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魂

긴히지, 세례

2015.10.03.

UND by 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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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썰에서 자잘하게 수정·보완함(http://tl.gd/n_1snejoe)

- 은유적 카니발리즘 주의

- 사망소재 주의

  “오늘따라 유독 모래가 많네요.”

  한참을 먼지떨이로 부산을 떨던 신파치가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다. 신파치의 발치에는 사무소 곳곳에서 끌어다 모은 정체불명의 새하얀 가루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다시마 초절임을 씹으며 뒹굴거리던 카구라가 몸을 뒤집고는 턱을 괴었다. “신파치, 이쯤이면 그냥 빗자루로 바꾸는 쪽이 낫지 않냐, 해?” 역시 그렇겠지? 신파치는 푸우,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먼지떨이를 저 멀리 치워버렸다.

  “긴토키 씨, 어젯밤 술 마시고 땅바닥에서 뒹굴기라도 하신 거예요? 사무소가 온통 모래투성이잖아요.”

  “모래치곤 좀 하얀 것 같은데… 비듬 아니냐, 해?”

  “그런 거 있을 턱이 있냐, 멍청아! 내 헤어는 언제나 클린하다고.”

  숙취랍시고 온종일 도롱이벌레마냥 몸을 말고 있던 긴토키가 벌떡 일어나서는 언성을 높였다. 그는 제 두피의 청결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보란 듯이 오른팔을 크게 휘저었는데, 그 순간 사락거리는 얇은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긴토키는, 그리고 아이들은 긴토키의 소맷부리에서부터 휘날리는 하얀 입자의 소용돌이를 보았다. 햇살을 받아 탁한 흰빛을 흩뿌리던 가루들은 희미한 반짝임을 품고 그대로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어라…? 이게 아닌데. 얼떨떨해진 긴토키가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신파치의 타박이 쏟아질 차례였다.

  “이것 봐요! 역시 긴토키 씨가 끌어온 모래잖아요!”

  “엥… 아냐아냐,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어젯밤은 그렇게까지 취하지 않아서 전부 기억한단 말이야. 땅바닥에 구르기는커녕 모래밭 근처에도 간 적 없다고?”

  “그럼 비듬이라도 된단 말이에요? ……잠깐, 비듬이야? 진짜 비듬인 거야?”

  “웩. 더럽다, 해. 너 절대로 가까이 오지 마라.”

  “너희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 머리는 매일같이 샴푸를 쓰지 않으면 큰일 나거든? 매일같이 꼬박꼬박 머리 감거든?! 맹세코 오늘도 머리 감았거든!!”

  긴토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긴토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며 주춤주춤 거리를 벌리려 드는 작태에 긴토키는 더더욱 억울해졌다. 아, 진짜 비듬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예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긴토키가 분한 듯이 머리를 마구 흔들고 제자리에서 쿵쿵 뛰어대며 온몸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다시금 하얀 입자들이 사방팔방 흩어지자 신파치와 카구라가 와악―! 기겁을 하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긴토키 씨는 절대로 비듬 같은 거 없어! 점프 주인공이 비듬이라니, 모양 빠지잖아!!”

  “그럼 저건 뭔데요! 날리잖아요, 지금 뭔가 엄청 날리고 있잖아요!!”

  “이, 이건 그거다. 사다하루의 털뭉치야.”

  “웃기지 마, 이 비듬덩어리가! 우리 사다하루 털은 저렇게 짧지 않다, 해!”

  “그럼 사다하루의 코딱지라고 해두자.”

  “더럽다는 점에서 비듬이랑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요?! 어쨌든 더러우니까 가까이 오지 마요, 좀!”

  한참을 난리법석을 피우던 긴토키가 움직임을 멈추는 데에는 몇 분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침 아래층에서 짜증스럽게 울린 오토세의 “대낮부터 시끄러워, 이 망할 천연파마!” 쩌렁쩌렁한 고함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우연히 시선이 닿은 제 손가락의 급작스러운 이변 탓이 더욱 컸다. 문득 오른손을 내려다보던 긴토키가 가만히 눈을 비비더니, 다시 제 손을 유심히 살폈다. 내 손가락, 뭔가… 이렇게 뭉툭했었나? 아니, 좀 더 길쭉길쭉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으응?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긴토키는 손끝을 스윽 문질러보았다. 그러자 몇 분 동안 질리도록 보았던 예의 하얀 가루가 재차 흩날리면서 검지 끄트머리의 윤곽이 아주 미세하게 흐릿해졌다. 소파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구역질하는 시늉에 열중하던 아이들의 눈동자에도 한순간 당혹감이 깃들었다.

  “긴쨩?”

  “긴토키 씨, 그거…….”

  긴토키의 표정이 찬찬히 굳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는 이번에는 오른팔을 들어올려 수도를 세우고 손등 부근을 가볍게 내리쳐보았다. 토옥. 아주 가벼운 타격이었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터무니없었다. 긴토키의 새끼손가락이 엷게 진동하더니, 곧 마디 반 토막이 모래성 무너지듯이 뭉툭 부스러지는 것이었다. 우수수 쏟아져 흩날리는 가루뭉치에 아연실색한 신파치가 뒤늦게 빼액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뭐, 뭐예요? 대체 뭐예요, 그거?! 왜 사람 몸뚱이가 모랫더미 같은 게 되어버린 거야!!”

  “몰라, 나도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뭐야 이거? 꿈인가? 내가 아직도 술이 덜 깼나?!”

  “소, 손가락 좀 봐요! 으아아, 맙소사. 진짜로 없잖아!!”

  “제대로 잘 좀 봐봐, 신파치! 정신 사나우니까 소리 그만 지르고. 일단 진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그, 있잖아. 소파 밑으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손가락이 제멋대로 굴러 떨어지는 시점에서 침착이고 나발이고 있겠냐!!”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남정네들 덕분에 도리어 평정을 되찾았는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구라가 타박타박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긴토키의 발치에 쌓인―한때 긴토키의 새끼손가락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하얀 가루들을 가만히 주시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그것을 문질러보더니 곧 손을 탈탈 털어내며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왠지 기분 나빠. 세균 같은 거 붙어있는 거 아니냐, 해. 불결해 보여.” 물론 그 건방진 말본새의 대가는 긴토키의 딱밤이었다. 아얏! 짧게 비명을 내지르는 카구라의 머리카락 위에도 역시나 하얀 가루가 몇 점 엉겨 붙어 있었다. 한숨과 함께 주먹을 거둔 긴토키가 고심하듯 허리에 손을 얹더니, 이번에는 대뜸 서랍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좋아, 그러면 나는 뭐냐… 타임머신을 찾아본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거기에 타임머신 같은 건 없어, 댁이나 좀 진정해!! 그보다 이거 타임머신 있어도 별로 소용없지 않아?”

  신파치의 태클보다는 서랍에 닿은 제 무릎이 또 다시 부스러지는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긴토키는 서랍으로 기어들어가려던 시도는 그만두기로 했다.

  잠깐 사이에 온통 진이 빠졌다. 식은땀을 훔쳐내며 긴토키와 신파치는 허탈하게 소파에 주저앉았다. 신파치가 한껏 지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갑자기 사람 몸이 부스러진다니. 전례도 없다고요, 이런 건.”

  “낸들 알겠냐. 어차피 또 무슨 천인 나부랭이가 저지른 난리통에 말려든 거겠지. 이 세계에서의 온갖 사건사고는 대체로 천인 짓으로 돌리면 99%는 개연성이 생기니까 말이야.”

  “저기요. 그거 우리가 절대로 입에 담으면 안 되는 말이거든요, 긴토키 씨.”

  “틀림없이 아무 생각 없이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게 분명하다, 해! 그게 천인이 만든 괴상한 음식이었던 거야.”

  “카구라야, 모든 사람을 너처럼 보지 말아줄래? 긴토키 씨는 단 거랑 술밖에 주워 먹지 않아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보통 아무것도 주워 먹지 않아요.”

  끄응. 작게 목을 울리던 신파치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여기서 저희들끼리 머리 싸매고 있어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겠죠. 그렇게 말하고는 신파치는 바닥에 쌓인 긴토키의 가루를 빗자루로 조심스럽게 비닐봉투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혹여나 어딘가에 흘리지 않도록 꼭꼭 봉투를 밀봉한 신파치가 그것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문으로 발걸음을 떼어냈다.

  “일단 여기저기 알아보고 올게요. 어떻게 좀 실마리가 잡히면 좋겠네요.”

  “가자, 사다하루! 지금은 한가하게 개밥 먹을 때가 아니다, 해.”

  “기다려봐, 너희들. 나도 같이…….”

  허둥지둥 긴토키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열려 있던 창문으로 바람 한 줌이 가볍게 몰아쳤다. 긴토키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바람은 미세한 가루 몇 점을 품은 채로 사무소 곳곳을 여유롭게 유영하다가, 이내 추락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해결사들은 한꺼번에 말을 잃었다.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스러진다니! 조금 전에는 긴토키가 갖은 난리법석을 떨며 몸을 움직여야 조금씩 부스러지던 것이 그새 상태가 악화되지 않았는가. 붕괴가 한 번 시작되고 나자 가속도가 붙은 게 아니냐며 신파치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가만가만 눈길을 교환하더니, 이내 긴토키를 방으로 질질 끌고 와서는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닫아걸고 “당신 절대로 거기서 나오지 마세요.” “나오면 내가 직접 죽일 거다 해.” 험악한 얼굴로 엄명을 내렸다. 콰앙, 태풍보다 사나운 기세로 방문이 닫혔다.

  그렇게 긴토키는 방에 반강제로 감금되었다. 지금의 긴토키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정확히는 제 몸에 자극을 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위험물질이나 다름없었다. 섣부르게 밖으로 따라 나갔다가 어디 한 군데라도 심하게 부스러져버리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홀로 방에 남겨진 긴토키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곳만이 제가 거동할 수 있도록 한정된 유일한 공간이라고 인식하자, 늘 보던 풍경임에도 왠지 모르게 낯설기 짝이 없었다. 한참을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리던 긴토키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으려나, 저 녀석들끼리.”

  그 자그마한 접촉만으로도 어깨에 쏟아지는 미미한 무게감이 있었다. 정말이지, 미치겠군. 긴토키는 짜증스럽게 눈을 감아버렸다.

  신파치와 카구라는 그동안 알고 지냈던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상황파악을 위해 발품을 팔았다. 해결사라는 위치는 다양한 직종들과 연을 맺기에는 아주 탁월한 직업이었다. 그간 쌓아온 연줄로 아이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돌팔이 의사에서부터 시작해서 겐가이 영감, 묻기도 전에 알아서 찾아온 사루토비―를 필두로 한 닌자 일당―, 캬바쿠라 여성진, 카츠라와 엘리자베스, 야쿠자, 음양사 등등. 천인의 소행일 거라는 긴토키의 근거 없는 주장도 고려하여 벌벌 떨리는 다리로 헤도로의 꽃집에도 방문해보았지만 역시나 소득은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이런 사례는 듣도 보도 못한 거라며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1시간, 2시간, 4시간,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조금씩 흐트러지는 평정심은 그 면면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야규 큐베는 저네 가문도 정보를 수집할 것을 약조하면서 걱정스럽게 카구라의 어깨에 손을 얹기도 하였다.

  “너희들도, 조금은 침착하는 게 좋겠어. 지금 안색이 말이 아니야.”

  신파치와 카구라는 그저 짤막한 웃음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말을 건넸던 상대방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하게 마주 미소 짓고야 마는 것이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신파치와 카구라의 발길이 다음 차례로 향한 곳은 신센구미 둔영이었다. 이는 신센구미가 아이들이 아는 공권력 중 두 번째로 높은 집단이기도 하였으나―가장 높은 권력자인 소요 공주를 배알하려면 굉장히 복잡하고 많은 절차가 필요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신센구미를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늘 신센구미와는 투닥거리기 일쑤였던 카구라는 그다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온종일 카부키쵸를 들쑤시고 다닌 덕에 둔영에 다다랐을 때는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신센구미는 이미 업무가 끝나가던 차였기에 곤도와 히지카타, 그리고 오키타가 해결사 아이들의 부름에 응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초지총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오키타가 신파치에게서 봉투를 넘겨받고는 내용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겉보기에는 그저 하얀 가루가 담겨 있는 비닐봉투에 불과했기에 그는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이 모랫더미처럼 무너져 내리는 걸 나더러 믿으라고? 차이나, 이거 사실은 그냥 네가 몰래 챙겨 먹던 설탕 같은 건 아니냐?”

  의심스러운 낯빛으로 오키타가 가루 한 줌을 끄집어냈다. 실외에서 가루를 부주의하게 취급한 대가는 커다란 재채기였다. 찰나 바람이라도 일었는지 코끝으로 밀려드는 간질간질한 감촉에 그만 오키타가 성대하게 침을 분사했다. 푸, 엣취! 그 여파로 얌전히 손바닥에 올라앉아 있던 긴토키의 가루들은 허공으로 훅 날아가, 하필이면 맞은편에 서 있던 히지카타의 면전에 왕창 달라붙고야 말았다. 예상치 못한 참사에 신파치가 입을 떠억 벌렸고, 카구라가 “아앗!!” 비명처럼 목소리를 높였으며, 가루 섞인 오키타의 타액을 고스란히 맞아버린 히지카타가 요란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오키타는 코를 훌쩍이며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이런, 날아가버렸네.”

  “너, 너어어… 날아갔다고 하면 다냐, 해! 어떻게 할 거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긴쨩이, 긴쨩이……!!”

  “그러니까 누가 설탕 같은 걸 가져오래? 아직도 코가 간지럽잖아.”

  “지금 긴쨩을 설탕 취급했겠다! 긴쨩 따위랑 설탕을 비교하지 말라고, 짜샤!! 아, 반대로 말했다.”

  득달같이 달려든 카구라가 오키타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댔다. 순순히 당해줄 오키타가 아니었기에 그 역시 즉각 카구라의 멱살을 붙잡아 다리를 걸었고, 이를 만류하려고 끼어든 곤도가 얼떨결에 카구라의 주먹에 얻어맞는 것과 동시에 마당은 흙먼지 날리는 싸움판으로 변모했다. 잔기침을 콜록거리며 손수건을 찾아 품속을 더듬던 히지카타의 귀에 언뜻 신파치의 목소리가 닿았다. 신파치는 텅 비어버린 봉투를 움켜쥐고 패닉에 빠져 있었다. “기, 긴토키 씨가 날아가, 날아갔다고! 어, 어떻게 해.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니겠지?! 괜찮은 거야? 괜찮은 거야, 이거?!” 히지카타가 찰나 행동을 멈추었다. 워낙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인지라 무심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사안이 그제야 예삿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명치 부근에서 여전히 치솟는 기침을 억누르며 히지카타가 작게 침음했다. 사람의 신체가 모래처럼 부스러진다…… 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래, 일단 설탕가루는 아닌 모양이로군.”

  가루의 대부분은 제 비강으로 스며든데다, 그나마 얼굴에 달라붙은 것조차 오키타의 타액에 녹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떼어낼 수 있는 가루만이라도 도로 봉투에 털어내며 히지카타가 짤막하게 한숨을 불어냈다. 신체의 붕괴라니, 최소한 에도에서는 단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던 사안이었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히지카타가 오른손을 올렸다. 멀찍이 피해 있던 야마자키가 재빠르게 다가와 경례를 붙였고, 히지카타는 즉각 남아도는 대원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이들의 감동에 찬 시선이 옆얼굴에 달라붙었다.

  “히지카타 씨…!”

  “토시……!”

  “누가 토시냐. 뭐, 일단은 민간인을 보호하는 직업이니까. 이것도 직무의 일환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혹시 전염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동안 그 녀석 근처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말도록.”

  “정말 감사합니다!!”

  “됐어. 해결사는 지금 사무소에?”

  “아, 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마모가 심해지는 것 같아서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해뒀어요.”

  “그런가… 나는 지금부터 그쪽으로 가겠다. 너희들도 돌아갈 거냐?”

  외출 채비를 갖추며 히지카타가 물었지만, 신파치와 카구라는 뜻밖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면 찝찝해서 안 돼. 우리는 좀 더 정보를 모아보겠다, 해.”

  “경황이 없어서 아직 오토세 씨에게도 알리지 못했거든요. 조금 상담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긴토키 씨는 맡기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히지카타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꽤나 안심이 됐었는지, 둔영을 빠져나가는 신파치와 카구라의 안색은 들어오기 전보다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멋쩍게 뒷목을 문지르던 히지카타가 이번에는 곤도와 오키타를 돌아보았다.

  “곤도 씨는 어떻게 할 거야? 소고 너는?”

  “나는 마츠다이라 선생님이랑 저녁약속이 있어. 혹시 뭔가 알고 계신 정보가 있는지 여쭤보고 오마. 우리에게 없는 정보라면 그쪽에도 없을 확률이 높지만… 선생님이라면 추후 높으신 분들을 넌지시 떠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전 곤도 씨를 따라갈래요. 바람만 닿아도 몸이 부스러진다는 형씨랑 같이 있으면 히지카타 씨를 함부로 죽이려 들 수도 없을 테니까.”

  “그래, 네가 하는 생각이란 게 다 그렇지.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그리하여 히지카타는 단독으로 사카타 긴토키를 방문하게 되었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해결사 사무소의 문 앞에 당도한 히지카타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방 안에서 움직이지 못할 긴토키가 인기척에 반응할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예의상 노크를 남겨보기로 했다. 똑, 똑똑.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지극히 평범한 응답이 돌아왔다.

  “네에, 기다리십쇼.”

  평범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역시나 평범하게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긴토키가 히지카타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등장에 되레 당혹해버린 히지카타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긴토키가 멀뚱하게 머리를 긁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라, 마요라 부장이잖아. 여기까진 어쩐 일이셔.”

  그 평이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히지카타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긴토키의 전신을 훑었다. 북슬북슬한 곱슬머리에 얼빠진 얼굴, 느슨한 행동거리. 정말로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사카타 긴토키였지만, 사소한 움직임에도 어김없이 부스러지는 탁한 빛깔의 흰 가루들을 히지카타는 보았다. 사르륵, 사르륵. 마치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소리 같다고 그는 내심 생각했다. 히지카타의 시선이 무엇을 좇고 있는지 긴토키 역시 이윽고 알아차리고야 만다. 잠시 침묵하던 긴토키가, 이내 부스러져가는 몸으로 한 발 비켜섰다. 그가 조용히 웃었다.

  “……들어와, 히지카타 군.”

  긴토키의 얼굴 윤곽이 어딘지 모르게 얄팍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기침을 눌러 참을 때처럼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무소로 들어가는 걸음걸음마다 긴토키에게서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던 히지카타는 그가 소파에 채 앉기도 전에 튕기듯이 물음을 올렸다. 애당초 방에만 처박혀 있어야 할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뚱이를 여기저기 날리며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너, 괜찮은 거냐?”

  “뭐가?”

  긴토키가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한껏 풀어져 있는 모양새가 마치 제 일이 아니라는 듯한 태도라서, 덧붙는 말은 한 걸음 느릿해졌다.

  “움직이면 더 부스러진다고… 들었는데. 안경한테.”

  “뭐, 그렇긴 한데. 이게 말이야, 방에만 처박혀 있어도 똑같은 꼴이더라고. 처음에는 마찰만 없으면 괜찮을 줄 알았더니 가만히 보니까 숨만 쉬어도 천천히 부스러지더라. 어차피 가루 날리는 건 변함없는 것 같겠다, 그냥 포기하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있어. 사실 꽤나 답답했거든. 사방은 온통 꽉 막혀 있고, 할 것도 없는데 잠도 안 오지. 진짜로 미치는 줄 알았어.”

  한량의 표본처럼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서는 대꾸하는 꼴이 짐짓 능청스러웠다. 긴토키는 보란 듯이 제 어깨 부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마치 능선을 구르듯이 하얀 입자가 어깨선을 따라 살금살금 떨어지고 있었다. 사륵, 깃털이 떨어지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유독 간지러웠다.

  “처음에는 이 가루들 모아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좀이 쑤시고. 그렇다고 쓰레받기로 모으려니 그건 또 귀찮은 거야. 어차피 모으려고 움직이는 동안 또 떨어질 테니 결국 제자리걸음일 거 아냐?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지금은 그냥 막 뿌리고 있어. 음, 그야말로 팅커벨이지. 어라, 그럼 나 갈 수 있나? 네버랜드 갈 수 있어?”

  “…….”

  “뭐야, 리액션 재미없네. 태클이라든가 없어? 아니면 히지카타 군도 네버랜드 가고 싶은 거야? 아서라, 분명 팅커벨이 마요네즈 냄새에 기절할 거다.”

  히지카타는 그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되지도 않는 말만 장난스럽게 뱉어내던 긴토키도 그제야 천천히 말을 잃었다. 그의 침묵이 저를 배려하는 것임을 긴토키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꺼내건, 히지카타는 지금처럼 줄곧 침묵을 지키며 그저 묵묵히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러기 위해 여기에 왔을 터였다. 입을 다물고 머뭇거리던 긴토키가 한참 후에야 어깨를 살짝 내려앉혔다.

  “……이대로 온몸이 전부 부스러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

  공기의 흐름도, 소리도, 지금까지 그를 감싸 안던 따스함들이 모두 가로막힌 적막한 공간 속에서, 사카타 긴토키 역시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의 위기에 속절없이 잠식되었다.

  “나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걸까, 혹은 분열일지도……. 어느 쪽이든 지금의 나를 유지하고 있는 자아는 사라지겠지. 다른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만, 역시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건 영 내키지 않아.”

  “…….”

  “무너지고 싶지 않았어.”

  그다지 긴 한탄은 아니었다. 본디 그런 녀석이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제 머리를 쓱쓱 문지르다가, 긴토키는 문득 히지카타와 눈을 맞추었다. 이윽고 그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히지카타 군.”

  이상하게도 그 입모양만이 선명하게 동공에 박혔다.

  “무서워?”

  내가?

  아니, 네가.

  히지카타는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긍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말없이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해결사.” 나직하게 호명하며 히지카타는 살짝 눈길을 틀었다. 저도 위로에는 그토록 익숙하지 못했더랬다.

  “네가 사라질 일은 없어. 너는 너인 채로 변하지 않을 거다.”

  시선이 꽤나 적나라했다. 히지카타는 살짝 헛기침을 더하고는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네가 고작 몸뚱이 좀 부스러지는 정도로 변할 녀석이냐. 네놈의 영혼은 악성 곱슬머리 같은 거라서, 아무리 바꿔보려 애를 써도 결코 바뀌는 일은 없어. 물론 네놈의 몸도 마찬가지다. 네게는 아직 빚이 남아 있어, 이대로 사탕가루마냥 분쇄되는 것도 곤란해. 에도 전부를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네 증상을 해명하겠다. 결코 이대로는 두지 않아. 딱히 날 믿으라고는 안 해, 하지만 네 아이들은 믿어라. 그 녀석들이라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올 거다. 그렇게나 지겹도록 끈질기던 게 네 녀석들이잖아.”

  재차 헛기침이 터졌다. 어설프게 말미를 머금고 문득 끌어올린 시야에,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붉은 시선이 있었다. 조금 당황한 듯, 기쁜 듯, 두려운 듯, 사랑스러운 듯. 이런저런 감정들이 뒤엉켜 부스러지는 다정한 눈동자가 올곧게 저를 향해 닿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부스러져가는 입술로 긴토키가 엷게 웃었다.

  “이거야 원. 천하의 귀신부장님께 위로까지 받았는데, 이거야 은이 금이 된다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겠군.”

  아,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듯했다. 그제야 히지카타에게도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돌았다.

  “뭐야, 그게. 보통은 금이 은이 된다고 하지 않나?”

  “은이 금이 되어야 의미가 있잖아, 그래야 내가 킨토키가 되고 이 만화가 ○알이 되니까.”

  “……아니, 그건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어. 오히려 의미라는 녀석을 시궁창에 처박는 결과니까.”

  그래, 여유가 돌아와야 태클을 걸 기력도 생기는 것이다. 정색을 하고 반박하는 히지카타를 간단히 무시하며 긴토키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그나저나 온몸이 부스러지는데도 어째 금구슬 쪽은 건재하는 거 있지. 이게 참 불가해란 말이다. 보통 무슨 일이 터지면 긴토키 씨의 고간에 장착된 암스트롱 포부터 수난이 시작되곤 하거든. 이거 진짜로 금구슬이 은구슬로 바뀌어버렸을지도 모르겠는데……. 좋아, 확인차 한번 사용해보자. 히지카타, 엉덩이 좀 대봐.”

  “네놈은 그 상스러운 뇌부터 부스러진 거냐?! 이런 상황에 뭘 하려고 들어!”

  슬금슬금 히지카타의 허벅지로 기어 올라가던 손이 대번에 멀찍이 내쳐졌다. 그 탓에 본의 아니게 긴토키의 손등이 제법 눈에 띌 정도로 부스러졌기에, 히지카타의 면면에 순간 죄책감이 스쳤다. 히지카타의 반응을 보고서야 긴토키도 아차 싶었는지 곧 얌전해졌다.

  남의 죄책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야 스스로의 몸을 아끼려 든다니, 터무니없는 상냥함이다. 그래, 그런 녀석이었지.

  상태를 보러 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긴토키가 기력을 차렸다면 더 이상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대원들에게만 전적으로 맡길 것이 아니라 저도 정보수집에 손을 거드는 쪽이 좋을 것이다. 슬슬 둔영으로 돌아가겠다며 몸을 일으키는 히지카타에게 긴토키가 돌연 툭 던지듯이 말을 건넸다.

  “믿어, 히지카타 군.”

  무엇을, 이라는 반문은 불필요할 터였다. 다만 사족이 없다는 것이 못내 어색했다. 이 녀석이 하는 말이니 분명 ‘나중에는 꼭 엉덩이를 대 달라’ 따위의 추잡한 말이 따라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긴토키는 뜻밖에도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고, 히지카타는 강렬한 위화감과 함께 처음으로 ‘몸이 부스러지는 것’의 의미를 뼛속 깊이 실감하였다.

  손짓으로 대강 인사를 대신하고 히지카타는 빠르게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지그시 따라붙던 그, 붉은 눈동자. 어둑해진 밤거리 한가운데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 히지카타가 조용히 뒷머리를 매만져보았다. 버석버석하게 말라붙은 긴토키의 시선이 손바닥에 한가득 묻어났다. 이윽고 그것은 잘게 부스러져, 사르륵 떨어져 내렸다.


  긴토키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해결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몸이 드라이버로 바뀌었을 때는 하다못해 범인의 얼굴 정도라도 알고 있었거늘,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니 마냥 아득해질 뿐이었다. 오늘도 이렇다 할 정보가 없다는 내용을 전해 받으며 신파치는 힘없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을 빛내고 있던 카구라도 신파치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는 도로 시무룩해졌다.

  긴토키는 하루하루 차근히 부스러져갔다. 전체적인 윤곽이 얄팍해졌고 왼팔은 거진 부스러져 팔뚝 아래로 소매가 헐렁헐렁하게 비었다. 오른쪽 어깨도 본격적으로 붕괴가 시작되면서 빠르게 마모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오른팔이 소실되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점진적으로 무너져 가는 몸뚱이를 부여안고도 긴토키는 늘 아무렇지 않은 양 굴었다. 카구라와 신파치가 불안해하기 때문이었다. 긴토키는 아직 지키는 자로서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도 어떻게든 꾹 눌러 참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사카타 긴토키를 지키는 방법임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긴쨩, 이것 봐. 긴쨩의 가루는 어쩌면 지우개가루 같은 걸지도 모른다, 해. 잘 뭉치면 팔도 다시 만들어 붙일 수 있을 거다, 해. 이렇게…….”

  어느새 소파에 수북하게 쌓여버린 가루를 한 움큼 쥐며 카구라가 짐짓 장난스럽게 손을 들었다. 모래처럼 버석버석한 가루를 어떻게든 뭉쳐보겠답시고 에잇, 에잇 하며 열심히 주먹을 모으는 꼴이 어째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어김없이 적중하여, 카구라는 결국 손이 미끄러져서는 긴토키에게 가루 폭탄을 날리고야 말았다. 잔기침을 터뜨리며 긴토키가 왈칵 성질을 냈다. “야! 콧구멍에 들어갔잖아! 젠장, 엄청 큰 놈 파내던 중이었는데.” 몸에 이변이 생긴 이후로 ―내색은 하지 않으려 들었지만― 감정표현의 폭이 확연하게 낮아진 긴토키였다. 간만에 듣는 긴토키의 신경질에 무언가 안도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인지, 카구라가 오랜만에 웃음기를 머금더니 곧 끊임없이 가루를 퍼부어댔다.

  “인마, 너 그만 안 해?! 쿨럭, 이거 진짜… 컥, 입에도 들어갔다고!”

  “아, 정말. 카구라쨩! 이러면 청소 다시 해야 하잖아!”

  오랜만에 보는 카구라의 진짜 웃음이 아무리 반갑다지만 그래도 눈 코 입 골고루 가루가 스며드는 것은 제법 아팠다. 콜록콜록 기침을 쏟아내면서도 남몰래 피식거리던 긴토키였으나, 슬슬 눈앞이 희뿌예지기 시작하자 그녀의 만행을 저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긴토키가 따끔따끔한 눈을 비비며 카구라의 팔목을 턱 붙잡았다.

  “요 녀석아, 적당히 좀…….”

  일순, 파삭.

  긴토키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루는 언제나 탁한 흰색이었으니까. 카구라의 팔목을 붙잡는 찰나 엷게 부유하던 희미한 푸른빛의 가루는 긴토키가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그렇기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최악의 가능성이었다. 히지카타가 경고했던 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들은 그 한계치를 알고 싶어 일주일씩을 들여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가다가, 오늘에야 마침내 손이 닿았던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정이 개화하고야 말았다.

  “아.”

  카구라가 작게 탄식하며 긴토키에게 붙들렸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주의 깊게 살펴야만 보일까 싶은 희미한 흔적이었지만, 탄탄하게 잡혀 있던 피부의 윤곽이 미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당혹감 서린 새파란 눈동자가 긴토키를 담는 순간, 무언가에 데인 듯이 긴토키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긴쨩. 무심코 카구라가 팔을 뻗자 그는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닿지 마.”

  ……너무 안일했다. 난생 처음 겪는 괴이한 변고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그 탓에 이런 수상한 증상에도 지나치게 무르게 대응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전염성에 대한 것을 생각했어야만 했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전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첫날 겪었던 지독한 적막에 젖어들어, 기어코 아이들을 말려들게 만들고야 만 것이다. 이것은 제 이기심의 결과이다. 아이들마저 이런 꼴이 된다면, 하물며 그 원인이 저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긴토키가 차차 표정을 경직시켰다.

  “……나가.”

  “자, 잠깐만요. 긴토키 씨!”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나가. 절대로 돌아오지 마라.”

  “긴쨩, 기다려! 나 괜찮다, 해. 그러니까……!”

  “나가랬지!!”

  긴토키의 서슬에 놀란 아이들이 얼어붙었다. 무심코 왼팔을 내밀어 신파치를 밀쳐내려던 긴토키는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이미 그럴 손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허리춤에서 동야호를 빼들었다. 휘휘 목도를 휘둘러 아이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긴토키는 서둘러 문을 닫아걸었다. 얼떨결에 내쫓겨버린 신파치와 카구라가 뒤늦게 쾅쾅 문을 두드렸지만 이미 문은 굳게 잠긴 뒤였다.

  “긴쨩, 나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다, 해! 문 열어줘, 긴쨩!”

  “일단 얘기를 좀 해봐요, 잘못 본 걸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게 어디 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긴토키 씨…!!”

  반대쪽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저희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긴토키가 그동안 어떤 행동을 취해왔는지 끔찍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카구라는 어느덧 울먹이고 있었다. 긴쨩, 긴쨩!!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카구라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신파치가 돌연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신파치는 신센구미 둔영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헉헉거리며 순식간에 둔영 대문을 박차고 들이닥친 신파치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얼굴을 훔쳐내었다. 손등을 흥건히 적시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반라의 상태로 검을 휘두르던 곤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신파치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카구라가, 갑자기 부스러져서, 팔이. 잠깐 붙잡았을 뿐인데, 내쫓겼어요. 문을 열어주지 않아요.

  “그 사람, 분명 또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질 생각이에요.”

  신파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긴토키 씨가 두려워하는 얼굴이라, 무서워요. 붙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희가 다가가기만 해도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도와주세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을 쏟아내던 신파치는 곧이어 기묘한 시선의 다발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신센구미 대원들의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래… 마침 찾아가보려던 참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멀찍이서 귓전을 찔렀다. 어딘가 모르게 여위어 보이는 히지카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사륵거리며 공기 중을 부유하는 하얀 가루가 선명하게 박혔다. 일주일간 소름끼치도록 익히 봐온 그것이었다. 신파치가 아연히 히지카타를 올려다보았다. 무너져가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히지카타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같은 처지인 사람이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신파치는 긴토키의 증상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오열하고 싶어졌다.

  신센구미 대원들이 해결사 사무소를 둥글게 감싸고 행인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동안, 히지카타는 신파치와 카구라만 대동하고 문 앞에 섰다. 쾅쾅, 다소 거친 노크가 문을 울렸다.

  “해결사, 안에 있지?”

  인기척은 분명히 존재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대꾸는 없었다. 히지카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한숨을 내쉬고는 간단히 발을 들어 문을 부수어버렸다. 콰지직,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박살난 문의 잔해를 짓밟고 히지카타가 몸을 들였다. 거침없이 진입하려던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흘끗 뒤를 돌아보더니, 새빨개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경고했다.

  “너희들은 들어오지 마라. 나는 이미 이 모양이라 상관없지만 너희들은 안 돼.”

  “하지만…….”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질겁하면서 너희들을 피하는 이유, 알고 있을 테지.”

  “…….”

  알고 있기 때문에 카구라도 함부로 문을 부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아는 사카타 긴토키라면 저희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는 쪽을 택할 테니까. 신파치와 카구라가 수긍하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자 히지카타가 안도했는지 살짝 웃었다. 그러나 몇 걸음 들이지 못하고 긴토키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던가?”

  여상한 대꾸에 저쪽에서 잠시 할 말을 잃더니, 이내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누가 깡패 경찰 24시 아니랄까봐……. 이거 엄연한 주거침입 아닙니까, 경찰 나리?”

  “불만이 있다면 신고를 하지 그래. 물론 그 신고를 접수받는 것도 나겠지만.”

  “……아무튼 들어오지 마. 정 할 말이 있다면 거기서 얘기해.”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들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히지카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이봐요, 히지카타 군. 듣고 있습니까? 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야, 인마, 죽는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이 자식아. 긴토키가 조금씩 언성을 높였지만 히지카타의 보폭은 늦춰지는 법이 없었다. 긴토키의 수없는 공갈협박에도 불구하고 히지카타는 무덤덤하게 현관을 지나쳤다.

  곧이어 사카타 긴토키를 볼 수 있었다. 채광을 받아 유독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그 사방으로 엷게 퍼지는 희뿌연 가루들. 무너져가는 놈의 형체들. 그는 빗자루로 내몰린 고양이처럼 한껏 구석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 꼴이 퍽이나 우스워 히지카타는 무심코 웃음기를 품었다. 이쯤 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긴토키가 크게 손사래 쳤다.

  “……그래. 좋아좋아. 네가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애라는 건 알겠으니까, 거기서 얘기해. 그 이상 가까이 오면 진짜로 긴토키 씨한테 혼난다.”

  “네까짓 게 뭔데 나를 혼내? 너 거기서 딱 기다려라.”

  “아, 진짜 말 더럽게 안 들어먹네! 가까이 오면 안 된다고!!”

  “빌어먹을, 네가 그러고 있으면 보일 것도 안 보이잖아!!”

  왈칵 신경질을 쏟아내며 히지카타가 달려들었다. 대범한 돌진에 긴토키가 기겁을 하며 동야호를 세웠지만, 히지카타는 날렵한 돌려차기로 간단히 칼끝을 돌려버렸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당도한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팔목을 붙잡아 세웠다. 헉. 헛숨을 들이키며 긴토키가 몸을 경직시켰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히지카타는 한껏 얼굴을 들이대며 으르렁댔다.

  “잘 봐라, 해결사.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멀쩡하네?”

  “멀쩡…… 뭐?”

  도중에 말이 가로막혀버린 히지카타가 순식간에 아까의 기세를 잃었다. 그것은 히지카타뿐만이 아니라 긴토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크게 뜨인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멀쩡하다고…? 그러면 아까 꼬맹이들이 울고불고하면서 분위기 잡던 건 다 뭐가 되는데? 얼떨떨해진 히지카타가 황망해 있는 사이, 긴토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히지카타에게 붙들린 팔목을 흘긋 고갯짓했다. 이것 봐, 히지카타.

  “안 부스러져.”

  “어…….”

  “너 말고, 내가 말이야. 이상하네, 보통 바람만 닿아도 와르르 무너지는데. 어떻게 된 거지? 너 뭔가 해결책이라도 알아온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안 부스러지잖아.”

  “뭐? 너도 부스러졌던 거야?!”

  서로의 사정을 해명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구석에서 버티고 있던 긴토키를 기어코 소파에 앉히는 데에 성공한 히지카타는 우선 제 이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본의 아니게 긴토키의 가루 일부를 마셨다는 것, 정확한 시작일은 알 수 없으나 처음 이 현상을 깨달은 건 오늘 아침이었다는 것, 슬슬 찾아가보려던 참에 마침 신파치가 달려와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뭐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아무래도 원인을 따지자면 아마도 직접적인 흡입밖에 짚을 곳이 없었다. 긴토키는 “그런가…….” 하며 착잡하게 말끝을 흐렸다. 히지카타는 네 탓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애당초 이 상황 자체가 그 누구의 책임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붕괴 현상이 확실하게 나타났던 것은 나와 차이나 걸이다. 나는 네 가루를 흡입했고, 차이나 걸은 너와 접촉했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딱히 이상이 없어 보여. 가능성은 둘이다. 지금은 잠복기로 추후에 발병하든가, 또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든가. 지금은 후자이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

  “전염의 원인은…… 당장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건 흡입뿐인가. 카구라도 나와 생활하면서 가루를 들이켰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직접적 접촉은 원인이 아닐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전염이 가능하다는 걸 인지했으니 이런 리스크를 안고 누군가를 함부로 접촉시킬 수는 없어. 너도, 그리고 나도. 이제부터는 격리생활이겠군.”

  “……그렇게 되면 남은 문제는.”

  “왜 우리 둘이 근접하면 부스러지지 않느냐, 다.”

  간략한 실험의 결과, 서로의 1m 정도 이내에 있으면 몸의 붕괴 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범위를 넘어가는 순간 멈췄던 시계가 돌아가듯 몸체는 평소대로 사르륵 부스러졌다. 히지카타는 제 몸에 흡입된 가루와 본체간의 접촉으로 인해 서로의 결핍이 메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스스로도 별로 설득력 없다고 생각되는 의견을 제시했고, 어차피 원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긴토키도 그냥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곱씹어보면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제 결핍을 메우기 위해 존재하는 그 녀석,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히지카타 토시로. 서로에게 있어 필수부가결의 존재. 같은 처지의 길동무가 생겼다는 점은 더없이 괴로웠으나, 어찌 되었건 고독은 순식간에 물러갔기에 긴토키는 빠르게 정신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본래 외로움과 적막이야말로 사람을 좀먹는 가장 큰 원인인 법이다.

  긴토키와 함께 히지카타가 해결사 사무소에 함께 머무르기로―격리 수용되기로― 결정되었음에도 카구라는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저도 긴토키의 가루를 마시고 긴토키와 함께 있겠다며 우겼는데, 긴토키가 직접 나서서 딱 잘라 막았다. 애당초 남을 말려들게 하지 않기 위해 알아서 문을 닫아걸었던 것이니만큼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문 너머의 카구라를 향해 긴토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 말이야, 우주 에일리언 헌터가 되겠다느니 어쩌느니 하지 않았어? 미안하지만 긴토키 씨는 위험한 일은 딱 질색이걸랑. 사망보험도 안 들었는데 같이 어울려줄 생각은 없어. 애당초 네가 평생 내 곁에 매여 살았다간 너네 대머리 아저씨부터가 당장에 내 숨통을 끊으려 들걸.”

  말은 없었지만 어쩐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던 신파치에게도 어김없이 한 마디가 얹혔다.

  “신파치, 너도 마찬가지다. 도장 재건해야 하잖아? 긴토키 씨는 그런 귀찮은 일도 딱 질색이에요. 그런데 내가 그 방해물이 되어 봐라, 당장 네 누나부터 달려들어서 죽어라 잽을 먹이려 들 거다. 너 인마, 내가 오타에의 다크매터에 죽는 꼴을 꼭 봐야만 하겠냐?”

  설득인지 한탄인지 당최 모를 말이었지만 해결사 아이들은 순순히 긴토키의 말에 따랐다. 스스로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어찌 되었건 당장 긴토키의 붕괴가 멈췄다는 사실에 안심했던 점도 적잖아 있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항변하지 않자 둘은 비로소 한 시름 놓은 얼굴이 되었다. 긴토키는 얼른 내려가서 잠이나 자라며 퉁명스레 축객하였으나 아이들은 한참을 더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밤이 깊어서야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긴토키와 히지카타의 본격적인 격리생활이 시작되었다. 구두로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모양새가 영 좋지 못해서 바깥과의 연락은 보통 전화로 통했다. 이따금씩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어디까지 접근해야 안전할지 알 수 없으니 종이를 묶은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져 넣는 식이었는데, 고의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굉장히 잦은 빈도로 긴토키의 안면을 강타하곤 했다. 코피를 주르륵 흘리면서 마구 신경질을 내는 긴토키를 보며 히지카타는 한참을 웃었고, 며칠 뒤 히지카타도 야마자키가 던져 넣는 결재서류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긴토키의 비웃음을 샀다.

  전염보균자로 수용된 사람에게 서류작업이라니. 퍽 잔인한 처사라고는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부장의 날인이 없으면 처리 자체가 되지 않는 일이 제법 되는지라 신센구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야마자키는 매번 죄송스럽다는 얼굴로 문 앞에 서류철을 내려놓았고 히지카타는 여상하게 펜을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환자 비슷한 취급이었기 때문에 평소 처리하던 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었다. 그 증거로, 해결사 사무소 근방을 얼쩡거리는 대원들의 손에는 보통 서류보다는 마요네즈가 들려 있기 일쑤였다. 부장의 안위가 걱정된 대원들은 드문드문 마요네즈를 지참하여―마요네즈가 없으면 일이나 하라고 화를 낸다― 안부를 물었고, 곤도 역시 발품을 파느라 바쁜 와중에도 하루 한 번은 반드시 얼굴도장을 찍곤 했다. 다만 오키타만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사무소 자체에는 이따금 들르는 모양이었으나 격리된 두 사람과는 도통 만나려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화를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토시, 네 전염에 죄책감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꼽자면 역시 그의 재채기밖에 없었으니까. 곤도가 난처하게 턱을 문질렀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핏발 선 눈으로 사방팔방 들쑤시고 있어. 꽤 위험한 곳까지 손을 대는 모양인데…… 도무지 말릴 수가 있어야지.”

  히지카타는 쓰게 웃었다. 아무도 그 녀석을 탓할 리가 없었다. 오키타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은 히지카타가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았다. 저만 해도 해결사 아이들이 갓 찾아왔을 때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못 느끼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무리 제가 괜찮다고 말한다 한들, 결코 괜찮아질 리가 없는 뻣뻣한 녀석이라는 것도 히지카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은 성과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 없이, 긴토키와 히지카타는 무너지다 만 몸을 유지한 채 조금씩 새로운 일상에 녹아들고 있었다. 카구라도 첫 날 이후로 지금까지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알려 와서 제법 마음이 느슨해진 것이다. 당사자 두 사람이 여유를 되찾자 주변인들도 한결 편안해졌는지 조금씩 특별취급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무관심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또 다른 일상에 적응했다는 의미이다. 매일같이 안달하며 근처를 기웃거리던 아이들은 이제 스낵바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고, 신센구미 대원들이 가져오는 마요네즈와 서류철의 비율이 차차 뒤바뀌었으며, 오토세와 오타에는 더 이상 후식으로 파르페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 이건 역시 조금 서글프다. 며칠 만에 들른 츠쿠요가 문 앞으로 밀어준 딸기 파르페를 입에 넣으며 긴토키가 오래간만의 행복을 만끽했다. 히지카타도 내심 섭섭했는지 서류를 대충대충 넘기다가 때마침 사이토가 가져다 준 마요네즈 다발을 한아름 안고서야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오토세가 올려다주는 식사를 마치고, 긴토키가 그 주의 점프를 읽고, 히지카타가 주어진 서류를 처리하고 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해진 둘은 자연히 몸의 현상을 규명하는 데에 열중하게 되었다. 가장 첫 번째로 제시된 난관은 장애물의 유무에 따른 변화이다. 과연 문이라는 장애물이 존재해도 몸의 붕괴는 멈추는가? 이는 화장실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생리현상에 의해 제시된 안건으로, 이미 첫날에 일찌감치 실험을 자행했던 바였다. 다행히 문에 가로막혀도 1m의 거리만 유지되어 있다면 괜찮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더랬다. 그 탓에 누군가가 볼일을 보려면 다른 한 사람은 문 앞에서 대기해야만 한다는 다소 민망한 광경이 연출되었지만, 같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난리법석을 떠는 것보다야 훨씬 사정이 나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라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긴 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둘씩 저희들의 이상 현상을 해명해가기 시작했다.

  시간대에 따라, 기온과 날씨에 따라, 착의상태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그리고 또……. 수없이 많은 변인을 움직여가며 긴토키와 히지카타는 서로의 몸에 기복이 있는지를 살폈다. 결론은 오로지 하나였다. 몸이 부스러지지 않는 조건은 단지 서로의 1m 이내에 머무르기만 하면 족했다. 깔끔하게 정의를 내리고 나자 이제는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둘은 한가롭게 몸이 부스러지기 이전처럼 가벼운 말다툼을 벌였다. 그것은 곧 멱살잡이로 번졌고, 이윽고 짙은 스킨십으로 이어지곤 했다. 맥락이 이상하다고? 딱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연인이었고, 반드시 곁에 있어야만 하는 필연성이 마련되었으며, 이 넓은 공간에 오로지 둘뿐이었다. 신체가 닿으면 원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온기가 필요했다.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오른손뿐이 남지 않은 팔로 긴토키는 곧잘 히지카타를 안았다. 히지카타는 거부하지 않고 연인의 얄팍해진 목을 끌어당겼다.

  허리띠를 풀고 키나가시를 스르륵 떨어뜨리면 반소매 아래로 텅 비어버린 왼팔이 드러났다. 히지카타는 소실된 단면을 가만가만 쓸어내며 말을 삼켰다. 그것은 정말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살갗 특유의 매끄러움도 내피 특유의 축축함도 없는, 버스럭거리는 인간의 신체. 모래뭉치를 어설프게 굳혀놓은 것만 같은 촉감은 손톱으로 가볍게 긁어내기라도 하면 그대로 부스러질 듯하였다. 히지카타가 조용히 긴토키의 왼팔을 더듬는 동안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유카타를 걷어 올려 오른다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붕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핏 보기에는 멀쩡한 모양새였지만, 왼쪽과 나란히 두면 확연하게 오른쪽이 가늘었다. 발목부터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점차 종아리로 타고 올라갔다. 히지카타의 다리는 아직 피부 특유의 보드라움과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군데군데 좀먹힌 듯이 손가락에 걸리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둘은 동시에 한숨을 뱉어냈고, 이어 키스했다.

  그렇게 한 달째.

  사카타 긴토키는 오랜만에 제 몸이 부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변기에 앉아 있던 사카타 긴토키는 한참을 제 눈을 의심했다. 팔뚝을 타고 굴러 떨어지고 있는 탁한 흰빛의 가루는 틀림없이 제 몸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긴토키는 가급적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 히지카타 군?”

  “왜.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변비냐?”

  “아니…… 너 지금 거기에 있는 거 맞지?”

  “엉? 당연하잖아, 내가 무엇 때문에 네놈 볼일 보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여기에 서 있는데.”

  확실히 무뚝뚝한 음성은 분명히 문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긴토키는 다시 제 오른팔을 곁눈질했다. 미세하지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어깨에서부터 부스러지고 있었다. 긴토키가 다시 침묵을 지키자 무언가 미심쩍은 구석을 느꼈는지 히지카타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무슨 일 있는 거냐?”

  그렇게 말하는 걸 보아, 히지카타의 몸에는 아직 이변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는 애당초 하루 정도밖에 부스러지지 않았더랬다. 긴토키는 기척이 들리지 않게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문에 한껏 몸을 붙여보았다. 그제야 사르륵 사르륵 무너져 내리던 것이 뚝 멈추었다. ……그래, 그런 건가. 긴토키는 크게 한숨을 토해내고, 목소리를 내깔았다.

  “아주 심각한 일이 일어났어.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아.”

  “……뭐, 뭐야. 정말로 뭔가 있어?”

  “잘 들어, 히지카타.”

  긴토키가 진지하게 속삭였다.

  “나 진짜로 변비인 모양이다. 10분만 더 기다려줘.”

  3초의 정적 끝에, 히지카타가 짜증스럽게 문을 걷어찼다. 빌어먹을 천연파마! 쓰잘데기 없는 일로 분위기 잡지 마, 진짜로 긴장했잖아!! 한 번 걷어찬 것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으로도 몇 번이나 문을 후려친 후에야 히지카타가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양새가 퍽이나 귀여워 그는 내심 큭큭 웃었다. “장난이야, 장난.” 긴토키는 그대로 물을 내려버렸다.

  히지카타보다 앞서 붕괴를 깨닫고, 그 시간부로 긴토키는 전력을 다해 히지카타에게 달라붙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런 몸이 되고부터 제법 긴토키와의 스킨십에 적극적이 된 히지카타가 기어이 질색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식사를 할 때는 허벅지가 맞붙는 거리에 밀착했고, 서류작업을 할 때면 뒤에서 폭 끌어안았으며, 할 일 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있을 때는 팔다리를 얽어 한껏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가슴팍을 밀어내는 정도로 저지하려 들었던 히지카타도 이것이 하루 종일 꼬박 이어지자 슬슬 신경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적당히 좀 해라, 네가 찰거머리냐?”

  “에이~, 섭섭한 말 하지 마. 다 히지카타 군이 좋아서 이러는 거야.”

  “성희롱하는 직장 상사 같은 말 하지 말고 저리 치워. 아까부터 끈덕져서 불편해 죽겠다고.”

  “뭐, 직장 상사가 성희롱을 해? 고릴라냐? 고릴라가 그런 거냐?!”

  “곤도 씨는 그딴 짓 안 해, 멍청아! 너 진짜 할복시킨다!!”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긴토키의 팔을 떨쳐버리고 히지카타가 벌떡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간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앞서 걸어가는 히지카타를 서둘러 뒤따라가던 긴토키는, 그가 화장실 문을 닫으려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황급히 발을 끼워 넣었다. 히지카타가 문틈 사이로 미심쩍은 눈빛을 던졌다.

  “……뭐냐?”

  “아, 아니… 그게 말이야.”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긴토키가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가…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

  “…….”

  “아, 아니! 딱히 이상한 뜻은 아니고!! 그냥 뭐랄까… 히지카타 군과 1분 1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

  “……안 돼?”

  Q. 애인이 내가 볼일 보는 걸 구경하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스카톨로지 변태네요, 당장 헤어지세요.

  히지카타의 뇌내에서 짧은 문답이 이루어졌고, 이윽고 그는 짜게 식은 눈으로 활짝 문을 열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아하하, 역시 히지카타 군도 나랑 떨어지기 싫었구나~. 되지도 않은 말을 씨부리며 슬그머니 발을 들이려는 긴토키의 정강이를 걷어차서 발라당 넘어뜨리고 히지카타는 도로 화장실 문을 닫아걸었다.

  “자, 잠깐만? 히지카타 군?!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 다 특별한 사정이…… 아니, 물론 아무 일도 없지만? 맹세코 아무 일도 없지만 말이지?! 어쨌든 안에 같이 들어가게 해 주면 안 될까?!”

  문 밖에서 요란법석을 떠는 긴토키를 무시하며 히지카타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 자식, 이렇게 붙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빌미로 제 이상성욕을 나한테 풀려고 드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을 투덜거리며 그가 유카타 자락을 헤치려던 찰나였다.

  익숙한 흰 빛깔이 새까만 천 위로 점점이 묻어나 있었다.

  히지카타는 대뜸 문을 열어젖혔다. 별안간 열리는 문에 이번에는 얼굴을 강타당한 긴토키가 또 다시 나동그라졌다. 새빨개진 코를 문지르며 그가 당황했으나, 히지카타는 가차 없이 멱살을 쥐고 긴토키를 끌어올렸다. 곁눈질로 확인한 긴토키의 몸은…… 부스러지지 않는다. 과연, 그렇군. 온종일 필사적으로 제게 들러붙어대던 긴토키의 행적을 반추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납득해버렸다. 히지카타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해결사, 내게 할 말이 있을 테지.”

  “어… 글쎄. 난 스카톨로지 취향 같은 건 없다는 말 외에는 딱히?”

  “멍청하긴, 이런 걸 내게 숨겨서 어쩔 셈이야. 평생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을.”

  “…….”

  긴토키는 난처하게 뒷머리만 긁적였다. 그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고, 그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히지카타도 구태여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다만 씁쓸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뭐든 혼자서 짊어지려 드는 건 그만두지 그래. 그제야 긴토키가 멋쩍게 웃었다. 미안. ……응, 미안해.

  한계거리였던 1m는 차차 줄어가고 있었다. 몸이 부스러지기 시작할 때처럼 조금씩 그 속도를 높여가면서. 그것은 주변 사람들의 특별대우가 재개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파르페가 없어서 울적했던 일전과는 달리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저희들이 다시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유쾌하게 웃었고 짐짓 장난스럽게 굴었으나 물밑에 깔린 은근한 배려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상태의 일변을 알리고부터 며칠이 지나자 마침내 오키타와도 대면할 수 있었다. 해결사 사무소에 격리되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봐야 저 멀찍이서 창밖으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 정도였지만. 오키타는 마치 시체를 연상시키는 핏기 없는 얼굴로 이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히지카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새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옷자락만 꽈악 움켜쥐었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히지카타는 그저 웃어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저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연히 그 미소를 바라보던 오키타는 곧 새빨개진 눈을 하고 뒤돌아섰다.

  어느덧 저희들에게 허용된 거리는 고작 한 뼘이었다. 팔이 아니라 새끼손가락만 뻗어도 닿을 법한 실로 인색한 간격이다. 오키타와 면대한 이후 히지카타는 내심 우울해져서 웃음기를 잃었다. 긴토키의 어깨에 기대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서류만 팔락이던 그는 결국 피곤하다며 초저녁부터 일찍 잠을 청했다. 히지카타가 수면을 원한다면 긴토키도 이불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자. 히지카타. 긴토키가 부드럽게 히지카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점차 고르게 녹아드는 히지카타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긴토키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긴토키는 조심조심 둘러져 있던 팔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조그마한 인기척에도 즉각 깨어나 검을 움켜쥘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제 말마따나 지쳤던 모양인지 쉬이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긴토키는 조용히 제 오른손을 살폈다. 히지카타와 살이 맞닿아 있음에도 그의 손끝은 조금씩 문드러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면 아마 히지카타도 내일쯤에는 부스러지기 시작할 것이다.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아마 오늘로 마지막이다. 히지카타 토시로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예민했다. 오늘이 지나면 그는 다시 명징한 정신을 되찾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긴토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재빠르게 알아챌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뿐이다. 긴토키는 깊이 잠든 히지카타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벌어져 있는 입술에 제 엄지를 눌렀다. 부드럽게 입술을 훑던 손가락이 살짝 진입하여 앞니에 부딪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륵 부스러졌다. 긴토키의 가루가 히지카타의 입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세상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녀석과 가까운 장소에서, 스러지지 않고 줄곧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히지카타가 더 이상 부스러지지 않게끔 막기 위한 최초이자 마지막 시도였다. 범위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면 아예 한 몸으로 일치되어버리면 될 터였다.

  히지카타 토시로라면 결코 이런 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사카타 긴토키가 정말로 히지카타를 위한다면, 이런 형태로 그의 생을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긴토키는 히지카타가 살아가기를 원했다. 가능한 오래오래, 영원토록 그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설령 저를 짊어져서라도.

  모두가 잠들어 있는 적요한 새벽,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받쳐 안고 아무도 모르게 제 모든 것을 히지카타에게 쏟아 부었다. 사실상 강제로 떠맡기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히지카타는 결국 자신을 끌어안아 줄 터였다. 그는 히지카타를 믿고 있었다. 생애 최후의 순간 시야에 담기는 연인의 모습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긴토키는 삐걱이는 몸으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고,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히지카타 토시로는 눈을 떴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히지카타가 몸을 일으켰다. 모래밭에서 구르기라도 한 듯 온몸에 미세한 알갱이들이 기어 다녔다. 이유 모르게 입안도 텁텁하여, 히지카타는 까끌거리는 혀를 내두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잔상처럼 어른거리는 흐릿한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가 이내 흩어졌다. 전혀 모르는 정경이었다. 그리고 모래폭풍처럼 몰려드는 기억이 있었다. 기억, 너의 기억. 사카타 긴토키의 기억. 녀석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뇌리를 스쳤다. 미안해, 히지카타 군. 겸연쩍게 웃는 긴토키의 면면이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너는 결코 바라지 않았겠지. 그 녀석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럼에도,

  네 삶이,

  영원하기를.

  “아…….”

  히지카타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뒤죽박죽 머릿속이 뒤엉켰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히지카타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히지카타의 절규가 새벽의 고요를 찢었다. 귓전에 닿는 끔찍한 비명소리에 오토세의 스낵바에서 쪽잠을 자던 사람들이 퍼뜩 깨어나 뛰쳐나왔다. 득달같이 2층으로 달려온 곤도가 가장 먼저 문을 열어젖혔다. 토시! 무슨 일이야, 토시!! 대답 대신 숨이 끊어질 듯한 비명이 바닥을 기었다. 한 발 늦게 위층에 당도한 오키타가 곤도를 지나쳐 사무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를 필두로,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사무소에 밀고 들어갔다. 꼬박 한 달 만에 밟는 해결사 사무소였다.

  “히지카타… 히지카타 씨!”

  히지카타는 방 한가운데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웅크리고 있었다. 괴롭게 신음하던 그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부터 시작하여 온몸이 하얀 분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루투성이 입술로 히지카타가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기, 긴……. 핏발 선 눈으로 부들부들 입술을 떨던 그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히지카타 씨!! 전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오키타가 서둘러 달려가 히지카타를 받쳐 안았다. 타인의 손길이 다소 강하게 부딪혔음에도 히지카타의 몸은 부스러지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오키타가 별안간 눈을 홉뜨더니, 늘어져 있던 히지카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멍이 들 정도로 센 악력이었음에도 그의 피부는 뚜렷하게 윤곽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신에 얼룩진 하얀 가루, 더 이상 부스러지지 않는 신체, 그리고 사카타 긴토키의 부재.

  그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온통 산발인 머리로 몇 발짝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아이들 역시 벼락같이 상황을 인지하였다. 히지카타의 몸을 덮고 있는 가루가 누구의 것인지, 사카타 긴토키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해결사 아이들이 망연하게 초점을 잃었다. 카구라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신파치는 입을 틀어막고 새어나오는 신음성을 간신히 억눌렀다. 제 목을 쥐고 헐떡이던 히지카타의 눈동자가 위태로이 허공을 더듬었다. 이윽고 아이들의 그렁그렁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히지카타는 의식을 놓았다.

  “토시!!”   “히지카타 씨!”

  곤도와 오키타가 급하게 히지카타를 들쳐 업었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끅끅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질근거리다가, 괴롭기 짝이 없는 낯으로 히지카타를 데리고 서둘러 해결사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히지카타는 꼬박 3일을 내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잠든 내내 악몽이라도 꾸는지 묘한 단어들을 중얼거리며 식은땀에 흠뻑 젖어들었다. 깨어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손톱을 세우고 바닥을 긁어내렸다. 시트에 머리를 처박고 괴롭게 신음하던 히지카타는 이내 제 몸을 온통 쥐어뜯으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자해에 가까운 그 몸짓을 막기 위해 대여섯 명의 대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붙들었고, 한차례 난리를 벌이고 나서야 겨우 안정하였다. 진이 빠진 듯 멍하니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히지카타에게 야마자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흰죽을 내밀었다. “부장, 일단은 뭐라도 좀 드세요. 이러다간 정말로 몸 상해요.” 히지카타는 퀭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수저를 쥐었다. 그러나 한 입 가져가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에 견디지 못하고 바로 수저를 내던졌다. 그는 무엇인가를 토해내고 싶은 양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욱욱거렸으나, 끝내 아무것도 게워내지 못하고 눈만 질끈 감았다.

  히지카타는 더 이상 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때로 토악질하여 신물을 뱉어내었으나 그마저도 곧 사그라졌다. 이후로는 식음을 전폐한 채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괴로이 호흡하던 히지카타는 5일째 저녁에야 처음으로,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냈다. 초췌한 얼굴에 형형하게 안광을 태우며 그가 명령했다.

  “전부 나가.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그렇게 굳게 닫힌 부장실의 방문은, 정확히 일주일이 되는 날 스스로 벌컥 열렸다.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부, 부장?! 당황을 넘어 기겁을 한 그들이 황망히 눈동자를 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신센구미의 귀신부장이었다. 그동안 해쓱하게 앓았던 나날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양 그는 깔끔하게 제복을 차려입고 담배를 물고 있었다. 진짜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얼떨떨하게 저를 살피는 시선에 히지카타가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뭐냐, 너희들. 일 안 해? 부장실 앞에서 땡땡이라니 배짱도 좋구나.”

  히지카타가 담배연기를 훅 뱉어냈다.

  “전원 사도불각오로 할복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히지카타 토시로는 되돌아왔다. 일주일간의 절망이 환상이라는 것처럼, 한 달간의 이변이 꿈이라는 것처럼. 히지카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해갔다. 사카타 긴토키의 존재가 소실된 세상의 새로운 일상을. 지난 한 달간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히지카타가 긴토키를 잊고 싶은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확실히 끌어안고 살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잔혹한 기억이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그는 한 사람을 먹어치우고 살아남았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히지카타를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긴토키와 관련된 키워드를 지극히 삼갔다. 다만 히지카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히지카타 토시로는 망각이라는 속 편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토시는 누군가를 잊으려 들 만큼 처세가 좋은 녀석이 못 돼. 하지만 그 녀석이 이 일을 언급하지 않기로 정했다면, 필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터. 나는 토시를 믿는다.”

  곤도 이사오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야마자키 사가루 역시 비슷한 견해였기 때문에 히지카타의 위화감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오키타뿐이었다.

  오키타 소고는 조심스럽게 히지카타의 방문을 열었다. 드물게도 성실하게 노크까지 남기며 그는 얌전히 방 안에 몸을 들였다. 한창 서류철과 씨름 중이던 히지카타가 천천히 펜을 놓았다. 히지카타의 주의가 제게 쏠리자, 오키타는 뻣뻣하게 입을 열었다.

  “히지카타… 씨.”

  “오. 네가 웬일이냐?”

  “……무슨 일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사이입니까, 저희가.”

  그래봐야 보통 히지카타에게 위해를 끼치기 위해 제멋대로 뛰어든 것이 대다수였지만 오키타는 괜히 불퉁거리며 대꾸했다. 히지카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멍청아. 네가 웬일로 이렇게 얌전하게 들어오는지를 묻는 거다. 더더욱 할 말이 없어져서 오키타는 고개를 수그렸다.

  히지카타는 길게 침묵하다가, 빙긋 웃었다.

  “그래. 용건은?”

  “……할 말이, 아니. 해야만 하는 말이… 있습니다.”

  “…….”

  오키타가 짧게 심호흡했다. 거진 한 달을, 그는 몸을 축내가며 필사적으로 제가 엎질러버린 물을 주워 담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손가락이 죄다 부르트도록 땅을 할퀴어 봐도 이미 쏟아진 물은 도로 손에 쥐어지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감히 무슨 말을 올릴 수 있을까. 오키타는 제가 속죄하면 히지카타가 반드시 그를 용서하고 다독여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런 어쭙잖은 위안으로 눈을 가릴 만큼 썩지는 않았다.

  “나… 사과 같은 건 안 해요. 어차피 당신들도 받으려 들지 않았을 테지.”

  원망조차 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영원토록 후회하고, 평생을 죄책감에 잠식돼길 바랐다. 그가 망가뜨린 두 사람의 무게가 숨이 멎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목을 옥죄기를. 그것이 오키타 소고 나름의 속죄였다. 히지카타의 그림자에서 사카타 긴토키를 보며, 아둔하기 짝이 없던 과거의 자신을 언제까지나 책망하는 것.

  “당신이 더 이상 이 일을 반추하고 싶지 않다면, 좋아요. 나는 무엇이든 당신 의견에 따를 거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묻게 해 줘요.”

  히지카타를 똑바로 응시하며 오키타가 물었다.

  “당신, 괜찮은 겁니까?”

  “……뭐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단 말이죠. 그렇다고 뭔가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아. ……당신, 형씨를 먹은 거죠?”

  뼈아플 정도로 묵직한 직구였다. 히지카타가 잠시 호흡을 멈추더니, 떨리는 숨과 함께 대답을 불어냈다.

  “……그래.”

  “당신 정말로, 제정신인 거예요?”

  생기 없는 눈동자가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했다. 오키타는 미세한 변화 하나라도 잡아내려는 기세로 히지카타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응대는 너털웃음이었다. 히지카타가 어처구니없다는 양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유감이군, 나는 지극히 제정신이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히지카타가 되물었다.

  “그렇다면 넌 내가 그 녀석을 따라 죽기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아니면 언제까지고 절망에 사로잡혀 방구석에서 허우적대는 게 옳다고 봐? 아니, 그건 녀석이 바라는 바가 아니야. 나는…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영원토록 녀석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지. 그 녀석은 내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내게 스스로를 맡겨버렸어. 나는…… 이에 부응할 수밖에 없어.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갈 거다. 내가 그 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아, 그런가. 오키타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랬다, 히지카타 토시로는 이렇게나 강한 사람이었다. 사카타 긴토키가 자신을 맡긴 것도 히지카타 토시로를 믿고 있기 때문일 터. 아무래도 그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오키타는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됐어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곤도 씨가 걱정하고 있으니 적당히 하고 가서 얘기 좀 나눠보시죠. 상태가 괜찮아지면 국장실로 오라더군요.”

  “처음부터 나는 멀쩡했다니까…… 뭐, 됐다. 그래서 고릴라가 어디에 있는데?”

  “국장실에……, 뭐?”

  일순 스쳐지나가는 위화감에 오키타가 무심코 말끝을 삼켰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히지카타가 재차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고릴라 우리가 어디냐고 묻잖아.”

  오키타 소고는 히지카타를, 혹은 그 속에 담긴 또 다른 누군가를 보았다. 오키타가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 누구야.”

  그가 의아한 듯 오키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느릿하게 시선을 맞춘 히지카타 토시로는, 사카타 긴토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하잖아, 오키타 군.”

오키타 소고는, 난생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그는 사카타 긴토키라는 존재의 거대함에 질식할 듯이 가쁘게 호흡하며 황망히 입술을 떨었다.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뇌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한 명분이다. 그 이상의 용량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계치 이상의 기억을 수용해버린 뇌는 기어이 내용물이 흘러넘칠 터이다. 그렇다면 넘쳐버린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 히지카타는 사카타 긴토키의 기억을 내칠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긴토키라는 존재를 짊어지기로 다짐했기에, 쏟아져 내리는 스스로의 자아를 느끼면서도 아등바등 긴토키를 끌어안고야 말았다.

그는 타인의 기억에 먹힐 만큼 약하지 않다. 히지카타는 결코 긴토키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요도 무라마샤에게서 기어이 자아의 주도권을 되찾았듯이, 그는 사카타 긴토키가 살아갔던 서른 해를 꼬박 들여, 자신의 뇌 속에 타인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점차 다져나갈 터였다. 언젠가 그는 긴토키의 기억을 모두 소화해내어 히지카타 토시로라는 개인으로서 온전히 설 것이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수십 년 간 두 명분의 기억이 혼합된 인격체가 과연 본래의 객체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히지카타는 긴토키가 제 안에 담겨 있기를 원했다. 비록 자신을 잃더라도 가능한 오래오래, 사카타 긴토키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흘러넘치는 기억을 끌어안고, 부스러지는 자아를 부여잡으며, 그 존재를 영원토록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그만이 온전한 사카타 긴토키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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