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 커미 샘플 1
병사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안 오셨어요’, 직장인들이 병원에 가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L는 가벼운 마음으로 건강검진 후의 저녁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는 그에게 광석병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그녀의 저녁 메뉴 고민은 송두리채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L는 몇 번이고 의사에게 되물었고, 돌아오는 답은 몇 번이고 같았다. 그녀는 광석병이었다. 심지어 원발지가 호흡기 언저리라 접근하기에도 곤란한 위치에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게 L는 어느 날 죽음이라는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L는 초연하게 그녀의 개인실로 돌아왔고. 그리고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L x D]
my last love letter
1.첫 번째 편지
Sil와 D는 동시에 왼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것은 그들 나름의 의문의 표시였을 것이다. L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러니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서요. 그녀가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사실 편지라고도 할 수 없는 서류 꾸러미였다. 아마도 Sil가 그 서류를 그 자리에서 펴 본다면 L는 바로 옆에 있는 제 연인인 D에게 병의 원인을 들킬 터였다. 원발지가 호흡기인 급성 오리지늄 감염증. 광석병은 일반적인 접촉만으로 옮지 않는다지만 L는 D에게 자신의 병증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광석병으로 죽는다 한들 D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는 그 병을 D가 알지 못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의 염원을 알았는지. 아니면 그저 바빴을 뿐인지 Sil는 별다른 의문 없이 서랍에 편지를 집어넣고 가보라는 듯이 까닥. 고개를 저었다.
-다시 볼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 빠른 쾌유를 빌지.
-...네. 감사합니다.
-형식상의 빈말이 아니라. 자네만한 통역사를 구하긴 힘드니까 말이야.
L는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아 숨막히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Sil는 바스락. 사직서를 펼쳐보았다. 간결한 문체로 적힌 사직서의 퇴직 사유에는 진단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러한 서류를 수백 건은 처리해 왔고. 그 중에서는 L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생겨 퇴사하는 인원도 적지 않았다. 원발지가 호흡기인 급성 오리지늄 감염증. 밑에 적인 의사의 소견은 애써 긍정적인 단어로 적어놓았다고는 해도 그닥 희망적이지 못했다. Sil는 흘긋. D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닥 큰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드라마였다면 아마도 L를 잡으러 뛰쳐나갔겠지만.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결국 Sil는 참지 못하고 D에게 질문을 던졌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구는군?
-약간은.
-약간?
-그 꼬맹이는 아직 얼굴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않아.
짐작은 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사무실은 침묵에 잠겼다.
D는 약간의 배신감과 아주 많은 체념이 자신의 안에서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지가 좋아한다고 들이대놓고 정작 중요한 건 말하려고도 안 하지.어린애다운 맹랑함인지 강한 척인지 D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에 철이 들어 버렸고, L를 이해하기엔 너무 오랜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새삼 이제 와서 누군가의 죽음에 주눅들고 슬퍼하기에는 기사 토너먼트 밑바닥에서 그런 것들은 수두룩히 봐 왔다. 경기 중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혹은 자신을 향한 온갖 찌라시에 스스로 목숨을 놓아 버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광석병으로 은퇴 선언을 한 지 몇 개월만에 그의 부고가 신문에 전해지거나. 전부 겪어본 일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들으면 충격받아서 울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D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L가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프단 말을 했어야 했다고, 영원히 숨길 수 없을 거라면 미리 말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D는 생각했다.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 자조했다. 꼬맹이 옆에 있으니 꼬맹이가 다 되어 간다고.
2.두 번째 편지
-그래서. 우리 통역사님께서는 일을 관뒀는데 또 뭘 그리 열심히 쓰고 계신 거지?
-아. 편지를… 조금, 쓰고 있었어요.
-편지?
-네… 콜록. 오래 말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서.
L는 말을 하면서도 편지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몇 개월 새에 가늘어진 손가락에서 펜을 쥔 힘줄이 선명히 드러났다. 병실에는 한동안 펜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뚫고 먼저 정적을 깬 쪽은 D였다.
-누구한테 쓰는데?
-나 자신한테 쓰는 것도 있고, 신세졌던…분들이나. 친구들도 있고. …그리고 어둠의 기사님 팬레터도 있고.
그렇게 말하면서 L는 작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는 언뜻 아프기 전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L는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옆얼굴에서는 어디서 오는지 모를 초연한 열정과 집중이 다시 선명히 드러났다. 마치 편지에 모든 걸 쏟는 것만 같군. 그렇게 생각하며 D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말했다. 쉬엄쉬엄 해. 예에…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L는 펜을 놓지 않았다. 아마도 로도스 아일랜드에 비치되어 있었을 작은 판촉용 볼펜과,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그녀가 사비로 구매한 듯한 아기자기한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굳이 편지를 읽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쓰는 편지인지도 불투명했고, 무엇보다 앞에 있는데도 말로 하지 않는다면 그녀 나름의 생각이 있는 것일 테니, D로서는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금 병실에 종이를 스치는 볼펜의 소리가 가득 찼다. D는 가만 눈을 감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마찰음에 귀를 기울였다. D는 알고 있었다. 맑고 또박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끊어지고 갈라지며 제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 마찰음은 L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점점 제 고유의 소리를 잃어가는 L가 목소리 대신으로 선택한 또 다른 소리일지도 몰랐다. 늘 응석을 부리던 꼬마는 거기 없었다, 어쩌면 사표를 내던 그날부터 거기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제서야 D는 깨닫는다. 사실은 자신은 그 응석을 받아주는 일을 정말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꺼내는 대신 복슬거리는 하얀 머리를 쓰다듬으면 L는 작게 웃는다.
-글씨가 비뚤어져요.
-괜찮아.
-다른 사람들 거에요.
-그 사람들도 아마 괜찮을 거다.
-안 괜찮으면요.
-내가 그랬다고 해라. 그럼 괜찮을걸,
사각거리던 소리가 살짝 멎는다.
-편지 쓰는 게 안 끝나요.
-할 말이 많았던 거지.
-...죽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은 사람은 없지.
-응석부려도 돼요?
-난 네 응석 받아주는 거 좋아해.
편지 젖을라. D는 병상의 간이 탁상 위를 빼곡히 채운 편지지를 살짝 치운다. 이내 그 위로 눈물이 한 두 방울 떨어진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쉰 목소리로 끝없이 하는 사과가 마치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울고 있는 누군가를 위로해본 적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온몸으로 부딫히고 칼을 맞대느라 눈물을 닦아본 게 너무 오래 된 일이었다… 어떤 말을 내뱉는 대신 그녀는 L의 등을 토닥이기를 택한다. 탁상과 손등에 눈물이 떨어진다. 액체는 뜨겁다. 그에 반해 몸은 예전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차고 단단하다. 마치 그녀의 남은 생명력을 눈물로 짜내는 것처럼.
D는 끝끝내 마음놓고 울지 못했다.
3.마지막 편지
겨울이 지나기 전에 L는 죽었다. 사인은 다발성 장기 부전, 유언이라도 듣고자 찾아갔었지만 그곳에는 목소리를 잃은 채 호흡기에 의존한 L가 있었다. 그래도 희미하게 웃어 보인 모습을 마지막으로 며칠이 지나고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D는 L를 찾아갔던 그날 밤, 끊은 지 좀 되었던 담배를 다시금 집어들었다. 담배에서는 향 냄새가 났다. 아니면 장례식에서 태우는 촛불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L는 이 냄새를 정말로 싫어했었다… 폐에 좋지 않은 것을 하릴없이 태워댄 저보다 먼저 목소리를 잃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D는 생각했다. L의 장례식에는 얼굴 모를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고. D는 처음으로 L가 알려주지 않은 그녀의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이틀 뒤 그녀의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읽어보지 않아도 발신인은 알 수 있었다. D는 페이퍼 나이프를 이용해 조심스레 편지를 열었다. 편지 봉투는 이상하리만치 두꺼웠고 족히 열 장은 되어보이는 종이로 버거울 정도로 차 있었다. 한 장 한 장이 L의 목소리일 터였다. 목소리를 잃은 이의 목소리였을 터였다.
‘D 님께.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쓰고 싶은 말이 매일같이 늘어나서 편지보다는 일기처럼 되어버렸어요.’
편지든 일기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발자취라면 그리 상관은 없었지만. D는 늘 알 수 없는 외국어를 제 모국어로 통역해주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 목소리는 창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문은 아니었지만. 유달리 전망 좋은 창문이었음을. 제가 앉아있으면 고즈넉한 경치로 반겨오던 창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유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불가능한 것이었길래.
‘...세상에 이렇게 두서없는 러브레터가 있어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네. 유서가 아니라 러브레터에요. 유서는 너무 칙칙하잖아요. 게다가 제가 남겨둘 수 있는 건 사랑한다는 말밖에 없는걸요…’
이 러브레터만큼이나 두서없는 사랑을 했었지. 한참 어리다고 생각한 여자의 텐션에 휘말려서 정신을 차리니 사랑을 하고 있었더랬다. 때로는 분위기에 휘말려 흘레붙기도 하고 둘만 어디서 훌쩍 떠날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속삭이기도 하고. 가끔은 그 어린 마음의 원망을 받아내며 가소로워하다가도 관계가 끝날까 슬그머니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미안하다며 다시 제게로 돌아왔을 땐 미묘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리고 욕망하고 독점하고 질투하고 유치하게 굴고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며 즐거워했었지. 하등 유치한 짓이었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짓거리였다.
‘...테라의 모든 말로 사랑한다고 쓰는 법을 연습해 봤는데 어떠세요? 사랑해. i love you. …(중략.)... 아. 다 쓰고 보니 에기르 어는 못 배웠어요. 카즈델어도요…’
그래. 이런 유치한 방식이 그 애의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지지도 못한 주제에 온 세상을 다 주고 싶어하는 방식이.
편지는 그야말로 두서없었다. 제 기분을 적어둔 날도. 좋아한다는 말을 적어둔 날도. ‘그때 기억나시나요?’ 하며 추억을 꺼낸 날도 있었다. 목소리가 추해져서 편지로 말을 전하게 된다는 고백도 있었고, 그래도 자신을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었다. 바램 고백 설렘 원망 갖가지 감정이 섞인 끝에는 드디어 초연함이 묻어났다. 이제 죽는 게 이상하게 무섭지 않다고.
‘...그치만 D 님이 절 잊는 건 여전히 두려워요. ‘
편지의 글씨체가 점점 힘이 빠진다. 거의 비스듬히 누워있는 글씨체에 마지막으로 담긴 감정은 초연함과 두려움이다. 거의 눌리지도 않은 편지를 몇 번이고 만져 가며 마지막 장을 펼친다. 다른 사람 사귀면 질투할 거에요. 농담으로 쓴 듯한 문장. 그리고 거기서 편지는 끝난다. 미처 끝을 맺기 전에 더 이상 펜조차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건지. 결국 유치한 농담 하나만 남기고 떠난 꼴이 되었지 않은가. D는 쓴웃음을 짓는다. 유치한 농담 끝의 공백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것은 실로 유서가 아니었다. 그건. 마지막 러브레터였다. L가 적은 마지막 러브레터임과 동시에
D가 받을 마지막 러브레터였다. 그녀는 카란 무역의 로고가 새겨진 펜을 집는다. 감히 러브레터 끝에 답장을 쓰기로 한다.
나도.
나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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