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루퍼] 되돌아온 시간
당신과 함께 했던 어느 과거로.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느 옛날처럼 조금 더 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로이드가 보였다.
“음? 잘 안 되는 것이 있나?”
루퍼스의 시선을 느낀 로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흰 가운, 종종 집중할 때 쓰던 안경. 그 뒤로 보이는 넓은 책상과 책장을 가득 채운 보고서. 루퍼스는 그제야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것은 과거를 재현한 것이었다. 로이드와 함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묶여 있던 그 과거를.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말이냐. 잠든 네 보고서까지 내가 작성한 걸 말하나?”
“…….”
“내 일이 금방 끝났기에 조금 도움을 줬을 뿐이네. 나 참, 무서워서 두 번 다시 도와주지도 못하겠군.”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하는 로이드가 보였다. 로이드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반응 없는 루퍼스를 보았다. 루퍼스는 자신의 감정이 원망인지 후회인지 알 수 없어서 아무런 표정도 내비칠 수 없었다.
“어디 아프면 가서 쉬는 게 어떤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아픈 게 아녜요. 아파서 이러는 게 아녜요.”
“그럼 무엇이 문제인지 내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한때 저 모습이 진실되었다고 믿었다. 루퍼스가 본 그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오롯이 빛나고 있었으니까. 세상 모든 색을 끌어다 칠한 것마냥 홀로 찬란하고 선명했으며,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북극성 같던 사람. 적어도 루퍼스에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루퍼스는 더 이상 로이드를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스승님이자, 친애하는 박사님. 무엇이 당신이 그리 만들었나요? 대답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질문을 꾸역꾸역 삼켰다. 이때의 당신도 전부 다 만들어진 모습일까. 당신이 보였던 애정에는 한 조각의 진심도 포함되지 않았던 걸까.
“사랑은 역시 거짓이었을까요?”
천천히 눈을 떴다. 루퍼스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늦게 알아차렸다.
루퍼스는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어색하게 웃거나 멋쩍게 웃던 얼굴이 사라지고 그 위로 침체된 표정이 떠올랐다. 그 외의 다른 감정은 파악할 수 없었다. 어떤 애정도 담기지 않는 눈은 그저 로이드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로이드는 그가 혹여 무언가를 알아차린 게 아닐까 하며 일부러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루퍼스는 여전했다. 꽉 다물린 입술과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 꽉 쥔 주먹이 그 증거였다.
루퍼스가 잠시 눈을 감았을 때, 로이드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분명히 그의 어린 제자가 맞는데 어째서인지 더 차분하고 성숙해진 느낌이 강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토록 달라진걸까. 물어도 돌아올 대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 로이드는 궁금증을 숨겼다. 네가 이렇게 변해서는 안 되는데. 내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는데.
“사랑은 역시 거짓이었을까요?”
갑작스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들려왔다. 사랑을 언급한 것치고는 루퍼스는 그리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전부 놓아버린 사람의 표정이었고, 그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처럼 보였다. 로이드는 그것이 불쾌했다. 그는 루퍼스에게 체념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감정은 누구에게서 배웠나?
“…내가 제자를 아끼는 것이 어째서 거짓이란 말이냐. 스승을 그리도 못 믿어서 어쩌려는 것인지.”
로이드는 차분하게 답을 내놓았다. 무슨 일이냐고 잘 달래면 아마 금방 진실을 털어놓을 거라고 믿고 다정한 스승을 흉내냈다. 계획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으면 치워버리면 그만이겠지.
그것은 오만이었고 자만이었다. 그가 달라진 루퍼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이기도 했다.
“…내가 제자를 아끼는 것이 어째서 거짓이란 말이냐. 스승을 그리도 못 믿어서 어쩌려는 것인지.”
“거짓이었군요.”
아마 잘 감췄다고 생각했겠지. 진짜 로이드보다 이때의 로이드는 조금 더 어리고 미숙했다. 더 철저하고 교묘해진 로이드를 봤던 루퍼스는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루퍼스는 이제 정말 잊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겠다고.
그야 모든 건 그저 하나의 연극이었을 뿐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하여 무대 위에 오른 당신과 달리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대 위로 올려진 것뿐이니까.
루퍼스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로이드의 눈이 크게 커지며 표정이 굳었다. 낭패를 당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쩐지 그가 조금 우스워졌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너.”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이제와 뭘 숨겨봤자 제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지?”
“당신의 행동을 직접 봤을 뿐이에요.”
로이드는 혀를 차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루퍼스가 정말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했다. 루퍼스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의자를 끌고 와 그 위에 앉았다.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조금 아팠다. 어차피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막으려고?”
“막을 수 있었다면 막았을 거예요.”
“왜 막을 수 없지?”
“……글쎄요.”
루퍼스는 정교하게 구현된 과거이자 꿈인 이곳을 둘러 보았다. 아마 그가 기억하는 만큼 구현된 듯 했다. 루퍼스의 보고서는 세세하게 작성된 반면 로이드의 보고서는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루퍼스는 그제야 또 다시 한 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로이드가 자신의 보고서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음을. 함께 하는 일이라 서로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탓에 루퍼스는 종종 자신의 보고서를 그에게 넘겨줬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말로 전달했다. 그때는 핵심만 간략하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라 아마 보고서에 루퍼스가 봐선 안 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지?”
“…….”
“내가 증거를 전부 폐기 처분할 수도 있을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당신을 잡을 수는 없거든요.”
“…….”
“그냥… 계속 그렇게 하세요. 당신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뭐?”
“당신은 결국 패배해요.”
“저주도 정성껏하는 군.”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루퍼스의 목소리에 로이드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루퍼스는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가 흔들렸다. 연구실이 조각조각 꺠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정한 스승의 껍질을 벗어던진 괴물은 계속해서 루퍼스를 빤히 쳐다봤다.
“다시는 보지 말아요. 이젠 정말 잊을 거니까.”
“루퍼스.”
“제가 괴로워할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로이드의 모습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 루퍼스는 로이드를 보며 나지막하게 마지막 작별을 전했다.
“당신이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어.”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루퍼스가 눈을 떴다. 그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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