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시로
총 9개의 포스트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느 옛날처럼 조금 더 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로이드가 보였다. “음? 잘 안 되는 것이 있나?” 루퍼스의 시선을 느낀 로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흰 가운, 종종 집중할 때 쓰던 안경. 그 뒤로 보이는 넓은 책상과 책장을 가득 채운 보고서. 루퍼스는 그제야
#. I loved you. 당신을 사랑한 모든 시간들이 내겐 지옥 같았다.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던 그 시간들이, 종종 내비쳤던 당신의 모습에 혹여 내가 알던 당신은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그 시간들은 전부 지옥이었고 나락으로 추락하던 순간들이었다. 당신에게 내 불안을 드러내지 못해서 홀로 많이 아팠다. 땅으로 떨어진 심장을 주워들고 억지로
“카르마 씨, 하늘이 이상해요.” “네 눈이 이상한 거겠지.” 에너지 드링크를 사 왔다며 건네주러 온 시즈는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처럼 고개를 기울이고 눈썹을 찡그리다가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카르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르마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느긋하게 답했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를 묻는 것처럼 태평하기
세계 멸망이라…. 웃기는 말이었다.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인지 나는 아마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스스로의 목숨마저 바쳐야 하는 일인 것을. 어찌 그리 쉽게 멸망을 바랄 수 있겠나? 아니, 아니다. 보통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바라지 않는다. 헌데 박사님, 당신은 어째서입니까? 잔인한 말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말하자면, 삶
apocalisse : 세계의 종말 • • • calopasies : 카로파시에스 * * * 1일, 아무런 이상이 없다. 2일, 고열에 시달리며 반응과 움직임이 조금 느려진다. 3일, 피를 토한다. 4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5일, 주변에 대한 반응을 거의 할 수 없게 되며 움직임이 많이 느려진다. 힘이 없어진다. 6일,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01. 18살, 겨울 오늘을 정의 내린다면 카르마는 아주 짧은 말로 나타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 라고. 매번 배우는 것은 똑같기만 하고 영 진도가 나가질 않으니 그 어떠한 흥미도 붙지 못했다. 더군다나 관심 있는 분야도 아닌, 모두가 배우는 그렇고 그런 일반적인 것들은 도저히 카르마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난 저런 걸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리 기꺼운 일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들 속에 정작 행복했던 순간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떠올려볼까. 네가 그리워졌거든. 널 처음 만났던 날은 무척이나 더웠던 한 여름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나뭇잎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더위가 지나가길 바라고 있던 한낮에 너를 만났다. 악, 하는 소리를 지
카르마는 뜨거운 햇빛에 눈을 찡그리고는 비척대면서 일어났다. 제발, 좀 멀쩡한 곳에 놓아주면 안 되는 것인가? 이렇게 꼭 길거리 한복판에 날 내던져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카르마는 몇 번을 겪어도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흙이 조금 묻은 옷을 툭툭 가볍게 털고는 몸을 한번 움직이며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도 괜찮은 것 같았다. 카르마는
그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교에 막 입학했을, 그때 있었던 일. 카르마는 작업하던 것을 멈추고는 가볍게 웃었다.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라일락 향이 필요했다. 아직까지도 코끝에서 떠나지 않는, 라일락 향이. 시즈가 “칙칙하니까 이거라도 가지세요!” 라며 주고 간 라일락향 디퓨져를 가까이에 내려놓고는 부드러운 꿈을 꾸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