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시 홀트 Jacksie Hoult

어느 날의 기억

누구도 반기지 않는 수렁을 집이라 불렀다.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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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못 - 날개


누구도 반기지 않는 수렁을 집이라 불렀다. 온갖 욕설찌꺼기와 쓰레기가 불어터지던 골목길, 수시로 불이 사라지는 도시, 짐짝을 숨긴 채 빛을 등져 떠도는 자들. 하등 가치 없는 생명을 붙들기 위해 경쟁하는 이곳에서 상처와 피 따위는 나약함의 증명이었으며 하릴없이 떨어지는 눈물이야말로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그리 악독하고도 수상한 것들이 몰려들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군상극이나 찍어내는 이곳을. …그래. 나는 ‘집’이라 불렀다.




한때 경쟁에 밀려나 쓰러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올려다 본 하늘은 너무도 멀고 맑아서. 한동안 우울에 빠져있었을 때가 있었다. 어린 날의 감상이었는지, 주제 넘은 바람이었는지. 아직 시작일 뿐이라며, 작고 여린 삶을 어떻게든 제대로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고민하던 아이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잭시, 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구나.”

온화한 목소리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검은 신부복을 입은 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끔벅거렸다. 누구더라. 어릴 적부터 유난히 느리던 머릿속에 차곡차곡 기억이 새겨져 한 얼굴을 떠올린다. 한 달에 한 번씩 골목 끝에서 배식을 하던 남자, 가끔씩 눈을 마주치면 다정하게 웃어주던… 아, 신부였다. 그가 누군지 알아차리자 얕은 탄성을 내며 고개를 기울인다. 높은 첨탑처럼 생긴 건물에 사는 사람이 가까운 척하며 말 붙인다는 게 이해되지 않은 탓이었다. 대답을 하기엔 애매한 사이. 계단에 앉아 애꿎은 다리만 투닥거리던 작은 발이 굼뜨게 가지런해진다. 다가온 신부가 옆자리에 앉자 옴찔거리던 발끝이 굳었다.

“저 아이들과 공을 차고 노는 것도 좋지 않니.”

계단 아래, 빈 공터에서 웅성대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나와 신부의 눈치를 보며 기웃거렸다. 신부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따스한 낯으로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다. 말갛게 웃는 얼굴과 정신 사나운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다시금 아이들이 나이에 맞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끝으로 눈을 떼자 곧 신부와 시선이 마주쳤다. 색 옅은 눈동자는 여전히 의아함을 빚어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아.”

괜히 뛰면 지치기나 하니까. 긴 문장은 입에 붙지 않아 단편적인 대답만 나올 뿐이었다. 안타까운 듯 내쉬는 한숨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의 반응은 예상하던 차였다. 커다란 차를 타고 지나던 어른이나 바닥이 꿇어 앉아 구걸하던 어른이나 비슷한 반응을 하곤 했으니. 흉터 가득한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다. 공이 이리저리 튀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그림자가 빛에 따라 산란한다. 여름을 맞아 사락거리는 이파리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 다른 이들의 웃음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고루하고 지루했다.

“잭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걱정스럽게 묻는 목소리조차 달갑지 못했다. 과한 관심이 영 못 먹을 것을 삼킨 듯 불편할 따름이었다. 느른히 내쉰 숨에 지친 기색이 언뜻 비쳤나. 이미 이 만남의 끝을 알고 있다는 듯 무던하기만 했다. 툭, 맞붙고 떨어진 신발코 소리가 작게 울린다.

“그렇게 관심 가질 필요 없어. 어차피 난 여기 아이도 아니잖아.”

어떤 유감도 없다는 듯 느리게 기울어진 고개. 목소리 끝에 걸려나온 한숨 비스무리한 웃음기.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온 만남이, 내가 앉아있는 이 계단이, 그저 고아원과 낡아빠진 거리 사이에 잠깐 베푸는 호의라는 사실 말이다. 턱을 괸 손가락이 찬찬히 마디 접혀 톡, 뺨을 두드린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뛸 때마다 흩날리는 흙먼지들. 나는 그저 저런 존재였다. 흙에 파묻혀 있다가, 그들이 못내 손을 내밀어야만 드러나는.

“그러니 괜찮아. 저기 어울리지 않아도.”

다시금 마주한 신부의 얼굴은 그닥 시원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지. 어린애는 항상 저리 웃고 순해야 한다는 망상. 무언가 가르침을 줘야 하는데, 콕 찔려 도무지 무엇도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얼굴. 이 역시 지루하다. 두 번째 손가락이 다시금 제 뺨을 의미없이 두드린다. 아, 재미 없다. 짧고 얇은 다리가 계단 위를 툭툭 치다가 곧 일어난다. 제 뒤를 털어내는 손길은 거침없었다.

“나 갈게.”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으로. 여긴 다른 이의 ‘집’이었으니.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 배웅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긴다. 남은 것이라곤 시간밖에 없는 아이의 걸음은 여유롭고 느릿하기만 하다. 그렇게 모형뿐인 신에게 조아리는 신부를, 곧 머리가 차면 버려질 아이들을 뒤로 하고. 곧 시린 겨울에 시들고 말 초록과 한기를 몰고 올 바람을 뒤로 하고. 언덕을 내려와 고아원 입구에 도착하면 갓 배식이 끝나 식판을 반납하던 이와 마주친다. 아는 얼굴이었다.

“여, 잭시. 또 그거 보러 갔구나.”

“응. 오늘은 안 보이더라.”

“그렇겠지. 날씨가 흐리잖냐.”

이빨 빠진 노숙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다. 저 높은 곳에 오르면 붉은 빛을 반짝이며 내달리는 비행기가 보인다고 했는데. 아쉬운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얼마나 올려다 봤을까. 그만 가자는 듯이 앞서 걷는 이를 따라 멈칫거리던 걸음을 돌린다. 깔끔하던 지난 길과 달리 신발창에 맞붙는 쓰레기와 눅눅한 이끼가 거미줄처럼 엮여든다. 얼마 가지 않아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길거리와는 아주 멀어질 테지. 이 사이에 느껴지는 묘한 괴리감은 어딘지 모를 불쾌감을 남겼다. 언제나.

“그러고 보니 패키, 그놈이 이를 갈고 있다더라.”

또 어디선가 주워 들은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문득 타이밍에 맞지 않게 입을 연 노숙자의 이야기에 적당히 귀 기울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그는 마치 주점과 길거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이처럼 신나서 주절거리곤 했다. 술잔 하나 없이 취객을 연기하는 건 그의 특기 중 하나였기에.

“저 고아원이 자길 버렸더라지. 큭큭, 정신 나간 놈.”

“항상 있던 일이잖아.”

늘 새로운 아이를 받기 위해 나이가 차면 매정하게 바깥으로 밀쳐내는 장면을 숱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밀려난 아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한지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하며 모퉁이를 돌 무렵. 고아원의 언덕이 위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스친다. 아, 이제야 나타나는구나. 어둑한 그림자와 햇살을 가르는 벽 사이로 희고 높은 새가 지나친다. 고아원을 향해, 그리고 높은 언덕 너머로. 날개 한 번 휘적이지 않고 고고하게 지나치는 광경이란. 내내 잠잠하기만 하던 바람이 언뜻 뺨에 닿은 듯했다.

“불태워버린다고 얼마나…. ―잭시?”

“으응.”

견고하게 붙은 고아원의 팻말과 기다리고 있던 새가 사라진 하늘을 번갈아 본다. ‘All we have is now.’ 짧은 문구가 적힌 팻말과 롬스힐 고아원이라 적힌 간판. 철로 만들어진 흰 새가 점이 되어 사라지자 흥미 또한 사그라든다. 처음부터 딱 그뿐인 관심이었다. 가자며 보채는 이의 목소리에 알았다며 귀찮은 투로 답하곤 그만 시선을 거둔다. 뭐, 저들은 오늘 하루라도 편히 보내니 다행인가. 언젠가는 불타 사라질지 몰라도. 귓가에 희미해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야, 잭시. 들었어? 고아원 결국 불탔다더라. 살아남은 애도 없대.

…아, 그럴 거라 들었지. 그럼 신부도?

말도 마. 가장 먼저 달아났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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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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