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斗²

어떤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猟犬 by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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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모

차태건. 85.07.2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 강력범죄수사부 마약수사과 검사

부산지방검찰청 남부지청 - 강력범죄수사부 검사

#0

법조계 집안의 이남 이녀 중 둘째.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4선 출신의 조부, 검찰총장 출신의 국회의원 부, 재계 순위 오 위 안에 드는 JT 그룹에서 파생된 JT 로펌 대표인 모까지. 차태건은 날 때부터 법조인이 되기 위한 초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살면서 본 수많은 부정부패와 허구한 날 뇌물을 받아먹는 아버지, 집안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이들에게 무자비한 편법 행위까지. 차태건은 이 집안을 경멸한다. 저런 짓도 무조건적인 재력과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빨리 깨우쳤던 탓인지 로스쿨을 졸업하고 수습 기간을 뗄 때까지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몸집이 커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매번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자기혐오도 있는 편이다. 머리가 크고, 본인이 원하던 자리에 올랐음에도 매 순간 혈연의 도움을 받는 어린애임에 불과할 뿐이라면서. 차태건을 대체할 대체품들은 사방에 널렸고, 다른 이가 그것을 약점 잡아 처리하느니 본인의 손으로 해결하는 게 낫다고 판단. 그리하여 본인이 그토록 혐오하던 일을 스스로가 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밥 먹듯이 본 부정부패로 인해, 혐오감이 생겼음에도 집안을 도와주는 꼴이라니. 그는 본인 생각보다 집안을, 그리고 가족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정치 생활이 끝날 때까지만 이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이는 오늘도 여전히 사건 청탁을 받으며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차태건은 자기혐오가 심하다. 하여, 불법적으로 취득한 약으로서 그것을 회피한다. 그때만큼은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이유로 자기혐오가 극심한, 도저히 제정신으로 잠에 들 수 없을 때만 하고는 했다. 그것이 차태건의 유일한 도피처이다. 아버지의 강제성으로 범죄자들을 본인의 손으로 풀어 준 날에는 자기혐오가 곱절로 커지기에. 하지만, 그는 자기 통제력이 상당한 편이라 중요한 재판이 있는 날이거나, 중요한 접대 자리, 가족과의 식사 자리가 있기 며칠 전부터는 약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 결과, 가족을 포함한 차태건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들켜서는 안 된다. 나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평생을 속여가며 살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에 방심한 탓이었을까. 결국 마약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들켰더랬다. 차태건의 부는 온갖 부정부패, 편법 행위는 눈감아 주면서도 마약은 극히 혐오하는 이였다. 오죽하면 본인과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이 또는 그의 자식이 마약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모조리 손절해 버렸을까. 차태건도 이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의 실수가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셈이었다. 결론은 아버지에게 찍혔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버지의 강제적인 명령으로 차태건은 부산으로 좌천이 되었다. 그곳에서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 다짐하며 해산물 비린내 가득한 곳에 발을 들인다.

——

#1

남부지청에서의 첫 출근 전날, 차태건은 청 근처에 오피스텔 하나를 얻었다. 이사를 할 것까지의 유난은 떨고 싶지 않았으므로, 캐리어와 슈트케이스 몇 개만 손에 덜렁 쥔 채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첫날인데,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냐며 머리를 만지고, 넥타이를 골랐으며, 시계 또한 슈트 차림에 맞춰 골랐다. 차를 끌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곳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여기가 맞는지 의문이 가득했으나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도착지 근처라며 제멋대로 안내를 종료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풍겨오는 해산물의 비릿한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숨을 쉬지 않겠다는 의지로 화생방 훈련을 하듯 숨을 멈춘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며 미리 마중 나와 있던 김 계장한테 고개를 까딱였다.

김 계장이 안내하는 곳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도착한 곳에 붙어 있는 팻말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강력범죄수사부장실, 부장검사 남두헌’ 그저 훑어볼 뿐이었다. 문이 열리면 보이는, 부장이라고 하기에 액면가는 어려 보이고, 커피가 아닌 것이 올려져 있는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안경 쓴 남자. 김 계장한테 인사를 건넸던 것보다 확실히 더 예를 갖춘 듯 고개를 까딱였으나 허리는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본인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시선을 뒤로하고 이름 석 자를 고했다. 그게 차태건과 남두헌의 첫 만남이었다.

지방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여기로 건너오는 사건 모두 부장인 사람이 처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게 떨어지는 사건 같은 건 없었기에. 그의 부와 조부가 손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오려던 찰나, 저를 부른다는 말에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부장실로 향했다. 이곳으로 좌천이 되고 나서의 첫 번째 사건이었다. 차태건은 사건 파악에 용이했고, 그것을 계기로 범인을 기소하는 것 또한 일사천리였다. 그 후로 차태건이 맡는 일은 남두헌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일 하나는 잘하는 차태건을 마음에 들어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찌 보면 본인보다 더 영리한 면이 있는 것 같은 탓에 조금의 아니꼬움도 느껴졌으나 그는 차태건을 인정했다. 여전히, 묘하게 본인을 깔보는 듯한 행동과 말투에서 비롯된 싸가지의 찝찝함은 안고 가야 했지만.

#2

부산에서의 몇 달이 지나고 차태건은 아버지의 부름에 서울로 상경했다. 그저 가족 식사뿐인 자리. 안부 인사는 하나 없고, 오직 일과 관련된 대화로만 채워진 자리. 체하지만 않으면 다행일까, 이 모든 게 남에게 보여주기식의 겉치레일 뿐이라는 것에 구역감이 올라왔다. 결국 그의 미래도, 안부도.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은 채 식사 자리는 파했다. 그래, 이게 차가네, 집안인데. 멍청하게 뭘 기대했던 건지 모를 것에 결국에는 속에 있는 음식을 전부 게워 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본인을 헐뜯는 형제들을 비집고 뻔뻔한 낯짝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누나를 사이로 경멸과 불신, 의문의 눈빛을 한 채 본인을 바라보는 동생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는 잘 지냈냐는 안부를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 같은 건 없었다. 집안에서 본인의 위치가 어느 정도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음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결국 자리를 피하는 건 차태건 쪽이었다. 볼품없이 떨어진 이 체면을 어떻게 복구시켜야 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에 딱 떨어지는 결론은 없었기에 답답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차태건은 이런 것으로 무너질 사람이 아니다. 본인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면 개척했지, 절대로 타인에 의해서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부산으로 돌아온 차태건은 이대로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기는 싫다는 이유로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다 들어간, 바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바다. 본인의 앞날처럼 어두운 것에 실소를 흘렸다. 본인이 자리한 곳에 자부심을 느끼던 이는 한순간의 일로 맡바닥까지 떨어져 내려온 것에 자책한다. 약을 한다는 자책이 아닌 본인이 더욱 철두철미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 차태건은 약을 하는 자신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게 그의 유일한 도피처이니, 이것마저 없으면 그냥 죽어야지. 잔에 담긴 얼음이 녹아 달그락거린다. 표면에 물이 맺힌 잔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올린 곳에 시선이 꽂혔다.

정장 차림에 간간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안경테. 눈꼬리는 휘어지지 않은 채로 입꼬리만 올라가 있는, 과장된 웃음소리. 누가 봐도 상대의 말에 맞장구쳐주며 본인 스스로 을을 자처하는 사람. 차태건은 조소를 흘렸다. 어찌 사람이 저렇게 투명할까. 참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 미처 비워내지 못한 잔을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 의자에 걸친 재킷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마주친 시선에 차태건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저 정도면 들켰다는 것에 자존심 꽤 상했을 것 같은데.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벌리던 남두헌을 뒤로 하고 차태건은 바에서 빠져나왔다. 남의 인생에 엮이기 싫었던 이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낮에 있었던 일과 불과 몇 분 전에 제 눈으로 봤던 광경을 날려 보냈다.

#3

남두헌이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제안에 차태건은 거절할 명분이 없어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간다는 곳이, 꼭 차태건이 싫어할 법한 곳을 고른 남자는 제멋대로 자리를 잡았다. 미세한 표정의 변화조차 없던 차태건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빈 컵에 따른 물을 남두헌 앞에 놓았다. 생겨 먹은 것과 다르게 예를 중시했던 차태건은 그동안 본인과 아버지, 어머니에게 아부를 떠는 이들이 했던 행동을 어깨너머로 보아, 눈에 익힌 것을 남두헌에게 대입했던 것일 뿐이었다. 유난히 깔끔을 떨고, 본인 나름의 강박이 있던 자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겠으나 정작 티는 내지 않았을 것이다. 주문한 메뉴가 하나둘 나오고,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남자 둘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간간이 정적을 깨는 남두헌의 물음에 차태건은 답을 내놓는다. 그리 알맹이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겠으나 각자의 나름대로 인상은 퍽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줄곧 서울에서만 살다 온 사람에게 묘한 편견이 있던 남두헌도, 지방 출신이라며 본인보다 타고난 배경 하나 없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를 낮잡아 봤던 차태건도. 그 생각도 딱 그때뿐이었다. 첫인상의 기억은 뇌리에 오래 남으므로, 식사 자리에서 느꼈던 감정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으니까.

음식점 앞에서 차태건은 멀어져 가는 남두헌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재킷 위로 배인 음식 냄새가 영 좋지 않다. 다시는 그 남자와 식사할 일이 없길 바랐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서면 차태건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개비 하나를 입에 물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조차 빠지지 않은 냄새가 밴 재킷을 벗어 손에 쥐었다.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공중으로 연기를 흩뿌렸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연기처럼 지금 본인의 상황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사라지면 좋으련만. 우습게도 현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는, 그저 담벼락에 기댄 채로 자조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 후로 차태건에게 식사 제안을 하는 남두헌은 사라졌다. 차태건 또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식사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때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본래의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지겹도록 똑같은 일상, 햄스터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은 차태건을 쉬이 무료함에 빠지게 했으나 그는 버텨야 했다. 언제 다시 본인을 부를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러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니.

#4

남두헌은 생각했다. 이러나저러나 아무리 봐도 차태건은 있는 집 자식이 분명한데, 도저히 부산으로 내려온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겉으로만 봐도 고급지고, 부내나는 이가 고작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이유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푼돈뿐인 공무원 월급을 꼬라박아도 그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남두헌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기필코 그의 약점을 찾아 손에 쥐어야겠다며.

그리고 그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로스쿨 동문이자 현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는 선배의 연락. 부산에 온 김에 밥 한 끼 하자며 불러낸 자리에 남두헌은 차태건을 불렀다. 혹여, 이 사람이라면 무언가 알지도 모른다는 같잖은 희망이 남두헌을 무모하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 합석하게 된 차태건은 익숙한 낯짝에 눈썹을 까딱였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건네오는 것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답을 내놓았다. 묘한 분위기에 남두헌은 그 둘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마치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옆에서 바람 잡는 남두헌을 차태건은 흘겨봤다. 시선이 마주치면 무슨 일이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입꼬리를 올리는 꼴이 퍽 역겨웠다. 내내 표정 변화가 없던 차태건의 표정이 굳어갔다. 속으로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던 차태건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미친 새끼……. 음식점 앞에서 차태건은 담배를 꼬나물었다. 제가 빠진 자리에서 저 둘은 무슨 대화를 나눌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갔다. 아마, 남두헌이 제 출신과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건 하나뿐이 없었다.

#5

차태건은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내뱉고는 다 타오른 담배를 발로 지져 껐다. 운전석에 올라타, 얼굴을 쓸어내리며 운전대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온 차태건은 옷장 깊숙이 숨겨둔 약을 하나 꺼내 익숙하게 와이셔츠를 걷어 고무줄로 팔을 조이고는 주삿바늘을 꽂았다. 온몸으로 퍼지는 약기운에 정신이 몽롱해지고, 옅은 숨을 연신 뱉어내며 침대 위로 몸을 늘어트렸다.

차태건은 이곳에서조차 약을 끊을 수는 없었다. 도피처의 수단으로만 쓰이던 것이 어느새 기분이 별로인 날에도, 남 부장한테 한 소리를 듣던 날에도, 별 같잖지도 않은 피의자들에게 꼴같잖게 욕설을 들은 날에도. 그는 집에만 오면 약을 찾기에 바빴다. 차태건 눈에, 남두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멍청해 보였기에, 여기 있는 동안 본인이 약을 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것이라며 자만했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곧 닥쳐올 미래도 모르는 판국에 뭘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며 자만했던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차태건은 약기운에 축 늘어져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켰다. 정신 사납게 울려대는 핸드폰 진동음에 짜증스러운 숨을 뱉으며 화면에 띄워진 이름 석 자를 확인했다. ‘남두헌’ 그리 반가운 이름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음으로 바꿔둔 채 핸드폰을 엎어놨다. 비척이며 향한 부엌 찬장에서 잔과 위스키 한 병을 들고 거실 소파에 걸터앉았다. 골통이 울리는 탓에 한 번 좁혀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따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향을 음미하다 삼킨 것은 화한 느낌에 썩 좋은 감상은 아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앉은 채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찰나에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데리고 왔다.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두드리는 것에 욕지거리를 낮게 내뱉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문 너머로 들리는 음성은 익숙했고, 오늘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현관문의 안전 고리를 걸어둔 채 문을 열면 들이치는 차가운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쩌자고 제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차태건은 알 수 없었다. 차태건은 처음으로 본인이 약을 한다는 사실을 후회했다. 문틈으로 보이는 낯짝은 왜 이리 꼴사납게 생겼는지. 예의도 없고, 경우도 없이 무작정 차태건의 집에 들이닥친 남두헌은 문틈으로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제가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듯이. 야비하고, 졸렬한 낯짝은 한동안 차태건에 꿈에 나올 것 같았다. 부디, 제게 예고 없이 휘몰아친 불안과 위기가 제발 무탈히 지나가길 바라는 차태건은 아무 말 없이 안경 너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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