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우조] 모래 산호초
2024년 7월 디페스타 배포본
홈 이후 시점 쯤 되는 아무래도 시공입니다. 트라이건 맥시멈. 작품의 중대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하는 이유와 밧슈의 정체 정도만 알면 대충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해봤자 트라이건 본편 1, 2권 정도 스포일러네요(아마). 이게 맹우조인지 씨피인지 뭐.... 이 또한 대충 알아서 착즙해 드시면 됩니다. 24년 7월 디페스타에 후기 포함 배포본 출품함.
사평선沙平線 너머로 폭풍이 다가왔다. 고운 모래 먼지 뒤로 쌍성들이 숨으며 세상은 기괴한 적색으로 물들었다. 연기를 머금은 것처럼 노랗게 탁해진 상공을 물들이며 기어드는 붉은 핏물을 닮았다. 태양들 빛이 먼지 위를 스치며 그 모든 게 희미하게 빛났다. 보기 드문 기상이었다. 그림자도 흐리고 세상의 색이 기묘해 보여서 거리감을 재기 어려웠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가해지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울프우드는 고개를 틀어 모래 폭풍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청암색으로 투과하는 렌즈 너머로 다가오는 적색은 유난히 검었다.
“이러다간 사막 한복판에서 폭풍을 맞겠는데.”
밧슈가 사이드카에서 손가락질했다.
“아냐. 곧 에우로아 협곡이야. 폭풍 쪽으로 꺾어.”
확실히 여기는 험지였다. 주요 도시가 가까운 거리에 둘이나 있는데도 교역이 적은 건 사이에 뻗은 바위 벼랑과 협곡의 규모가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이륜차에 사이드카를 단 게 간신히 오갈 만큼 마땅한 길이 없어서, 그리고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할 바엔 협곡을 빙 돌아가는 샌드스팀을 유용하는 게 편해서, 사람들은 이곳을 잘 지나다니지 않았다. 버스나 트럭마저도 다닐 수 없는 험지에 개인 여행자를 털어봤자 본전 찾기 어려워서 이곳엔 변변한 도적단도 없었다. 오토바이를 아무렇게나 버려놓아도 문제없을 거란 소리였다. 울프우드는 궁시렁대며 핸들을 꺾었다.
“이러다가 폭풍 속에서 낭떠러지로 날아가서 우리 안젤리카가 결딴나면 네 책임인 거야, 빗자루.”
“뭐야, 운전 똑바로 못한 네 잘못은 안쳐주는 거야?”
울프우드는 쉽게 죽는 보통 사람인 척 농담했다.
“그야 바이크가 부서질 정도면 내 몸도 산산조각 아니냐. 장례 좀 치러 달라 이거지.”
밧슈가 질색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러곤 풀 죽어서 투덜거렸다. “진짜 아는 사람 자주 묻어본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고.”
울프우드도 아는 사람을 묻어본 적 없는 게 아니었다. 가장 최근 일은 2년 조금 더 전이었다. 스승을 폭발한 건물 잔해에 묻어버렸지. 그는 그냥 웃었다.
“그럼 네가 좋은 은신처로 잘 안내해주면 되겠네.”
이 여정의 안내역은 울프우드다. 그가 실제로 지도와 방향을 따져서 길을 정하고 알려주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었다. 더 오래 이 행성을 떠돈 밧슈가 이 세상을 더 잘 알았고, 이번처럼 지리와 지형을 안내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울프우드는 단지 밧슈의 죽음이 어디 있는지 알아서 안내자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항해사는 밧슈다. 이번에도 밧슈는 울프우드에게 길을 알려주었다.
절벽으로부터 여유를 두고 세상에 난 틈새를 따라가던 그들은 그사이를 굽이굽이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더는 바이크로 갈 수 없는 곳에 가서는 튼튼해 보이는 괴석 아래를 살짝 파고 가리개 천을 덮어서 숨겨두었다. 작업을 끝내고 고개를 들면 폭풍이 지척이었다. 모래 냄새가 제대로 나기 시작했다. 울프우드는 짐에서 꺼낸 스카프를 두르며 밧슈를 따라 뛰었다.
밧슈는 깎아지를 듯한 절벽에 신코를 걸치고 서서 다가오는 폭풍을 지켜봤다. 그들은 험지의 가장 높은 지대께에 있었는데, 그래서 아래로 펼쳐진 사막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둥근 곡률이 느껴질 정도로 넓은 대지를 이제 숨이 턱 막히는 모래의 거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끝없이 아래로 쏟아지면서도 무너질 줄 모르는 성이 앞으로 내달리는 토마떼처럼 뛰어왔다.
“여길 내려가야 해.”
“장난해?”
“내가 그래서 그 십자가도 놓고 오라고 했잖아.”
밧슈는 그러고 냉큼 절벽을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울프우드는 상소리를 하며 그를 따라갔다. 밧슈는 무슨 벽에 붙은 다지류 웜즈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는데, 울프우드는 밧슈가 가는 길을 보고 단단해 보이는 턱을 향해 뛰어내리길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낙법으로 충격을 줄여야 했을 만한 거리와 중량인데 좁아서 그럴 수도 없어서 나중엔 그의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무릎과 삭신이 쑤셨다. 올라갈 땐 어쩌란 거지.
울프우드는 마지막으로 쾅 하고 떨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퍼니셔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밧슈는 아래로 펼쳐진 사막을 주시했다. 캐러밴이라도 지나가는지 확인하는 걸까. 울프우드는 일어나서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빡 때렸다.
“아 왜!”
“내 무릎이 더 개고생했어. 여기야?”
밧슈가 뒤편을 가리켰다. 울프우드는 돌아섰다.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높이의 바위굴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돌출된 턱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위쪽의 오버행이 절묘해서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특수한 지형이었다. 용케 찾았다. 밧슈가 먼저 안쪽으로 냉큼 들어갔다. 입구는 퍼니셔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빼내야 할 만큼 좁았지만 몇 걸음 안 가서 바로 넓어졌다.
좁은 입구와 다가오는 어둠 탓에 안에 드는 빛이 별로 없었다. 울프우드는 고글을 벗고 희미한 조명에 기대어 내부를 살폈다. 반사되는 발소리로 보아 여기는 의외로 깊은 틈새였다. 바위가 쩍 갈라지고 붙으며 생긴 틈새인 만큼 벽면은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도비탄이 생기는 걸 피할 수 없으므로 전투 상황에서 퍼니셔는 엄폐물로만 사용하고 권총을 꺼내야 할 것이다. 미카엘의 눈 소속 개조자라도 붕괴한 바위틈에서 살아남긴 어려울 것임으로 미사일 탄두는 당연히 논외였고. 울프우드는 짐을 뒤적여 불을 켤 성냥갑과 기름 불통을 꺼내었다. 밧슈가 그를 말렸다.
“잠깐 불 켜지 말아 볼래?”
“왜? 어둡잖아.”
“있어 봐.”
뭔가 재미있는 걸 기대라도 하는 투라서 울프우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 말고 달리 들리는 기척도 없었다. 그는 퍼니셔를 벽에 기대어 두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밧슈는 그대로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울프우드가 말 걸었다.
“뭐 하는 건데, 빗자루.”
“쉿.”
그래서 다물었다. 편안한, 아니 사실 그보단 피로한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가물가물하게 잠들 뻔한 울프우드는 어쩐지 시야가 밝은 걸 느꼈다. 내려앉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별바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발광체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점조직이 천장으로 내려앉은 별길처럼 또렷해졌다. 울프우드는 잠시 말문 막힌 채 좁은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밧슈는 그 모든 것에 에워싸인 채 정경의 일부가 되어 서 있었다. 울프우드는 경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밧슈가 속삭였다.
“조용히, 천천히 움직여.”
“뭐야 이건.”
“웜즈 군체. 특이한 경우지?”
그들의 인기척에 숨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빛을 낼 뿐인데도 자기 보존을 아는 걸까. 울프우드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천장을 보았다. 그에게 신은 언제나 가까이 계심이라, 그 존재를 실감하는 순간이야 드물지 않았다. 그에게 이미 영성의 근거는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이러한, 어떤 개인을 겸허하게 하는 창조성을 눈앞에 두고서 그 순간에서 헤어 나오긴 어려운 법이라.
밧슈가 말했다.
“예쁘지?”
“그러네.”
“보여주고 싶었어. 여기 누굴 데려온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 보통 이런 곳까지 같이 다니는 동행인은 없어서.”
울프우드는 밧슈가 예전에 여기 데려왔을 사람을 생각했다. 아마 나이브스겠지. 그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런 소박하게 아름다운 장소에 어우러지는 정경처럼 마냥 서 있는 밧슈와 그렇게나 두려운 압박감을 주던 나이브스가 함께 있는 모습이라니. 떠올리기 어려운 이질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울프우드는 밧슈 역시 나이브스를 생각했을까 추측했다―밧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구에는…”
“갑자기?”
밧슈가 그의 딴지를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살아있는 예쁜 바위가 있었대.”
“흠.”
“사람들은 아주 오래 그걸 보석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동물이었대. 그게 숨을 쉬면서 돌을 만드는 거야.”
“숨을 쉬는데 돌이 왜 나와. 플랜트냐?”
“인간도 젖을 만들지…?”
“아 그런 식인가.”
밧슈가 웃었다. 이상한 예시를 든 자신도 그걸 또 이해해 준 울프우드도 우스웠단다. 그가 이어 말했다.
“걔들은 숨을 거꾸로 쉬어서 산소를 만들었는데, 이젠 다 죽었대. 인류가 지구를 탈출한 이유 중 하나야. 그들을 지탱해 주던 것들이 그들의 손에 다 죽어버려서, 더는 그들을 도와줄 수 없어서.” 그가 손을 뻗었다. 빛은 꺼지지 않았다. 울프우드는 밧슈의 장갑 보호 쇠가 은은하게 반짝이는 반사광을 지켜보았다. “여기 있는 애들은 그렇게 죽진 않겠지?”
“이 망할 땅에서 죽어가는 건 외래종인 인간이야, 무슨 걱정을 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뭘. 울프우드는 제 뒤통수에 팔베개를 하고 되물었다. 밧슈가 부연했다. “다들 결국 죽을 거라고.”
밀리언즈 나이브스와 그 휘하의 몇 미치광이들 때문이라도 언젠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밧슈의 질문은 그 너머까지 닿아 있음을 울프우드는 이해했다. 그는 고민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오래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의 삶은 좁아서 인류의 보존 따위의 거대한 문제를 생각할 겨를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언젠가 다들 죽지 않을까.”
“그래?”
“이 땅은 번성하기엔 좋지 않으니까. 좀 오래 걸릴 거 같긴 한데.”
밧슈가 울프우드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울프우드는 문득 깨달았다. 저건 아주 오래 살아온, 어쩌면 울프우드가 말하는 오랜 시간 이후에도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그는 말을 바꿔서 달래줘야 할까 고민하며 입술을 씹었다. 밧슈가 그 전에 말했다.
“난 안 그럴 거 같아.” 울프우드는 그의 설명을 기다렸다. 돌아오는 건 이유가 아니었다. 남을 끝없이 설득하지만 그 설득하는 본인을 이야기하진 않는 자가 말했다.
“자주 생각하고 오래 무서워했는데, 그러진 않을 거 같아.”
그러면서 짓고 있는 여상한 미소가.
울프우드는 눈을 감아 어둠 속으로 숨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계속 알지 않았던 걸 알게 되고 생각하지 않을 걸 생각하게 된다. 울프우드는 그게 조금 두려웠다. 나의 세계는 좁고 나는 이미 상황에 갇혀 있는데 더 넓게 보게 되면 어쩌란 말인가.
들어본 적도 없는 바다를 알아서 뭘 할 수 있다고.
모래폭풍이 가둔 작은 동굴 속에서 울프우드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 밧슈도 인제 그만 밥을 먹어야 한다고 불통을 꺼내는 걸 막지 않았다. 인공적인 불길이 타오르자 웜즈들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들어오는 외풍을 등진 채 울프우드는 손 맞대고 식전 기도를 올렸다. 눈꺼풀 뒤에서 서로 다른 빛은 더는 분간 가지 않았다.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1년 전에 시작한 각설이가 죽질 않고 돌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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