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여성주인공의 계보 (5) 完

4세대, 그리고 5세대

4세대 :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

4세대는 로맨스 판타지로 명명되고 난 이후부터 2015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 세대를 생각하면 여러 회한이 드는데... 로맨스 판타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이게 절대 생각했던 대로 여성주인공 판타지로 남지 않을 거란 강렬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주인공의 모험물에 로맨스 서사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건 별 상관 없다. 하지만 이름에 로맨스가 들어가게 되면 로맨스 서사를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여성들의 대리만족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되는 지점 중 하나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여성에게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관리자나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라고 할 때 기본적으로 남성을 생각하는만큼 남성에게 권력을 주길 선호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소하게는 같은 돈을 내고 식당에서 같은 요리를 시켜도 여성에게는 덜 주는 가게도 많지 않나. 이런 판국에 동일노동 동일임금 또한 꿈 같은 말이며 투표권을 엄연히 쥔 채 휘두르고 있으나 특정 정치세력은 아예 무시한다.

그런 현실의 여성이 실생활에서 권력의 부스래기라도 느끼려면 가족구성원에게 사랑을 받아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던가, 연인 관계를 통해 폭력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대리해 적극적으로 나서줄 남자친구를 원하기 마련이다. 개처럼 껄떡대던 놈이 아무리 의사표현을 해도 무시하고 질척대다가도 남자친구의 존재를 확인하고 도망가는 꼬라지를 살면서 보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가부장제 안에서는 남성에게서 사랑을 받아야 권력이 생긴다고 착각하면 살기 편하긴 하다. 그래서 사랑 받는 모습을 권력으로 자주 묘사하고 말이다. 반대로 말해서, 이 시기의 로맨스 판타지에서 묘사되는 사랑을 보면 얼마나 여성독자층이 사랑에 깊은 불신을 품고 있는지 짐작이 온다. 

이 시기에 황녀물이 유행을 선도한 이유도 심플하다고 생각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구조상 절대 권력에 제일 가깝고 신분제 사회 안에서 높은 지위를 타고난 여성이니 기본적으로 존중받는다. 게다가 망한다 해서 삶이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하고 위험해지지도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황족이랍시고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한다고 현대 빈곤층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위협이나 노골적인 물화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일부 하긴 하는데 선을 지킨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읽다가 도중에 놔버렸지만 예시를 아예 안 들 수는 없으니 '재혼황후' 얘기를 하자면 주인공 나비에와 라스타를 대하는 독자의 온도차에서 독자의 성향이 로맨스와는 여전히 다름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는 신데렐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중이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울론 내가 볼 때는는 어쨌든 소비에슈 놈이 기혼자면서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고 다닌 게 문제의 근원이고 신분제 사회 안에서 황제를 거부함 = 죽음인데 라스타의 입장에서 어떤 저항이 가능했는지조차 의문이라 라스타가 부당할 정도로 나쁜 취급을 받는 면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기존의 로맨스와 완전히 달라진 공식이 적용되어있지 않는가. 

보통 로맨스에서라면 주인공이 황제의 사랑을 얻고 황후가 되는 걸 해피엔딩으로 치는데 주인공이 모든 의무를 다 하는 황후로 시작하는데 남편이 불륜질해서 이혼하고 재혼하는 걸로 새 사랑과 인생을 찾는 새로운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보수적인 로맨스에서 먼저 시도하기 어려운 시놉시스이기도 했다. 전형적인 신데렐라와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사랑만이 여성을 구원해주는 모습을 회피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맨스 서사가 진하긴 하지만 로맨스보다는 젊은 여성들의 사고관에 가까운, 하지만 모험물에서는 많이 멀어진 시기로 4세대를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낭만적이거나 운명적인 사랑이 여성을 이 세상에서 구원해준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로 일종의 환상으로 추종하게 되는 과도기적 성향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뭐 이 시기를 열심히 독파하신 분들이 더 잘 알 테지만 내 경우엔 이런 요인들 때문에 놔버린 거기도 했다. 로맨스는 불안과 확인의 서사라는 말대로 로맨스에서는 여성이 혼자서 온전해선 안 되는 장르적 특성이 있달까... 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 게 연애인데 미디어 안에서 비춰지는 여성은 끊임 없이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싶을 때가 있어서 안 좋아한다. 

특히 포르노 목적의 로맨스 쪽은... 거의 못 본다. 관련한 비평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이유다. 조금만 여성에게 위협적인 상황이 되면 실제 범죄 사례가 생각나서 그렇다. 당사자도 아니고 공부만 했는데도 이리 단단히 트라우마가 박힐 정도이니 혹시 자신이 만드는 창작물의 일부 유해한 장면이 비슷한 피해를 본 적 있는 당사자들에게 보여졌을 때 어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도 반드시 한 번은 생각해보고 포르노 목적이면 19금을 예쁘게 잘 달자. 이 권유가 낯설다면 트라우마 트리거에 대해 가볍게 찾아보길 권한다. 논의 자체는 기존부터 있었다. 

5세대 : 페미니즘 대중화

2015년쯤부터 일상에서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엔 페미니즘 용어를 꺼내면 아무도 몰라서 ?? 상태인 사람을 앞에 두고 차근차근 설명해야했는데 아주 조금씩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 전부터 여성혐오범죄와 여성인권 얘기를 해왔지만 이걸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하는 시대가 오기 시작하니 좀 뭐랄까... 진심으로 세상이 변하고 있는 걸 느꼈달까 인류를 아예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얻었달까 망망대해에 단체 표류하다가 드디어 몇몇 구조선이 육지로 항로를 잡는 걸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내겐 그랬다. 

인식이 나아지니 자연스레 현실의 문제에서 시선을 공연히 돌리지 않게 된다. 그렇게 예전엔 묻혔을 사건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미투운동, 버닝썬 사건, N번방 사건, 숙대 입학 거부 사건 등등 많은 일이 있었다. 이런 사건들과 유사한 일들이 예전이라고 없던 건 아니다. 그저 그동안은 묻혔다. 

메갈리아 얘기로 시작해보자. 메갈리아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혐오에 당사자인 여성들은 그저 부정하며 자기검열로 반응했다. 그러다 폭발한 게 바로 이 메갈리아다. 이 갤러리로 몰려온 유저들은 그저 홧김에 '미러링'을 했다. 이게, 솔직히 너무 유쾌했다. 유쾌할 수밖에 없다. 된장녀 같은 쌉소리에 짜증나서 반박을 하면 니가 참으란 소리를 그동안 몇 번이나 들었을 거 같은가.

메갈리아 이후부터 여성들은 참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들이 참지 않게 된 이후로 여성혐오사건들이 언론 보도를 타는 빈도와 분량이 늘었다. 그간 흘러왔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사건의 보도는 무미건조한 척 하기 바빴다. 동기는 살인자의 변명을 고대로 따와서 대충 흘려보냈지 그 변명이 가지고 있는 범죄심리에 대한 해설은 어지간히 심각한 강력범죄가 아니면 붙지도 않았다. 그렇게 점점 더 여성혐오의 심각성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짐과 함께 페미니즘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이 사그라들며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창작자들이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섞기 시작했다. 

여성향으로 묶이는 장르소설 안에서 특히 작가들이 하나 둘 과감한 시도를 하기 시작했고 끝내주는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펜들턴 혁명, 패스파인더, 치트라, 용의 조각, 독신 마법사 기숙 아파트, 다시 피는 꽃, 여왕 쎄시아의 반바지, 그 동화의 끝은 막장 드라마, 남주의 연적이 되어버렸다, 마이 디어 아스터, 던전에서 치킨 냄새가 나요, 순백의 엘리사벳, 악녀를 죽여 줘, 신데렐라를 곱게 키웠습니다, 101번째 여주인공 등등 아직 연재 중인 작품들도 있고 너무 많아서 다 부르기가 힘들 정도다. 

대리만족을 목적으로 한 소설도 엄연히 존재하나 대리만족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모험하는 소설들이 유독 빛나고 있다. 모험물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라서 움츠러들기 마련인 사람들에게 전능감을 돌려준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이 사고와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넓어진 만큼의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여성과 소수자 캐릭터가 멋있게 나오는 건 정말로 중요하다. 어엿한 이 세상의 일원임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방식이니 말이다.

젊은 여성에게 유난히 가해지는 '니들이 생각이 뭐 있어. 연애나 하고 예쁘고 말라 보이는 것 말고 너희는 욕망하면 안 돼.'라는 압력에서 제일 자유로운 컨텐츠가 나오는 게 현 5세대다. 이 세대 또한 시간이 지나야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 정도로만 정리하겠다.

여성주인공의 계보를 작성하게 된 계기는 심플하다. 여성주인공 판타지에서 로맨스 판타지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그 본질은 여성주인공의 모험물이기에 로맨스 장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젊거나 어린 여성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가장 안전하게 키워내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대중의 욕망을 비춰 대리만족을 하는 지점이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게 이 장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잘 하는 것을 뽐내기도 하고 경쟁도 하지만 그 성질이 비정하지는 않고, 현실의 문제점을 비추되 나름의 대처방법이 있음을 주지시켜주기도 한다. 모험도 좋고 연애도 좋고 자본도 좋고 권력도 좋지만 누군가의 아내로 끝나는 게 해피엔딩인 것만은 아님을 주지한 채 여러 종류의 직업과 노동을 보여준다. 

로맨스 판타지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할 수도 없다. 하지만 변화가 빠르다. 이 장르에 있는 작품들이 향유자들의 연령에 상관 없이 사고와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안전한 욕망의 장이 여성들에겐, 그중에서도 특히 젊거나 어린 여성들에겐 주어지지 않아서 더 그렇다. 

긴 글을 따라온 분들께 감사의 말을 남기며 근래 많이 썼으니 조금 휴식을 가질 생각이다. 그럼 이만 줄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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