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시즈

[카르시즈] 단 하나의 회고록

결코 끝나지 않을 나의 회고록에 너를 담아서, 내 모든 시간을 온전히 너로 채울 수 있기를.

하고프 2차 by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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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리 기꺼운 일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들 속에 정작 행복했던 순간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떠올려볼까. 네가 그리워졌거든.


널 처음 만났던 날은 무척이나 더웠던 한 여름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나뭇잎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더위가 지나가길 바라고 있던 한낮에 너를 만났다. 악, 하는 소리를 지르며 풀잎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네 모습에 놀라 같이 소리를 질렀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네가 뭐라고 했더라. 뱀이 나와서 놀랐다고 했나? 그 말을 듣고 비웃었던 것 같다. 뱀이 뭐가 무섭냐고. 그 허접하기만 한 매끄러운 게 어디가 무섭냐고.

독의 유무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나는 죽지 않으니까 널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긴, 이제와 다시 생각하면 네 입장에선 무서웠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인간이었으니까.

고작 독 한 방울에 죽고 마는, 기껏해야 몇 십 년을 사는 약한 인간이었으니까.


너는 꽤 자주 숲으로 들어왔다. 그늘이 있어서 시원하다면서 마치 제 집인 것처럼 편하게 지냈더랬지. 웃기는 애라고 생각했다. “여기가 네 집이냐, 꼬마.” 라고 말했었다. 그러더니 내게 당돌하게 “누구 보고 꼬마라는 거예요! 조용히 하세요!”이라고 외쳤었지. 조그마한 주제에 겁이 없는 건지 잘도 돌아다니길래 신기함을 느꼈다. 혼자 지내느라 가졌던 지루함도 없어졌고.

아, 그때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넌 두렵지 않았어?

난 숲 속에 처박혀 있었는데.

가끔은 네가 부러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하던 네가.


작았던 아이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어느덧 성인에 가까워진 네가 내게 옷을 자랑했다. “어때요? 예쁘지 않아요?” 하고. 그 말에 내가 뭐라고 답했더라. “예쁘군. 옷은 예쁘네.” 라고 한 것 같은데. 뭐, 다시 생각해도 그건 진심이었다. 옷이 예뻤지. 옷만 예쁘던데.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하니 네가 툴툴거렸다. “이럴 땐 예쁘다고 해주셔야죠.” 그렇지만 그러긴 싫었는데. 예쁘다고 하면 네가 정말 그 옷을 입고 다닐 게 분명했다고.

굳이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필요 없잖아?


하루는 네가 오지 않았다. 연락할 방법은 없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네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숲 밖으로 벗어났던 게 수 백 년 전이던가.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란 사실이 싫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렵다고 할까. 그래도, 그래도 네가 걱정이 되어서.

네가 말해준 집 위치를 어렴풋하게 떠올리며 달려갔더니, 열이 펄펄 끓고 있는 네가 보였다. 밤까지 숲에 있던 탓에 감기에 걸렸나.

멍청하게 왜 이런 날씨에 감기에 걸렸냐고 물었더니 네가 웃었다. “그러게요.” 라며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지.

뭐, 딱히 기분이 나쁘단 건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었다고 했다. 봄에 어울리는 밝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는 내게 찾아왔지. 성인식 복장이라던가? 아무튼 걸리적거리지도 않은지 특유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뛰어왔다. 이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내 이름을 크게 불러주며. 손을 번쩍 들어 흔들고는 말이다. 그리웠나, 그래, 사람이 그리웠을 수도.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너를 보고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난 그대로인데 너는 너무 커버렸다고. 그래봤자 나이는 내가 더 많겠지만.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게 거슬릴 줄은 몰랐는데.


너는 좀 신기한 구석이 있었다. 그 나이쯤이면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법도 하건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었다. 배려해 주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눈치가 없는 건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었다.

경멸하지만 않으면, 정말 괜찮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을 한다. 왜 너는 안 하냐고 물었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소리쳤지. “그런 거 함부로 물어보지 마세요!”라고 말이야. 그땐 몰랐지만, 글쎄, 지금은 어떨까.

나는 다 알게 되었는데, 너는 여전히 그대로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내게 찾아오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너는 사교성도 좋았고 나와 다른 보통의 사람이었으니까. 질투일까, 부러움일까. 그냥 널 많이 못 본다는 사실에 조금 쓸쓸했던 것 같다.

나에겐 너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네가 많이 늙었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한탄하다가 앙상해진 네 손을 잡았었다. “뭐예요. 징그럽게.” 라며 마주 잡은 손을 보다가 네가 부드럽게 웃었었지. 시간은 흘렀고, 나는 여전한데, 너만 달라졌다. 그것이 못내 서러워 퉁명스럽게 말한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나.

어쨌든, “찾아갈게요.” 라고 말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은 네가 부러웠다.

나는 그러지 못하니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숲 속은 소름 끼치게도 조용했었다. 분명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생각했다가 결국 내가 너에게 길들여졌구나, 싶어서 헛웃음도 흘렸다.

날 이렇게 만들고 먼저 가버린 너를 원망하면서.


조용하다. 적막하고 삭막하고. 황폐하고 메마른 숲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너를 만나고 싶은데, 언제쯤 와줄까 생각하며 기다렸던 시간들은 괴로웠다.


네가 죽고 수 백 년이 흘렀지만 너와 다시 만나지 못했고, 나는 우리가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보고 싶었다. 네가 없을 때 네 이름을 불러보았다.

시즈.

내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울림.


언제 와? 심심하다.


하여간 내 말 지지리도 않는 꼬맹이.


아직도 기다려야 해?


수 천년이 지나도 네가 오지 않자 꽤 지쳤다.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나면, 그땐 제대로 말할게.


야, 대체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려고.


너 10년 뒤에도 안 나타나기만 해 봐. 내가 찾으러 간다.


아, 드디어.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늦어서 죄송해요!”

“너, 진짜 죽고 싶나?”

“그게, 하도 많이 달라졌다 보니….”

미안함이 가득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웃는 모습을 보니 내려던 화가 나오질 못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네가 그 말을 안 했으면.”

“네? 안 했으면요?”

“내가 먼저 찾으러 갔겠지.”

급하게 뛰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다가 다시 화가 나서 헝클어뜨렸다. 생각하니까 다시 짜증 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저도 제가 이렇게 못 찾을 줄은 몰랐어요.”

“어. 나도 네가 이렇게 못 찾을 줄은 몰랐다.”

“죄송하다니까요….”

시선을 땅에 내리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나도 단단히 미쳤군. 드디어 돌았나.

“그, 그래도! 아무튼 다시 만났잖아요!”

“허.”

“안 기쁘세요?”

기뻐, 기뻐 죽겠는데.

말로는 표현을 못하고 삐딱한 자세로 그저 가만히 시선을 맞추니 시즈가 어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예요! 진짜, 나만, 나만….”

아, 이러다가 울겠네. 장난치기에 성공한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웃다가 사과했다. 달래주는 거에는 영 자신이 없어서 말이지.

“미안, 울지는 마라. 나도 기쁘다고.”

“진짜요?”

“당연하지. 너 없어서 지루했다. 놀릴 사람이 없잖아.”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장난이야.”

“으으, 진짜 너무하다구요!”

빽 소리를 지르는 것마저 좋아서 실실 웃었다. 그동안 외로웠던 걸 수도 있다. 항상 옆에 있던 애가 긴 시간 동안 없었으니.

“다시 만나서, 다행이네.”

“그렇죠? 다행이죠?”

“응.”

“…왜 그렇게 순순히 대답해요?”

시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뒤로 슬쩍 물러나면서. 뭐야, 얘.

“그냥,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하고.”

“혹시 몸속에 다른 영혼이 들어갔나요?”

“…이게 진짜.”

“수상하잖아요!”

“하. 내가 두 번 다시 이러나 봐라.”

착하게 해 줘도 불만이지?

“…장난이에요!”

“늦었다.”

썩 사이가 좋은 듯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을 주고받다가 마주 보고 웃었다가. 그리고는 불현듯 깨닫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너와 함께하는 나의 시간을.



너를 다시 만났다. 결국 또다시 헤어지게 되겠지만, 그리고 또다시 만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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