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시즈

[카르시즈] 나의 라일락

바람에 실려 온 라일락 향은, 언제나 네 곁에 머물러 있었다.

하고프 2차 by 시로
1
0
0

그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학교에 막 입학했을, 그때 있었던 일. 카르마는 작업하던 것을 멈추고는 가볍게 웃었다.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라일락 향이 필요했다. 아직까지도 코끝에서 떠나지 않는, 라일락 향이. 시즈가 “칙칙하니까 이거라도 가지세요!” 라며 주고 간 라일락향 디퓨져를 가까이에 내려놓고는 부드러운 꿈을 꾸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학식을 왜 강당에서 하는 거지, 라며 궁시렁대는 카르마는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여유가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각하면 뭐 어때, 라는 생각으로 카르마는 학교 구경이나 더 할 생각이었다. 입학식에 못 간다고 퇴학당하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수석이라고, 수석.

카르마는 혼자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슬슬 다른 학생들과 멀어지는 듯 했지만 카르마는 스스로가 대단하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정말 직진만 했다. 어디쯤 걷고 있는지 파악하지 않고 직진, 오로지 직진만.

“길 잃었나?”

사람은 무슨, 보이는 거라고는 나무와 꽃이 전부인 곳에서 카르마는 머리칼을 헝클였다. 학교가 빌어먹게 넓은 탓이야, 내가 길치는 아닌데. 상황이 조금 귀찮아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카르마는 곧바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히려 입학식을 빼먹을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 라며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스냥폰을 꺼내 들었다.

“장난이나 쳐볼까~.”

강당 조명을 다 꺼버릴까? 그럼 나 없다는 거 눈치 못 채겠지. 누가 보면 미친놈인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던 카르마 뒤에서 여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찾았다! 여기서 뭐해요, 빨리 가야죠!”

“…?”

카르마는 학교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저 사람도 날 모를 게 분명한데 반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르마는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다. 갈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어 내린 여자는 카르마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한 학년 높은 교복이라는 것뿐일까. 카르마는 손에 쥐고 있던 스냥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여자에게 물었다.

“어딜 가.”

“입학식이죠!”

여자는 자신이 신입생이라는 것을 아는 듯 했다. 그런데도 말을 낮추지 않는 것은 습관이거나, 아니면 예의가 무척이나 바른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반말을 쓰는 것에도 별 반응을 안 했으니. 카르마는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싫은,”

“싫어도 가야 해요! 수석이잖아요. 수석은 학생 대표로 선서해야 한다구요.”

아이를 달래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여자는 앉아있는 카르마에게 몸을 굽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시즈 샤넌, 이라고 소개하면서.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흩날렸다. 시즈에게서는 라일락향이 풍겨왔다. 그것이 카르마와 시즈의 첫 만남이었다.


카르마와 시즈가 자주 만나는 일은 없었다. 1학년만 다른 건물을 썼기 때문이었다. 간혹 시즈가 체육 수업을 할 때 카르마가 그것을 교실에서 바라본 적은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 그런 위치.

그리하여 2학년이 된 카르마는 지금 꽤 들뜬 기분으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같은 건물이다 보니 생각보다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카르마가 시즈를 살펴본 결과, 시즈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선한 성격, 누구에게나 잘 웃는 인상과 상대의 대화에 경청을 잘하는 모습 등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카르마는 제 일인 것처럼 뿌듯해하다가 곧바로 인상을 찡그리기 일쑤였다.

“말을 못 걸잖아, 말을….”

카르마는 눈에 띄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2학년 초록 머리 애가 3학년 시즈 선배를 좋아하고 있대!” 라는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정말 딱 질색이었다.

“왜 동갑이 아닌데.”

이상한 부분에 짜증을 내면서도 카르마의 시선은 항상 시즈를 좇았다. 빌어먹게도 말이다.


기회가 생겼다. 카르마는 그 사실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동아리가 있었다는 걸 왜 여태 생각하지 못했지? 공교롭게도 시즈와 카르마는 비슷한 것에 흥미가 있던 터라 시즈가 개설한 동아리는 카르마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카르마는 동아리 홍보 포스터에 적힌 번호로 시즈에게 가입 신청 연락을 보냈다. 그 후 곧바로 [확인했어요!] 라고 답장이 온 것을 보며 시즈의 모습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몇 주 뒤, 카르마가 기다리던 동아리 날이 왔고 부원은 카르마와 시즈, 그리고 몇 명의 학생들이 더 있었다. 카르마의 서늘한 경고 어린 눈빛을 본 학생들은 시즈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고, 카르마는 나른하게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즈 샤넌이고, 동아리 부장을 맡고 있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연락 주세요!”

“카르마 자이젠, 2학년.”

“저는 …이라고 해요…. 1학년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다른 부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따분하다고 느낀 카르마는 시즈를 쳐다봤다. 편하게 연락하라고, 그럼 아무 때나 연락해도 상관없나? 그런 멍한 정신으로 카르마는 동아리 활동에 대한 얘기도 설렁설렁 들으며 어떻게 하면 시즈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했다.

아, 컴퓨터로 뭘 하라고 했는데…. 모르겠다,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카르마는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카르마에게 무척이나 좋은 일이 되었지만.

“카르마 씨! 이거 어떻게 한 건가요?!”

“…뭐, 뭐?”

기쁜 듯 신기한 듯 평소보다 더 높아진 시즈의 목소리에 놀란 카르마는 말을 버벅거렸다. 정신을 놓고 있다는 게 들킬까 봐 태연하게 표정을 바꾸며 눈을 빛내고 있는 시즈를 쳐다봤다.

“이거 엄청 어려울 텐데, 5분도 지나지 않았다구요!”

“어…. 아닌데, 이거 쉬운데?”

“아, 맞다. 카르마 씨 수석이었죠….”

“아니, 그게 아니라. 잘 생각해 보라고. 접근을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되는 거 아냐?”

설명을 잘하지 않는 카르마였지만 시즈가 물은 것인지라 평소보다 말이 길게 나왔다.

“네? 접근을 다르게 할 수도 있어요?’

“당연한 거 아냐? 이 부분을, 이걸로 바꿔 입력하면… 보라고. 금방 되잖아.”

“세상에…. 역시 수석 머리는 다른 걸까요?”

“자주 하면 될걸.”

칭찬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꽤 낯선 기분이라 카르마는 시선을 애매하게 피하며 대답했다. 거리가 꽤 가까운 것도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즈의 시선이 워낙 강렬했던 탓도 있었다.

“정말… 카르마 씨가 이 동아리에 들어온 건 행운이에요!”

진짜 뭔데…. 카르마는 제 얼굴이 혹시라도 붉어졌을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다. 매일이 동아리 날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날은 정말이지 운이 좋았던 날이었다. 하교를 하려던 도중 학교 정원에서 꽃을 보며 웃고 있는 시즈를 발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카르마는 시즈가 혼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곧바로 시즈에게 달려갔다.

“뭐 하고 있어?”

시즈와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카르마가 죽어도 선배라는 말은 쓰지 않기에 시즈는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말을 했다. 그럼에도 카르마는 여전히 그 어떤 호칭으로도 시즈를 부르지 않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 라일락 꽃이 예쁘게 피어서 보고 있었어요.”

“라일락, 좋아해?”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라일락 향을 묻히고 왔었지. 카르마는 여태 잊지 못한 1년 전 과거를 생각하며 시즈를 빤히 쳐다봤다.

“음, 그런 편일걸요? 사실 꽃말이 마음에 들어서 마음이 가긴 해요.”

“꽃말?”

“첫사랑, 이래요.”

애정 어린 눈으로 라일락 꽃을 보고 있던 시즈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카르마와 눈을 맞췄다. 카르마는 순간적으로 제 심장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바람이 불고 라일락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래,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아주 지독하게도.

시즈는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가 라일락 향에 물들겠어요, 라며 여전히 사랑스럽게 웃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카르마 씨도 적당히 꽃 구경하다가 돌아가세요!”

“…….”

카르마는 멀어져 가는 시즈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상태로 쭈그려 앉았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이건 반칙이잖아….”

누가 그렇게 웃으래.

카르마는 제 상태가 진정될 때까지 애꿎은 꽃들에게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너도 내가 우습냐? 나도 우습거든…. 젠장, 진짜 싫어. 아니 걔가 싫다는 건 아니라 내가 싫어. 말 한마디에 아주 휘둘리고 멍청한 놈…. 아, 몰라. 너희들이 뭘 알아. 시즈한테 사랑받으니 좋냐? 좋냐고. 너네만 좋지 말고, 나도 같이 좀 좋자. 어?

카르마가 처음으로 사랑을 깨달은 날이었다.


1년이 또 지났다. 카르마에겐 종업식이었지만 3학년인 시즈에겐 졸업식이었다. 졸업장 수여에, 정들었던 친구들과 선생님과의 인사가 끝난 뒤 시즈는 꽃을 들고 서 있는 카르마에게 다가왔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라는 카드가 꽂힌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시즈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동아리 잘 맡아줘요!”

“걱정 마.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카르마 씨 성격이 영….”

“허.”

카르마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제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해졌고,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시즈와는 친구에 가까운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서로 고민도 털어놓고, 정보를 공유하거나 하는 그런 바람직한 친구 관계로.

“그보다 카르마 씨.”

시즈가 다시 입을 열더니 말을 머뭇거렸다.

“음, 저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요? 물론 카르마 씨가 졸업하고 나서요.”

“뭐?”

“같이 일하자구요! 그게, 카르마 씨는 그쪽으로 뛰어나고, …저도 그에 뒤쳐지지는 않거든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카르마는 어떤 빌미를 만들어서라도 시즈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돈이 없다, 집이 없다, 온갖 구차한 변명도 있었지만 시즈를 옆에 두기 위해서라면 상관없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는데…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나 받아줄 거야?”

“응? 당연하죠! 카르마 씨를 거부할 리 없잖아요!”

시즈와 카르마가 말하는 포인트는 무척 달랐지만, 그게 무어 대수인가. 시즈는 카르마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카르마는 시즈가 걸려들었다는 사실에 기쁘게 웃을 뿐이었다.

“약속해.”

“새끼손가락이라도 걸까요?”

“응.”

“어린애 같네요.”

“철저하다고 해줄래?”

“그렇다고 치죠, 뭐.”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하고는 시즈는 카르마에게 인사했다.

“기다릴게요. 졸업 무사히 하고요.”

“…잘 지내고 있어.”

다른 사람 만나지 말고,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카르마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입 안으로 말을 삼켰다. 거기까지 간섭하면 싫어하겠지.

“그럼, 나중에 봐요!”

시즈는 팔을 들어 올려 손을 붕붕 흔들다가 카르마가 마주 손을 흔드는 것을 본 후에 몸을 돌려서 학교 밖으로 걸어갔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남은 1년은 카르마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다.


시간은 느리게 가는 듯 하면서도 빠르게 지나갔다. 카르마는 3학년을 졸업했다. 졸업식은 대충 흘러 넘긴 뒤, 카르마는 곧바로 시즈에게 온 연락을 확인했다.

[일이 많아서 졸업식에 못 갈 것 같아요. 미안해요…. 음, 그렇지만. 대신에 성대한 파티를 준비 중이니 아래 주소로 꼭 와달라구요. 물론 카르마 씨하고 저 밖에 없긴 하겠지만요!]

드디어 시즈를 만날 시간이었다.


카르마는 제 과거에 헛웃음을 흘리며 생각을 멈췄다. 아, 그때. 시즈에게 죽어도 선배라고 부르긴 싫어서 이봐, 저기, 거기, 그쪽… 그런 걸로 불렀던 게 떠올랐다. 선배라고 부르면 제가 너무 어리게 보일까 봐. 후배, 그러니까 나이 어린 동생으로 보일까 봐 정말 부르기 싫었더랬다.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 환장할 노릇이네.

성인이 된 카르마는 역시나 제 감정을 숨기는 데 더 능숙해졌다. 그만큼 성격도 좀 더 나빠지긴 했으나, 카르마는 원래 다 그런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곤 했다.

“어라, 카르마 씨. 뭐 하세요?”

“과거 회상?”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즈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안 어울리네요.”

“뭐? 말 다했냐?”

“아뇨, 다 안 했거든요!”

카르마는 킥킥 웃다가 숨을 고르고는 시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거 알아?”

“뭐를요?”

“라일락 꽃말.”

“그거 제가 알려줬던 거 아니에요? 첫사랑이잖아요.”

시즈는 뿌듯하게 대답했다. 모른다고 대답하면 날 무시하려고 했겠지. 하지만 난 알고 있다! 라는 속마음에 뻔히 보이는 탓에 카르마는 무척 즐거웠다.

“그럼 그것도 알아?”

카르마는 악동처럼 웃으며 다시 물었다.

“꽃을 선물해서 마음을 전한다는 거 말이야.”

“음… 몇 번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이게 뭘까.”

“라일락 디퓨져잖아요. 방이 너무 칙칙해서 제가 선물해 준 거.”

“응, 라일락.”

“…….”

“첫사랑.”

“…….”

“아, 내가 첫사랑인가?”

카르마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짓궂게 웃었다. “아까부터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은데 열나는 건 아니지, 시즈?” 라며 한 번 더 시즈를 자극해서는.

“진짜 싫어요, 카르마 씨!”

쾅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카르마는 제 첫사랑을 놀릴 땐 적당히 놀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라일락 향을 제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는 향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