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만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아무것도 널 묶어 놓을 수 없다는 듯이.
Acoustic cafe - Tears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또 어디로 가. 죽으면 죽는 거지.
하하, 그건 그렇지. 하지만 아쉽잖아.
―그래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이었음 좋겠다.
“오늘은 이걸로 끝.”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때려박힌다. 가슴팍이 벌어질 만치 뻐근하게 차오른 숨을 어떻게든 목구멍 너머로 욱여 넣는다. 한계까지 내몰린 체력과 정신력은 오랜 기간 눌러붙고 굳길 반복한 기름처럼 역겹기만 하다. 질리고 질려버린 감각. 먼지 낀 듯 흐린 시야는 수십 번 닦아내도 깨끗해지지 못할 테고 가시 돋아난 숨은 몇 번을 들이켜도 편해지지 못하겠지. 너절하게 토막 난 호흡을 얼마나 잘라 삼켰을까. 내일이면 다시 요란한 소음과 함께 이겨내야 할 일과였음에도 당장 주어진 휴식이란 달콤한 법이었다. 땀방울이 쉼없이 흐르던 턱을 무심히 닦아 털어내고서 흐리멍덩한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쓸데없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느 하루, 흠씬 처맞아 드러누운 채 새까만 천장을 올려다 보며 떠올린 깨달음이었다. 머리를 비워야 해. 수도 없이 되뇌어 읊으면서도 그때마다 아득해지는 정신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침, 교관의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견뎌낸 ‘오늘’. 손톱과 살갗 사이로 깊숙하게 밴 피는 잠들고 일어나기까지 마르지 않으리라. 젖고, 젖고, 또 젖어버려서.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할까. 과연 저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지조차 알 수 없다.
“잭시, 이제 쉬러 가자.”
누군가의 손이 등을 툭 치듯 앞으로 민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걸음이 마침내 한 발짝 떨어지고 나면 뒤늦게 시야에 나타난 얼굴을 마주본다. 먼저 이 지옥에 처박혀 하루하루 건뎌내고 있는 아이, 윌리 해밀튼. 어둡고 눅눅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을빛 머리칼과 가늘게 휘어지는 녹안, 점점이 박힌 주근깨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 혹은 조금 더 큰가. 지옥 깊은 곳에 빠져 훨씬 오랫동안 빛다운 빛을 보지 못했음에도 그는 어떤 날의 하늘을 품기라도 한 듯 말간 웃음을 짓곤 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그런 윌리의 빛을 동경하며 당장 머리 위 천장보다 허영 같은 하늘을 꿈꾸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앞서가는 윌리를 따라 주춤거리던 여럿이 재빨리 따라붙는다. 우두머리를 쫓아 무리 지은 짐승이나 저리 할까.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제 몫의 무기를 챙기려 고갤 돌린다. 그들을 비웃는 짓도 우스꽝스럽다. 어느덧 나 또한 여느 아이들처럼 윌리의 하늘 한 점을 제 모퉁이 구석에 몰래 묻었기에. 바닥에 널부러진 무기를 챙겨 일어났을 때 즈음, 때마침 윌리의 뒤통수를 가만히 지켜보던 시선과 마주친다. 교관이었다. 우릴 절벽 끝까지 밀어넣고 하찮다는 눈으로 지켜보던 사내. 오래도록 학습된 두려움이 덜컥 올라와 우연찮다는 듯 고갤 틀었으나 시선은 곧 윌리에게서 떨어져 내게 향한다.
“너, 잠깐 이리로.”
들려온 목소리가 가까웠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짙어진 긴장감이 만면에 드러났다. 아직 여물지 못한 얼굴은 숨기는 법을 몰라 못내 떨떠름한 기색마저 비췄을까. 그리 내리깐 시선이 초조하게 떨리면서도 복종에 길들여진 몸뚱이는 여상한 태로 터벅터벅 나아가 선다. 각을 세워 뒷짐 지고, 다리는 어깨 넓이로 굳건히. 턱은 올리나 시선은 내려라. 낙인처럼 새겨진 복종이란 그런 것이었다. 상처 위에 또다른 상처를 기우듯 벗겨낼 수 없는 흉터처럼 남아버린, 교육이란 이름의 사축. 그러므로 감상은 빈약하고 책임은 버겁다. 불복과 망설임이야말로 벌로 다스리기 마땅한 죄였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마주하기 힘든 시선이 교관의 신발코를 비끼듯 옆으로 샜다. 노골적인 시선이 위아래로 훑더니 곧 오른쪽 손목을 잡아 들어올린다. 어른과 달리 아직 성숙하지 못한 몸뚱이가 힘없이 붙들려 그 좋을대로 흔들리자 당황한 기색이 짙어진다.
“아직 패널티라고 할 만한 건 없나.”
도마 위 생선처럼 제멋대로 살펴보던 이가 무심히 손을 놓는다. ⋯아, 패널티. 그제서 유난하던 손짓의 원인을 깨닫는다. 능력이 나타나고 시간이 지나도 패널티라 불릴 만한 증상은 도통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 능력을 개화했을 땐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는데, 능력의 패널티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벼워 조직에겐 물론 내게도 의문으로 남아있는 문제였다. 차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탓에 머뭇거리며 눈치나 살폈을까. 교관이 그만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으면 재빨리 인사하고 서둘러 윌리가 지나간 길을 따라나간다. 그러나 이미 저만치 갔을 거라 예상했던 모습과 달리 윌리는 입구에 등을 기댄 채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천장이나 바라보면서.
“⋯윌리?”
“잭시, 왔구나. 얼른 가자.”
윌리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오랜 기다림을 끝낸 사람처럼 말갛게 웃으며 한달음에 다가온다. 가까워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술이 비죽거렸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서로의 피로 울음을 씻는 이 구덩이에서 기어코 싹을 틔운 이파리처럼, 바라든 바라지 않았든 뜻하지 않은 배려로 남을 살피곤 했고 나는 그런 태도가 불만이었다. 그 배려의 수혜자가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본인 목숨 하나 건사하기 힘든 밑바닥에서 대가 없는 호의란 양날의 검이었다. 적어도 그런 꼴을 질리도록 지켜본 입장에선 윌리가 이 지옥에 있는 한, 친절을 온전히 돌려받지는 못하리라. 나름 걱정 어린 타박을 하곤 했으나 그때마다 윌리는 상관 없다며 또다시 배알도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멍청한 윌리.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를 처음 봤을 당시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던 창가와 그 너머 하얗게 웃던 아이가 떠올랐더란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뒤로 한 채 웃던 아이. 펑펑 흩날리는 눈송이와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오색빛깔 트리만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처럼. 윌리도 그런 아이였을까. 따뜻한 벽난로와 찻잔, 활짝 핀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이 어울렸을, 그런 아이. 그래서 이다지도 둔하고 멍청한 건지. 그럼에도 도무지 미워하기 힘든 부류였다. 피가 눌러 붙은 옷에 먼지까지 묻어나자 등 언저리를 툭툭 털어준다. 그러자 윌리는 어수선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머지 먼지를 스스로 털어냈다.
“그런가? 난⋯ 그냥 잭시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랬지.”
“이렇게 신경 써줘도 언젠가 다 뒤통수 맞는다니까. 말했잖아.”
“하지만 내일의 잭시는 날 기다려 줄 거잖아.”
허어, 바람 빠지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람. 내가 널 왜 기다려? 불퉁하면서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가볍게 대꾸하며 일부러 몇 걸음 앞서자 윌리가 유쾌한 표정으로 옆자리를 꿰찬다. 정말 안 기다릴 거야? 너 하는 거 보고.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하자 다 안다는 듯 윌리의 팔꿈치가 허리를 툭 떠민다. 시답잖은 농담들, 며칠이면 스러질 기억들, 지켜지지 않을 약속. 먼 미래엔 단 하나의 추억도 되지 못할 우스갯거리를 지껄이며 복도를 걷는다. 그렇게 두 소년의 걸음만이 적막한 공간에 울리다 사라지고.
“⋯⋯.”
그들을 주시하던 한 사내의 걸음도 이내 멀어진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벌려본다. 분홍빛 잇몸과 좁은 간격으로 돋아난 치아. 단단하고도 날카롭게 난 치아를 한쪽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유독 날카롭게 난 송곳니가 입안에 닿을 때마다 쓸려 슬슬 아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만질 때마다 따끔한 걸 보니, 이미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이것도 능력 때문인가? 역시나 알 수 없다. 도무지 단서라곤 모호하기만 한 능력이다. 눈살을 팍 찌푸리며 입술을 다문 대신 갈 길 잃은 손이 어깨에서 넘실거리는 머리칼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자를 때가 됐는데. 날이면 날마다 격하게 움직여야 하니 머리카락은 길어봤자 약점밖에 되지 않았다. 실제로 자신도 상대의 머리채를 붙들고 바닥에 내리꽂아 승리한 적이 있지 않았나. 세면대를 더듬거려 가위 하나를 들고 대충 머리칼을 물리려는 찰나.
“헉.”
놀란 숨소리가 들려온다.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거울 속에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놀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윌리가 있었으니까. 또 저 녀석이네. 윌리는 그의 배알 없는 배려 만큼이나 참견이 많은 녀석이었다. 한숨이나 내쉬고 싹둑 자르려는데, 윌리가 끝내 바보처럼 두 손을 휘적이며 달려왔다. 그러더니 곧 죽어도 자기가 잘라주겠다며 온갖 훼방을 놓는 게 아닌가. 당장 능력을 다루기 위해 시간을 쏟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지경인데. 갑작스럽고도 쓸데없는 오지랖에 그가 다치든 말든 가위를 이리저리 휘둘러 그만 내보내려 했는데. 아무리 엉성하게 휘둘렀다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눈앞에 떡하니 다가온 윌리의 얼굴이 낯설었다. 원래 이렇게 빨랐나? 지금까지 헛으로 살아남은 게 아닌 걸 이리 증명하는 게 우스워서 어이없이 터진 웃음을 삼켰다.
“그만 좀 해. 내가 너한테 가위까지 주고 내 뒤를 맡길 것 같아?”
“아, 그거 때문이구나. 그럼 네가⋯ 음. 이렇게 하자.”
윌리는 제멋대로 중얼거리곤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이내 짧은 단도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곤 제 손 안의 가위를 쏙 빼내고 텅 빈 손아귀에 단도를 들려준다. 앞에서 자르면 급소가 눈앞에 있으니까 찌르기도 쉬울 거라며. 도통 제 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정신머리였다. 역시 이 새끼도 오래 있어서 어딘가 돌아버린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과 지독한 요구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건 결국 자신이었다. 늘 그랬지. 저 멍청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싸울 의지도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굳이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면서 머리칼을 자르는데, 대충 싹둑 자르면 끝날 걸 가지고. 잘못 만지면 깨져버릴 유리알마냥 조심스럽게 만지는 손짓이 퍽 섬세하다. 그런데도 가까이서 오랫동안 머무는 손길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저도 모르게 두 눈두덩이 느릿하게 끔벅인다. 담백하고 심심한 침묵.
“여기 오기 전엔 친구 머리카락을 잘라주곤 했어. 부모님이 미용실을 하셨거든.”
건조한 침묵 앞에 먼저 말문을 튼 건 윌리였다. 가족, 친구, 부모님. 세 가지 단어 사이엔 묘한 온기가 있었다. 가족이 있는 아이, 윌리 해밀튼. 이미 예상했던 진실 만큼 식상한 건 없었다. 그럼 해밀튼이라는 성은 그의 아버지 것일까. 태생부터 정해진 이름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면서도 그가 받았을 애정은 가늠하기 힘들어 청개구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그저 더 얘기해 보라는 듯 고개만 까닥이자 화들짝 놀란 윌리가 가위를 뗐다. 놀랐잖아, 잭시. 움직이면 안 돼. 무슨 선생이라도 된 듯이 말하는 모양새가 웃겼다. 알았으니까 빨리 끝내라며 하품이나 하다가 한 번 더 혼나버리고 말았을 땐 뭐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게 많느냐며 투덜댔던가. 불만 섞인 목소리 사이로 윌리의 웃음이 섞인다.
“사실 주소는 잊어버렸어. 아침마다 반짝거리던 바다, 노란 사탕이 새콤했던 가게⋯ 그리고 빨간 벽돌 집이었나.”
이상할 건 없었다. 이곳에 온 아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충격과 현실에 못 이겨 스스로를 놓아버리곤 했으므로. 어린 나이에 긴 주소를 다 외웠더라도 흔적도 없이 잊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온 곳에 대해 늘어놓지 않는다는 부분이었을까. 그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너무나 그리워서 입 밖에 내기도 어렵거나 더는 돌아가지 못함을 알고 포기하거나. 혹은⋯⋯.
“잭시, 네가 나가면 안부라도 전해줄래?”
―허울뿐인 유언이 될까봐. 그가 자신을 찌르라며 들려 준 단도를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둥그스름 수그러든다. 목 안에 둔탁한 게 들어찬 것처럼 먹먹하다. 오랫동안 살아남았으니 네가 직접 전하라며 약간은 가시 돋힌 말을 하고 싶었음에도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가 그리도 미련하게 느껴졌다. 오늘 하루를 견뎌도 내일을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저점이 바로 이곳이었으니. 그럼에도 거울은 여전히 그의 등만 비출 뿐이었으며 손길은 여전히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자, 됐다. 후련한 목소리와 함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말갛게 웃으며 정돈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맡기는 걸까. 내가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저 보잘 것 없는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입술이 꾹 다물려 송곳니에 다시금 입안이 아려도 고갤 들지 못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 무엇을 바라보고 추억하는지 모를 아이. 그리하여 지켜지지 않을 약속마저도 굳게 이루어지리라 믿고 마는, 어리석은 윌리 해밀튼.
“값은 그걸로 치루면 돼. 잭시, 이제 가야지. 우리 차례야.”
손목을 잡아 끄는 윌리에게 그대로 이끌리며 낯선 걸음을 내딛는다.
반짝거리던 바다, 노란 사탕, 빨간 벽돌 집.
지워지지 않을 단어가 한 곳에 뒤섞이며 박혀들었다.
“하아, 하아⋯.”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이를 본다. 한때 교관의 눈치를 보며 크게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싸우다 기만이라는 죄로 눈 한 쪽을 잃고 만 아이였다. 자긴 괜찮다며 입 모양으로 다독이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한데. 결국 잃어버린 한 쪽 눈알 때문에 칼이 박혀 죽고 말았다. 가쁘게 뛰는 가슴이 손바닥으로 누르고 누른다. 아, 역시나 호의는 양날의 검이나 다름 없다. 특히나 이런 밑바닥에선. 머릿속에 떠오른 누군가의 웃음을 못내 지워버리곤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낸다. 한 번 울컥거린 속이 가라앉지 않아서. 토악질처럼 쏟아지는 호흡을 겨우 되삼키고서 이를 악물자 돋아난 치아에 쓸리고 상처 입은 입안에서 끝내 핏방울이 새어나왔다. 비릿한 내음이 복잡하게 뭉개지는 머릿속을 느리게 내리누른다. 이러다 죽어버리고 말까. 나도 저렇게,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버리고 마는 걸까. 서서히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다 터덜터덜 힘없이 다가선다. 무수한 이의 살점을 벤 칼날이 마치 식사를 마친 뱀처럼 흰 목덜미에 꼿꼿이 박혀있었다. 손잡이를 움켜쥔 손아귀가 따뜻하게 밴 핏기에 미끄러져 자꾸만 빗겨나갔다.
“⋯⋯하.”
결국 아이의 어깨를 흙먼지 묻은 발로 짓밟고서 완전히 빼낸다. 서걱거리는 살점의 감촉이 철과 고무를 타고 신경 하나하나에 새겨진다. 그를 죽인 건 생명이라곤 없는 날붙이에 불과한데도 흡사 저 가녀린 목덜미를 있는 힘껏 졸라 죽인 것만 같았다. ⋯아니. 이 또한 농담이라며 웃어 넘겨야지. 익숙해지면 될 일이다. 호의를 악의로 되돌려주는 일도, 손 안의 죽음에서 애써 눈 돌리는 일도. 땀방울에 젖어 따가운 시야에 인형처럼 늘어진 아이의 모습을 담는다. 짐승의 발톱과 칼날에 찢겨 군데군데 벌어진 살점과 살가죽을 뚫고 나온 골편, 그 안에 들어찬 먼지. 아직 따뜻하고도 무른 살점. 방울마다 떨어진 피가 이윽고 붉은 강을 이루듯 처참히 흘러들어 발치까지 적신다. 코끝까지 진득하게 피어오른 생명의 향내가, 좁디좁은 세상을 채워간다. 꼭 스스로 상처 입어 벌어진 누군가의 쓰라림처럼.
“잭시. 이만 네 자리로 돌아가라.”
퍼뜩 정신을 차리자 여느 때와 같이 서늘한 시선의 교관과 마주한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내내 입가만 쓸어내리던 손등을 뗀다. 구겨졌던 종이가 펴지듯 사그라드는 아픔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교관 앞에 예의를 차려 고개를 숙인 뒤, 어린 피를 머금던 단도를 갈무리하고 뒤돌았을까. 그렇게 교관의 자리를 지나치려던 찰나, 그가 불러 세웠다. 한심하다는 듯 느린 목소리였다.
“저 안대는 네가 갖다 버리도록.”
⋯안대? 뒤늦게 아이의 모습을 다시금 시야에 담자 그제서 주인 잃은 안대가 풀려 널부러진 모습을 발견한다. 순간 머릿속이 흐리게 번졌다.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죽은 이를 온전히 담는 건 제 손으로 꺾어버린 이에 대한 나름의 애도였으며 죄갚음이었다. 흩어진 머리카락, 멎어버린 목소리, 터지거나 늘어져 쏟아내는 핏줄기를 잊지 않기 위해. 곧 쓰레기처럼 버려질 그들의 유품은 누군가 소중히 모아 태워주는 게 우리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음에도. 나는 분명 뚜렷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저렇게 눈에 띄는 안대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니.
문득 초점없이 풀어진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린다. 그럼 내가 보고 있던 건 뭐였지? 흔들리는 시야를 눈두덩 꾹 눌러 감았다 뜨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천천히 다가서서 안대를 들어 올린다. 교관에게 눈이 뽑힌 이후로 그가 약 2주간 차고 있던 안대였다. 그것을 손아귀에 꽉 붙들어 쥔 채 대기줄로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난 저 아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여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입가의 피가 묻어난 손등과 안대를 번갈아 보던 무렵, 불식간에 든 기억은 혼란스럽던 감정을 더욱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 그때 아귀를 아프게 누르면서, 분명 그를 내려다 보면서.
⋯⋯나, 웃고 있었나?
그날의 기이함은 지워지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다. 내가 왜 그랬지.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골몰히 머릴 굴려봐도 속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습관 같은 게 있던가. 둥글고 흰 이마가 얄팍한 주름으로 접히더니 이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처 낭자한 무릎 사이로 머릴 묻는다. 만약 내가 모르고 남이 아는 습관이 있다면 빨리 파악해둬야만 했다. 언제 발목을 잡을지 모르니.
“잭시,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냥⋯ 고민.”
저런 정신 한 가닥을 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놈에겐 그닥 알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 건성으로 대답하며 네가 알 것 없다는 듯이 고갤 저었다. 윌리는 대놓고 불퉁한 얼굴을 해 보이며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꿰차 앉는다. 그럼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순한 어조로 묻는 목소리에 내내 무릎에 파묻혀 있던 시선이 윌리에게로 흘긋 향한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지. 윌리는 평소에도 그의 주변 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실제로 궁금한 게 생기면 지치지도 않고 종알거리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훈련생의 약점을 잡아 이긴 전적도 있었으니, 종달새마냥 지껄이는 입은 무용지물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뭐가 그리 궁금한데?”
“저번에는 내 얘기 해줬잖아. 이번에는 잭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정말 할 일도 없다. 가서 훈련이나 해. 너도 눈알 하나 빠지고 싶지 않으면.”
퍽 냉정하게 밀어내자 윌리가 녹색 눈동자를 크게 뜨곤 떼쓰듯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말 그대로 흔들었다. 앞뒤로, 양옆으로. ⋯이 애새끼를 어떻게 하지. 인내라곤 하나도 없는 속마음이 금세 짜증에 못 이겨 그의 머리를 확 쥐어 팰지,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뻥 차버릴지 고민하던 차. 저 순하디순한 얼굴을 마주하자 힘이 쭉 빠져버리고 만다. 그래, 이 머리 하나 더 컸을 뿐인 콩알은 굳이 쥐어박는 것보단 몇 마디로 어르는 게 낫다. 내일이면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 없었을 합리화를 하고 나자 부글거리던 짜증이 점차 멎어가는 듯했다. 여기 앉으라며 의자도 방석도 없는 바닥을 툭툭 치면 윌리는 냉큼 자리 하나를 차지해 앉은 채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애새끼다, 애새끼. 이딴 놈이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어디 보자. 부모 얼굴도 모르고 태어나서 노숙자와 동거하면서 살았고, 남들 뒤통수 때리거나 도굴꾼 노릇하면서 살았다. 이상.”
“엑⋯.”
십여 년의 이야기를 한 줄로 퉁쳐버린 과격한 압축에 윌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인다. 대체 뭘 기대한 거냐며 헛웃음을 들이켰다. 그는 충분히 당황스러운 낯으로 두 손을 붕붕 흔들며 인정 못한다고 시위하는 시늉까지 했다. 심지어 부담스러운 상체가 가까이 훅 다가오자 퍼뜩 놀란 몸이 뒤로 기울었다. 선명한 녹안이 순진한 빛으로 반짝거린다.
“그럼 잭시는 그때도 친구 없었어?”
“뒈진다, 진짜.”
“에이⋯⋯. 하나도 안 무서워. 그래서, 있었어?”
그가 바라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이도 나름대로 독종이라 할 만한가.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시기에 잘난 친구 따위가 있었을 리 없지 않느냐며 과하게 다가온 그의 상체를 밀어내려던 찰나 문득 떠오른 낯이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당황스럽기까지 한, 희한하리만치 선명한 낯. 고이고 썩어버린 지하수를 옴팡 뒤집어 쓴 듯 우울하고도 시큼하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색이라곤 다 빠져버린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눈동자를 하고서, 늘 도마뱀처럼 하수구 아래로 기어들어가던 아이. 멜빵 버클이 잘그락거리던, 청소 도구가 부딪혀 달그락거리던 소음은 노숙자들이 서로 욕하고 떠들며 만드는 시장통에도 귓가 어딘가에 익숙한 감이 있었다. 굳이 시선을 맞추지 않아도 한 번쯤은 거스럼처럼 걸리곤 했던 그림자. 서로라는 영화에 이름 한 줄 올리지 못할, 흐리고 우중충한 그림자로 나타나곤 했던 아이.
“⋯아니.”
그을음 묻은 악어 장난감과 그 옆에 엉성하게 놓여 있던 괴물 모양 장난감을. 누군가의 소유도 되지 않은 채 수없이 스치는 신발코에 치여 사라져버린 괴물과 짐승 두 마리를.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버린. 그저 외롭지만 않을 두 친구를 기억한다. 그뿐이었다. 나눈 온기라곤 장난감 하나, 그마저 흔적없이 증발해버린 체온을 과연 인연이라 할 수 있는가. 과연 음울을 닮은 그날의 아이와 나는 어떤 관계로도 엮이지 않았고 그럴 의지조차 없었지만.
“⋯⋯없었어.”
몇 마디 단어조차 어울리지 못해 한 점 기억에 불과하더라도.
그 아이와 나는, 어딘지 서로를 알고 있다고.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상처 입은 댐이 파괴되어 기어이 넘쳐나고 만 홍수와 같았다. 훈련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훈련생 한 명이 갑자기 개나 새, 뱀도 아닌 괴물로 변하더니 같은 훈련생을 물어뜯었노라는 이야기. 어쩌면 동화나 소설에 어울릴 법한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다. 이후 해당 훈련생은 다른 훈련부와 분리된 채 여러 연구원과 대면하고서야 본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 충동은 능력에 의한 패널티로 밝혀졌으며 특별한 관리는 필요치 않으나, 능력의 남용은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미 사태를 목격했던 몇몇 훈련생은 예측할 수 없는 충동을 두려워하여 그를 멀리했고 이로써 그의 곁에 남은 이는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그가 물어뜯었던 한 명만이.
신경을 좀먹던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벌레처럼 기어올라왔다. 온통 붉고 무른 것만 보면 목구멍이 아리도록 조여들어서, 기어코 그들의 살점을 파내 입안에 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얇은 이불 한 장을 끌어안은 채 딱딱 부딪히는 이를 꽉 악물었다. 이상해. 이런 건 너무도 이상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런 욕구를, 짐승에 가까운 욕구를 가져서는 안 되지 않나.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의 뜨거운 살결을 찢어내지 못해서, 뼈와 뼈를 끊어먹지 못해서 이토록 안달 나는지 도무지, 도무지도 알 수 없었다. ―패널티. 그건 능력의 대가라 했던가. 능력을 쓰면 쓸수록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어딘가 썩어버린다면 나았을 텐데. 도려내고 또 도려낸다 할지라도 차라리 내가 상처 입는다면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딴 무저갱까지 처박히진 않았을 텐데.
“하하⋯, 개새끼들⋯. 다 죽여버릴 거야. 다⋯.”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소릴 하릴없이 중얼거린다. 진정 누구인지도,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허무에 가까운 것을 원망하고 증오한다. 평생을 길거리에서 들개처럼 전전했을 지라도 인간이길 포기한 적 없었다. 언젠가는 저 하늘과 태양 아래 떳떳하고자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아이를, 창가 너머로 봤던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해서? 아니, 누구라도 안 된다고 말해줬다면 그러지 않았을 테다. 애초에 그는 죽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금까지도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을 게 뻔하다. 으득, 잇새가 맞물리며 사납게 갈린다. 지금까지 저지른 죄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도 살고자 했다면 죽는 건 나였을 테니까. 그게 정말로 내 죄였다면, 이 지옥을 만든 이들부터 지옥불에 태워 죽여야 하지 않나. 알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시작된 죄였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런 결과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나.
몇 겹을 덧댄 암막처럼 시야를 가려대는 탐욕이 미치도록 두려웠다. 평생 이리도 무언가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타인의 멱을 그었을 때와 새빨간 내장이 두 손에 묻어났어도 이리 두렵지는 않았는데. 마구잡이로 떨리는 동공이 옆으로 기울어진다. 두려운 이유. 이 모든 게 두려운 단 하나의 이유는 헛웃음이 나올 만큼 단순하고 거대하다.
“잭시, 괜찮은 거야?”
윌리 해밀튼, 그가 한 쪽밖에 남지 않은 팔로 등을 두드렸다. 다정이 묻어난 손길을 차마 보지도 못한 채 휘적거리듯 밀어내며 비틀대는 꼴로 물러난다. 꼴만 본다면 실로 짐승 새끼나 다름 없었다. 온종일 고르던 숨은 잦아들긴커녕 인내를 비웃듯 점차 거칠어졌고, 심장은 아프게 뛰어대고, 혈관 흐르는 소리마저 노이즈처럼 머릿속을 메운 지 오래였으니까. 실수하고 말 거야. 또다시 실수하고 말 거라고. 확신인지 직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고갤 들자 걱정스러운 얼굴의 윌리와 시선이 마주친다. 윌리. 멍청한 윌리. 네가 거기 있으면 안 되지.
다소 과격한 손짓이 그를 붙들어 문 밖으로 밀쳐냈다. 등 뒤로 당황한 목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왔으나 제대로 식별되진 못했다. 윌리의 목소리, 사슴의 뜀박질, 윌리의 목소리, 박동하는 심장 소리. 몇 초에 수십 번씩 형태를 바꾸는 소음이 헛구역질을 일으킨다. 당장이라도 돌아가려는 문고리를 두 손으로 꼭 붙든 채 대답 대신 달궈진 숨을 몇 번이고 토해냈다. 땅이 꺼지고 하늘이 치솟는다. 본질을 거부하는 짐승에게 분노하듯이. 눈먼 사람처럼 기어 문짝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옹송그린다. 웅크리고 또 웅크린다. 하염없이 쿵쿵 울려대는 관자놀이를 더듬더듬 막고서, 벌벌 떨어대며. 거인의 손바닥이 뇌를 찍어대고 수천 마리 벌레가 내장을 파먹는 환상. 먹어야 해. 먹어. 저 아이를, 저 살덩이를. 비명처럼 쏟아지는 경고를 가까스로 넘기며 제 손아귀라도 있는대로 뜯어먹어 숨을 골랐다. 눈앞이 희게 멀었다가 암전됐다가 붉어졌다가. 이따금 눈알이 텅 비어버린 듯 기괴한 부유감까지 차오를 때면. ⋯안 된다며, 그래선 안 된다며. 부릅뜨던 눈을 차라리 꽉 내리누르며 기도와 같은 중얼거림을 일삼았다. 신이 있다면, 정말로 신이 있다면 내게 이래선 안 된다. 신이 있다면. 적어도.
"잭시. 우리 약속했잖아. 네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적어도, 내게만은.
차가운 한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진다. 얼음장처럼 얼어붙은 물이 끝없이 타오를 것만 같던 머릿속을 겨우 잠식시키며 배수구로 빨려들어간다. 살갗이 아파. 두 손이 들어 바라보자 지독한 냉기에 못 이긴 상처와 몸뚱이가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며칠 밤 사이 수없이 뜯어먹힌 살가죽이 성할 리 없었다. 상처에 상처가 더해지고 흉터에 흉터가 덧그려지던 나날. 그러나 버티는 게 전부였던 기억 속에선 그마저 희미하다. 그래도 아파서 다행인가. 통증을 느낄 만한 정신이라도 있으니까.
한 가지 생각에 정신이 몰리자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까득, 깨물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겨우 며칠 사이에 밴 습관이었다. 한때 손톱이 자리 잡았던 손가락은 이젠 아무렇게나 뜯겨진 채 형체라곤 일부밖에 없었다. 시린 물과 통증에 잔떨림이 이는 손가락을 느릿느릿 문지른다. 패널티를 견디는 시간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다행이도 곧 터질 듯이 넘실거렸던 충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소음과 수많은 울음 소리가 점차 귓가에서 멀어져가는 감각이 그리도 기꺼울 수 없었다. 이제는 윌리를 만나도 괜찮겠어. 시간표를 살피자 이제 곧 훈련에 참가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옷을 껴입고 훈련장에 도착해 아이들이 모인 곳을 둘러 찾자 시선을 마주친 이들마다 고개를 돌려대기 바빴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그저 함께 있었던 탓에 팔 한 쪽이 처참할 만치 뜯겨나간 소년을 알고 있었다. 괴물의 거죽에 칼날 하나만 간신히 꽂아넣었다던가. 제 이야기였음에도 멀고 먼 과거의 이야기, 타인의 이야기처럼 건조한 감상뿐이었다.
"해리엇. 잭시가 왔으면 얘기해 줘야지."
"어어, 응. 미안해, 윌리."
부드러이 풀어진 목소리가 아이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모를 리 없지. 자잘한 웃음을 지은 목소리는 곧 우중충한 얼굴과 부상 입은 얼굴 사이로 빠져나온다. 역시나 기억 속 노을처럼 따스한 색이 인상적인 소년. 그리고 이제는 한 쪽 팔이 사라진 소년의 녹음 우거진 눈가를 고이 접어 웃음 짓는다.
"보고 싶었어, 잭시."
"⋯미안해, 윌리."
답지 않은 사과였다. 내내 기고만장하던 들개가 꼬리를 내린 듯 그리도 어울리지 않는 사과. 아이들 사이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제 귀에도 들려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으리라. 머뭇거리며 오른 시선이 윌리의 어깨에 맺힌다. 그러자 윌리는 다정히 웃어 보이며 다가와 위로하듯 안았다. 부드러이 흩어진 주홍빛 머리칼이 뺨을 간질였다.
"너만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팔 하나로 이루어진 포옹은 엉성하고도 따스했다.
"자, 그럼 이렇게 하자."
윌리가 멀쩡한 왼손을 들어 검지를 까딱거린다. 뭘 어떻게 한다고? 의아한 눈빛이 까딱거리는 검지만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장난스럽게 휙 오른쪽으로 돌리고 휙 왼쪽으로 돌린다. 뭐야, 뭔데? 의미 모를 몸짓에 손을 따라 고개가 돌아갔을까. 이내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히죽거리는 면상부터 보였다. 그때서야 순전히 놀림이었단 걸 깨닫곤 으릉거리는 소릴 낸다. 윌리는 사과를 받은 뒤로 종종 이런 식으로 놀리곤 했다.
"내가 개새끼도 아니고. 훈련 시키냐?"
"에이, 예쁜 말 해야지. 개새끼가 아니고 강아지."
그게 그 뜻이잖아, 개자식아! 결국 으릉거리던 목울대에서 불만스러운 대꾸가 터져나온다. 그러나 윌리는 아주 즐거운 양 평소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놀리던 검지를 제 입술 위로 지그시 올렸다. 그러자 움찔, 흉포하기 짝이 없던 입술이 금세 얌전한 개새끼마냥 사그라든다. 그보다 더 나아가 제 입술 위에 얹어진 손가락이 조금이라도 다칠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일전에 그의 피부를 처참히 긁어냈던 손톱이 다시금 그를 해칠까 싶어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하얗고 작은 마디를 고이 밀어낸다.
"먹으려고? 난 좋은데."
"⋯⋯그딴 농담 하지 마. 재미 없어."
멍청하긴. 내가 널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면서. 불만이란 듯 입술을 비죽 내민 채로 웅얼거린다. 사실 평생토록 몰라줘도 상관 없었다. 그가 알아주길 바라서 이악물고 참았던 게 아니었으므로. 괜히 자꾸만 지는 기분이 들어 양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나 홱 돌린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들려줘 봐. 짜증과 한숨이 섞여 껄렁한 투로 껄렁하게 얘기하니 실로 양아치의 새싹나 다름없다. 윌리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하하, 진짜 불량 소년 같아. 하고 웃어버리곤 손가락을 치웠다.
"간단해."
"그러니까 뭐냐고."
"배불리 먹기."
"너, 지금 놀리기나 할 때야? 좋은 거 알려준다며!"
“다 배고파서 그런 거 아냐? 멍, 해 봐. 잭시.”
결국 으릉대던 속이 터져나오자 윌리는 살랑살랑 웃는 얼굴로 아이들 사이에 쏙 숨어버린다. 머리통 두 개 사이로 주홍색 머리가 불쑥 올라와 혀를 비죽 내밀며 얄미운 어투로 놀린다. 속은 사람이 잘못이지. 그간 답답했던 관계를 회복해서 그런가. 장난스럽게 웃어버린 윌리는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정말이지. 유독 답지 않은 일이 늘어나는 기분에 크게 웃어버렸을까. 마냥 당해줄 리 없는 성격은 도화선에 불 지핀 듯 윌리가 도망치려는 틈을 타 좁은 틈새로 팔을 뻗어 그를 잡아당긴다. 기어이 붙들려 나온 윌리는 아야야, 하는 나약한 소리나 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여간. 꼭 잡힐 거면서.”
“잭시가 너무 빠른 거라니까. 그 능력 사기야.”
부스스 웃는 목소리는 한 점 걱정조차 없어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현실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새까만 천장과 복도에서 가시지 않는 피비린내만 아니었다면 마치 시내 어딘가에서 이런 시답잖은 소리나 여태 하고 있었겠지. 쌉싸름해진 입안을 느리게 삼키며 그의 손목을 놓아줬을까.
“⋯⋯야. 윌리, 너 손 다시 줘 봐.”
그의 손을 놓아주던 사이, 분명 시야에 스치고 간 것이 있었다. 항상 살갗 아래서 기민하게 스밀곤 하는 감각은 늘 귀찮고 과했으나 지금 만큼은 알 수 있었다. 가령 예를 들어 소매 안쪽에서 비친 새까맣고 큰 반점 몇 개라든지. 평범한 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불길한 색이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윌리가 어깨를 움찔 떨며 팔뚝을 도로 잡으려는 손아귀를 재빨리 쳐냈다. 평소 알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빠르고 날렵한 몸짓.
“⋯잭시, 난 분명 좋은 걸 알려준 거야.”
웃고 떠들고 유약하던 그의 목소리가 잔잔히 가라앉는다. 좀 더 짙고, 노곤한 어조로.
⋯무언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겨울 훈련을 앞둔 시기까지 다가왔다.
개미지옥, 정식 명칭은 1급 기밀 제약 시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야 정식으로 리타스의 단원이 될 수 있는 곳. 아니, 입단하지 못하면 죽음밖에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몇 명의 생명을 꺼뜨렸고 얼마나 더 꺼뜨려야 할까. 죽음을 앞뒀다 할 수 있을 만치 가혹하게 내몰리던 훈련과 전투. 그야말로 능력의 활용과 패널티 관리는 목숨과 연관된 사안이었고, 이는 혹독한 계절도 마찬가지였다.
눈보라가 지나치고 한결 느릿해진 하늘. 구름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하얗게 멀어버린 하늘 아래 여전히 펑펑 흩날린 눈송이가 나무 위로 나붓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온통 하얗고 메마른 세상에서 홀로 나무 상단을 점한 채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이가 느지막이 하품을 한다. 아, 언제 끝나.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이는 그의 색 옅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털어내곤 언덕 아래 위치한 산장을 빤히 바라본다. 정확히는 뒤편에 숨은 동료 한 명을. 훈련 목표물을 산장에서 꺼내 나무 밑 굴까지 몰아넣은 이상 더는 볼 게 없었다.
잭시. 잠깐만.
얼른 해.
기다려.
귀찮은데.
수신호로 나눈 대화치곤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애초에 하품이나 찍찍 하는 인간을 두고 무슨 긴장감이 있겠느냐만. 그럼에도 기다려 달라는 동료의 요청에 어깨나 으쓱이곤 퍽 굵은 나뭇가지 위에서 여유나 부렸을까. 갑자기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산장 안에서 의문의 불빛이 켜진 순간. 쏘아지듯 폭발적인 속도로 나아간 이는 곧 그의 허리 언저리에 동료 한 명을 대롱대롱 잡은 채 산장에서 물러난다. 아직까지 자신의 뒤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는지, 당황스러운 눈을 한 윌리를 한심하게 내려다 봤을까. 커다란 통나무 아래 몸을 낮춘 채 목표물의 인기척을 찾는다. 아아, 운도 없지. 체온이 높은 이상 이런 한겨울에서 생기는 입김은 손으로 막는다고 해서 완전히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래서 처음부터 높은 곳을 점했는데. 능력의 특성상 아래로 내려오면 안 되는 조건이었다.
까득, 습관이 된 손짓이 또다시 손톱을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툭툭 팔을 건드린 윌리가 바닥을 가리킨다. 바닥을? ⋯아니, 아니었다. 바닥이 아니라 눈이다. 금세 의도를 알아채곤 수북하게 쌓인 눈덩이를 아무렇게나 퍼 입안에 머금는다. 차가운 눈이 높은 체온과 맞물려 금세 녹아내리겠지만 잠깐의 은신은 가능하리라. 까드득까드득. 가까이 다가온 걸음이 깊은 눈을 헤치고 통나무 가까이, 그리고 이쪽에서 등을 돌린 순간. 그대로 손을 뻗어 적의 입을 틀어막고 목뼈를 부러뜨린다. 원거리면 몰라도 근접전이라면 두려울 게 없지. 긴장이 한 시름 놓이자 목이 꺾인 시체를 앞두고 털썩 자리에 나앉아 기나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윌리.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굴만 파내면 되는, ⋯."
"아, 이제 왔네."
뭐가 왔다고? 제 뒤를 돌아보자 무언가에 홀린 듯 승리 토큰을 쥔 사내 한 명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또야? 질린다는 양 윌리와 사내를 번갈아 보곤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윌리의 능력은 최면이었다. 손의 복잡도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최면. 그리고 저 사내는 굴에 들어가기 전부터 윌리의 최면에 당한 상태였겠지.
"굴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직접 들어가. 이렇게 가져다 주면 끝나잖아."
눈과 입이 풀린 채 기괴한 목울음까지 내던 사내는 얌전히 두 손을 뻗어 토큰을 건넨다. 흡사 좀비와 같은 상태의 인간을 유순한 강아지 다루듯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는 윌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헛웃음이 샐 수밖에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이 토닥토닥 등까지 두드려주고서 떨어지면 사내는 여전히 비틀거리며 중심이나 겨우 버티는 꼴이었다. 내가 저 최면에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모든 역할을 끝낸 사내의 뒤로 다가가 나약하기 그지없는 목덜미를 한 손에 붙들고서, 이번에도 쉬이 비틀어버린다. 훈련은 이대로 끝이었다. 보란 듯이 'Victory' 글자가 새겨진 토큰을 든 채 웃어 보이는 윌리를 바라보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래도 나 없었으면 뒤통수 맞았어."
"알아, 알아. 나는 늘 재수가 없더라."
"맞아. 넌 항상 운이 없지."
키득키득 웃어버리곤 입안에 남은 눈덩이를 퉤, 뱉어버린다. 눈 존나 맛없어. 불만스레 중얼거린 목소리에 윌리가 몸까지 들썩이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나중에서야 묻은 눈 털어대는 강아지 같았단 소리를 들을 거란 상 상은 한 치도 못한 채로, 그렇게 두 사람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통제실로 향했다.
"그게 사실이야?"
약간의 분노, 짜증, 불안에 뒤섞인 목소리가 울린다. 인적이 줄어들어 두 사람만 남아버린 공간은 적막한 한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채 귀결되지 못한 감정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한 명은 습관처럼 손톱을 물어대면서, 한 명은 담담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가만히 웃으면서.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무리하게 강행하진 않겠지.”
낙관적인 대답은 답답하기까지 했다. 우리 둘이 치고 박고 싸우게 될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리 여유롭느냐며 타박하고 싶은 충동을 꾹 내리누른 채 애꿎은 이만 아득아득 갈아댔다. 다름 아닌 ‘대련’이라는 평이한 단어로 꼰 행위는 종이 두 장을 마주 댄 듯 쉽사리 분간할 수 없는 부류의 시험이었다. 어떤 날엔 정말 대련으로 끝나기도 했으며, 어떤 날엔 생사를 걸고 끊임없이 싸워 이겨야만 했다. ‘그만’이라는 명령 하나가 떨어지지 않아 마지막 숨을 떨구고 죽어간 이들이 몇 명인가. 수십 개의 시선으로 둘러싸인 두 사람이 벌이는 ‘대련’은 짧으면 몇 개월에 한 번씩 벌어지곤 했는데, 이런 훈련으로 인해 오랜 기간 줄어든 훈련생 수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 머릿수면 별탈 없이 메이드맨으로 올라설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정해야만 한다. 그간 너무나 안이했다는 점을. 무엇 하나 잡히는 것 없이 빠져나가는 허무함이 그저 우스웠다.
“무사할 수 있겠지.”
그의 사라져버린 어깨 한쪽에 느슨히 고갤 기울여 묻는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우린 무사할 거라는 나지막한 위로. 겨우 찾아낸 어둠 속 등잔불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놓쳐서는 안 됐다. 만약 우리가 이번 시련을 이겨낸다면. 그럴 수 있다면.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을 위안 삼으며 눈꺼풀을 내리감는다. 더는 찾지 않으리라 여기던 신을 향해 기도한다.
이 빛을 앗아가지 말아달라고.
들숨과 날숨이 거칠게 몰아친다. 그의 피냄새로 폐부가 가득해질 적엔 곧 죽어버려도 좋을 듯 슬프다가 빠져나갈 적엔 빗댈 수 없는 상실감이 눈시울을 채웠다.
근본이라는 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나는 그리 뿌리내린 곳이 없어 이리도 뒤흔들려야만 하나. 하염없이 피와 살점을 머금어 질척해진 손잡이를 어떻게든 그러쥔다. 손 주름과 손톱에 스며드는 피비린내란 이제 와 새삼스러울 일도 없었다. 다만 맞은편에서 두 다리를 꼿꼿이 세운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저 얼굴이 너무도 매스꺼웠다. 차라리 한바탕 울어제끼면 끝날 꿈이라면. 평생 유의미한 가정을 내린 적 없던 머릿속에 벌레처럼 기어든 바람. 따스하던 머리칼과 분홍빛이 감돌던 뺨엔 붉디붉은 핏자국을 질척히 묻힌 채로 부드러이 웃어 보이는 저 얼굴이 믿기지 않아서. 왜, 이렇게 된 거지. 혼란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에도 습관적인 웃음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드러난다.
“⋯무사할 거라고 했잖아.”
그의 하얗고 말갛던 웃음이 불투명한 색으로 번진다. 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를 알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그러나 눈앞의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웃음을 만면에 가득 피운 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느리게 펼쳐 보인다. 마침내 흐드러진 꽃잎처럼. 웃었나. 혹은 울고 있나. 무엇도 아닌 표정 앞에 위장 속에서 녹물이 난 것마냥 역겨움이 치민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한 체온을 머금던 아이들은 이제 훈련장 구석에 쓰레기처럼 쌓여 죽어가고 있는데. 우린 저런 식으로, 흙더미조차 되지 못한 채 죽어가진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언젠가는 이리 될 일이었어, 잭시. 현실을 외면하는 건 너답지 않아.”
“씨발, 개소리 좀 그만해!”
윌리 해밀튼. 너만은 내게 이래선 안 됐다. 차라리 교관의 명령이었다면, 빌어먹을 대련표에 너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이리 원망스럽지도 않았겠지. 그래, 모든 훈련이 끝나고 모든 아이들이 죽어버리고. 마침내 우리 둘만 남아 끝나갈 무렵에 갑자기 나와 ‘대련’을 하고 싶다며 나서지만 않았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 테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대체 무얼 바라는 거야?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난, 우리는, 우리 만큼은 이대로 드높고 파랗던 하늘 아래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는 여름철 숲을 닮았노라 생각했던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한때 내게 반짝거리던 바다를 얘기하며 쥐여 주었던 단도를 고쳐 쥐며 웃는다. 가까스로 빚어낸 희망을 구더기 들끓는 무덤에 처박아버린 주제에. 이미 또 다른 시선이 우리에게 몰리고 있었다. 툭, 교관의 구둣발이 재촉하듯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어깨가 움찔 떨리며 저도 모르게 손잡이를 움켜 쥐었다. 그에 윌리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썹을 기울이며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물러났다. 단지 그뿐인 행동이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콱 죽어버리고 싶단 충동이 들어서.
“미안해. 더는 시간이 없거든.”
제발, 윌리. 이렇게 부탁하잖아. 입안에 맴도는 몇 가지 목소리가 어떤 무게도 갖지 못한 채 스러진다. 너보다 낮은 곳에서 무릎을 꿇고. 그렇게 울부짖으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가정에 가정을, 희망에 희망을 기우고 덧대도 발 딛은 이곳이 지옥인 이상 달라지는 건 없다. 더는 빛조차 들지 않는 구덩이 속에서 굳고 또 굳어버린 현실감이 제멋대로 아우성을 내지른다. 윌리가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물러나던 걸음이 기어이 벽에 부딪혀 막히면 그의 발걸음 소리도 멎는다. 한 차례 침묵,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든 날붙이가 목덜미를 향해 날아든다. 오로지 숨결을 끊는다는 목적으로, 군더더기없이. 본능에 가까운 칼부림으로 매서운 칼날을 쳐내면서도 떨리는 손 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자꾸만 힘이 빠지는 손끝을 거부하듯 억지로 한 움큼 부여 잡으며 튕겨나는 저항을 받아낸다. 그렇게 날붙이가 부딪혀 떨어져나가면 또다시 날카로운 바람을 타고 거세게 굽이쳐 온다. 포말이 부서져도 끝나지 않을 파도처럼 밀려드는 힘. 가슴을 온통 죈 압박감이 목울대까지 치밀어 울컥인다. 이해가 안 돼. 난 모르겠어, 윌리. 내게 어떤 죄가 있어서. 나는 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어느 밤에 어깨를 베고 눈 감으며 맡았던 체향이 쇳소리 사이로 스며들었나. 이전과 다름 없는 음성이 부드러이 귓가를 속삭인다.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 잭시.”
“난⋯⋯.”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사실은 좀 더 나중이었어야 했는데.”
이제 더는 여유 부릴 처지가 안 되는 걸 어떡하니. 한 마디를 끝으로 그가 단도를 치켜 들어 달려들었다. 멍청한 머릿속이 느리게 굴러간다. 그렇다면 그는, 이 모든 걸 이미 상정하고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칼과 칼이 팽배한 힘으로 서로를 버텨내는 찰나에 희미한 기억 속, 그와 함께 걸었던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는다. 그의 어깨에 팔 하나를 두르고 눈밭을 걸어가던 날. 그의 팔을 물어뜯고 더는 후회하기 싫어서 차라리 제 손바닥을 짓씹어 삼켰던 날. 머리칼을 다듬어주며 덧없는 약속을 했던 날. 혹은 처음 그 맑던 웃음을 보이며 악수하듯 손 내밀던 첫만남부터였나. 한 발, 두 발. 밀듯이 파고드는 윌리의 얼굴을 마주한다.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그를 이루던 색채가 죽어간다. 고목처럼 푸르던 머리칼은 이미 수십 년 썩은 나무통처럼, 햇살에 비치듯 반짝이던 눈동자는 사체를 잡아먹어 배불린 늪의 색으로 죽어간다. 허상 같던 하늘이 사라지자 이제야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 멍청한 잭시 홀트. 진정 머저리에 불과했던 건 자신이었다. 순간, 첫 시체를 앞두고 치밀어 올랐던 그날의 구역감이 위장을 비틀며 차오른다. 욱⋯, 하는 막힌 소릴 내며 칼을 쳐내고 비틀비틀 물러나 입가를 짓누르는 동안에도 머리 위로는 그의 목소리가 나붓이 내려앉는다.
“아직도 의미 따윌 찾고 있니.”
“⋯⋯.”
“그럼 알려줄게.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왜 이래야만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줄 테니까.
이제 제대로 해야지, 잭시.
너 기다리는 거 잘 못하잖아.
내 모든 걸 안다는 듯 가벼이 부르는 목소리가, 더는 듣기 싫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간사한 웃음, 친근하고도 낯익은 표정 하나까지 전부 낚싯대에 걸린 듯 쓰렸다. 여태 무슨 감정으로 억눌렀는지, 어떤 처지로 비관했는지도 모르면서. 잠잠하던 머릿속에 거품이 일고 새빨간 열이 들끓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세상에 눈을 떠서, 내내 거센 파도에 밀려나고 성난 폭풍에 휩쓸리며 살았다. 그리 내버려진 곳에서 살아내려 다 젖은 절벽을 아등바등 기어 올라온 삶이다. 어린아이 하나로는 무너뜨리지 못하는 천성, 굳건히 다져진 악. 나는 그리 단단하게 널 밀어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 이리도 미련한지. 더는 못하겠다고, 차라리 울며 도망치고 싶다고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거대한 망치로 내려찍듯 쿵쿵 울리는 심장과 뜨거운 머릿속은 금세 하릴없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데. 독기 머금은 외침을 외치는 대신 습기 어린 눈시울을 부릅 뜬다. ⋯알아야겠다. 네가 왜 그랬는지. 어째서 내게 고통을 종용하는지. 배신이라는 불길에 추억과 미련을 불사르며 희멀겋게 차오른 열기가 눈앞을 가린다. 기만. 단 하나의 글자가 온 생을 통틀어 폭풍의 눈처럼 자리잡는다.
시작은 손끝. 그리고 마디, 팔뚝, 어깨. 점점 굵어지고 날카로워지는 손톱과 흉진 살결 위로 단단하게 덮기 시작한 비늘이 생전 처음 허물을 벗는 파충류마냥 온몸을 뒤덮는다. 뼈와 살이 움튼 과실을 틔우듯 서서히 벌어지며 새로운 피로 메워가면, 그렇게 짐승의 굶주림에서 잉태된 물이 온 척추와 뇌를 가득 채우고 이성을 잡아먹기 시작하면. 비로소 인간이었던 자는 스스로를 완전히 우그러뜨려 어떤 단어로도 표할 길 없는 금수로 태어난다. 두 앞발은 눈앞의 생명을 붙들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을 내고, 두 뒷발은 살점을 꿰기 위해 새로이 뼈를 돋아낸다. 피부와 세포가 재구성되는 고통이란 그 탄생 만큼 비련하고도 창대하다. 긴 시간 눌러왔던 아우성이 비대해지는 몸뚱이 만큼 거세게 반발하며 터져나온다. 그들의 원성을 삼켜내듯 단단한 바닥에 쓰러져 엎드리며 울음을 토한다. 동공이 수축하고 팽창하며 갓 마주한 새까만 세상을, 좁은 우리를 초점에 잡으려 흔들린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 첫 번째 우리를 그 거대한 눈알에 담고서야 비소로 괴물이 된다. 비죽하게 나온 주둥이 사이사이 굶주린 울음도 부족하여 멀건 타액을 뚜욱, 뚝. 본래부터 그리 창조된 존재처럼, 오로지 본능만 따르는 태로. 고대에 새겨진 괴물이란 그야말로 이러했을까. 하여 그리도 오랜 세월 미움 받았을까.
“아⋯. 드디어.”
거대하고 비대한 그림자 앞에서 곧 오랫동안 움직이던 육신을 찢기고 빼앗길 이는 환희에 찬 얼굴로 웃는다. 들고 있던 날붙이마저 바닥 저멀리 던져버린 채 웃는다. 날아간 칼날이 모퉁이 구석에 짚단처럼 쌓인 채 죽어있는 아이들의 손등에 치여 나뒹군다. 한때 그를 따르던 아이들의 눈동자엔 이제 어떤 생명도 없었으나, 누군가의 미련한 바람처럼 그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처럼 상처 받을 어떤 이를 위해.
“잭시, 난 정말 많이 고민했어.”
푸른 싹이 돋아난 듯 녹음 우거진 눈동자가 부드러이 흐드러진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옷깃을 한 꺼풀씩 풀어내며 그는 그간 하지 못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 듯, 어쩌면 아주 답답하고 불편했던 일에서 벗어난 듯이 풀어진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간다. 번쩍이는 시야, 바로 잡히지 않는 윤곽. 그 사이에서도 그의 목소리 하나 만큼은 선명한 색감으로 틀어박힌다. 한낮의 노을처럼 아름답고 드넓은 숲처럼 아늑하던 이의 목소리.
“내가 얼마나 더 멍청하게 굴어줘야 네가 날 먹어줄까.”
그러나 이제는 썩어버리고 까맣게 타버린 자의 목소리. 그가 한 발짝 다가오자 괴물은 커다란 동공을 가늘게 떨고 포효하면서도 뒷발을 물렸다. 그리 오랜 세월 본능을 억울렀던 이는 짐승의 태를 뒤집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빛이라 여겼던 이를 한 입에 삼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양 전처럼 상냥한 기색으로 웃어 보이며 마지막 꺼풀을 풀어낸다. 온통 타버린 시체처럼 변질된 신체가 드러난다. 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크고 부상이라 하기엔 형체가 멀쩡한 몸. 그가 마치 보란듯이 팔뚝에 긴 상처를 내어 피를 내자 흡사 석유처럼 진득하고 꺼멓게 죽은 피가 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바닥에 고인 핏방울은 오래 전 죽은 사체의 것처럼 어둡고 어두웠다.
“봐, 잭시. 이게 답이야. 어차피 너와 난 같이 못 나가. 지금부터 운 좋게 버텨도 사흘이 고작이겠지.”
패널티였다. 이번에도, 또다시 패널티였다. 다른 이의 인지를 빼앗는 대신 스스로의 몸이 썩어버리는 대가.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을 살갑게 펼쳐 보이며 나지막이 웃음 짓는다. 네가 삼킨 그 팔도 어차피 다 썩어버린 살점에 불과했다고. 검붉게 떨어져내린 핏물이 따라 그려지며 둥근 반원을 그렸다. 고이고 고인 비릿한 향내가 코끝에 지독히고 감겨들었다. 그가 내뱉는 말 몇 마디의 진실보다 그를 향한 탐욕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한다. 무뎌져가는 심장과 곧 멎어버릴 내장을 한 입에 삼키고 싶어서.
“주변을 둘러봐. 언제부터였을 것 같니.”
그의 목소리를 따라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은 뼈마디를 우득우득 움직여 주변을 둘러본다. 쓰레기더미처럼 쌓인 아이들의 시체와 깊은 상처를 입어 죽어가면서도 두려운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는 훈련생 몇 명. 그리고⋯ 아아. 이리 될 줄 알았다는 듯 혀 차는 소리나 내는 교관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손 안의 차트에 펜을 긋는 교관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윌리 해밀튼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처럼 그의 하늘을 한 점 가슴에 묻은 게 아닌, 그의 능력에 홀릴까봐 전전긍긍하던 것이었음을. 그리고 윌리 해밀튼은 오랜 훈련생 생활을 끝마치지 못하고 패널티로 죽어갈 것임을. 이미 그의 이름 위에 새빨간 줄을 긋고서.
“배신감이 드니? 어째서? 넌 어차피 자신 외에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이었으면서.”
나가서도 그리 살아.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아무것도 널 묶어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누구에게도 의미 따위 주지 말고 그리 살아가, 잭시.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발 디딜 곳 따위 만들지 말고 오래도록 내내, 평생을 홀로 살아가라며 웃는 저 목소리를. 너만이 내 빛이었음을 알고 있으면서 쉽게도 내뱉는 목소리가 너무도 미웠고 원망스럽다. 포효하던 괴물은 이제 앞발을 내딛은 채 둥글고 부푼 가슴 가득히 울음을 머금는다. 슬픔은 분노로, 분노는 본능으로. 악의에 가까운 해방감을 돛 삼아 드넓은 훈련장을 몇 걸음만에 달려간 괴물은 한때 친구라 불렀던 이를 벼려진 손톱에 박아넣고 벽면에 내친다.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내고 쓰러진 그가 스멀스멀 기울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가슴팍을 짓누르면, 손아귀 아래 맞닿은 몸은 나이에 맞게 너무나 여리고 무방비해서. 조금의 힘만으로도 손 닿을 수 없이 날아간 풍선처럼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목울대 밑에서 울렁이는 무언가가 거스럼처럼 호흡에 걸려 나풀거린다. 그는 붉어진 입술로 호선을 그리며 덧없이 웃는다.
“하하, ⋯잭시. 망설이지 마. 난 네 안에서 함께 바깥을 볼 거니까.”
그러면 죄책감이 덜하지 않겠어. 그가 뒤로 삼킨 뒷말이 들려온 것만 같은 착각. 나름의 위로랍시고 내뱉는 지껄임. 빌어먹게도 그가 읊조리는 모든 말의 의중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내 안에서 함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어서 자길 먹으라고. 짐승의 목울음이 그의 얼굴 가까이 삐걱거리듯 다가선다. 푸르고 좁은 동공에 그의 작은 얼굴이 비친다. 피딱지가 앉아 엉망이 된 갈색 머리칼,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녹색 눈동자. 그는 온전한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몸이 썩어가는 고통에서 벗어날, 이 지옥에서 벗어날 죽음을. 애초 나라는 인간이 아닌, 이 괴물을 바라고 있었단 사실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리도 우스꽝스러운 일이 다 있을까. 스스로 새기는 자조와 달리 향긋한 살내음과 달뜬 숨에 섞여든 혈향은 미지근하게 내려앉던 머릿속을 더욱 거세게 뒤흔들었다. 좁은 어항에 가둔 물이 금방이라도 넘쳐날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게.
⋯아니, 그렇다면 난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구원을 얻는다면 난 차라리 낭떠러지로 떨어지라며 밀어넣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는 짐승의 언어가 되어 기괴한 소리로 흘러나온다. 그는 이런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나지막이 웃으며 비늘로 단단히 덮힌 머리통을 한 손으로 쓰다듬는다. 순간, 어느 밤에 그의 쓰다듬을 받고 잠들 수 있다면 어찌 되어도 좋다고 중얼거리던 기억이 스친다. ⋯아, 윌리. 조그마한 자극에도 희멀겋게 반전된 정신이 또다시 점멸하고 되돌아오길 반복해 방향감을 잃는다.
“기억 나? 좋은 거 알려준다고 했잖아.”
“⋯⋯.”
⋯윌리, 윌리 해밀튼.
사랑스럽고 원망스러운, 나의 작은 하늘.
이리 먹구름을 몰고 와 내 세상을 멸망으로 이룰 줄 알았다면 이리 마음을 내어주진 않았을 텐데.
괴물에게 표정은 어울리지 않았음에도 오래 전부터 그를 비추고 사랑했던 눈동자는 끝내 열화되어 사라질 눈물을 흘린다. 내게 이리 잔인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어디서부터, 대체 어디서부터. 그 답은 끝없는 지옥에 떨어져도 찾을 수 없어 허공만 맴돌 뿐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라고 하자. 처음부터 나는 이리 살아야 할 운명이었고, 어떤 기대도 품어선 안 되는 존재라고. 동화 속 괴물처럼, 처음부터 정해진 외로움이었다고. 윌리는 생애 마지막으로, 그 어떤 때보다 아름답게. 온 세상을 가진 사람처럼 환희에 묻혀 웃으며 팔을 뻗는다.
“자, 간식 먹을 시간이야.”
타들어가는 시야 속에서, 입안에 가득 퍼진 환상 같던 달큰함 속에서 나는 직감한다.
그의 마지막 웃음이야말로 진정 내게 보였던 일말의 진심이었을 거라고.
잭시? 하하, 이름 강아지 같아.
난 윌리 해밀튼이야. 우리, 꼭 함께 나가자.
“잭시 홀트.”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두피가 당겨지는 듯한 고통이 멀어진 정신을 일깨운다. 물안개 드리운 머릿속이 점차 또렷한 윤곽을 그리며 시야를 걷어낸다. 눈앞을 가득 채운 건 새까만 천장. 그 짙은 어둠 같은 천장에 초점을 맞추듯 옅은 속눈썹이 떨리고 가슴이 느리게 오르고 내리며 아가미 없는 물고기처럼 가느다란 호흡을 잇는다.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성과 자아가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누군가의 피냄새가 짙게 배어나고 위장을 빽빽하게 채운 포만감이 너무도 충만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을까. 좁아진 갈비뼈와 흉통이 아직도 뻐근했으나 큰 통증은 아니었다. 들끓던 뇌수가 서서히 가라앉고 온몸을 태울 듯이 뜨겁던 체온도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당겨져 천장만 바라보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걸리면 그제서야 뒤늦게 인간의 언어가 어눌하게 터져나온다.
“⋯교, 관님.”
“훈련은 끝났다. 너만 남았으니 올해 메이드맨은 한 명이겠군.”
정리하고 나오도록. 무심한 한 마디를 끝으로 뒤통수를 당기던 통증도 사라진다. 그가 흰 빛이 새어나오는 바깥으로 나가면 커다란 훈련장에 남은 건, 그의 말대로 단 한 명이었다. 아무데나 널부러진 시체 몇 개, 바닥과 벽에 흩뿌려진 피, 찢겨진 살점들. 멍하던 눈동자가 점점 아래로 향한다. 얼굴과 상체가 전부 뜯겨서 누군지 모를 시체의 위에 앉아 있음을 깨닫는 순간, 하여 위장에 들어찬 포만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치밀듯 올라온 거센 역류감에 욱, 막힌 소릴 내며 입가를 틀어막는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극심히 역류한 것이 금세 식도를 타고 올라와 쏟아진다. 새빨갛게 고여있는 웅덩이 위로 철퍽철퍽 떨어진 것들은 역시나 붉고, 붉고, 또 붉은 무언가뿐. 속이 저며진 듯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 뇌까지 우그러뜨린다. 내장까지 차버린 비린내는 아무리 게워내도 사라지지 않을 테고 배덕과 같은 탐욕은 이미 본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몇 번이고 반복될 거라는 예감. 두 눈두덩을 꽉 짓누르며 짧게 터져나오는 숨을 가까스로 내뱉는다. 인간으로서. 나는, 인간으로서.
'주변을 둘러봐. 언제부터였을 것 같니.'
희미한 기억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번잡하게 뭉개지던 머릿속이 멎는다.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남아있는 기억 직전까지 구석에 쌓여있던 시체는 훈련장 전반에 뜯겨나간 채 굴러다녔고 나는⋯ 내 입과 손은, 그들의 피로 점철되어 한없이 비릿했다. 손톱 사이에 배어 사라지지 않는 핏기. ⋯이럴 줄 알았지. 이 지긋지긋한 피 냄새가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어. 나는 실수할 줄 알았고 그는 내게 거짓이었으며 나는 아주 오래 홀로 살아갈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믿으면 배신 당할 거란 사실조차도 전부, 전부 알고 있던 주제에. 흐느낌과 비스무리한 웃음을 토해내며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인간이 늘 그렇듯 몸을 옹송그린 채, 다 닳아빠진 손톱을 습관처럼 잇새로 짓이긴다.
'누구에게도 의미 따위 주지 말고 그리 살아가, 잭시.'
만약 신이 있다면,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이 능력은 그의 주사위 놀음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테지.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신의 자비를 바라지 않으리라. 비틀비틀 바닥을 짚고 일어난 이는 긴 시간을 거쳐 홀로 살아남은 훈련장을 바라본다. 무엇도 없이, 단지 맨발로 발치에 밀려든 핏물 위에 서서. 수많은 생명 위에 생존한 이가 눈가를 내리감는다. 윌리 해밀튼. 자신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한 영악하고 잔인했던 아이. 이제 저리 나뒹구는 시체 중 무엇에도 의미란 없다. 이 피가 그의 것이라 하더라도. 교관이 지나간 길을 그대로 밟아 빛이 스며드는 입구로 향한다.
‘알아, 알아. 나는 늘 재수가 없더라.’
손이 부르트도록 차가웠던 겨울의 윌리. 문득 기민했던 그가 미처 뒤를 잡지 못한 건 썩어가는 몸뚱이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몸을 움직이는 대신 능력을 사용해 난관을 헤쳐 나가곤 했다.
‘⋯잭시, 난 분명 좋은 걸 알려준 거야.’
능력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시절에도 그는 이 날만을 위해 모든 것을 내걸었을까. 자신의 최면에 걸려든 나를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참, 그의 단순했던 손짓에 걸려든 이런 정신머리도 웃기긴 했으리라. 그날엔 방으로 돌아가서 마냥 웃었으려나.
‘잭시, 네가 나가면 안부라도 전해줄래?’
어디였더라. 바다와 사탕 그리고 빨간 벽돌이었나. 모든 것을 알게 된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지 어떻게 알고 그런 약속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를 모르는 만큼 그는 나를 알고 있었던가. 한없이 가벼워진 가슴팍은 잔가시처럼 꽂히는 목소리에도 쉬이 무거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일의 잭시는 날 기다려 줄 거잖아.’
우뚝, 마지막 걸음이 멈춰 선다. 아, 그 한 마디는 조금 아픈가.
부스스하게 터진 웃음기는 느리게 사그라들어서 곧 비뚜름하게, 아주 비뚤게 기울어진다.
“⋯네 내일을 내가 먹어버렸는데 더 무얼 기다리겠어.”
가벼이 걸어가는 소리를 끝으로 마침내 훈련장의 모든 불이 꺼진다.
Yuriko Nakamura- Last fascination
메이드맨으로 올라선 이후로 반복되는 나날은 퍽이나 피곤했다. 매일같이 누군가를 죽이고 쫓고 또 죽이고. 이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 속에서 하나 만든 취미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피우는 담배 정도인가. 민간인 구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 그 옥상의 문짝을 익숙하게 구둣발로 부수고 들어선다. 이놈의 문짝은 항상 부서질 거면서 왜 만날 잠가두는 건지. 욕설이나 짓씹곤 난간에 앉아 품에서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꺼내면 벌써부터 희미한 만족감이 느껴진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펴지는 불씨.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그런 말이나 중얼거리며 몇 번이나 담배 연기를 내뱉었을까. 드높고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란 답답하던 흉부를 트게 하는, 무언가 자유로운 감각이 있었다. 흰 구름과 푸른 상공, 날아가는 새. 어릴 적에 동경하던 것들.
“잭시 홀트, 농땡이나 피우고 있군.”
“아, 씨발⋯. 깜짝이야. 아니, 큼. 콜록.”
당황해서 붙어버린 욕설을 담배 탓이라는 듯 일부러 기침하는 모양새를 하며 시선을 피한다. 그러던 차, 스치듯 본 얼굴이 문득 익숙해 뵈어 다시금 시선이 그를 향한다. 어디선가 봤는데.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뜬 채 그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차, 불량하던 눈매가 번쩍 뜨인다. 주름진 뺨, 다부진 몸, 서슬퍼런 안광. 아무리 단순한 머리통이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지만 한때 지독하리만치 두려워했던 얼굴을 쉬이 잊을 리 만무했다. 제밀 다운스. 개미지옥 훈련부에 있을 당시 그저 ‘교관’으로만 부르던 이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도 정식으로 리타스의 일원이 된 이후였다. 내 기수를 마지막으로 해외 파견을 주로 맡아서 최근에 카포레짐 후보로 올랐다나. 이러나 저러나 내겐 껄끄러운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긴 어쩐 일로⋯⋯.”
“마찬가지로 휴식이다. 이것도 인연이니 얘기나 좀 하지.”
그가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자 다소 불편한 손짓으로 그의 담배 끝에 불씨를 지펴준다. 매캐한 향과 누군가의 인기척이란 홀로 지낸 지 오래된 이로서 조금은 떨떠름했을까. 그가 곁눈질로 날 바라보고 있단 사실 정도야 진작에 알았음에도 모른 척하는 이유였다. 그가 나지막한 숨과 함께 연기를 내쉬고, 역시나 가장 먼저 침묵을 깬다. 나지막하고 고조 없는 목소리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윌리 해밀튼. 기억하고 있나.”
“⋯그놈은 왜 부르십니까.”
하필이면 가장 꺼리는 이름을 부르자 눈살을 팍 찌푸렸다. 눈앞의 이가 솔다토든 카포든 심지어 언더라 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그만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으니.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눈꼬리나 미미하게 움찔거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알아도, 몰라도 상관 없다는 듯 여상한 목소리였다. 흰 연기가 푸른 하늘로 사라진다.
“훈련부에 들어오고 가장 먼저 미쳐버린 놈이었어. 그런 주제에 재능은 있었지.”
“⋯미쳤다니.”
“그만큼 유약한 성정이었다. 처음엔 무슨 종교를 부르짖던데 이후로는 도통 입을 열지도 않고 구석에서 웅크린 채 아무것도 안 하더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기억 속의 윌리 해밀튼은 언제나 웃음이 많고 살갑던 녀석이었으므로. 분명 귀에 익숙하고 눈에 선한 이의 이야기가 한 번 마주쳐 본 적 없는 타인의 것처럼 낯설었다. 그런 제 얼굴을 흘긋 바라본 제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난간 밖으로 재를 털었다.
“그런 녀석이 네 능력을 듣더니 갑자기 생기가 돌았어. 마지막에 보니 ‘먹힌다.’는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무슨 종교였습니까.”
“이름은 몰라. 듣기로는 ⋯⋯유리아.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유리아. 단 세 글자에 불과한 이름은 너무도 부족했다. 어딘지 모를 초조함과 분노가 가슴 속에 등잔불처럼 흔들린다. 어느덧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버려 구둣발로 지지고 고개를 들자 그도 어느덧 다 태운 담배를 아무데나 버린 이후였다. 그는 여전히 어릴 적 봤던 무던하고도 빈틈없는 얼굴로 정장 옷깃을 바로 세우며 덧붙였다.
“요즘 통 재미 없어 보인다는 얘길 들어서 한 이야기야. 듣고 넘기든지 파보든지 마음대로 하도록.”
어깨를 두드리고서 철문 바깥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곧 푸르고 하얀 하늘로 고갤 돌린다. 더는 의미 따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았는데. 느른히 눈꺼풀을 끔벅이자 푸른 하늘에 새까만 천장이 포개지며 지긋했던 비린내가 환상처럼 끼쳐온다. 아주 오래 전, 먼 기억 속에 파묻어둔 기억이 하나씩 수면 위로 비치기 시작한다. 그의 어깨에 기댈 때면 홀로 바다의 향이 난다며 착각했던 내음과 함께.
‘아침마다 반짝거리던 바다, 노란 사탕이 새콤했던 가게⋯ 그리고 빨간 벽돌 집이었나.’
예상되는 곳이야 너무도 많았다. 이 땅의 절반 이상이 바다였고 사탕을 파는 가게는 셀 수도 없었으니. 그래도 찾아볼까.
오직 나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 정도 호기심은 나쁘지 않았다.
마침내 높은 지점에 올라서서 내려다 본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푸른 바다. 조각이 너울치듯 알알이 빛을 머금은 수면은 가히 그가 회상했듯 한 장의 화폭 같았다. 항구 맞은편에 들어선 낡은 가게도 하나 보이고. 손 안에 들린 주소를 기점으로 주변을 돌아보자 높은 건물 건너 무너진 집터가 하나 보였다. 이러려고 높은 곳에 자리 잡았지. 금수처럼 몸을 낮추면 기다렸단 듯 두 다리에 비늘이 돋아난다. 그렇게 바닥이 패도록 도움 닫기하여 가속하면 날개짓다운 날개짓이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날개가 새의 것을 따라하듯 퍼덕이며 속도를 늦춘다. 나름대로 빠른 기동력을 습득하기 위해 연습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목표한 지점까지 한 번에 날아 섰을까. 붉은 벽돌만 남은 집터를 이리저리 기웃거리자 주민 한 명이 느릿느릿 나와 주변을 훑었다.
“누구 찾아오셨소.”
“여기 윌리⋯ 아니, 해밀튼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고 들었는데.”
“해밀튼? 거긴 데커라는 가족이 살았던 집이오만.”
뭐라고? 당황스러운 기색이 표정에 스민다. 그럼 윌리는 빨간 벽돌을 자기 집이라고 얘기한 게 아니었나. 오랫동안 공 들여서 찾았더니 내내 허탕이나 친 기분이었다. 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흩뜨리며 눈살을 찌푸린 채 한숨이나 내쉬었나. 이제 미용실이란 걸 찾아봐야 할지. 거친 욕설을 얼마간 지껄였을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주민이 벽돌 하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더니 이내 아, 하는 탄성을 낸다.
“그래, 있긴 있었지. 데커 가족이 살기 전에 아주 짧게 살다 떠난 가족이 있었소. 그 가족 이름이 해밀튼이었던 것 같군.”
“그럼 그렇지. 뭔가 알고 있는 거 없어?”
“흐음⋯. 그 가족이 놓고 간 일기가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아 먼지만 앉았겠어.”
나도 그만 잊고 있었지 뭐요. 늙은 주민은 조그마한 집안에 들어가 콜록거리는 소릴 내더니 곧 조막만한 일기 하나를 꺼내 들고 왔다. 푸른 겉가죽을 덧댄 일기장은 그 주인을 가리키듯 어린아이의 글씨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손때가 많이 묻어 보였다. 그 가족이 놓고 간 건 일기 하나밖에 없으니 돌아가려면 일찍 가라며 일갈한 주민은 그의 낡은 집으로 돌아갔고, 이내 잡음 섞인 TV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거밖에 없나 보네. 그래도 일기가 어딘가. 터만 남은 공터 벽면에 기대 앉아 쇠 잠금을 풀었다. 대충 훑어보던 종이를 다시금 천천히 한 장씩 넘기자 익숙한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윌리 해밀튼의 일기장.
처음 만났던 시절보다 더욱 삐뚤빼뚤하던 때의 글씨였다. 알고 있던 글씨체와는 다르지만 그의 필체가 어디 가진 않았는지 본질은 비슷해 보인 게 조금 웃겼나. 간만에 마주한 그의 흔적이 퍽 반가워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곤 한 장씩 넘겼다. 부모님과 공원에 갔던 일, 바다에서 소라고둥을 가져온 일, 그리고 생전 처음 본 신의 가르침을 받았던 일. 어릴 적의 윌리는 부모님의 신앙을 따라 심취해 있었던 듯했다. 내가 모르는 윌리 해밀튼이 일기장 속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새삼스러워 입술이 비죽거렸다. 한 장씩 넘기던 손길은 마지막 장을 향할수록 점차 느려진다.
“⋯하하. 이래서였네. 이래서 그토록 나오고 싶어했어, 윌리?”
안부를 전해주란 게 겨우 이런 이야기였다니. 헛웃음을 터뜨리며 일기장을 들고 있던 팔을 툭 떨군다. 속이나 시원해지고 싶어서 겨우 찾아왔건만 어째 더욱 사나운 아이러니 속으로 빠진 기분이었다. 괜히 찾아왔네. 대충 혀나 쯧, 차고서 비척비척 일어나 바다로 향한다. 온통 비린내 나는 콘크리트를 하염없이 적시며 밀려드는 파도와 방파제에 부서지는 포말. 하늘의 푸른 빛이 내리쬐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때 그가 서서 바라봤을 광경을 온전히 시야에 담는다.
“과연 누가 멍청했던 건지 모르게 됐네.”
이리도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자라서, 사랑을 받고 자라 그리도 예쁜 줄 알았더니. 우리의 인생은 어째서 이리 기구할까. 손때가 묻어 낡고 삭아서 곧 부서질 것만 같은 일기장과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드는 바다를 번갈아 본다. 네가 어울리는 곳은 내 안이 아니라, 저기겠지. 손아귀에 일기장을 꼭 쥔 채 저멀리, 아주 멀리 던진다. 그가 기억하던 수평선에 닿을 수 있길 바라면서. 풍덩거리는 소리마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나면 여전히 빛을 머금은 바다는 기억 한 점까지 삼키고, 그렇게 더는 미련 없는 걸음이 자리를 떠난다.
하염없이 부닥칠 바다만이 덧없는 영혼을 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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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맑음.]
[어젯밤에 엄마, 아빠가 몰래 속닥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날 데려다 판다고 하셨다. 어떤 조직에 팔아 넘긴다고. 그 돈으로 집을 사고 빚을 갚을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오늘 밤, 도망가기로 했다. 절대 잡히지 않을 거다. 절대로. 그래서 모든 게 안전해지면⋯ 찾아와서 전부 죽여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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