 동의서 다음 장에 첨부된 서류를 확인했다. 인형의 서명이 들어간 이 동의서는 약 한 시간 전에 작성되었다.

인형의 단 한 명뿐인 가족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보관 동의 절차를 미리 끝내놓았다. 가족을 먼저 보낸 기계 인형은 제 발로 이곳에 걸어와 한 시간 전, 동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 관 같은 캡슐 안에 들어가 스스로 구동을 꺼뜨렸을 것이다. 약 30분 전에 잠들었으니, 그가 서명함으로써 서류가 갱신된 시점에 울렸을 단말기의 알림음을 듣고 카베가 바로 달려왔다면 슬립에 들어가기 전의 그와 대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보관 기한이 무기한인 것을 보면, 이 인형이 이곳에 누워 있는 이유는 아까 예상한 대로 가족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잃어 이곳에 왔으니, 적어도 이 인형을 인수할 누군가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 시간으로부터 버림받은 인형이 아닌가, 이 인형도 잠들기 직전에 고독을 느끼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그는 지금 이렇게 홀로 관 같은 캡슐 속에 잠들어서,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내내 이곳에 누워 있어야 한다.

신이 사람에게 망각을 선물했듯이 사람은 인형에게 같은 축복을 선사했다. 인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지만, 그 덕에 이 인형이 겪었을 가족의 죽음도 시간 속에서 아물어갈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람의 체온이 더해지면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캡슐의 덮개 부분을 열고 본체를 확인한다. 그저 항상 하던 일의 순서에 맞추어 서류와 본체 순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사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카베는 이 인형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흔들어 깨우면 미간을 찌푸리며 당장에라도 눈을 뜰 것 같은 모습으로 그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잿빛 은발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얽어 한 번 쓸어넘긴 카베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머리를 맞대었다. 피부를 간지럽히는 타인의 머리카락이 생소했다. 감긴 눈이 지척에 있었다. 윤곽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손바닥을 올려보아도 그곳에서 생명의 진동이 느껴질 리 없었다. 사람처럼 부드러운 감촉과 기계처럼 차가운 몸의 괴리에는 분명히 외로움이 있다.

괜찮아. 내가 조금 늦는 바람에 너는 잠들어 버렸지만.

──금방 깨워줄게.

 

 

 

 

절차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국가 공방의 인형사라는 직책은 장기 보관하게 될지도 모를 인형의 양도자로서 최적이었으며, 카베가 여태 기계 인형을 단 한 체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점 역시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카베는 이 인형을 집의 어디에 두고 깨울지 고민하다가, 유지 보수가 필요할지도 모를 그를 위해 작업실로 결정했다. 카베의 작업실은 거실이나 침실보다 널찍하다. 집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는 데다 인형사라는 직업 때문에 너른 공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슬립 상태이니 소프트까지는 건드리지 않고, 그의 본체를 구석구석 살펴보며 고쳐주어야 할 부분이 있는지 파악하려 한다. 사실 슬립 상태인 인형의 소프트에 손대는 일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의 동의 없이 하기는 싫었다. 그가 눈을 뜨면 카베는 자신이 그를 데려오게 된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그다음에는 과거를 이야기해달라고 할 생각이다. 함께 살던 가족은 어땠는지, 혼자일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공방의 창고로 향하면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물론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겠지만, 되도록 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그래야 인간다우니까. 사람으로 대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 관한 자료는 기본 정보와 동의서 정도만 확인하고 세부 파일은 열지 않은 그대로였다.

‘내가 일방적으로 아는 건 반칙이잖아.’

대화로 서로를 알아가는 방법이 제일이라고, 카베는 생각했다.

캡슐 안에 잠든 채 누워 있는 그의 옷 매듭을 풀기 위해 옮기는 손끝이 저릿했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미약한 열기가 섬세한 신경을 타고 세포를 간지럽혔다. 그 손으로 간신히 매듭을 잡은 채 한동안 망설이느라 풀지 못하는 자신을 의식했을 때, 카베는 이것이 긴장이라는 사실 역시 동시에 깨달았다. 그저 인형의 유지보수와 구동을 위해 본체를 살펴볼 뿐인데 오늘 처음 본 남자의 옷을 벗기는 기분이었다. 심장 소리가 고요한 작업실 벽에 부딪쳐 메아리처럼 고막을 두드렸다. 그는 인형일 뿐이고 어차피 지금은 잠들어 있어 무엇을 하든 모를 것이라고, 그저 긴장을 달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여태까지 그를 위해 너무나도 많은 생각을 해왔다. 마음을 부정하려고, 그렇게 이 순간이나마 편해지려고 이제 와서 그를 무기물 취급해 버린다면 이후 카베는 더 깊은 자괴감에 빠질 것이었다. 물건에 일방적으로 마음을 쏟아 그 대상에게도 감정이 있으리라 여기는 건 사람의 이기심이다. 카베는 이미 이 인형에게 이기심을 실컷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그러나 지금부터 하는 일은 그를 위해 카베가 인형사로서 해야 하는 의무이다. 그가 깨어났을 때 당당하게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도록, 지금은 마음을 다잡고 최선을 다해 그를 살펴야 한다.

매듭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넣어 잡아당긴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매듭이 하나하나 풀려간다. 옷깃을 조심스레 젖히고 드러난 피부 위에 마침내 닿기 위해 손을 내렸을 때, 귀를 간지럽히던 심장 소리는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차가웠다.

눈앞의 이 물체가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 위에 올린 손바닥의 피부로 가차 없이 파고드는 이 순간에, 카베는 절실히 깨달았다.

지금 가슴을 가득 채우는 실망과 낙담이야말로 카베가 이 남자를 더 이상 인형으로 대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단말기에 띄워놓은 파일을 눈앞에 두자 자신의 무력함에 머리부터 짓눌리는 것 같아, 카베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화면을 향해 뻗은 손가락이 차마 파일을 열지 못한 채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밤새 찾았다. 수면도 잊은 채 매달렸지만 그의 몸 어디에서도 전원 장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이다. 슬립 상태인 기계 인형에게 특정 패스워드를 음성 인식시킴으로써 깨워야 한다.

문제는 패스워드가 무엇인가였다.

그가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려고 했던 내용들이 이 파일 안에 있을 것이다. 천재라고 불리는 인형사답게 그를 단번에 깨워서 여유로운 얼굴로 마주하고 싶었는데, 역시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다.

씁쓸할 따름이다.

그의 제작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그래서 깨울 수가 없어 이렇게 기록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기록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끝까지 보기를 망설이는 자존심이.

그때, 알림을 듣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로 향했다면 그가 슬립에 빠지기 전에 만났을 텐데. 단편적인 데이터와 잠든 얼굴을 보고 혼자 생각에 잠겨 이렇게 일방적으로 마음이 깊어질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첫인사를 나누고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그렇게 천천히 교감의 단계를 함께 밟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카베는 자신의 이름조차 그에게 알려주지 못했다.

잠든 그의 얼굴을 보기 전에 확인한 동의서, 거기에 적힌 서명을 얼핏 보고 이 인형의 이름이 알하이탐이라는 걸 그저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일어날까? 애초에 패스워드가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 이름을 부르는 건 두려웠다. 내가 만든 인형도 아닌데, 그래서 이름도 내가 붙여준 것이 아닌데, 혼자 지내는 동안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던 외로움은 그를 만나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훅 하고 피어올라 팽창했다. 그 존재감이 밑바닥으로 묵직하게 내려앉을 때 피어오른 고독은 마음속을 안개처럼 뿌옇게 휘저어놓았다. 이건 사람의 무게이다. 그를 만든 한 인형사의 마음 위에 사람과 함께 살아온 인형의 인생이 얹히고, 거기에 카베는 고독을 올렸다. 무거운 것이 당연하다. 그의 몸을 구석구석 관찰하면서 세월의 흔적들을 보았다. 성인 체형으로 보디를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해야 할 몸에는 아마 습관으로부터 얻었을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손을 어디에다 그렇게 썼는지, 굳은살이 살짝 박인 손가락 마디를 더듬어 그 끝을 살펴보자 미세하게 닳은 지문도 구현해 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형사의 고집이다. 인형이 가진 인격과 습관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했다가 보디를 교체할 때마다 인위적으로 새겨 넣었다.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어른이 된 것처럼. ──누구지? 이 남자를 이토록 사랑했던 누군가가. 견딜 수 없어졌다. 처참한 기분 속에서도 궁금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개를 들자 단말기의 환한 빛이 망막에 끼얹어져 눈을 찡그리고서, 멈춰 있던 손을 다시 화면으로 뻗는다.

카베는 단말기의 화면을 조작하여 결국 파일을 열어 보았다.

 

 

 

 

사진 한 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이 남자의 어린 시절인 것으로 보이는 소년 옆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낮추어 웃는 얼굴로 찍었다. 직감했다. 이 사람이 ‘알하이탐’을 만든 인형사이다. 애정을 쏟아 만들어낸 인형을 볼 때 장인은 이런 눈을 한다. 그러나 더 깊고 따뜻했다. 카베가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의 한순간이 여기에 들어 있었다. 이름밖에 모르는 남자의 지나간 시간이 비춰지는 화면을 바라보는 건 아주 기묘한 경험이다. 앞으로 읽어 내려갈 내용은 대체로 이러한 느낌일 것이다.

──기록을 쭉 읽어본 결과를 대충 요약하면 이러하다.

‘알하이탐’의 제작자는 나이든 여성 인형사이며, 그녀는 자식이 없는 아들 내외를 위해 그들의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어린아이 모습의 인형을 만들었다. 성장형임을 감안하여 코어 역시 고성능으로 직접 제작했으며, 사람의 아이가 적당히 성장할 정도의 세월이 흐를 때마다 보디를 교체했다. 보디를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섬세한 작업이지만,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은 아들 내외의 아이이자 자신의 손자였기에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나 아들 부부는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고, 나이든 인형사와 아이 인형만이 남겨졌다.

아이는 인형사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인형사 역시 아이를 혈육으로 여기며 아낌없이 사랑해주었다. 매일 이름을 부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연산의 결과로 출력되는 아이의 사소한 버릇 하나하나를 체크하여 성장한 몸으로 교체할 때마다 그 흔적을 새겨주었다. 부모의 성격 데이터가 반영되었기 때문인지 아이는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다.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과 지문이 닳은 흔적은 그 때문이다. 아이의 손에 들린 책의 수많은 페이지가 넘어가고 또 넘어가는 동안 세월도 흐르고,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갔다.

그렇게 사람으로 살았다.

기록의 마지막에 덧붙인 듯한 이미지는 작은 금속 조형물 사진이었다. 어딘가에 맞물리도록 복잡하게 만들어진 은색의 그것은 열쇠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아서 카베도 오랜만에 보았다. 어디에 쓰는 열쇠일까, 이걸 왜 마지막에 보여주는 걸까 생각하다가 문득 전에 살던 집 열쇠가 아닐까, 집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잠들어버린 그의 깊은 내면으로 통하게 해줄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홀린 듯이 사진에 고정된 시선 한켠에 작게 첨부된 메모가 언뜻 비쳤다. 짧은 문자의 조합을 보자마자 카베의 머릿속에서 파편들이 하나씩 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열쇠 사진, 가족을 잃은 인형, 인형 보관 창고, 스스로 잠들기 위해 홀로 공방에 찾아오기 전, 그는 한동안 비우게 될 집의 문을 단단히 잠근 후 어딘가에 열쇠를 담아 가져왔으리라. 그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소지품을 둘 만한 장소.

공방의 보관소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맞는 걸까, 아니면 그가 잘 이끌어준 걸까.

사진 한켠에 적힌 메모는 역시 보관소의 로커 번호였다. 공방에는 이러한 물품 보관소나 로커 룸이 여러 군데 있지만, 인형을 위한 보관 창고에 딸린 보관소는 여기뿐이다. 지정된 숫자의 로커를 열자 거기에는 어두운 색의 남성용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가방 안에는 여기로 올 때 입었을 옷들, 헤드폰, 사진과 똑같은 열쇠 하나, 그리고 책 한 권.

가방 안의 물건들을 확인하자마자 뛰쳐나가 그가 잠든 캡슐을 열고 패스워드를 맞추고 싶었지만 공방에서의 업무는 제대로 마쳐야 했기에, 카베는 일과를 해치우고 나서 그 물건들을 소중히 가지고 자택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우선 단말기로 그의 데이터를 띄워 사진의 열쇠가 맞는지 대조해 보았다. 틀림없다. 사진에 찍힌 것과 똑같은 이 열쇠는 그의 집 현관에 알맞게 들어맞을 것이다. 동의서의 주소를 확인하니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내일 당장에라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와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에 벅차올랐다. 정확한 패스워드를 알아내려면 아직 멀었을지도 모르지만 큰 진전이다.

카베는 열쇠를 다시 가방에 넣고 그 안에 함께 들어 있던 책을 꺼냈다.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을 텐데도 책갈피가 끼워지지 않은 걸 보면, 그는 읽던 페이지를 기억하는 타입이었나 보다. 이 책에도 무언가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기왕이면 알기 쉽게 패스워드라도 적힌 종이가 튀어나오면 좋고.

책을 한 손에 들고 카베는 천천히 인형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마냥 평온해 보였다. 옆에 앉아서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생각한다. 이야기책에서는 이렇게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키스를 하면 마법처럼 깨어나던데, 하고.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자 금색의 머리카락이 뺨의 피부를 스치고 그의 위에 사라락 내려앉았다. 희미하게 작업실로 스며든 한밤중의 달빛이 잠든 인형의 얼굴에 음영을 새기고, 그 위에는 카베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서 다른 쪽 손을 옮겨 인형의 뺨을 어루만진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윤곽을 더듬어 나아가던 손가락은 입술에 닿았을 때 움직임을 멈추었다. 부드럽다. 이렇게 부드러운데, 이 정도로 다가온 타인의 숨결을 느끼고 당장이라도 눈을 뜨며 말을 걸어 올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차갑다. 두 번째 손가락을 머뭇머뭇 움직여 아랫입술을 살짝 눌러보았다. 얼핏 보이는 하얀 치열 안쪽에 있을 점막과 근육을 상상하자, 들이마신 공기가 목 안쪽에 걸려 힉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사람의 손에 의해 모든 것이 만들어진 기계 인형이라도, 그래서 호흡조차 흉내에 불과하더라도 누군가가 내쉬는 숨결을 삼키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어날까, 무슨 말을 들려줘야 움직일 수 있을까. 패스워드를 알아내지 못하면 그는 이렇게, 영원히 잠든 채 누워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 데려왔는데.

닥치는 대로 뭐라도 말해볼까?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주면 그 안에 답이 있어서 네가 깨어날까? 까마득한 언어의 바다에 빠져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가라앉는 동안 세월이 흐르고 흐르고, 카베는 유언처럼 이 기계 인형의 패스워드를 중얼거리고서 눈을 감을지도 모른다. 홀로 눈뜬 그가 이번에는 반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린 카베를 발견한다면 이 기계 인형은 또다시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는 안 돼. 네게 죽음을 또 겪게 할 수는 없어──카베 역시 가족의 죽음을 겪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파도처럼 인생에 덮쳐 온 그것은 마음속에 깊숙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 상실과 죄악감을 그에게 남기고 갈 수는 없다. 반드시 깨워야 해.

“역시 이건 다음에 하자.”

그가 깨어 있었다면 말할 때 울리는 공기의 파동마저도 전해졌을 거리에서 속삭이고 카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에 머물러 있던 손을 내려 몸의 윤곽을 타고 가슴 언저리를 어루만진다. 확인하는 것처럼, 혹은 바라는 것처럼 고동치지 않는 심장 위에 한동안 손을 올려두었다가 몸을 일으키고 그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긴 뒤 가져온 책을 손에 들었다.

커버를 펼쳐 목차의 소제목을 하나씩 소리 내어 읽으면서, 카베는 벌써부터 따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책을 들고 다니면서까지 읽다니 정말 희한한 남자인가 보다, 하면서 잠든 그를 힐끗 내려다보자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쁘지 않다. 직접 대화하며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었던 일들이지만, 깨어났을 때 당신이 잠든 동안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대단한 양 들려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나 딱딱한 책을 읽는 타입이니 분명 가볍게 무시하고 할 일을 하거나 무표정으로 정론을 툭툭 던질 게 틀림없다. 그래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 앉아 말 없이 책이나 읽으며 카베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따금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치고 목소리를 들려주면 충분하다. 분명히 생생하고 즐겁고, 그리고 따스한 시간일 것이다.

목차의 소제목을 다 읽은 카베가 그 페이지를 한 번 손끝으로 훑고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도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똑같이, 이렇게 커버를 들추고 목차를 읽은 뒤 내용을 살폈을 것이다. 이 남자의 손이 닿은 책을 그대로 읽어 내려가고 싶기는 했으나 이 책은 정말로 재미없어 보였다. 카베의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한 자 한 자 읽을지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일단 책을 통째로 들어 파라락 넘기던 카베의 손끝에 가벼운 위화감이 닿았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보자, 책이 거의 끝나가는 뒤쪽 페이지에서 작은 쪽지가 나왔다. 아까 책 사이에서 패스워드가 적힌 쪽지라도 나오면 좋겠다고 했더니 정말로 그런 건 아니겠지, 라고 설레기에는 문장 자체가 지나치게 길었다. 접지도 않아 펼쳐진 채 책에 끼워진 종이를 집어 들고 나직하게 소리 내어 읽어본다. 

「서재. 빛이 안 드는 책상 안쪽.

눈앞에 나열된 문자가 정답은 아니더라도,

그것들은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하나의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잠들어 있는 남자를 다시 내려다본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면서도 그는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눈앞에 누가 비칠지조차 몰랐을 그는, 그럼에도 자신과 함께할 어떤 한 사람이 끈기 있게 답을 찾아주리라 믿고 이 문장을 남겼을 것이다. 알하이탐의 의식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언어의 바다 저편에 잠들어 있다. 파도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수면 한가운데에서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걸음을 옮길 때 새겨졌다 사라지는 파문과 함께 고독도 불안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쪽지를 책 속에 다시 끼우고, 카베는 천천히 일어나 책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있던 자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캡슐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음……. 조금 비좁겠지만 네가 참아. 내가 널 침대로 옮기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멋쩍은 듯 말을 건네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깊어진 달빛이 드리워진 머리카락에 손끝을 대어 살며시 쓸어 넘기고 고개 숙여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혼자 자는 건 익숙하지만, 사실 별로 안 좋아하거든.” 

관처럼 비좁은 캡슐 안에 몸을 눕히고 카베는 알하이탐을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천을 사이에 두고 밀착한 몸 위로 떨어지는 달빛이 따스했다. 이윽고 카베의 체온이 그에게 스며들면 달빛의 온기와 섞여 더 포근해질 것이다. 심리적인 안정감은 무엇보다도 잘 듣는 신경안정제이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의식의 끝을 놓아버리는 순간이 이렇게 달콤한 적은 없었다.

 

 

 

알하이탐의 집은 겉보기에 아주 평범한 단독주택이었다. 잠긴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어두운 목재로 이루어진 실내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여 쏟아지는 빛이 고풍스럽다고 느꼈지만 특별할 것은 없었다. 집 여기저기에 책이 꽂혀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범한 가정집이다. 집을 비운 지 며칠 되지 않아 실내에 먼지가 쌓이거나 한 건 아니지만, 군데군데 정리되지 않은 채 쌓아놓은 책이 보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가 이곳에 살았다.

이 집에 오기 전부터 흥분되고 설레고 한편으로는 불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했다. 오늘 아침, 관 같은 캡슐에서 눈을 뜨고 여전히 잠든 채 누워 있는 알하이탐을 보았을 때도 더 이상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반드시 깨우겠다는 결심 내지는 확신 덕분인지, “다녀올게, 집 잘 보고 있어야 해”라며 인사까지 건넬 수 있었다.

현관을 지나 오른쪽 복도를 따라 걸어간 곳이 서재였다. 문이 잠겨 있으면 어떡하나 염려하여 잠시 망설였지만, 그가 패스워드를 찾기를 바란다면 열어 두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문고리를 잡고 힘을 넣자 역시, 찰칵 소리를 내며 매끄럽게 문이 열렸다.

놀랄 만한 풍경은 그 안에 있었다. 문 하나 건너편은 책의 숲이었다. 창문이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 벽은 온통 책장이다. 요즘 이렇게 종이책을 소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종이에 자필로 남긴 메모도 그렇고, 역시 그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 공간의 모든 것이 온화했다. 쏟아져 들어온 오전의 빛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을 그대로 비추어 서재 안에 녹음이 우거진 듯 보였다. 왼편의 커다란 책상 아래에도 빼곡히 책이 꽂혔다. 책상으로 다가간 카베는 특이한 금속제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향로다. 그러고 보니 이 서재에는 꽃이 없다. 알하이탐은 서재를 좋아했을 테고, 좋아하는 공간에 꽃 한 송이 정도 두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서재에는 살아 있는 꽃 대신에 향로를 두었다. 희한하게 여기며 향로를 열자 그 안에는 다 타고 남은 재가 꽃향기를 머금은 채 쌓여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녹음과 책의 숲과 꽃향기 나는 잿더미가 이 서재를 균형 좋게 채웠다. 인위적인 생명의 향기이기에 잘 어울렸다.

향로를 덮고 카베는 책상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여기 놓인 의자에 앉았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마침 그곳이 이 서재에서 빛이 가장 적게 들어오는 곳이었다.

거기에 놓인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상자를 조심스레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둔다. 이 안에 그가 말했던 ‘열쇠’가 있다.

상자를 열기 전, 서재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알하이탐이 매일같이 봐왔을 풍경이다. 그를 잠에서 깨워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대중은 자연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에는 특유의 치밀한 아름다움이 있다. 만든 이의 노력과 고뇌가 녹아들었기에 위화감 없이 섞여 자연물과 좋은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가 품었다 쏟아내는 햇빛과 달빛은 실내에 녹음을 만들고, 거기에 금속 향로에서 새어나오는 꽃향기가 감돈다. 빽빽한 목재 책장을 채운 책들 역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사람이 만든 인공물이다. 자연물과 인공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은 카베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들어온 이 서재가 마음에 들었다. 기계 인형은 이 방과 닮았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져 그들 사이에서 사람처럼 절묘하게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공물이라는 점에서.

작은 마찰음을 내며 상자를 열자 오래되어 보이는 책 몇 권이 나왔다. 책을 보관하려면 빛 안 드는 곳에 눕혀놓는 방법이 정석이기는 하다. 이렇게 보관한 걸 보면 소중한 책일 것이다.

페이지에 한가득 메모를 붙여놓아 두꺼워진 책, 커버에 아름다운 축복의 말들을 적어둔 책, 그리고 두꺼운 비취색의 양장본.

이것이 열쇠다. 잔잔했던 마음속에 파문이 번져갔다. 작은 물방울이 떨어질 때처럼 사랑스러운 소리와 함께 파고들어 아련하게 퍼져가는 그것은, 나이든 인형사의 바람을 담은 한 문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아름답고 온화한 문장은 패스워드가 아니었다.

책 커버에 적어놓은 문장 그대로 패스워드 설정을 했으리리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역시 ‘정답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눈앞의 수단은 다 써보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업실로 곧장 돌아와 책을 꺼내 들고 읽어보았지만 역시 알하이탐은 깨어나지 않았다. 알하이탐의 집에서 오래된 책 몇 권을 가지고 돌아온 날 이후로 나흘째, 그동안 끊임없이 말을 걸고 책을 낭독하고 그의 자료도 다시 읽었지만 패스워드를 찾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책에 답이 있을까 생각했으나 알하이탐이 지정해놓은 대상 외 다른 책이 힌트가 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에 관해 잘 안다고 하기도 애매했지만 아예 모르지도 않는 상황에서, 카베는 눈앞의 이 남자가 남긴 메시지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를 가장 잘 알던 인형사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카베 자신이 알하이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리라 확신했다.

지금 카베는 캡슐 옆에 앉아 그저 책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잠든 알하이탐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해 질 무렵의 등색 빛이 충만한 실내가 포근하다. 혼자 지낼 때는 낮밤이 어떻게 바뀌는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길게 한숨을 흘렸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이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평온한 삶이라. 알하이탐의 집에서 가져온 ‘열쇠’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들 내외를 위해 온 정성을 들여 아이 인형을 만들고 사람처럼 키운 인형사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만들 때도 그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인형사로서 인형을 만들 때 담는 마음은 비슷하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 인형을 만들고 사람처럼 기르고, 진심 어린 유언을 남긴 인형사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즉, 카베는 그녀와 같은 마음일 수 없으므로 다른 입장에서 그를 생각해야 한다──이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리라. 그러나 카베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가 이어진 혈육을 대하듯 사랑해 마지않던 기계 인형에게, 나이든 인형사는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선사하고 싶었을 테니까. ‘우리 아가 알하이탐’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그의 몸과 남겨진 데이터를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된다. 지금은 ‘아가’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아주 큰 위화감이 들기는 하지만, 자료에서 보았던 소년 시절의 알하이탐은 나름대로 ‘아가’라 부를 만한 앳된 모습이었다.

사람이 인형을 만들 때. 사람이 인형을 사랑할 때.

자신의 창조물을 향한 마음으로 따진다면 인간을 만든 신에 빗댈 수 있을까──아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나약하고 때로는 꼴사납고, 불리하거나 오래된 기억은 망각하고, 그러나 유한한 시간을 살면서 항상 외로워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한다.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고뇌하며 아등바등 살아간다. 오로지 마지막 순간이 편안하기를 바라면서.

인형을 만들고 가족으로서 사랑한 인형사는 이 소중한 아이가 사람처럼 살기를 바랐다. ‘알하이탐’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던 인형사, 가족이기도 했던 그녀가 결코 줄 수 없었던 무언가를 카베라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하이탐에게 손을 뻗을 때는 단잠을 깨우는 게 아닐까 염려되어 항상 조심스러워진다. 며칠째 잠들어 있는데도 흔들어 깨우면 일어날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카베의 바람일까. 누워 있는 그에게 닿을 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스치듯이 얼굴의 윤곽을 덧그리는 행동이 그새 습관이 되었다. 사실 손으로 만질 만한 곳이 얼굴과 손 정도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면 가슴 정도일까. 그것도 그의 가슴이 뛰기를 일방적으로 기대하는 행동에 불과하지만. 물론 인형을 연인으로 삼는 사람들도 요즘은 드물지 않으니 그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지. 여태 인형사로 일하면서 손을 거쳐 간 인형들을 떠올려봐도 그들에게 닿는 일조차 주저한 적은 없었다. 물론 하나하나 정중하게 대해줬지만.

어쨌든 몸의 다른 부분에 허락 없이 손대는 건 매너 위반이다. 알하이탐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첫날에는 전원 장치를 찾기 위해 온몸을 살피느라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감상에 젖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고, 그가 일어나면 여태 있었던 일을 말할 때 이렇게 설명할 생각이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스친 뒤 턱선을 따라 서서히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손끝으로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 위에 이르렀을 때 카베는 여느 때처럼 살며시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에 잠긴 동안 해가 더 떨어져 등색으로 충만했던 실내에 어두운 보랏빛이 깔렸다. 이제 곧 카베도 잠들어야 할 시간이 온다. 하루의 긴장감은 그의 얼굴을 이렇게 내려다보는 동안 온기에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눅진한 졸음이 주르륵 떨어진다. 오늘도 그와 몸을 맞대고 누우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달콤한 잠에 빠지던 감각을 떠올리니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알하이탐을 보기 전까지 이 비좁은 캡슐을 그저 관 같다고만 여기던 카베는, 누군가가 거기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락한 침대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널찍하고 질 좋은 침대 위를 독차지하고 혼자 누웠을 때는 그저, 오늘 하루 시달린 자신이 지친 끝에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길 기다리는 기분이었는데. 자는 동안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몸을 떠나 가라앉은 의식이 꿈속을 떠다니다가 아침에 이끌려 다시 떠오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일 뿐이다. 그동안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의식의 시간만이 멈춘다.

그의 시간도 멈추어 있다. 그의 의식을 찾아 함께 아침을 맞아야 한다. 아침의 빛 속에서 함께 눈을 뜨고 같은 시간을 살아가다가 밤의 포근함에 다시 잠들고, 그렇게 오랫동안 매일매일을 반복하며 어느 날, 반복되는 시간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길 바란다고 의식이 말할 때. 만약 그가 홀로 눈을 뜬다면 또다시 혼자서 장례를 치르고, 두 번째로 잠들기 위해 시간이 멈춰 있는 안치실로 갈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더 이상 그의 기억에 사람의 죽음을 새기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베는 알하이탐의 마지막 가족이 되고 싶었다.

가슴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두어 양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차가운 손가락 사이사이 부드럽게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뺨에 가만히 대고서 말했다.

“너와 함께 죽고 싶어.”

그것은 인생에서 해본 그 어떤 말들 중에서도 가장 달콤하게 입 안에서 번져갔다. 슬프고 아련하고, 그러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번지는 충만감을 만끽하는 동안 얽혀 있는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잡은 손이 더는 차갑지 않았다. 천천히 눈꺼풀이 열리고 마침내 드러난 동공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카베는 손가락에 힘을 넣어 그 손을 꼭 잡고서 알하이탐에게 최초의 아침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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