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잠
그래, 그렇지. 오래도 지났지.
Seoyizi - Windy Garden
잭시, 네가 나가면 안부라도 전해줄래?
“아퀼라, 이 개자식들. 심심하면 지들끼리 놀지, 왜 부수고 지랄이람.”
기름칠 잔뜩 먹은 문짝을 닫고 어두운 현관을 손끝으로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 어디 있더라. 보이지 않는 앞을 대신 굳은살 밴 손가락이 애꿎은 벽만 더듬는다. 자잘한 벽지의 질감과 어슴푸레한 온도, 복도를 타고 기울어지듯 희미하게 떠오른 달빛이 손등에 걸리면. 문득 고갤 들어 바라본 거실은 한밤의 바닷속처럼 푸르스름한 달무리에 푹 젖어있었다. 그 광경이 썩 나쁘지 않아서. 드넓은 창가 너머, 어스름하게 쏟아지는 달빛이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적막을 위안 삼아 힘이라곤 하나 없는 걸음이 소파로 향한다.
풀썩, 소파 옆에 대충 내던져진 겉옷이 구겨진다. 쓰러지듯 그림자 진 소파에 누워 부드러운 천가죽에 얼굴을 파묻으면 짧은 시간 묻어난 체취가 깊게 파고든다. 오래도록 한 자리에 남아 배어난 짙은 밤의 향기와 인공적인 풀내음. 소파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검지와 중지를 휘감아 내려앉을 때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른 무게감 또한 낯익다. 생각해 보면 참 오래 있었지. 끔찍하기만 했던 지옥의 검은 천장에서부터 저들의 소음이 귓가에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던가. 천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톱에 어른거린다. 그래, 그렇지. 오래도 지났지. 찬찬히 끔벅인 눈꺼풀, 곤히 내쉬는 숨소리. 슬슬 돌아가야 할 텐데. 멍하니 중얼거린 목소리는 고요함에 묻혀간다.
―잠깐 선잠에 들었던가. 느릿하게 상체를 올려 시계를 바라보자 어느덧 새벽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누구나 곤히 잠들었을 시각, 3시 45분. 딸깍거리는 초침 소리만이 전부인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한다. 비틀거리는 걸음, 잠에 겨워 쳐진 어깨. 가뜩이나 먼지 가득한 현장에서 굴러다녔더니 목구멍이 매캐하게 메말라있었다. 웃옷을 벗어 소파에 걸쳐놓은 채 불룩한 목울대를 느리게 문지르며 냉장고를 열면, 붕 떠오른 파아란 색감이 눈가를 시리게 감싼다. 겨우 물통 두어 개와 먹다 남은 도넛 하나만 남은 냉장고란 무색하기만 하다. 의미 없이 넓기만 한 내부를 슬 시선으로 둘러보다가 물통 하나를 꺼내 든다. 탁, 플라스틱 뚜껑이 뜯기는 소리. 이내 꼴깍거리며 넘어가는 물은 매캐하던 목구멍을 찬 기운으로 뒤덮는다. 하얗게 샌 수증기처럼.
“이상하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러나 미미한 부유감과 느릿한 머릿속은 여느 밤과 다르지 않다. 차게 가라앉은 목덜미만 만질거리며 반절밖에 남지 않은 물통을 싱크대 위에 올려둔 채, 다시 터벅터벅 걸어 소파 위로 드러눕는다. 소파 쿠션이 눌리고 올라오기까지 누군가의 얼굴이 잠시 흐릿했던가. 새까만 천장, 비릿했던 바닥이 무의식 속에 포말처럼 떠오르고 지면 이내 머릿속에도 밤이 찾아온다. 느릿하게 끔벅인 눈동자가 서서히 노곤한 색으로 옅어진다. 역시 머리는 비우는 게 편하다. 생이란 짧고 유한하기에. 습관처럼 읊조리던 문장은 이제 삶이 되었다. 기나긴 숨을 내쉬며 흉진 팔로 눈두덩을 덮는다. 더는 무겁지 않은 눈꺼풀을 내리감는다. 이제 잠에 들어야지. 무엇 하나 거슬리지 않는 컨디션으로 내일을 살아야지. 애매하고 미적지근한 시간과 곧 떠나버릴 별, 그리고 더는 잠들지 못할 자신. 모든 걸 알면서도 다시금 잠을 청한다. 또다시 깨버리고 말 선잠에.
사실 주소는 잊어버렸어.
아침마다 반짝거리던 바다, 노란 사탕이 새콤했던 가게… 그리고 빨간 벽돌 집이었나.
―자, 잭시. 이제 가야지. 우리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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